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몰락한 밤 (3)
물의 마법사 파보크는 불타는 바위에 맞아서 두 다리를 평생 못쓰는 불구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목숨을 잃는 것보단 불구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파보크였다. 그는 당분간 이렇게 침상에 누워 회복기를 가져야만 한다.
“다리는 좀 어때요?”
드르륵.
자객이 그의 옆으로 의자를 끌어놨다.
그 의자에 베르자인이 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그는 우리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우리요? 마법사들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에게 해선 안 될 짓을 저지른 전 승천자, 그를 죽이려고 한 화염술사 카누스, 그의 추방에 일조하고 승천자를 맹목적으로 따른 페레스, 아그니샤, 그에게 돌을 던지고 매질을 한 군중. …지금 이렇게 꼴사납게 누워있는 놈도 그의 용서를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약 파보크 님이 페인과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용서하실 건가요?”
페인이 겪은 것을 반대로 이쪽이 겪었다면.
파보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자괴감과 죄악감이 있었다.
“…누구라도 용서 못 할 겁니다.”
베르자인은 페인에게 용서받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을 잠시 감상했다. 그러다 넌지시 화제를 돌렸다.
“아그니샤라는 분은 끝까지 나서질 않았네요. 그…. 커다란 은 십자가를 등에 달고 계신 분이요.”
“아그니샤는 네이트의 축복을 받은 여전사입니다. 진정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면 권능을 발휘할 수 없는, 마법사겸 성기사입니다.”
“여전사, 마법사, 성기사…. 가지고 있는 역할도 많네요. 페레스 님이 절벽길에서 전사하시고 수많은 민간인들의 터전이 파괴되었는데도 나서지 않는 건가요.”
“아무리 적군이라도 악령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중에 누군가는 진심으로 파괴와 살육을 즐겼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대다수는 명령에 따라, 충성심에 따라, 애국심에 따라 움직였을 겁니다. 그들도 우리 병사들과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명분이 있으면 악행도 포장되는 거군요.”
“…어쨌든 그들 제국군의 존재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면 아그니샤는 싸울 수 없습니다.”
베르자인은 그 부분이 불만이었다.
네이트라는 천사에게 축복을 받은 몸이면 보통 강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런 사람이 왕국의 힘이 되어주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불만인 것이다.
아그니샤가 처음부터 참전하여 함께 싸웠더라면 얼마나 많은 적들을 해치우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을까.
“이 좆같은 전쟁 속에 옳고 그름을 따지고 있는 건 아쉬워서요. 다 똑같이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데…. 그냥 그렇다는 말이에요.”
파보크도 그녀의 불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강령술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못 들었어요? 아까 왕궁 사람들한테 보고도 하고 왔는데요.”
“못 들었습니다. 치료사와 성녀들이 수면을 강제해서.”
베르자인은 벌써 왕궁까지 줄이 닿은 모양이었다. 얼마 전까지 궁지에 몰렸던 왕궁이라 음지의 사람이든 양지의 사람이든 가릴 처지가 아니긴 했다.
“그는 비첸크로이 제국의 수도에 저주를 걸었어요. 검은 비를 퍼부어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타락시켰죠. 내면에 있는 악을 끄집어내고 주변에 있는 악을 끌어모아 모조리 악령으로 만드는 거예요.”
“황제는 어떻게 된 겁니까?”
“황제는 강했다고 해요. 무슨 고유 능력이 있어서 페인은 그걸 무력화하는 중이죠. 그리고 제국 전역에 흑사병이 퍼졌어요.”
흑사병.
파보크로선 처음 들어보는 병명이었다. 또한 그것은 왕국의 그 누구도 들어본 적 없는 병명이었다.
