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몰락한 밤 (4)
타락한 승천자가 만들어낸 분지는 힘 있는 가문들에 의해 새로운 건물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징집되어 전장에 나갔거나, 전쟁에 필요한 생산직에 투입되었거나, 조용하고 불안한 일상을 보내는 중이다.
왕국의 거의 중심에 위치한 도심 한복판이라도 인파가 적은 거리는 쓸쓸했다.
이곳은 실재세계의 재건된 중앙교회.
대낮의 밝은 햇살이 꽃과 식물이 있는 정원을 비추고 있다. 성녀는 부상자를 치료하거나 사망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모두 전장에 나갔고 성기사들도 싸우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신관들은 매일 모여서 회담을 하느라 바쁘다.
지금 중앙교회 안에는 한 사람밖에 없다.
“네이트 님….”
찰랑이는 긴 금발, 녹안, 귀족적인 자태를 풍기는 외모에 일반적인 남성들과 비슷한 키.
자기 키보다 두 배 가까이 큰 은 십자가를 옆에 세우고 있는 아그니샤는 기도를 올리는 중이었다.
“인도하소서….”
아무리 기도하여도 아그니샤에게 축복과 권능을 내린 존재는 오늘도 묵묵부답이다.
“교단의 승천자는 타락하였고 왕국은 전쟁의 광기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왕국 내에서 악령 발생이 빈번해졌습니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아그니샤는 체념한 듯 일어섰다.
은 십자가를 한 손으로 들어서 등에 걸쳤다. 무기를 등에 메는 것처럼 어떤 장치가 있는 게 아니었다. 은 십자가를 그녀의 등에 고정하는 간단한 마법이 발동한 것이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네이트 님.”
커다란 은 십자가는 아그니샤의 등에 바짝 붙어서 허공에 고정된 채다.
그녀는 중앙교회 밖으로 나왔다.
이 신성하고 아름다운 정원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령술사 페인.”
“아그니샤.”
“당신이 어째서 이곳에 있습니까?”
“세인트 왕국의 백성이라면 누구든 중앙교회에 입장할 권리가 있지 않나?”
페인의 검붉은 로브에서 숨길 수 없는 피비린내가 풍겨왔다.
“제국군은 어떻게 하고요?”
“전멸했잖아. …아니지. 모두가 힘을 합쳐서 전멸시켰지.”
“투항하는 자는 없었습니까?”
“아주 많았어.”
“왜 그랬습니까?”
“그들은 역병에 감염되었을 위협이 있었고, 그 많은 포로들을 수용할 시설도 인력도 물자도 없고, 그들이 살아있으면 황제의 힘이 되거든.”
페인은 막힘없이 곧잘 대답했다. 그리고 반대로 물었다.
“다들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데, 현시점에 왕국에서 가장 강하다는 마법사가 중앙교회에 눌러앉아 매일 기도만 한다는 말을 들었어.”
“….”
“퇴마술사 페레스는 절벽길을 지키려다가 죽고 물의 마법사 파보크는 죽기 직전까지 갔고. 제국군이 성벽 앞까지 쳐들어왔을 때도 누구는 이곳에서 기도만 하고 있었다지.”
“하고 싶은 말이 뭐죠?”
“도대체 언제 나서려고?”
“네이트 님의 권능은 오로지 악한 존재에게만 쓸 수 있어요.”
페인은 아그니샤에게 위협적으로 다가들었다. 방독면의 뾰족한 끝이 그녀의 얼굴에 닿을 듯했다.
“나라를 빼앗고 백성들을 노예로 만드는 적들이 악하지 않다는 말이냐?”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들은 적군이기 이전에 사람이에요. 설령 그들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죄를 범해도 그들의 존재가 악하다고 여길 수는 없어요.”
“병신 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네.”
그녀는 신념을 모욕당해도 할 말을 했다.
