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몰락한 밤 (2)
정체불명의 역병에 걸린 자들은 증상을 호소했다. 몸이 뜨겁게 부어서 시름시름 앓다가 구토를 하고 마지막엔 몸에 검은 반점이 나타나며 죽는 것이다.
깊은 밤. 제국의 병사들은 잠을 청하지도 못하고 바삐 뛰어다녔다. 막사에서 쉬던 자들이 증상을 호소하면 의무병을 불러야 했고 누군가 앓아누우면 찬물을 옮겨야 하는 것이다.
“의무병! 이쪽으로!”
“여기도 병사가 쓰러졌다!”
제국의 군대에는 성녀나 치료사가 없었다. 대신 의무병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전장에서 입은 외상을 치료하는 자들이라 뭔지도 모를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환자들에게 할 수 있는 조치라곤 물에 적신 수건을 이마에 올리고 일부 막사를 격리하는 것뿐이었다.
“갑자기 역병은 왜 터진 겁니까?”
“강령술사의 짓이겠지!”
“다들 코랑 입을 가려! 살갗이 노출되지 않게 하라고!”
그들은 천과 수건 따위로 호흡기를 가려서 감염을 막으려 했다. 환자들을 격리하고 죽은 자들의 시신은 빠르게 불태워 막으려 했다.
하지만 시신을 치우는 속도보다 시신이 생기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일부 환자나 환자의 동료들은 어떻게든 사람을 살리겠다며 격리조치에 반발했다.
그러면 더 빠르게 감염이 확산되었다.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환자들이 격리된 막사는 비위생적이었다. 누군가 격리된 막사에서 죽으면 그 막사에 있는 환자들은 시신과 함께 나란히 누워있는 꼴이 되었다.
토사물의 악취, 시신의 악취, 불타고 있는 시신으로부터 끔찍하게 익는 냄새가 밤공기를 채웠다.
- 찌이익! 찍찍!
그래서일까, 검은 쥐들이 나타났다.
쥐들은 심히 굶주렸는지 막사에 들어가서 시신을 뜯거나 막사 밖에 널린 토사물을 핥아먹었다. 그뿐만 아니라 제국군이 가져온 식자재, 빵, 말린 고기, 절인 고기 따위를 그악스럽게 탐했다.
그렇게 제국군은 병든 새벽을 지새웠다.
* * *
역병이 터지고 닷새째 아침.
1만의 제국군은 전령으로 차출되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중이다.
선두에서 군마에 오른 이 남자는 임시로 전령부대장 직책을 받았다. 최대한 빠르게 수도로 가야 한다는 명령이라 무거운 마차는 한 대도 받지 못하고 병사들 모두가 군마에 올라 달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들은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을 통과하는 중이다. 길바닥에 아군과 적군의 시신이 널려있고 그중엔 민간인들의 시신도 많았다.
- 까악! 까악!
습기 있고 차가운 아침 공기에 썩는 냄새가 스며있었다.
- 까악!
전령부대장은 석궁을 들어올렸다.
…퓻!
- 까아아악!
시신에 모여든 까마귀들이 어지럽게 날아올랐다.
“어째서 까마귀 따위에게 화살을 쏘십니까?”
“저 새들을 보고 있으면 우릴 이렇게 만든 개자식이 생각나서 말이지.”
“강령술사요?”
“빌어먹을.”
일찍이 파괴한 마을에서는 얻을 게 없다. 1만의 제국군은 마을에서 한숨도 돌리지 않고 그대로 거친 길을 밟으며 절벽길로 향했다.
저 멀리 뾰족뾰족한 돌산 능선이 보인다.
“백만대장의 야망이 보였어.”
“그분께 문제라도 있습니까?”
“폐하께서 무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고. 아무래도 본인이 새로운 황제가 되길 원하는 것 같아.”
“과욕이군요.”
“군마 한 마리도 소중한 마당인데 우리한테 만 마리를 내어줬어. 어차피 당분간 기병을 활용한 공세는 취하지 않을 거라고 얘기했지만, 본심은 그게 아니란 거지.”