“제국은 안팎에서 병들고 있어요. 지금 저 성벽 밖에서 진을 치고 있는 놈들도 포함해서, 제국에 있는 수백만이 흑사병에 죽어가고 있죠. 게다가 페인은 절벽길까지 틀어막아서 제국군의 후퇴나 전령 교환까지 원천봉쇄했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방어만 하라고 강조한 것이었군요. 괜히 싸웠다간 병에 걸릴 수도 있고….”
“네. 그러면서 제국군을 앞뒤로 포위하겠다는 뜻도 있는 거죠.”
“이대로 기다리면 그들은 자멸하는 겁니까.”
“페인은 그 많은 제국군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 조만간에 악귀 군단이 모이면 다시 출몰해서 제국군을 정리하겠다고 했어요.”
그럼 혼자서 몇 명을 죽인다는 말인가.
이 정도면 개인이 군대에 필적한다는 개념을 한참 넘어섰다. 이젠 개인이 하나의 국가에 필적하는 수준이 아닌가.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하게 된 페인의 머릿속은 어떤 상태인가.
이미 악에 물들었는가. 아니면 악에 물들고 있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악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는가.
‘주제 넘은 생각이다. 나 따위가….’
“왕국은 저 앞의 제국군이 전멸했을 때 진격하면 돼요. 제국의 영토까지 단번에 진입해서 속국들을 하나씩 독립시키는 거죠.”
파보크는 물었다.
“그자가 이렇게까지 제국을 공격하고 왕국에 유리한 싸움을 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베르자인은 좀 전에 파보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애국심에 따라 움직였겠죠. 아니면 뭐…. 복수심이나 자신만의 믿음이 있을 수도 있고요.”
* * *
나는 홀로스트 수용소의 옥상에 있다.
이곳에서 악귀 군단의 숫자를 늘리는 중이다.
잿빛세계에서 이물이 보이는 족족 목줄로 묶어서 이곳에 소환하고 그것들을 전투에 능한 악귀들로 변이시키는 것이다.
그날의 영력이 소진되면 쉬었다. 그리고 영력이 차오를 때마다 쉴 틈 없이 악귀들을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불나방을 천리안처럼 활용하여 제국의 수도를 상공에서 감시했다.
황제는 아라나크의 ‘타락’이라는 주술에 당하고도 죽지 않았다. 세계에 만연한 악을 불러들여 악령화를 일으키는 강력한 저주인데 말이다.
황제는 밤낮없이 황궁에서 철퇴를 휘두르고 기괴한 악귀들을 때려잡았다. 차라리 수도를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법도 한데 황궁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뭔가 고집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하다.
황제는 그렇게 4일째 싸우고 있는데 지칠 기미가 안 보인다.
‘제정신일까.’
「지금 황제가 제정신인지 아닌지는 모르지. 다만 몸으로는 악귀들과 싸우면서 정신으로도 악에 맞서고 있을 거야.」
사아아…….
허공에서 검은 연기가 모여들었다.
셰르카다.
“제국의 전령은?”
“네 말대로 절벽길에 오더구나. 그런데 그들의 숫자가 예상보다 많았다.”
“얼마나?”
“백만대장이 전령으로 만 명의 병사를 투입했다.”
셰르카는 적당히 아무 상자를 골라서 걸터앉았다. 호흡이나 안색에 조금 지친 감이 있어 보인다.
“8천 명만 더 해치우면 된다. 세 시간마다 2천 명씩 죽일 생각이다.”
그렇다면 오늘 해가 떨어지기 전에 제국의 1만 전령은 전멸하리라.
“흑사병을 쓰면 더 쉽지 않냐?”
“그 역병에 걸린 고기에는 금방 쥐들이 꼬인다. 이리가 먹을 살점을 쥐들에게 빼앗길 수는 없지 않으냐.”
셰르카는 이리가 포만감이라는 걸 느낄 수 있는지 실험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유의미한 실험일까. 어차피 이리는 굶주리는 저주에 걸린 게 아닌가.
「실험정신이야. 흑마법사들이 다 그렇지.」
“페인. 제국에도 흑사병이 퍼지고 있다.”