“왕국군도 그들을 살인하고 학살했어요. 제가 악행을 기준으로 그 존재의 선악을 판단한다면, 저는 제국군뿐만 아니라 왕국군도 모조리 심판해야만 해요. 그러니까 이 권능은 행위가 아닌 존재 자체를 보고 판단…”
“그래서 씨발, 네가 진작 나섰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도 않았을 거라고.”
“그러는 당신은 왜 일이 이렇게 되어서야 왔죠? 너무 늦었잖아요.”
“나는 최선을 다했어. 머리가 깨지도록 계획해서 깔끔하게 끝내려 했다고. 그런데 황제가 나를 만나는 그 순간 하나를 위해 평생 능력을 숨겨왔을 줄 누가 알았겠어? 게다가 왕국의 군대는 제국 앞에서 내 예상보다 훨씬 약했던 걸 어떡해? 적어도 여기까지 밀리기 전에는 네가 나섰어야 했던 거 아니야?”
“아니요. 당신이 승천자를 죽이지 않았으면 우리는 전쟁을 겪을 일도 없었겠죠. 당신이 화염술사 카누스를 죽이지 않았다면 파보크 님이 다리를 잃지도 않았을 거고요. 페레스 님도 멀쩡하게 살아계시겠죠.”
“승천자든 카누스든 죽이지 않았으면 내가 죽었어!”
“그러는 편이 나았을 지도 몰라요.”
“뭐?”
두 사람 사이에 당장이라도 살인이 벌어질법한 기류가 흘렀다.
“저는 기다리고 있었어요. 타락한 승천자를 대체할 유력한 신관이 나오기를. 그리고 제가 왕국에 그의 악행을 폭로하고 그가 악령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날이 오기까지 기다리고 있었어요.”
페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 당신은 무지했죠. 통찰력이 부족했죠. 당신은 승천자가 죽고 그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승천자가 없게 된 왕국이, 이런 오늘날의 사태를 마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어요. 복수심에 눈이 멀어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방해하는 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무고한 자들까지 몰살해버렸죠.”
“알고 있었어…? 승천자의 정체를…?”
“네. 그의 역겨움은 참기 어려웠어요. 그래도 참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는 죄를 저지르는 ‘인간’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악령’이 되어버리고 말았죠. 그래서 조만간에 그를 심판하고 왕국에 진실을 알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제가 눈여겨보고 있던 늙은 신관이 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으리라 희망하면서 하루만 더, 하루만 더…. 그의 타락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면서 기다렸죠. 때가 되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폭로하려고요. 정말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됐어요.”
아그니샤는 페인에게 원망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런데 당신이 앞서가서 모든 걸 망쳤죠.”
페인이 그녀를 탓하는 것처럼 그녀도 페인을 탓하고 있었다.
“그때 당신에겐 내일이 없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왕국과 교단의 내일을 생각해야 했어요.”
“그럼 진작 나한테 와서…”
“잿빛세계를 오가면서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사람과 무슨 수로 접촉해요? 전부 당신이 멋대로 진행했잖아. 그리고 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고. 당신이 악령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인지, 사람인 척하는 악령인지도 몰랐다고.”
“이런 씨발….”
“당신 하나만 가만히 있었으면…. 지금처럼 수백만의 사상자가 생기진 않았을 거라는 말이에요.”
페인은 그녀에게 화가 났지만 어떻게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그의 갈 곳 잃은 시선은 아그니샤와 찬란한 중앙교회를 번갈아 보다가 허공에 버려졌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고 정원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멀쩡한 척하려고 했는데 더는 그럴 수가 없다. 속에서 곪은 것이 터지고 말았다.
“왜 내 인생에는 이런 좆같은 일만 생기는 거냐고…. 내가 어떻게 그런 것들을 다 알아…? 난 그렇게 대단한 놈이 아니야…. 성인군자가 아니라고…. 지금 하고 있는 것들도, 누구라도 나처럼 했을 거야…. 난 사람들 죽이는 거 좋아하는 놈이 아니라고….”
