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63화 (63/181)

12. 잊지 않겠다 (3)

아라나크가 또 명령을 듣지 않는다. 이번이 벌써 몇 번째인가.

‘말 좀 들어. 오지 말고 후퇴하라고. 네 군락으로 돌아가서 다음 싸움에 대비해.’

그러나 오천 마리가 넘는 거미 악귀들이 순식간에 황궁을 오르고 있다. 아라나크는 수도에 포진한 친위대 병력들을 무시하고 모든 전력을 이곳에 투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라나크 또한 황궁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접근하고 있다.

내 명령은 들은 채도 안 한다. 대답도 안 한다. 뭐에 홀린 것처럼 무작정 합류하려고 한다.

‘아라나크. 넌 최악의 악귀야.’

“폐하!”

바로 뒤까지 병사들이 올라왔다.

그러자 황제가 소리쳤다.

“오지 마라! 명령이다!”

“황공하오나 거스를 수밖에 없겠습니다!”

“나중에 저희의 목을 베어주십시오!”

“저 강령술사를 공격하라!”

황제는 나와 비슷한 입장인 것 같다.

그의 반응이 이해가 된다.

“어리석기는! 네놈들이 끼어들어선 안 되는 상대란 말이다!”

그는 나쿠타서스가 수도를 공격했을 때 어떤 능력을 선보였는지 알고 있다. 그라면 분명 모든 전투의 세세한 보고를 기억하고 그것을 통해 나쿠타서스의 능력을 추리해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알고 있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친위대가 나의 바로 뒤까지 접근한 채다.

나는 지체할 것 없이 내 뒤에 있는 자들에게 방혈을 걸었다.

‘제물방류(祭物放流).’

푸화아아아악…!

수백 명 정도를 죽인 것 같다. 그들의 몸에 있는 혈액, 혈관, 내장 따위가 내 배후에서 광기의 춤을 추며 피로 물든 비를 내렸다.

황제는 또다시 내게 철퇴를 날렸다.

하지만 내 뒤에서 붉게 요동치던 덩어리가 붉은 실 같은 것을 뿜어냈다. 그것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황금 사슬을 휘감고 철퇴까지 집어삼켜 그 속도를 늦췄다.

“방혈을 5계까지 개방하였구나! 어쩐지 피를 너무 잘 다룬다 싶었다!”

황제는 말도 안 되는 괴력으로 철퇴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이쪽에서도 붉은 덩어리는 그 괴력에 버틸 수 있는 힘을 주고 있었다.

그래서 철퇴를 잡아당긴 황제는 자연히 내게 돌진하는 형태가 되었다. 이번엔 주먹일까, 발일까. 어느 쪽이든 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올 것이다.

나는 황제의 사지가 아슬아슬하게 닿을 거리에서 도끼를 휘둘렀다. 거기에 검기까지 담아서 휘둘렀다.

황제는 황금 사슬이 감긴 오른팔로 도끼날과 검기를 막아내고 한 바퀴를 돌면서 그대로 주먹을 휘두른 것 같았다.

쿠저적…!

내 오른팔이 없어졌다. 너무 강한 주먹에 맞아서 팔꿈치 아래로 관절이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이 정도 격통은 왠지 참을 수 있다. 은화살에 비해선.

아주 짧은 순간, 날아가고 있던 내 오른팔을 붉은 덩어리가 붉은 실로 붙잡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내 오른팔이 있어야 할 곳에 가져다 붙여주었다.

그러면서도 황제는 좀 전에 피로 물든 비를 맞은 몸.

나의 영력과 연결된 그 혈액은 황제의 옷자락과 살갗으로 파고들어 끈끈하게 변한 채다.

그래서 이젠 황제의 주먹이 얼핏 보인다.

촤악!

나는 여왕의 독니를 꺼내 황제의 왼쪽 손목을 그었다. 한순간이지만 황제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도끼, 쇠뇌, 단검, 주술, 괴물 군단까지! 갖고 있는 무기가 참으로 많구나!”

이제 황제는 주먹이나 발을 쓰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내 도끼에 닿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철퇴는 닿는 거리감이었다.

쐐애액!