“알아. 그것도 불나방으로 지켜보고 있어.”
“황제의 상태는 어떻더냐? 아직도 기운이 넘치는가?”
“큰 변화는 없어.”
“그렇다면 더 많은 이들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겠구나. 너무 초조하게 생각하지 말고 지켜보면 되겠다.”
“아무렇지도 않아?”
“무엇이?”
“…아니다. 그냥.”
흔들리지 말자.
황제는 권력의 근원이라는 고유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능력은 황제가 지배하고 있는 피지배층의 인구수에 비례하여 강해지고 약해진다.
그래서 제국의 수백만 인구를 흑사병으로 빠르게 줄여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쪽이 죽는다. 왕국이 멸망하고 황제는 굳건할 것이며 제국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주변국들을 끊임없이 집어삼킬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건 전쟁이야. 인간들의 죽음은 불가피하다고.」
「제국의 무고한 백성들이 아니야. 농장에서 제국의 식량을 재배하고 대장간에서 놈들이 쓸 무기를 만드는 적국의 ‘인력’이지. 게다가 제국 놈들도 왕국의 민간인들을 학살했잖아. 농지를 불태우고 마을을 파괴했어. 결국 이건 필수적인 전략이라는 거야.」
우리는 천사가 아니다.
그래서 그런 도리를 지키며 싸울 정도로 강하지 않다.
* * *
이곳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지 일주일째다.
훈련된 백만 대군으로 세인트 왕국을 공격했던 일이 어젯밤의 꿈같다. 절벽길에서 연전연승을 하고 왕국의 성벽이 보이는 곳까지 적들을 쳐부수며 진격했던 날들은 덧없이 사라진 희망 같다.
65만 병사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이들을 이끄는 백만대장과 지휘관들은 어떨까.
“항복 같은 소리는 하지도 마라. 65만 군사가 있는데 항복하는 지휘관이 세상 어디에 있겠나.”
백만대장은 지휘관들의 권유를 단칼에 거절했다. 처음보다 숫자가 줄긴 했지만 65만은 여전히 한 나라를 전복시킬 수 있을 정도의 대군이다. 이런 대군이 아직 수중에 있는데 항복이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렇다고 마냥 내일을 기다린다고 바뀔 건 없지 않습니까.”
“절벽길로 보냈던 1만 전령들의 시신은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팔다리가 성하게 붙어있는 시신은 고사하고 뼛조각과 나뒹구는 살점만이…”
“강령술사…! 그 괴물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을 직접 보셔야만 했습니다! 역병으로 죽인 것도 아니고 순전히 싸움으로 1만을 죽였단 말입니다!”
1만 전령을 죽인 건 셰르카지만 이들은 뒤를 잡은 강령술사의 소행이라 추측하고 있다.
그 1만 명 중에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젠 기마병도 못 씁니다! 기동력을 살리겠다고 전령에 1만 군마를 차출하지 않았습니까!”
“지난 새벽에는 공성대장이 역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이제 공성탑은 누가 지휘합니까? 아니, 그보다 이제 ‘공성’이라는 걸 할 수는 있는 겁니까?”
“닥쳐라! 이 겁쟁이 놈들!”
백만대장의 호통이었다.
“강령술사 앞에선 찍소리도 못하는 놈들이 상관에게는 잘도 지껄이는군! 백만이 65만으로 줄었다고 하여 내가 더는 백만대장이 아닌 것 같나?!”
“….”
“죄송합니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나도 알고 있네. 지금 우리가 어떤 상황을 직면하고 있는지 백만대장으로서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그래서 계속 지켜보며 결정을 고뇌했네.”
지휘관들은 해답을 촉구했다. 백만대장이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명령을 내려주길 간절히 원했다.
후퇴는 불가능하고 항복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알다시피 우리 진영에는 역병이 퍼졌네. 왕국 놈들은 성벽 앞에서 진을 치고 그저 방어만 하고 있지. 이쪽이나 그쪽이나 식량이 동나는 건 매한가지인데.”
