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잊지 않겠다 (4)
“애옹.”
“…이제 세 번 부활할 수 있는 거냐?”
“애오옹.”
고양이 세 마리가 발밑에 있다.
도톰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발밑을 빙글빙글 돌고 있다.
“……나 잠깐만 여기서 쉬었다가도 돼? 잠깐이면 되니까.”
“애오옹….”
* * *
페인은 부활했다.
잘리기 직전이었던 팔다리가 멀쩡하고 군데군데가 찢어졌던 로브가 멀쩡하고 찌그러졌던 방독면이 멀쩡하다.
그래서 여기가 어디인가.
어느 장소에서 부활하게 되었는가.
해가 저물고 있는지 어두컴컴하다. 풀과 흙이 밟히고 주변에서는 빛나는 것을 찾을 수가 없다. 하늘은 나뭇잎이 덮고 있어서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광인의 숲이야.”
앳된 목소리.
마녀 같은 화장.
저주받은 인형 같은 복장.
접어서 지팡이처럼 쥐고 있는 우산.
왜소한 신장.
“셰르카?”
셰르카의 동공이 평범한 갈색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그녀는 턱을 치켜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눈알을 뽑았다.
갈색 동공을 하고 있는 가짜 눈알이었다.
“나쿠타서스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우산. 의 형태를 하고 있는 이리가 촉수를 혀처럼 내밀어서 가짜 눈알을 받아삼켰다. 그리고 붉은 동공을 하고 있는 눈알을 직접 셰르카의 눈에 넣어주었다.
“뻔한 결과였다. 황제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그렇구나. 근거가 뭔지 말해줄 수 있어?”
“너의 부족한 통찰력.”
콰악!
페인은 셰르카의 멱살을 쥐었다.
“퀴이익…!”
그러자 접혀있는 이리가 촉수를 꺼내어 페인의 목을 졸랐다.
“진정하렴.”
“내가 거기서 뭘 어떻게 준비해야 됐는데?”
“끝도 없이 정복활동을 벌여온 황제에겐 아군도 많지만 적도 많았다. 그 정도는 너도 알고 있지 않았느냐?”
“그게 왜?!”
“통찰력을 가지고 생각을 해보거라. 적과 아군이 많은 지도자는 언제나 내부의 위협을 받는다. 독살, 암살, 급습, 배신, 역모…. 이 세상에 그렇게 죽은 지도자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이다.”
투웅!
이리의 촉수가 페인을 밀쳐냈다.
“황제는 아주 많은 역모를 겪었지. 그 수많은 역모 속에 황궁 내부에서 그를 죽이려는 시도가 몇 번이나 있었겠느냐? 황제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었겠느냐?”
“비약이 크잖아.”
황제. 엑수스의 화신.
그의 모든 게 비상식적이다.
“황제는 나쿠타서스와 가짜 강령술사까지 직접 황궁에 들였다. 그리고 그가 정말 뛰어난 지략가라면, 부적과 흑마법사 우토만으로 위협에 대비하진 않았을 것이다.”
셰르카는 틀어진 옷매무새를 정돈하였다.
“결국 지략가 황제가 그러한 위협들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면, 황제 본인이 비상식적으로 강하다는 추측을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강령술사가 황궁에서 부적을 찢고 우토를 죽이며 달려들어도, 강령술사를 이길 수 있다는 근거가 깔렸다는 것이지. 황제에겐.”
“……그렇게 다 알고 있으면서 왜 안 알려줬어?”
“너와 접촉할 방도가 없었다.”
“…아라나크가 죽을 때는 왜 안 도와줬고?”
“너는 죽어도 살아나지만 나는 죽으면 끝이지 않느냐. 차라리 이곳에서 부활할 너를 기다리는 편이 합리적이었지.”
페인은 화를 내고 싶어도 화를 낼 수 없게 되었다. 사실 지금 그녀에게 화를 낸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어리광이자 화풀이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자신도 알고 있는 것이다.