황제의 배후에 태양 같은 소환진이 더욱 거세게 소용돌이쳤다. 그 소환진과 사슬이 이어진 더 많은 황금 철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내가 방금 착각을 했다.

“흐…!”

황제는 놀란 얼굴이 아니라 진심으로 신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군 사력을 다해, 심지어 두려움을 참으면서까지 싸우고 있는데.

“나도 갖고 있는 철퇴가 많은데 한번 볼 테냐?!”

“미친 새끼가! 이미 꺼내놓고 묻지 마!”

이젠 황금 철퇴가 열 개다.

열 개의 황금 철퇴가 동시에 쇄도해온다. 당장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제물방류로 만들어낸 붉은 덩어리를 방패로 앞세웠다. 이불처럼 펼쳐서 철퇴의 충격을 부드럽게 받아낼 것이다.

쿠화아아아아!

가까스로 받아냈다.

“화신의 철퇴는 아직 다 꺼내지도 않았다!”

그 순간 보였다. 붉은 덩어리를 우회해서 수평으로 크게 회전한 황금 철퇴 여섯 개.

싸우던 도중에 철퇴를 더 소환한 것이다. 왼쪽에서 세 개, 오른쪽에서 세 개가 내 몸을 가운데에 놓고 짓이길 기세로 날아들고 있다. 그런데 그 철퇴들의 애매하게 낮은 높이를 보건대, 몸이 아니라 다리를 분쇄할 작정인 것 같다.

그때 어떤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나는 자세를 낮췄다. 이대로 여섯 개의 철퇴에 맞아서 상반신과 머리가 짓이겨질 높이까지 자세를 낮췄다.

……키리리릭!!!

매섭게 날아들던 여섯 철퇴의 사슬이 짧아졌다. 그러면서 여섯 철퇴는 내 앞에 펼쳐둔 붉은 덩어리를 으깨버렸다.

무너져 흐르는 붉은 덩어리 사이로 황제가 보였다.

그의 반응을 보니 드디어 뭔가 좀 먹혔구나 싶었다.

“방금 죽일 수 있었잖아.”

“교묘한 놈….”

“죽이라니까.”

황제는 내 죽음의 의도를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날 죽였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는 전혀 모른다.

전혀 모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네놈을 죽이면 어떻게 되지?”

“그냥 죽고 끝이야. 무슨 극적인 반전이라도 생길 것 같아?”

“…빌어먹을.”

뭔가가 있을 거다. 강령술사를 죽이면 뭔가 일이 터질 것이다. 나쿠타서스를 연기할 때부터 죽여달라고 했던 강령술사다. 그래서 죽이지 않으려니 방금 싸움에서 대놓고 죽으려 했다.

왜.

강령술사를 죽이면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말인가.

황제는 모른다. 머리로 생각하고 경계한다. 불확실한 시도는 하지 않는다. 강령술사의 죽음이 엄청난 역풍을 몰고 올 수 있으리라. 마음이 불안하다. 이렇게 싸우다가 정말로 강령술사를 죽이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황제는 강령술사를 죽일 수 없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이제 끝내자. 황제.”

“끝낸다니?”

나는 여왕의 독니를 들었다. 그것을 역수로 고쳐 쥐었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내 목을 찌르려고 했다. 만약 황제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죽을 각오였다. 그런 속도였다.

“…!”

황제는 곧잘 반응했다. 16개의 황금 철퇴를 날렸는데 그마저도 날 직접 때리지 못하고 내 주변 바닥을 친 것이다.

나는 황궁의 계단 아래로 다시 굴러떨어졌다. 계단이 너무 높고 길어서 몇 번을 굴렀는지도 모르겠다. 시야가 위아래로 어지러이 바뀌었다. 친위대의 혈액이 피의 폭포처럼 계단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병사들과 거미 악귀가 싸우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황궁의 성벽 쪽에서 들려온다.

“키기기기그그극….”

거미 악귀가 날 내려다보고 있다. 머리 크기가 다른 녀석들보다 유난히 큰 것이다.

“아라나크….”

“최악의 악귀라는 말을 듣고 참을 수 있어야지.”

아라나크는 거미발로 내 머리를 툭툭 쳤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일단 황궁의 성벽 쪽을 보았다. 친위대와 거미 악귀들이 싸우고 있다. 역시나 거미 악귀들에게 높은 성벽은 의미가 없던 것이다.