“백만대장이 실수를 한 걸까요.”
“빨리 알고 싶었던 거야. 폐하께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수도가 멀쩡한지 어떤지.”
“저희에게 1만의 군마를 내어준 건 역병이 돌고 있어서 1분 1초가 소중하다는 점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야 하겠지만.”
“79만 대군이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어도 역병은 조금씩 아군의 전력을 깎아먹을 겁니다.”
“미치겠군. 승천자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점이었는데…. 강령술사라니….”
“그래도 저는 그 지독한 역병의 현장에서 빠져나온 게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행운은 개뿔.”
전령부대장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가래침을 뱉었다.
그들은 어느덧 절벽길로 들어서는 돌산 능선 앞까지 도달했다.
“그 잔악한 존재가 어째서 세인트 왕국을 돕고 있는 거지?”
“그런 놈의 심리를 어찌 알겠습니까.”
“미친…. 저 앞에 뭐야? 잠깐 정지해.”
선두가 정지하며 깃발을 높이 올렸다. 그러자 그 뒤로 이어진 1만의 병사들이 모두 정지했다.
“시체가 까맣습니다.”
제국군은 절벽길로 들어서는 길목에도 약 200의 병력을 남겨 진을 쳐두었다.
어차피 백만 대군에 의해 고립된 세인트 왕국. 그래서 이곳에 남겨졌던 200의 병력은 절벽길 통제가 목적이라기보다는, 무언가 절벽길로부터 나오거나 절벽길로 들어갈 때 전령을 급파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까맣게 변해서 죽어있는 게 아닌가. 저 현장에 살아있는 거라곤 까마귀, 쥐, 파리, 들끓는 구더기들밖에 없는 것 같다.
“시체가 까맣다고 해서 불태운 건 아닙니다. 까마귀가 파먹을 살점이 남아있다는 거니까요.”
틀림없이 역병이다. 저 까마귀, 쥐, 파리, 구더기들도 그렇고 까맣게 변한 시신들이 있으니 분명 역병에 당한 것이리라.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막사와 요새는 누가 저렇게 부숴놨지?”
저곳에 대기하는 병사들이 생활할 막사, 판자로 만든 임시 요새, 기병과 짐승의 접근을 차단하는 방벽 따위가 전부 부서져있다.
“…왕국에서 비밀리에 병력을 빼돌린 것 같습니다. 저희가 역병에 정신이 없는 새벽을 틈타서 저 방벽과 요새를 허물고 역병을 퍼뜨린 것이죠. 확실합니다.”
“확실하진 않은 것 같다. 왕국 놈들이 하룻밤 새벽에 이런 짓을 벌일 여유가 없었을 거라고.”
“그럼 직접 들어가서 확인해보시겠습니까? 일부 병사들만 보내서 저곳을 통째로 불태우면 역병은 처리될…”
“대기해.”
전령부대장은 망원경을 꺼내서 현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돌산 능선도 꼼꼼하게 확인해보고 주변 언덕의 숲도 확인해 보았다. 탁 트인 농지도 전부 까맣게 불태워진 상태라 매복할 장소는 없는 것 같다.
“강령술사는 신출귀몰하다고 하였지. 갑자기 세인트 왕국 진영에서 나타나거나 아군의 공성탑 안에서도 출몰하는 놈이라 했으니깐.”
“설마 그자가 여기에…?”
“그렇지. 놈은 분명 수도에서 생포당했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거다. 만약 놈이 절벽길을 지나갔다면 저런 난장판을 만들어둔 것도 납득이 된다.”
“완전히 잘못 짚었구나.”
그 순간, 허공에서 검은 연기가 모여들어 사람의 형상을 취했다.
참혹한 현장을 뒤로하고 혼자서 이들의 선두를 마주한 여자.
