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몰락한 밤 (5)
어둡고도 깊은 밤이다.
한때 위상을 드높였던 제국의 수도는 타락한 악령들과 잿빛세계의 군단이 충돌하는 전쟁터가 되었다.
‘움직여라.’
150만 악령들을 상대하는 6000마리의 거미 악귀와 200마리의 불나방. 그리고 나와 함께 움직이는 300마리의 흑기사.
콰콰쾅!!!
흑기사들의 검기는 남쪽 관문을 파괴하였다.
“그기게그기기기그그기긱…!”
“키에에에엑!”
수도에서는 악령과 거미 악귀들의 싸움이 한창이다. 인간이었던 악령들은 인간처럼 팔다리를 가진 채 악령화의 특징을 보이고 있었다.
어떤 녀석은 이빨이 아주 길었고, 어떤 녀석은 팔다리가 아주 길었고, 어떤 녀석은 혀가 아주 길었고, 어떤 녀석은 머리 대신 큼지막한 눈알이 달려있기도 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다.
“이히히히히히히!!!”
손톱이 긴 악령들이 지붕에서 뛰어내려 흑기사들을 덮쳤다.
“스으으하아아아아…!”
흑기사들이 내뿜은 연기는 녀석들의 심장을 마비시켰다. 그리고 흑기사들의 검기는 어떤 악령이 길을 가로막더라도 일격에 파괴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나는 예전의 기억을 살려 황궁을 향했다. 모든 것이 미쳐버린 현장에서 흑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오르막길을 갔다.
싸움은 악귀들에게 맡긴 채 나의 영력은 최대한 아끼는 것이다.
「타락.」
「정말 어둡고 깊은 저주야. 이렇게나 악령들이 날뛰는 현장은 본 적도 없어.」
나는 악령들을 무시하다시피 뛰었다. 어떤 건물에서 파도 같은 머리칼이 휘날리고 있어도, 불길이 사람의 형상을 한 채 골목을 태우고 있어도, 여러 마리의 악령이 진흙처럼 뒤섞여서 벽에 붙어 있어도 뛰었다.
와중에도 황궁의 위쪽에서는 철퇴들이 움직이고 있다. 가루를 뿌리던 불나방들이 철퇴에 맞아 피의 소나기를 뿌렸다.
“쿠훼에엑…!”
오르막길을 따라 초록색 토사물이 흘러내려온다. 저 위에 뚱뚱한 악령이 게워내고 있는 것이다.
치지지직!
토사물은 나보다 앞에 있는 흑기사들의 발목을 적셨다. 그리고 풀처럼 엉겨 붙어서 사철로 된 갑옷을 부식시켰다.
「폭식하는 자.」
「550.」
‘무시한다.’
저런 것을 상대하려고 영력을 소모할 수는 없다. 나는 옆에 있는 길로 들어가서 도약했다.
타앗!
건물의 지붕에 오르자 하늘에서 눈이 아주 큰 박쥐같은 것이 내게 달려들었다.
「배신자.」
「676.」
이건 피할 수 없다.
‘잡아!’
콰콰콰앙!
길에 있던 흑기사들이 검기를 날렸다. 칠흑 같은 검기는 내가 밟고 있던 건물의 천장과 지붕까지 가르고 녀석에게 적중했다.
“그아아아악…!!!”
나는 무너지는 건물을 밟아 도약하여 다음 건물로 착지했다. 그리고 배신자라는 악령은 날개 한쪽을 잃어서 내 앞에 떨어졌다.
“정말 강하시군요…! 멋집니다…!”
녀석은 입가에서 피와 타액을 늘어뜨렸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에게 모든 걸 바치겠습니다!”
「속지 마.」
퍼억!
나는 도끼로 녀석의 머리를 깨부쉈다. 그리고 건물에서 뛰어내려 흑기사들 사이에 착지했다.
「축적된 악이 벌써 2900을 넘겼어.」
아까 위경을 불태워 0으로 만든 악이 벌써 2900을 넘겼다. 나의 악귀들이 악령들을 죽이고 있는 탓이다.