셰르카가 보기엔 그의 그런 모습이 심히 불안정해 보였다. 전에 보았던 페인과는 또 다른 일면을 본 느낌이었다.
“아라나크의 죽음 때문에 괴로운 것이냐?”
페인은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부정하려는 듯 고개를 몇 번이나 저었다.
“어차피 성불해서 사라질 악귀였어. 평소에 말도 지독하게 안 듣고. 벌써 날 두 번이나 죽였지. 그래도 녀석이 통솔하던 거미 악귀 군단이 내 수중에 들어왔으니까 그건 다행이야.”
“절벽길이 뚫렸다. 벌써 제국의 백만 대군이 세인트 왕국의 성벽을 향하고 있다.”
“그렇겠지. 이 일은 반드시 마무리를 해야 해. 더는 주어진 시간도 없고.”
페인은 셰르카를 지나쳐서 광인의 숲을 걸었다. 그녀는 그런 페인을 졸졸 따라갔다.
“이 미련한 녀석아. 도와달란 말이라도…”
“도와줘.”
숲속에서 거미 악귀 두 마리가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페인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해지고 말았다.
“너의 정보와 힘이 필요해.”
“대신 조건이 있다!”
“알겠어.”
“들어보지도 않느냐?”
“네가 날 도우면 나도 널 도울 거야.”
“아니 그런 거 말고. 나는 너와 조금 더…. 건설적이고도 미래지향적인 방향을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 너의 조력자가 될게.”
“그렇게 간단히 승낙하는 것이냐? 저번에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내게서 도망치지 않았느냐. 설마 아라나크 때문이냐? 역시 아라나크가 너에게 그 정도로 소중한 존재였다는 말이냐?”
“그걸 이유로 삼진 않겠어. 내가 또 복수의 길을 걷는 건 아라나크도 원치 않을 테니까. 아라나크는 그러려고 희생한 게 아니야.”
셰르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황제를 죽이고 제국을 멸망시킬 거야. 그러기 위해 너와 지옥까지도 같이 가는 조력자가 되어주겠다고.”
“아라나크가 잘 죽었구나. 덕분에 널 손에 넣게 되었으니.”
“다시는 그딴 소리 내뱉지 마.”
그러자 셰르카는 얼굴에 홍조를 띠며 히죽히죽 웃었다.
* * *
나는 셰르카와 함께 각각 거미 악귀를 타고 내달렸다. 해는 완전히 떨어졌고 밤은 깊어만 갔다.
“황제의 고유 능력은 ‘권력의 근원’이라 한다.”
“철인 7계랑은 별개였냐.”
“별개의 능력이다. 페인. 너는 권력의 근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군사력.”
“아니다.”
“무력과 지략.”
“아니다.”
“충성스러운 부하들.”
“비슷하다. …권력의 근원은 피지배층이다. 수많은 백성들이란 말이지.”
“그게 황제가 가진 힘의 근원이라고?”
“이해가 빠르구나. 그러니까 내 말은, 지금 황제는 대략 850만 인구로부터 힘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자, 이제 통찰력을 발휘해 황제의 지난 행적들의 이유를 찾아보거라.”
“지배하는 피지배층이 많을수록 황제는 강해진다는 거네.”
첫 단추를 다시 꿰어보니 다음 단추까지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 광적인 정복활동을 벌여왔고. 아무리 역모의 위협이 있는 국가라도 무조건 합병하고. 아무리 적대적인 국가의 적군들이라도 자기 군사력으로 흡수하고. 제국 각지의 흉악범들조차도 노동력을 착취한다는 명분으로 죽이지 않고. ……황제는 무조건 자신의 피지배층이 늘어나는 방향으로 움직여왔어.”