자신은 악령이 아니다. 자신의 안에 악령이 있다. 자신은 그런 악령을 통제할 수 있다. 눈이 붉은 것도 악령화의 증상이 맞긴 하지만 그렇다고 악령이 되어버리진 않을 거다. …라고 주장하면서 절규했던 페인이다.
아그니샤는 의자에 앉아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의 악행이라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 역시도 당신처럼 모든 걸 알지는 못했어요. 당신의 여동생에게 있었던 일은…. 저 역시도 알았다면 일이 그렇게 되기 전에 폭로를 실행했을 거예요.”
“화형, 화형식을…! 내 눈앞에서 보여줬다고!”
“해결사라면 아시잖아요. 세상에 인간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교활한 악령들이 얼마나 많은지.”
“난 전부 다 봤다고…. 그 아이의 발끝에서부터 올라가는 불길이 피부를 어떤 색깔로 태우는지, 그렇게 익어가는 사람에게서 어떤 목소리가 나오는지…. 승천자는, 타락했더라도 그 눈깔이라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었을 거야. 그런데 그 새끼가….”
“선을 넘었죠. 지금까지 악행을 저지르더라도 그 정도로 선을 넘은 적이 없었는데 결국 넘고 말았어요. 그걸 뒤늦게 알고 말았어요.”
아그니샤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평소처럼 차가운 눈으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지나간 이야기는 그만하죠.”
“….”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당신도 결국 거악에 당해서 길을 잃어버린 피해자일 뿐이니까요. 우리는 서로 엇갈린 거죠.”
그녀는 괴로워하고 있는 페인 앞에 섰다.
그러자 페인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그니샤. 나도 살려고 살다 보니까 이게….”
진심으로 구원이라도 바라는 목소리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업보에 짓눌리고 있는 듯하였다.
“나…. 너무 많이 죽이고 있어.”
“그래 보여요. 이대로면 언젠가 악에 잠식당하지 않을까 싶네요.”
“…지금은?”
“지금 당신의 모습은 아슬아슬하죠.”
아그니샤는 페인 옆에 앉았다. 그녀의 등에 있던 은 십자가가 팔걸이에 스스로 기댔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악연이자, 악순환이자, 악행이자, 악이 만연하는 오늘날의 결과를 가슴에 담아 조용히 녹였다.
아그니샤는 승천자에게 당한 피해자이자 페인을 추방한 가해자였고, 페인 또한 피해자이자 누군가들에겐 재해와도 같은 가해자였다.
그렇게 피가 흐르는 쳇바퀴처럼 돌고 돌아서 지금이다.
“사죄드릴게요. 당신을 추방한 건. …물론 당신이 진짜 악령이라고 생각하여 추방하긴 했지만요.”
“난 악에 물들고 싶지 않아. 그곳으로 끌려가기 싫다고.”
페인이 언급한 ‘그곳’이라는 개념을 아그니샤도 어렴풋이 이해하는 눈치였다.
“그게 싫으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포기하세요. 당신의 안에 있는 악령도 내치시고요.”
“그럴 수 없어.”
“그러면 어쩔 수 없죠. 당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운명, 운명…. 그래, 결론은 운명이지.”
“좆같죠.”
아그니샤는 하늘에 떠다니는 망연한 구름을 쳐다봤다.
“누군 힘을 휘둘러서 괴롭고. 누군 힘을 휘두르지 못해서 괴롭고.”
페인은 아그니샤의 옆얼굴을 보았다.
자신이 그녀에 대해 무언가 크게 착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참전하고 싶어요. 나라와 사람과 교단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적들을 상대하고 싶다고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는 권능이 발동하지 않는 걸 어쩌라는 말인지….”
“적군들을 학살하고 그러는 게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었어?”
그녀는 눈만 움직여서 페인과 시선을 접했다.
여전히 차가운 눈이다. 늘 그런 눈이다.