왜소한 체구, 검고 짧은 머리칼, 전투보다는 무덤 앞에서나 어울릴 것 같은 복장, 그러나 그 복장조차도 인형에나 입히는 것처럼 쓸데없는 노출과 화려함을 가지고 있어 진짜 무덤 앞에선 무례가 되리라.
그리고 고이 접어서 작은 어깨에 올리고 있는 건 우산인지 양산인지.
마녀 같은 화장법에 붉은 동공을 지니고 있는 그녀의 표정이 사람 같지 않은 부조화를 이루는 건 왜일까.
“누구냐!”
병사들이 군마에서 내려 전령부대장 앞으로 나섰다. 그들 모두가 셰르카에게 창과 칼을 겨누어 순식간에 전투병력이 되었다.
그러자 셰르카는 엄지로 자기 뒤를 가리켰다.
“뒤에 있는 현장은 내가 만든 거다.”
1만을 앞에 두고도 당돌하게 말하는 것이다.
전령부대장을 비롯해 그녀를 마주한 이들은 모두 위기감을 느꼈으리라.
“강령술사의 하수인이냐!”
“아니다.”
“당장 정체를 밝혀라!”
“내가 왜 그래야 하느냐?”
셰르카는 들고 있던 이리를 바닥에 찍었다. 그리고 손잡이를 지팡이처럼 쥐었다.
“퀴익…!”
그때 선두에 있던 자들은 들었다. 저 우산인지 양산인지 모를 것에서 해괴한 짐승의 소리가 났다고.
이젠 미지의 공포가 스멀스멀 잠식해온다.
“너희가 수도로 가기 위해 편성된 자들인가? 그걸 전…. 전…. 뭐라고 하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페인이 분명 알려줬는데.”
“페인?”
“앗.”
셰르카는 자기 입을 가렸다.
전령부대장은 의욕적으로 눈을 번뜩이며, 또한 목소리를 키워 절박하게 물었다.
“페인…! 그게 강령술사의 본명이냐?!”
“내가 실수로 이름을 말하였구나.”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주술, 주물 중에 상대의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 저주를 걸 수 있는 것들도 있다고. 그러니 이건 아주 귀중한 정보다.
어쩌면 흑마법사 우토가 강령술사에게 저주를 걸어줄 수도 있다. 물론 강령술사가 그 주술보다 강한 저주 저항을 가지고 있다면 무의미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강령술사의 이름을 알았다는 건 곧 그의 정체도 알아낼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실수를 대놓고 인정한 셰르카는 아직도 태연하게 히죽대고 있는 것이다.
“가만 보니 그의 이름을 말해도 별 상관은 없었겠구나. 어차피 죽을 녀석들이니.”
“뭣이…?”
그녀는 이리를 들었다. 그리고 우산처럼 폈다.
이리의 안쪽에는 붉은 동공을 가진 눈알 그림과 붉은 입술 그림이 있었다. 딱 보기에도 수상한 주물 같다. 그것만 가지고 혼자서 1만을 죽이겠다고 한다.
그래서 전령부대장은 외쳤다.
“저년은 흑마법사다! 당장…”
쿠지직!!!
이리의 붉은 입술 그림으로부터 촉수들이 엄청난 속도로 뻗어왔다. 그 촉수들이 전령부대장의 두 눈과 입을 뚫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전령부대장의 명령도 필요 없었다. 촉수들이 여러 갈래의 살아있는 채찍처럼 날뛰며 선두에 있는 자들을 죽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병사들은 도망을 택하거나 싸우기를 택했다. 하지만 촉수들은 집요하게 도망을 택하는 자들부터 꿰뚫고 비틀고 강타해서 죽였다.
그 경악스러운 소식은 빠르게 퍼져서 후열까지 닿았다.
“흑마법사라고?!”
“우토가 아니야! 강령술사랑 같은 편인 여자가 저 앞에서 날뛰고 있어!”
“그래도 저희 숫자가 있는데 도망쳐야 합니까?”
“일부는 어서 백만대장님께 돌아가 알려야 한다! 절벽길을 흑마법사가 막고 있다고!”