백만대장은 비장한 얼굴로 지휘관들과 한 명씩 눈을 마주쳤다.
“즉, 놈들은 배를 곪아서라도 우리와 전장에서 충돌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네. 아마 역병을 경계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네. 어쨌든 요점은 놈들이 싸움을 기피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우리는 놈들이 원치 않는 상황을 강제해서 살 길을 모색해야 하지 않겠나. 이대로 역병에 자멸하는 것보단 그게 현명할 테다.”
그리하여 제국군은 처음에 사신을 보냈을 때처럼 소수의 병력을 편성했다. 고작 열댓 명인 그들은 백기가 아니라 당당하게 제국의 깃발을 세우고서 아군 진영을 통과했다.
일찍이 자기 밑의 병사들을 모조리 잃어버린 전령대장이 열댓 명을 이끌고 있다.
“처참하군.”
흑사병에 걸린 병사들이 시름시름 앓아누워서 죽어가고 있다. 매일 쌓여가는 시신들을 불태울 장작도 기름도 없어서 멀찍이 있는 새까만 농지에 버리고 있는 현장이다.
병사들의 상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쪽은 어느새 한계에 봉착했음을.
“이 시련도 곧 끝날 거다. 이젠 우리가 죽거나 저들이 죽거나 둘 중 하나가 되겠지.”
“왕국에 가서 뭐라고 말하면 됩니까?”
“우리의 뒤를 막고 있는 강령술사를 치우지 않는다면 나머지 65만 군대를 이끌고 왕국에 총공격을 감행할 거다. …역병도 강령술사도 우리의 결단을 막을 수 없다고.”
한 마디로 후퇴할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공멸이라도 하겠다는 협박이었다.
“여전히 우리 숫자가 있어. 왕국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숫자라고. 그런데 우리는 역병까지 끌어안고 있지.”
만약 이 협박을, 제안을 왕국 측에서 거절하고 강령술사가 나타나서 이쪽이 갖고 있는 수적 우위를 뒤집는다고 하여도 싸울 것이다.
어차피 이 방법이 아니라면 가만히 앉아서 죽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 * *
흑사병이라는 수단을 선택한 대가는 크나큰 업보가 되어서 내게 고스란히 돌아오리라.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영혼에 악이 쌓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게 느껴진다.
제국에 흑사병이 본격적으로 퍼지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런데 벌써 하루에 성수 한 병을 마셔야할 정도로 업보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흑사병으로 죽인 것도 우리가 쓸 수 있는 악이라면 좋겠는데…. 인간이라서 쓸 수가 없네.」
악령이나 이물을 죽였을 때 악을 얻는 건, 존재 자체가 사악한 그것들의 영혼은 악의 농도가 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한 악의 축이 아니기 때문에 죽여도 악을 얻기가 힘들다.
악령이나 이물을 죽여서 얻는 악은 직접 손을 뻗어 돌멩이를 줍는 느낌이라면, 인간을 죽여서 얻는 악은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물을 퍼올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쌓이고 있는 악은 내 능력을 강화하거나 개방하는 일에 쓸 수 없다. 손에 잡히지 않는 물과 같아서 내 뜻대로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저 멋대로 영혼에 들어와 축적되는 악이 되고 있다. 문자 그대로 업보다.
「너를 덮칠 업보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것 같아.」
존재, 사물, 장소, 행동에도 악을 붙일 수 있는 세계.
사람을 죽였는데 악령이나 이물을 잡은 것처럼 내 영혼에 조금씩 악이 쌓이고 있다. 그건 지금도 무고하든 무고하지 않든, 아주 많은 사람들이 내가 선택한 수단에 의해 죽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흑사병은 아직 본격적으로 퍼지고 있는 단계조차 아니다.