“살면서 그런 단 한 번도 개소리를 내뱉은 적은 없어요. 전쟁에 있어 살인은 불가피하다는 게 상식이잖아요.”
“그럼 왜 아까는…?”
“아까도 일관되게 주장했어요. 병사들이 저지르는 살인이라는 악행만으론 그 병사들이란 존재의 선악을 판단할 수 없다고. 제 권능은 존재 자체가 악할 경우에만 휘두를 수 있다고요.”
“아니, 아니, 제국군을 모조리 죽였냐고 따지듯이 물었잖아. 그중에 투항하는 자가 없었냐고도 물었고.”
“그들은 역병에 감염되었을 수 있고, 왕국은 그 많은 포로들을 수용할 수 없다고 하셨죠.”
“그래, 그거.”
“당신이 또 무언가에 눈이 멀어서 행동하는 건 아닌가 확인했을 뿐이에요. 그런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이유들을 곧잘 대답하셨으니까 다행이라 생각했어요.”
아그니샤가 참전하여 적들을 해치우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전쟁에서 자신이 권능을 휘두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페인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말을 꺼냈다.
“제국의 수도에 있는 인구가 전부 악령이 되었어. 황제 하나만 제외하고.”
“황제 개인의 힘이 강하다고 했죠.”
“상대가 악령이라면 그 권능을 써먹을 수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도와줘.”
“확답을 드릴 수는 없어요. 이대로 왕국군이 진격하면 왕국의 방비에 커다란 공백이 생길 테니까요. 승천자는 없고 파보크 님은 다리를 잃으셨고…. 다른 두 마법사도 없어서 저는 왕국을 수호하라는 명을 받았어요.”
“왜 남아? 어차피 제국군이 왕국을 기습해도 너는 그들과 싸울 수 없잖아.”
“네이트 님을 배신하면 싸울 수 있죠.”
그 대답 또한 페인에겐 충격이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해서라도 적들을 학살하겠다고 하면 할 수 있어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생에 한 번뿐이라면요.”
아그니샤는 그런 각오로 줄곧 왕국에 남아있던 것이다. 정말로 왕국이 벼랑 끝에 몰려서 최악의 상황까지 직면하게 된다면 그때는 자신의 모든 힘을 포기해서라도 나서겠다는 각오였다.
즉, 그녀는 왕국 최후의 보루였다. 왕국이 아그니샤에게 요구하는 역할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당신이 이겼으면 좋겠어요. 이겨야만 하죠.”
“나는 싸워서 이기는 방법밖에 모르는 놈이야.”
“그럼 당신을 위해서 기도할게요.”
“네이트라는 천사한테?”
“제게 다른 분은 없죠.”
아그니샤는 중앙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앙교회에서 무의미한 기도만 올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페인은 뭔가 다 토해내서 홀가분하고 담담한 기분이 되었다. 혼탁했던 시야가 한층 맑아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내 길로 가야겠지.’
그는 새로운 시각으로 그녀의 등을 잠시 지켜보다가, 다차원 능력을 발동하여 사라졌다.
* * *
아그니샤의 합류를 기대해선 안 됐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본다면 당연한 일이다. 내가 왕이라면 그녀를 절대 왕국에서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긴장된다.」
나는 한때 벤들렌타 변경백의 군대가 집결했던 언덕에 섰다.
이곳에서는 수도와 황궁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왕이면 왕국군과 함께 싸우는 게 안전할 텐데 아쉽네.」
‘왕국은 황제에게 충성하는 속국들을 처리할 거야.’
황제에게 충성하는 지도자는 죽이고 새로운 지도자를 앉혀 독립시킨다. 반대로 황제에게 충성하지 않는 지도자에겐 독립을 촉구한다. 그러면 황제 밑에 있는 피지배층의 숫자는 더욱 빠르게 줄어들 것이다.
모든 속국이 독립한 다음에 왕국군과 함께 수도를 공략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촉박하다.
황제는 언제든지 수도를 포기하고 아무 속국이나 찾아가 새로운 군대를 일으킬 수 있다.