“…가라고 했더니 말을 안 들어서 욕을 했더니 그것도 안 통하네.”

“괜한 착각하지 마라. 나는 널 구하러 온 게 아니라 저 황제 놈을 죽이러 온 것이다.”

부서진 계단의 가장 높은 곳에 황제가 있었다. 그는 태양 같은 소환진을 배후에 두고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도약했다.

쿵!

긴 계단을 단숨에 건너뛰어 내 앞까지 착지한 것이다.

“네놈이 부리는 괴물이로군.”

황제가 선택한 그 단어는 아라나크의 심기를 건드렸다.

“황제….”

“놀라움의 연속이군. 사람 말도 할 줄 아는가.”

친위대를 상대하던 거미 악귀들이 온 사방에서 몰려왔다. 동시에 아라나크도 황제에게 손아귀를 뻗었다.

아라나크는 금방이라도 황제에게 주술을 발동할 것 같다.

“네놈. 마녀사냥을 기억하고 있나?”

“마녀사냥?”

“네놈이 황제가 된 해였지. 그 해에 가뭄이 심했다.”

황제는 아라나크를 유심히 쳐다봤다.

아라나크는 황제를 알지만 정작 황제는 아라나크를 모르는 것 같다.

“네놈이 산 채로 불태워 죽인 수많은 성녀…. 그녀들 중에 진짜 마녀는 몇 명이었나?”

그러자 황제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즉답했다.

“한 명도 없었지.”

“알고 그랬나? 다들 무고한 성녀들이라는 걸…”

“설마 내가 모르고 그랬겠느냐?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여 뭐라도 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마침 하늘과 같은 황제를 섬겨야 할 백성들이 교주와 성녀 따위를 하늘로 섬기고 있었으니 별 수 있겠나.”

“나는 네놈이 불태워 죽인 성녀다.”

“그래서 성녀였던 시절에 가지고 있던 인간성은 어디로 갔나?”

거미 악귀들이 으르렁댔다.

“지금 네 모습을 보아라. 네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란 말이다. 이 괴물 년아.”

나는 아라나크의 일그러진 얼굴을 차마 지켜보기 어려웠다.

“아니야…. 네놈이 죽인 거다. 전부.”

직후, 아라나크는 황제에게 광란의 집단부화를 걸었다. 혐오감을 느낀 상대의 체내에 새끼 거미를 부화시키는 주술이다.

그러나 황제에겐 통하지 않았다.

틀림없이 아라나크를 혐오하리라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럼 괴물이라고 한 것도 그냥 아라나크를 자극하려고 꺼낸 말이야…?」

이윽고 대기하던 수백의 거미 악귀들이 황제에게 달려들었다. 성벽의 안팎에 있는 녀석들까지 합치면 오천 마리 이상이 황제 하나를 목표로 달려드는 것이다.

키리리리리릭!!

황제의 배후에 있는 소환진에서 더 많은 황금 철퇴가 나타났다. 그것들은 황제를 중심으로 거미 악귀들을 휘둘러치고 내려쳤다. 마치 팔이 여러 개 달린 거인이 주먹질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거미 악귀들의 숫자는 매우 많았다. 달려든 녀석들 중에 극소수는 철퇴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아 황제의 몸에 닿을 수 있었다.

퍼억!!

황제는 기꺼이 육탄전에 응했다. 철퇴가 없어도 맨손으로 거미 악귀들을 깨부수는 것이다. 거미줄이 몸에 묻으면 뜯어냈고 거미의 턱이 살을 깨물어도 상처 하나 생기지 않았다. 이미 그의 움직임은 싸움을 초월한 경지였다. 거기에 휘몰아치는 철퇴들까지 있으니 거미 악귀가 만 마리가 있어도 이길 수 없을 것만 같다.

황궁의 성벽이 부서지고 포장된 길이 뒤집어졌다. 새까맣게 몰려드는 새끼 거미들은 그의 몸놀림과 철퇴가 만들어낸 강풍에 힘없이 날아갔다.

보다 못한 아라나크가 직접 나서려고 했다.

‘안 돼.’

아라나크가 멈칫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다른 수단을 찾아야 해. 일단은 후퇴…’

“어딜!”