“철인 7계는 어떻게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유 능력으로 휘두르는 그 무지막지한 황금 철퇴들. 수천의 거미 악귀가 달려들어도 모조리 찍어 죽이며, 수많은 불나방이 상공을 지배하여도 모조리 찔러 죽이는 능력. 그것 때문에 넌 황제를 이길 수 없던 것이다. 철인 7계만으로도 벅찬데 850만 인구로부터 나오는 힘은 정말이지 인간을 초월한 화신의 힘이었지.”
그가 정말 엑수스의 화신임을 부정하기가 어렵다. 천계의 정복자라는 존재가 그런 인물에게 자신의 권능을 내려줬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아라나크는 ‘타락’을 뿌리고 갔어.”
“나도 보았다. 제국의 수도에 있는 150만 백성, 5만 친위대, 거미 악귀들과 황제는 저주받은 빗방울을 맞았지. 그 검은 비는 세상에 돌아다니는 악을 끌어모아 육체에 흡수시켜 악령화를 가속하는 것이었다. 맞나?”
“맞아. 그리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거미 악귀들의 눈으로 봤는데, 황제와 극소수 사람들은 살아있었어. 그리고 악령이 된 대다수 사람들에 의해 폭동이 발생한 상태야.”
“궁금한 것이 있다. 검은 비를 맞은 거미 악귀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 그 저주가 악령화를 가속하는 것이라면.”
“악귀들은 지나친 악령화로 육체가 붕괴해서 죽거나, 더 뒤틀린 괴물이 되었을 거야.”
“통제가 가능한가?”
“폭주하는 악귀는 통제할 수 없어. 이미 그것들의 영혼은 다른 것으로 변해서 내 목줄과의 연결도 끊겨버렸으니까.”
“일단 황제는 그곳에 발이 묶였구나. 지치지도 않는 몸으로 끊임없이 싸울 것이다. 그 사이에 우리는 황제가 가진 고유 능력만 약화시키면 된다.”
셰르카는 빠르게 달리는 거미 위에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서늘한 밤공기가 그녀를 훑었다.
“따라서 우린 850만 인구를 학살해야 한다.”
황제가 가진 고유 능력.
권력의 근원.
그것은 황제가 다스리고 있는 피지배층의 숫자에 비례하여 강해지고 약해지는 능력이었다. 따라서 ‘비첸크로이 제국’이라는 국가에 소속된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서 0으로 만들면, 황제가 가진 고유 능력의 위력도 0이 된다는 이치다.
그러면 철인 7계만 상대해도 되는 것이다.
이해는 된다.
하지만 망설여진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남녀노소, 직종, 신분을 가리지 않고 850만을 죽인다는 일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뭔가 이상하다. 그런 일을 덜컥 실행할 수 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가. 잘못되지 않았나. 적어도 평범한 제국군이나 황제의 친위대는 적군이라 여길 수 있는데.
「씨발. 이젠 더 봐줄 필요도 없는 거지. 아니, 오히려 무고한 희생을 줄이려다가 전투에 손해를 본 부분이 있었을 거야.」
“왜 대답이 없느냐? 우린 850만 인구를 학살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국에 합병된 속국들을 설득해서 독립시키는 건? 그러면 황제의 피지배층을 국가 단위로 줄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느 세월에?”
“….”
“누가 설득하고 누가 독립시키나? 그런 일을 해줄 사람은 있나? 아니면 그걸 강제할 충분한 숫자의 군단이 있나? 그보다 넌 황제가 언제까지 타락한 수도에 발이 묶여있을 것 같으냐?”
파스스….
어느덧 거미 악귀의 여덟 다리에 모래알이 밟히는 중이다.
“저번에 저택에서도 말했지만 내겐 흑사병이라는 수단이 있다.”
나는 대답을 보류하고 일단 거미 악귀에서 내렸다. 그러자 셰르카를 태우고 있던 거미 악귀도 몸을 떨면서 그녀에게 내리라고 재촉했다.
“쥐 떼를 이용하면 금방이다. 황제의 백성과 군대는 병들어 전멸할 것이다.”