그래서 극단적인 기동력을 살리기 위해 단 열 명이 백만대장에게 돌아가는 전령이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흑마법사와의 싸움에 임하기로 하였다.
정체불명의 흑마법사가 아무리 강해도 이쪽은 1만이다. 다들 생각했으리라. 이 싸움은 자신의 차례가 오기 전에 저 앞에서 끝날 것이라고.
- 끄아악!
- 쏴! 쏘라고!
- 거기 막아!
- 방패 들어!!!
- 아아아아악!!
“지금 저 앞에서 계속 싸우고 있는 거야? 한 명 상대로?”
“여기까지 오기 전에 지칠 거다. 대규모 마법을 쓰는 것 같진 않으니까.”
하지만 앞에서 메아리치는 싸움의 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길을 따라서 늘어섰던 병사들이 좌우로 퍼져 단 한 명의 적을 상대로 포위하는 대열을 갖추고 계속 싸우고 있는데 말이다.
앞에 있는 자들이 죽으면 당연히 뒤에 있는 자들이 나설 차례다. 이쪽의 숫자가 보통 많은 게 아니기도 하고 상대는 단 한 명이다. 그래서 순서대로 나가 싸움에 임해야 한다.
그때 앞쪽에선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쐐애액…!
셰르카에게 화살이 쇄도하면 이리가 화살보다 빠르게 촉수를 움직여서 그녀를 지켜주었다.
쐐액!
그녀의 측면까지 포진한 자들이 화살을 날려도 이리는 모조리 방어해냈다. 그럴 때마다 이리의 안쪽에 있는 눈알 그림들이 이리저리 불쾌한 동공을 움직이는 듯했다.
“죽여어어어!”
촉수들이 아무리 열심히 움직여도 그보다 더 많은 제국군이 동료의 시신을 밟고 달려들었다.
“멍청이들아! 쉴 틈 없이 달려들어! 계속 둘러싸라고!”
그러나 방패를 앞세우면 촉수가 방패와 갑옷을 뚫어버렸다. 검을 들고 휘두르면 촉수가 베이긴 했지만 금방 재생되어 다시 날뛰었다.
창병들이 찌르려고 뛰어가면 일부 촉수가 굵직하게 변해서 둥글게 바닥을 쓸어버렸다. 무겁고 긴 창을 든 자들은 다리를 친다는 행동 한 번으로 모조리 넘어뜨리는 것이었다. 아니, 촉수의 위력이 너무도 강하여 단순히 넘어뜨리는 게 아니라 수십 명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지경이었다.
그래도 셰르카는 한 명이었고 제국군은 많았다.
몇 명이 임기응변으로 던진 창이 휘몰아치는 촉수 사이를 통과하여 셰르카에게 닿기 직전이었다.
쿠직!
셰르카는 이리를 방패로 삼았다.
체구가 왜소해서, 우산 크기의 이리를 자기 앞에 펼치는 것만으로 전신을 가릴 수 있었다.
촤락!
그리고 이리를 접으면 검은 연기만이 그 자리에 남고 셰르카는 이리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뭣, 어디야?!”
“씨발! 기껏 뒤까지 포위했더니 어디 갔어?!”
앞에서 셰르카를 중심으로 둥글게 포진하고 있던 자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무의미하게 죽은 아군의 시신이 발에 치이면 사기가 꺾였다.
- 여기다!
- 왜 여기서…!
- 잡아아아아!!!
셰르카는 그들의 중간쯤으로 가버린 것이다. 대열도 없고 셰르카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싸우는지도 모르는 자들을 다시금 학살하는 것이다.
앞에서 그녀를 상대하던 자들은 서둘러 뒤로 뛰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에워싸서 모든 방향으로부터 달려들었다. 휘몰아치는 촉수들 때문에 1초에 몇 명이 다치고 몇 명이 죽는지도 알 수 없다.
악착같이 달려들어 한 명을 상대하는 광기의 현장이었다.