지금 황제는 어떤 고집을 갖고 있거나, 정신적으로 악령화에 저항하고 있어 그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황제가 언제까지고 수도에 있어줄 거라는 보장이 없어.’
그리고 내게 너무 많은 악이 쌓이고 있다는 것도 시간이 촉박한 이유다.
「아이고, 이 비싼 주물을….」
나는 황금달에서 아직 판매되지 않은 마지막 위경 한 권을 불태웠다.
화르륵…!
불타는 위경은 영혼의 아우성을 내지르는 듯했다.
「4755에서 0이 되었어.」
「성수와 달리 아프진 않아서 좋네.」
영혼에 축적된 악이 3000을 넘어가면 악령화 증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셰르카를 통해 알아내기를, 악령화 증상이 생기고도 계속해서 악이 축적되면 지옥과 연결성이 걷잡을 수없이 짙어질 거라고 했다.
「지금도 너의 선택으로 인해 뿌려진 흑사병이 수많은 인간들을 죽이고 있어. 악은 금방 쌓일 거야.」
제국 전체에 흑사병이 퍼져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수록 영혼에 축적되는 악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이미 눈덩이를 굴린 상황이다. 이 눈덩이가 성수나 위경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지면 그때 나는 심연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되기 전에 이 전쟁을 끝내고 흑사병을 정리해야만 한다.
‘목줄 4계.’
그간 틈틈이 악을 쌓은 덕분에 목줄 능력을 4계까지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목줄 4계 강화를 조건으로 하는 새로운 능력이 개방되었다.
이건 나의 가시거리 안에 있는 장소에 ‘악귀 한 마리’를 소환하는 영력만으로 대량의 악귀 군단을 소환할 수 있는 고유 능력이다.
또한, 오로지 어두운 지역에서만 발동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해가 저문 밤이다.
‘이계(異界)의 망령들아.’
‘결박된 영혼이라도 차원을 건널 수 있게 해줄 테니, 다가올 강령술사의 명령에 대비하라.’
‘그리고 준비된 망령들부터 강림하라.’
나는 도끼에 영력을 주입하여 마법의 지팡이처럼 썼다. 지금부터 그려질 소환진이 내 시야 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크기 때문에, 이렇게 도끼를 이용하여 소환진이 전개될 위치를 조준해야만 한다.
이건 대규모 주술이다.
‘차원침공(次元侵攻).’
키이이이이이이잉……!
수도의 상공에 거대한 소환진이 핏물로 그려졌다. 타락한 승천자가 발키리의 낙뢰를 쏠 때 그려졌던 마법진보다 더 큰 소환진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쿠구궁……!
수도의 곳곳에 붉은 번개가 내리쳤다. 그리고 번개가 떨어진 곳마다 작은 소환진이 점멸하며 거미 악귀를 한 마리씩 출몰시켰다. 그렇게 소환한 거미 악귀의 숫자는 대략 6000마리.
녀석들은 수도에 있는 150만 악령들과 난전을 벌였다.
쿠구궁……!
이어서 200마리의 불나방들이 수도 위를 돌며 잿빛 가루를 뿌렸다.
쿠구구…
콰앙!!!
내 근처에도 붉은 번개가 연달아 떨어졌다.
“스으으…. 하아아아아….”
척! 척!
내 나름의 정예라면 정예들이다.
「흑기사 300마리. 도열했어」
「준비 끝났어.」
지금도 황제는 싸우고 있다. 황궁에서 그의 몸놀림이 만들어낸 거대한 폭발이 보인다. 또한 그의 황금 철퇴들이 하늘의 불나방들을 떨어뜨리고 있다.
직면하자. 포기하지 말고 무너지지 말고 직면하자. 이길 수 있는 상대를 두려워하지 말자.
‘잘 지켜봐. 아라나크.’
지금쯤 황제도 알 것이다.
이게 최후의 결전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