셰르카는 내 뒤를 따라서 사막을 걸었다.
오밤중에 거대한 요새 같은 곳에 도착하였다. 높은 담벼락과 굳게 닫힌 정문이 있다. 또한 저곳에 밝은 빛은 하나도 없다.
“850만은 너무 많아.”
“승천자의 일가족들은 학살했으면서 황제의 백성들은 학살하지 못하겠느냐?”
“그거랑은 달라.”
“어찌 보면 아라나크도 원한 일이 아니더냐.”
마지막에 성녀의 모습이 되었던 아라나크가 눈에 선하다.
“전부 죽이겠다는 건 아라나크의 본심이 아니었어.”
“아라나크가 그리 말을 바꾸더냐?”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 아라나크는 그런 녀석이 아니야.”
셰르카는 어쩔 수 없다는 투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죄 없는 백성들이 전멸하기 전에 우리가 황제를 해치우고, 제국의 영토를 격리하고, 감염자들을 다시 격리하여 피해를 최소화하고, 당분간 역병을 치료하러 돌아다니면 되는 것이다. 됐느냐? 이 고집불통아.”
결국 이런 선택에, 이런 절충안이라도 학살이라는 건 변함이 없을 것이다.
“어휴. 누가 세인트 왕국에서 태어난 놈 아니랄까 봐.”
이제 시야가 트인 느낌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녀가 내 등을 밀어주었다. 내가 어떤 경계선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가 드디어 한쪽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러니 걷자.
가시밭길이어도 발을 들이자.
“알겠어. 흑사병으로 그렇게 하자.”
꼭 850만을 다 죽일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전부가 아니라 절반 정도 죽었을 때 혹은 그보다 적게 죽었을 때 황제를 이길 수도 있다.
그리고 또 역병이 퍼지다보면 속국들이 자체적으로 독립을 시도할 수도 있는 일이다.
어떻게 되든 흑사병은 제국을 멸망시킬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수단이다. 이 전쟁을 끝내고 왕국을 지켜내고 아라나크의 염원까지 들어줄 수 있는 수단이다.
「나는 찬성하는데. 너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어?」
‘어떤 결정을 내리든 후회는 있을 거야.’
지금 이런 확실한 수단을 쓰지 않았다가 봉변이라도 당하게 되면 미치도록 후회할 것이다.
반대로 이런 수단을 쓴 참혹한 결과를 눈에 담게 된다면 그때도 후회할 것이다.
어차피 이 모든 일들은 아름다운 결과를 원하고 시작한 게 아니다. 나의 부족한 통찰력으로 인해 황제 개인의 무력에 대항하는 계획까진 세우지 못하였으니.
이미 후회하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해낼 거야.’
잔잔했던 세계의 호수에 내가 돌을 던지고 말았으니 이건 한참 전부터 엎질러진 물이었다. 또한 황제도 이 엎질러진 물에 가담했다.
- 내가 믿던 신은 날 버렸다.
- 모든 것이 만악이다.
- 나조차도.
나조차도.
내 선택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을 것이다. 하지만 제국의 횡포에 의해 고통 받을 미래의 수많은 사람들과, 제국에 의해 나라를 잃을 것까지 생각해보면 이게 최선이다.
황제를 죽이고 제국을 멸망시키면 세인트 왕국은 살아남을 수 있다. 제국에 의해 나라를 잃은 사람들도 언젠가 자국이 독립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아라나크의 염원까지.
그런 최선의 결과를 기대하며, 최악보다 차악을 선택할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렇게.
“여긴 무엇을 하는 곳인가?”
“군락.”
그녀와 나는 홀로스트 수용소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거미 악귀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원한을 담아 으르렁댔다.
“…어미 잃은 아이들이구나.”
밤하늘의 별 보다 많은 눈들이 붉게 빛났다.
녀석들은 틀림없이 분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