‘마법 저항이랑 저주 저항 강화해.’
나는 전에 파보크에게서 사죄의 의미로 받은 성수를 급히 꺼냈다.
「마법 저항 5계.」
「저주 저항은 4계까지 강화됐어.」
촤아아!
“으윽…!”
뚜껑을 열어서 머리 위에 뿌렸다. 마시는 게 더 효율적이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치지직!
내 몸에 닿은 성수는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219로 줄었, 줄었어…. 어휴, 씨발! 그러면 뭐해! 방금 또 700을 넘겼잖아!」
‘악령들을 죽이지 말고 가급적이면 제압하는 식으로 하라 했잖아. 왜 이렇게 빨리 쌓여?’
이렇게 될 걸 예상하지 못한 게 아니다. 예상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급박한 것이다.
「이 수도에 있는 악령들이 너무 공격적인 탓이야. 그리고 놈들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악을 가지고 있다고. 그런 것들이 백만 마리가 넘게 있잖아!」
「저주할 거면 좀 적당히 걸어주지! 전부 아라나크 때문이야!」
‘이만한 숫자에 이 정도로 강한 악령들이 아니었다면 황제의 발을 묶을 수 없었을지도 몰라.’
애당초 아라나크는 황제까지 악령으로 만들 심산으로 타락을 발동한 것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그걸 버티고 황궁에서 수많은 악귀들을 상대로 며칠 동안 싸울 수 있으리라고 누가 알았겠나.
‘그러니까 아라나크 탓하지 마.’
「아쉬워서 그렇지. 조금 더 괜찮은 방법이 있지는 않았을까 싶어서.」
잠시 목줄 능력으로 흑기사들의 존재를 세어보았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무려 210마리가 죽었다.
아무리 흑기사들이라도 상대는 아라나크의 타락으로 발생한 150만에 준하는 악령들이었다.
그래도 90마리면 황궁까진 충분히 도달할 수 있다. 내가 여기까지 상처 하나도 없이 도달한 게 오히려 다행이다. 영력을 크게 소모하지도 않았고.
「황궁에서 싸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이런 악령들 사이에서 살아남아 계속 싸우고 있는 황제가 얼마나 강한 건지 다시금 체감한다.
하지만 아무리 황제라도 지치긴 했을 것이다. 이 세상에 무한하게 싸울 수 있는 존재란 없다. 아무리 강한 존재라도 때로는 쉬어야 하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게다가 그의 피지배층은 백만 단위로 죽었으며, 지금도 흑사병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다.
「또 3000까지 쌓였어!」
나는 달리면서 성수를 몸에 뿌렸다.
방금 수도에 있는 내 악귀들이 어떤 악령을 해치웠거나, 제국의 어딘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흑사병에 죽었으리라.
내 영혼에 계속해서 악이 쌓인다. 악이 쌓일 때마다 짙은 악을 좋아하는 악령들이 내게 몰려들었다. 그럴 때마다 흑기사들이 나를 대신하여 싸웠다. 그러다 흑기사가 죽기도 하고 발이 묶이기도 했다. 그러다 흑기사가 악령을 죽이기도 했다. 그러면 또 악이 쌓였다.
악순환이다.
치지직!
다시 성수를 뿌린다. 오로지 황궁을 올려다보며 뛴다. 악령이 구울 무리처럼 떼 지어 달려들면 흑기사가 나서서 검기를 썼고 악이 쌓여서 성수를 뿌렸다. 그러기를 반복했다.
이제 황궁의 성벽이 보인다.
성벽이 부서져있다.
어딘가의 변경백은 저 성벽을 넘고자 긴 세월을 기다리고 수많은 병사들을 투입했는데.
…콰앙!!!
나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황금 철퇴를 피했다. 그러면서 불나방의 숫자를 세어봤는데,
「한 마리도 남지 않았어. 다들 철퇴에 맞아서 죽었다고.」
아라나크가 있었을 땐 이렇게 악귀들을 한 마리씩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역시 내가 혼자서 수천 단위의 악귀들을 하나씩 통제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적 활동 강화해.’