황제는 수백의 악귀들을 상대하면서도 이쪽의 낌새를 눈치챘다. 그의 철퇴 여러 개가 날아들었다. 몇 개는 앞에, 몇 개는 옆에, 몇 개는 뒤에, 몇 개는 그것들이 전부 아라나크를 노려서 날아든 것이다.

그러자 아라나크는 꽁무니를 열어 거미줄을 사출했다.

일반적인 거미 악귀들의 거미줄과 달리 아라나크의 것은 훨씬 질기고 강했다. 그래서 가까스로 철퇴들의 경로를 틀 수 있었다.

쿠쿠쿠쿵!

철퇴들은 사슬이 거미줄과 복잡하게 얽힌 채 아라나크 주변 바닥만 치게 되었다.

“네놈들은 절대 도망칠 수 없다!”

그때였다.

황제가 사슬과 거미줄들 사이로 돌진해왔다. 주먹을 꽉 쥔 채로.

* * *

쿠구궁……!

황궁을 둘러싼 성벽의 한쪽에서 파괴적인 흙먼지가 일었다.

황궁은 제국의 수도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지어진 터라, 그곳에서 발생한 흙먼지가 산사태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속에 수많은 거미 악귀들과 친위대 병사들도 즉사한 채 휩쓸리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폭파광의 공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황제의 주먹이었다.

그의 주먹이 강풍과 충격파를 일으킨 것이었다.

자욱한 흙먼지가 내려앉았다.

거미 악귀들의 사체 위에 황제만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나름 진심을 다한 일격이었는데 그걸 대신 맞아주다니.”

아라나크는 온몸에 찢어진 상처를 입은 채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페인의 앞에서 말이다.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강령술사. 네놈은 분명 죽으려고 했다. 그런데 너의 괴물 년은 어째서 그 순간에 널 보호한 것일까.”

그는 당당하게 페인을 가리켰다.

“네놈은 이제 죽을 수 없게 된 거다. 네 앞에 있는 괴물 년을 아끼기 때문이지.”

페인은 방독면 속에서 입술을 씹었다. 급박한 전투 속에 황제는 계속 읽고 있던 것이다. 아라나크가 오기 전의 페인, 아라나크가 온 이후의 페인이 보인 미세한 변화를 말이다.

그래서 페인은 속으로 아라나크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오지 말라고 했잖아.’

그러자 아라나크도 대꾸했다.

‘내가 오지 않았으면 넌 사지가 절단된 채 죽지도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둘의 침묵을 지켜보던 황제는 또 입을 열었다.

“전언인가? …아니면 강령술사 특유의 소통 방식이라도 있는 것 같군.”

“그걸 어떻게 확신하느냐?”

“싸울 때도 함께, 눈알을 굴릴 때도 함께, 피할 때도 함께…. 둘에게서 느껴지는 태세가 비슷했으니 말이지.”

이윽고 황제의 수많은 철퇴가 지면에 떨어졌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파편들이 폭발적으로 일었고 그 속에서 페인은 검기를, 아라나크는 창처럼 길쭉하게 굳은 거미줄을 수없이 사출했다. 그러면서 페인은 내달렸고 아라나크는 도약을 했다. 둘이서 동시에 황제를 치려는 것이었다.

그러자 황제는 힘차게 주먹을 내질렀다. 또 엄청난 강풍과 충격파가 발생하였고 그것은 지면에 널린 돌조각이나 바위까지 날릴 정도로 강력했다.

뒤이어 페인은 아라나크가 사출하는 거미줄을 재결합하여 거대한 방패 모양으로 만들었고, 아라나크는 공중에서 방패를 낚아채 휘몰아치는 바위와 파편 따위를 막아냈다.

직후 페인의 도끼가 수평으로 황제의 허리를 노리고 아라나크의 육중한 거미 몸체가 황제의 머리 쪽으로 떨어지려 했다.

처거거거걱!!!

지면에 있던 수많은 철퇴들이 사슬과 분리되었다. 황금 철퇴를 떼어낸 황금 사슬들은 페인과 아라나크가 인식조차 할 수 없는 속도로 움직였다.

페인의 팔다리를 사슬이 구속했다.