“살려줘…!”
“앞에 얘들은 뭐 하는 거야?!”
“아아아아악!”
“저 씨발년 죽이라고!!!”
“비키십시오!”
그때 제국의 화염술사들이 나섰다. 그들은 셰르카가 사정거리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전원!”
“방사해라!”
비록 발화 1계에서 2계 사이의 위력이었지만 화염은 합쳐지기 마련이다. 여럿이서 한 목표를 대상으로 뿜어내면 더욱 뜨겁고 커다란 화염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화아아아아악!
셰르카가 있던 곳을 화염이 휩쓸었다. 뜨거운 열기에 몇 명은 화상을 입거나 타죽고 말았다.
그러나 화염은 그들의 의도보다 오래 타오르지 못했다.
사아아아…!
검은 연기가 휘몰아쳐 화염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 광경은 마치 검은 연기가 화염을 쫓아다니며 잡아먹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뜨겁게 그을린 땅 위에 셰르카가 우두커니 서있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래도 간절히 바란다. 생각한다.
그 어느 마법사도 주술사도 영력은 무한하지 않다. 싸우다 보면 영력은 바닥을 드러내는 법이고 그때 마법사나 주술사는 무능력의 일반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목숨을 내던지며 싸우다 보면 결국 그녀도 지칠 거라고. 그것이 유일한 승산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1만의 병사를 상대하겠다고 혼자 등장한 그녀가 무모해 보인다.
“2천 명을 죽이니 조금은 지치는구나. 이렇게 지칠 때까지 싸워보는 건 처음이다.”
처음과 변함없는 안색을 보면 전혀 지친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실제로 영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어 지치는 것과 그녀의 안색은 별개의 문제였다.
“조금 쉬어야겠다.”
그때 셰르카는 그들의 유일한 승산을, 승산이라는 희망을 정면에서 단 몇 마디로 짓밟았다.
“세 시간 뒤에 돌아와서 2천 명을 더 죽여주마.”
“절대 그렇게 두지 않겠다!”
병사들은 무기를 고쳐 쥐었다. 다시 그녀를 에워쌌다. 이번엔 군마에 오른 훈련된 자들이 장창과 석궁까지 들어서, 그녀의 촉수가 1초당 해야 하는 행동들을 더 늘릴 수 있도록 하였다.
짙은 피 냄새가 코끝을 역하게 찔렀다.
“이리는 언제나 배가 고픈 아이라서 말이다. 포만감이라는 걸 느낄 수 있는 건지 실험을 겸하고 싶었다. 그렇지?”
“퀴이익!”
“우릴 가지고 실험을 한다고…?”
이쪽은 죽을 각오로 싸우고 있는데 저쪽에선 그냥 실험이라고 한다.
스스스슥!
셰르카를 중심으로 일렁이던 붉은 촉수들이 우산 속 입술 그림으로 쏙 사라져버렸다.
“퀴익! 퀴이익!”
“안 된다. 역병을 퍼뜨리면 금방이지만…. 역병에 걸린 고기는 금방 쥐 떼가 파먹어서 말이다. 네가 먹을 게 없어진다.”
“퀴익….”
이쪽은 죽을 각오로 싸우고 있는데 저쪽에선 뭔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것 같다. 도대체 세상에 저런 것이 존재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저런 것이 존재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어째서 지금까지 저런 압도적인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없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이해할 수가 없다. 정말 흑마법사가 맞는지도 정의할 수가 없다. 저런 건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스윽.
그녀는 이번에도 이리로 자신의 몸을 가렸다. 작은 체구가 우산에 다 가려졌다.
그 행동의 의미를 아는 자들은 망연자실했고 그 의미를 모르는 자들은 무의미하게 달려들었다.
사아아…
이윽고 그녀는 검은 연기만 남긴 채 사라져버린 것이다.
“으아아아아아!!! 씨바아아알!!!!!”
세 시간 뒤의 학살을 예고한 채, 불합리하게 사라져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