「지적 활동이 2계에서 4계까지 강화됐어.」
생각의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그 빈자리에 악귀들을 넣어보니 또 머릿속이 가득 찼다.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내가 지금까지 단기간 내에 이 정도로 빠르게 성장한 적이 있었는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이곳은 끔찍한 전쟁터가 아니라 최고 효율의 사냥터인 것이다.
물론 폭발적인 성장통이 뒤따른다.
치이익!
「꺄아아아악…!」
악령들이 무너진 성벽을 넘어 황궁으로도 몰려가고 있었다. 난 흑기사들을 앞세워 녀석들을 상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안뜰로 진입했다.
높은 계단에서 피가 폭포처럼 흐르고 있었다.
콰광! 쿠콰쾅!
저 위에서 황제가 싸우고 있다. 흙먼지와 강풍이 몰아치고 이따금씩 분쇄된 악령의 살점이 폭발에 떠밀려 나왔다.
처벅….
피가 흐르는 계단을 오른다.
처벅….
고개를 위로 든다.
처벅! 처벅! 처벅!
나는 계단 위로 뛰었다. 꼭대기에 도달했다. 황궁에 도달했다.
황궁이라는 커다란 건물은 폐허처럼 변한 채였다. 두꺼운 문, 화려한 창, 제국의 깃발, 튼튼한 기둥, 마법석으로 된 조명 따위는 전부 지나간 영광의 시대처럼 흐려져있다.
저곳에서 몇 번이나 주먹을 휘두른 걸까. 저 자리를 지키며 몇 번이나 철퇴를 휘두른 걸까.
「놈이다….」
심각한 지진이라도 발생한 것처럼 균열이 빼곡한 바닥, 부서진 제국의 문양 한가운데에 그가 서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눈을 마주치기 전부터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황제.”
“……강령술사.”
그의 배후에 떠있는 태양 같은 마법진은 수십 개의 황금 사슬을 꺼내놓고 있었다. 그 사슬의 끄트머리마다 달려있는 황금 철퇴가 공중으로 붕 떴다.
“죽고 싶어 찾아왔느냐?”
“죽이려고 찾아왔지.”
“흐.”
황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흐, 흐흐흐….”
그는 실성했다.
“으흐흐하하하하하하하!!!”
그리고 폭소했다.
폭소하면서, 공중에 올린 철퇴들을 내게 떨어뜨렸다.
카아앙!!!
그러나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
이젠 철퇴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 검기를 쏘아내 황금 사슬을 끊어낼 수 있으니.
전에는 절대 끊어지지 않던 사슬이었지만,
쿠쿠쿠쿠쿵!
사슬이 끊어진 철퇴들이 내 주변에 떨어졌다.
“당신 많이 약해졌네. 아니면 지친 건가?”
“얼마나 죽였느냐.”
“뭘 죽여?”
황제는 얼굴에서 손을 치우고 날 쏘아봤다.
그의 눈에는 이제껏 내가 느껴본 적 없는 지독한 살의가 있었다. 그것은 살인에 미친 악령의 기운보다 더 지독한 살의였다.
“나의 백성들을 얼마나 죽였느냐 물었다.”
“꼴에 네 사람들을 아끼긴 하나 봐?”
“백만 대군은? 나의 충성스러운…”
“다 죽였어.”
“수도에 있는 내 백성들은?”
“전부 악령으로 만들었지.”
황제는 고개를 저으며 목소리를 떨었다.
“…아니. 그보다 더…. 더 죽었을 것이다. 내 힘은 그 정도로….”
“맞아. 제국 전체에 역병이 퍼져서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있어.”
“…악마 같은 새끼.”
“너나 나나 악마 같은 새끼인 건 매한가지야. 우리는 처음부터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었잖아.”
“아아아아아아아아!!”