아라나크의 여덟 다리와 온몸도 사슬에 구속되었다.

…쿠웅!

철그럭!

페인은 그 자리에 고정되었고 아라나크는 지면에 떨어진 채 황제를 향해 질질 끌려갔다. 끌려가는 도중에 사슬이 더 날아들어서 아라나크의 허리와 목까지 휘감았다.

“보아라. 강령술사.”

아라나크의 여덟 다리, 거미 몸체의 머리, 배, 아라나크의 상반신, 허리, 두 팔과 목을 사슬이 살인적으로 조르고 있었다.

“내게 거스를 수 없도록 공포를 심어주겠다.”

그때 페인은 궁지에 몰린 듯 불안정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너무나도 순식간이었다. 납득이 되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이었다.

“우선은 이…. 성녀였다는 괴물부터.”

투드드드드득…!

아라나크가 14조각으로 찢어지고 말았다.

커다란 거미의 머리와 배가 공처럼 구르고 창백한 상반신이 허공에 떴으며 두 팔이 풍차처럼 회전했다. 그리고 새하얀 머리칼이 페인의 발치에 툭 떨어져서 선혈을 흘렸다.

페인은 처음으로 아라나크를 내려다봤다.

흰자위 없는 검은 눈과 검은 렌즈가 서로를 마주했다.

“다음엔 세인트 왕국을 없앨 것이다.”

원래 생사를 건 싸움이란 이런 것이었다.

지금까지 싸우며 숱하게 죽은 목숨들이 있다.

그러니 아라나크의 죽음도 생사를 건 싸움에서는 그리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해서라도 이 갑작스러운 죽음이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여기고 싶은데. 당사자가 되면 절대 그럴 수가 없다.

“아아아아아….”

“나를 경외하라.”

뚜드드득…!

페인의 팔다리를 구속하고 있는 황금 사슬이 강하게 조여들었다. 아라나크와 달리 페인은 철인 능력이 있어서 몇 초는 더 버틸 수 있었다.

그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감과, 슬픔과, 분노와, 후회에 오열하던 페인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 울지 마라.

- 내가 아는 넌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다.

아라나크는 머리가 떨어졌어도 잠시 살아있을 수 있던 것이다. 아라나크의 입이 뭐라고 뻐끔대고 있었으니.

- 어차피 황제가 죽고 제국이 멸망하면, 난 성불하여 사라질 존재가 아니었느냐.

- 예정된 이별이, 지금의 사별이 되었을 뿐.

우드드득!

페인의 팔다리가 부러졌다. 하지만 황금 사슬은 그걸로 만족하지 않고 팔다리를 절단할 기세로 더욱 강하게 조여들었다.

- 고개 들고 황제를 봐라. 그래야 목표물을 향해 주술을 쓰지. 내 시점에서는 네놈밖에 안 보인단 말이다.

페인은 어떻게든 고개를 들어 황제를 노려보았다.

- 원래는 널 죽이고 목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아껴둔 것인데….

페인과 목줄로 영혼이 연결된 아라나크.

녀석은 페인의 시야를 통해 황제라는 목표물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주술을 발동했다.

- 내가 믿던 신은 날 버렸다.

- 모든 것이 만악(萬惡)이다.

- 나조차도.

제국의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소나기가 울부짖는 것처럼 내렸다.

- 타락(墮落).

갑작스레 황제가 머리를 쥐고 괴로워했다.

“으으윽…! 무슨 수작을…!”

사방에서 사람들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 아아아아아아!

거미 악귀들도 괴롭게 신음했다.

- 키이이잉…! 키이익…!

페인도 죽어가는 사람처럼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그리고 정신까지 무너져서 환각이 보이는 듯했다.

- 항상 말 안 듣는 악귀라서 미안했다.

- 그것 말고도 이래저래 많이.

흑과 백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신도복.

신도복 차림의 미인이 눈앞에 서있다.

그녀의 까만 눈엔 흰자위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과 똑같은 색깔의 눈물을 흘리며 다정하게, 누구보다도 선하게 미소 지었다.

- 그래도 페인.

이름 모를 성녀.

그녀는 페인의 뺨을 어루만졌다.

- 너라서 다행이었어.

그제야 페인은 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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