‘나중에 이 업보를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은 하루에 성수 한 병으로 버틸 수 있지만….’
고뇌하던 중에 셰르카가 내게 물었다.
“세인트 왕국 앞에 있는 제국군. 그리고 수도에 있는 악령들이 문제다. 너는 어디부터 정리할 셈이냐?”
왕국 앞에서 발이 묶인 제국군은 70만 정도 남았으리라.
그리고 수도에 있는 통제불능의 악령들은 그보다 더 많으리라. 애당초 수도의 인구는 150만이었으니까, 그곳에서 황제가 아무리 저항한다고 한들 악령들의 숫자는 150만에 준할 것이다.
“150만 악령을 상대하는 것보단 흑사병에 당하고 있는 70만 제국군을 정리하는 게 맞아.”
그래야 왕국도 길이 열려서 제국으로 진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제국의 속국들을 독립시켜 황제의 피지배층 숫자를 낮출 수 있다.
“70만 제국군은 언제 공격하려고? 악귀 군단이 충분히 모였을 때? 아니면 제국군의 숫자가 지금보다 더 줄었을 때?”
둘 다 아니다.
나는 그들이 무언가 대담한 행동을 취했을 때, 그들이 최후의 결단을 내렸을 때 움직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걸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놈들이 궁지에 몰린 쥐새끼가 되었을 때.”
* * *
그렇게 전령대장과 열댓 명은 제국 진영의 최전방까지 왔다.
공성추, 공성탑이 하는 일 없이 방치되어 있고 병사들은 흑사병이 두려워 전방 경계를 소홀히 하고 있다.
“아주 대놓고 진을 쳐놨군. 판자로 가시 방벽까지 세우고.”
저 멀리 성벽 앞에 쭉 늘어선 왕국군들이 개미만 하게 보인다.
쿵…….
그때 땅이 울렸다.
쿵…. 쿵…. 쿵….
“뭔 소리야?”
“동쪽입니다!”
전령대장과 병사들은 일제히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양측 군대의 시체로 더럽혀진 낮은 언덕이 있었다.
쿵…! 쿵…! 쿵!
일정한 박자의 땅울림이다. 발바닥을 타고 희미하게 전해지는 울림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이윽고 그들은 목도했다.
- 그으으으으으……!!!
검은 연기가 낮은 언덕 위로 피어올랐다. 그리고 인간보다 두 배, 세 배는 덩치가 큰 존재들이 각자 두 자루의 장검을 들고 등장한 것이다.
처억!
그 커다란 존재들은 합이라도 짠 듯 똑같이 움직였다. 새까맣고 무거운 갑옷에서 철 소리가 났다.
그제야 전령대장은 상황을 이해하고 말았다.
“…기다리고 있었구나.”
“네?”
“놈들은 기다리고 있었어. 우리의 결단을….”
쿵쿵쿵쿵쿵!
100마리의 흑기사들이 달려오며 허공에 장검을 휘둘렀다.
쿠콰콰콰아아악!!!
지면을 가르는 검기가 살아있는 바람처럼 닥쳐왔다. 절대 피할 수 없는 규모로, 절대 피할 수 없는 속도로 닥쳐왔다.
어찌 반응할 틈도 없이 전령대장과 병사들의 숨통이 끊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검기는 갑옷과 살갗을 가르고 뒤에 있는 자를, 그 뒤에 있는 자를, 또 그 뒤에 있는 자들까지 가르며 나아갔다.
심지어 흑기사들의 출몰은 전조에 불과했다. 하늘에는 수백의 불나방들이 출몰하여 세상을 잿빛세계처럼 탁하게 물들였다. 뒤이어 왕국군이 대열 뒤에 숨기고 있던 병력을 진격시켰다.
그들은 모두 두꺼운 로브에 정화통이 하나인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불나방의 가루나 흑사병은 그들을 해치지 못했다.
고작 이틀이었다.
이틀 만에 65만 제국군이 전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