황제가 발사되듯 돌진해왔다. 철퇴를 잃고 가벼워진 황금 사슬들이 채찍처럼 휘몰아치며 날 노렸다.
그때 내 뒤로 합류한 소수의 흑기사들이 검기를 날렸다. 황금 사슬들이 더 짧게 끊어졌고 곳곳에서 불꽃이 튀었다.
“감히 내가 이룩한 나라를 더럽히다니!”
황제의 속도는 전에 보았던 것보다 확실히 느려졌다. 그래서 그의 주먹에 맞추어 도끼를 휘두를 수 있었다. 이대로 그의 오른쪽 어깨를 부숴버릴 것이다.
콰악!
황제는 주먹을 펴서 한 손으로 도끼를 붙잡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을 칼날처럼 펴서 도끼를 내리쳤다.
카앙……!
도끼가 반으로 부러졌다. 난 도끼를 놓아버리고 왼쪽 손목에 달린 쇠뇌로 은화살을 발사했다. 그러자 황제는 이번에도 은화살을 낚아채버렸다. 그는 몸을 회전하며 은화살을 역수로 들고 내 관자놀이를 찌르려고 했다.
쿠웅!
그러나 흑기사들이 달려들어 나를 뒤로 빼냈다. 일부 흑기사들은 황제의 측면으로 접근하고 또 일부는 내 머리 위에서 장검을 휘둘렀다.
촤악…!
황제는 전신에 칼을 맞았다. 그의 어깨, 이마, 허벅지, 종아리, 허리 따위에 칼자국이 났다. 하지만 장검은 깊게 파고들지 못했다.
“버러지 같은 놈들!!!”
황제는 그 자리에서 바닥을 주먹으로 찍었다. 나는 재빨리 뒤로 도약했다. 그를 중심으로 바닥이 뒤집히며 충격파가 퍼졌다.
부웅!
그는 제자리에서 칼날이 달린 팽이처럼 몸을 회전하였다. 그의 배후에 있는 마법진도 그를 따라 회전하며 황금 사슬을 휘둘렀다.
흑기사들이 조각나서 모조리 쓰러졌다.
“그 괴물 년이 네놈의 복수심을 부추겼나?”
“당신은 성녀들을 불태워 죽였고 주변국을 끊임없이 집어삼켰어! 게다가 당신은 내 나라를 침공했다고!”
“나는 위대한 비첸크로이 제국의 지도자다! 세상에 나만큼이나 훌륭한 지도자가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거라! 천년, 만년 뒤의 후손들은 드넓은 영토에 살아가며 나를 칭송할 것이다!”
“그건 먼 미래의 후손들의 입장이잖아. 그리고 씨발놈아, 네가 나였으면 가만히 손 놓고 당했을 거냐?”
“당하지 않겠지! 하지만 애국심과 복수심 따위로는 추악한 학살극을 포장할 수 없다! 나도 많이 죽이긴 했지만 이제는 나보다 네놈이 더 악마 같은 놈이란 말이지!”
콰직!
황제는 흑기사의 시신을 밟아버렸다. 단단한 사철 갑옷이 고철처럼 찌그러지며 혈액을 분출했다.
“보아하니 네놈은…. 네놈이 저지른 일에 대해 명분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로 잠식당하여 악마가 될 것 같으니까. 내 말이 틀렸나?”
“틀리지 않았지. 그래서 직면하기로 했어. 당신의 혀가 어떻게 춤을 추든 난 흔들리지 않아.”
“다 떠나서 그건 아는가? 강령술사.”
황제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했다.
“네놈이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언젠가는 널 죽이려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이미 너 역시 누군가들의 복수의 대상이지.”
“…그래?”
“나보다 네놈이 더 많이 죽였기 때문이다. 무고한 자들을.”
그의 손가락이 날 고발하는 듯했다.
“즉, 네놈은 천하의 쓰레기 새끼다.”
나를 가리킨 그의 손가락이 까맣게 변했다.
아까 은화살에 흑사병을 묻혀두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