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71화 (71/181)

14. 업보 그리고 위선자 (1)

황제의 손가락이 까맣게 변했다. 좀 전에 황제가 낚아챈 은화살은 셰르카의 흑마법으로 더 강화된 흑사병이 극한까지 농축된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철인 7계다. 흑사병에 걸린 일반인처럼 픽 쓰러지진 않을 것이다.

“역병이로군….”

‘제물방류.’

페인은 흑기사들의 사체로부터 붉은 물결을 여러 가닥 뽑아내 그에게 발사하듯 날렸다.

타앗!

황제는 황궁을 둥글게 돌았다. 페인이 날린 붉은 것은 황제를 따라 황궁 벽을 세로로, 대각선으로 갈랐다. 그러면서 페인은 황제가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없는 주술인 방혈까지 연달아 걸었다.

“쿨럭…!”

황제가 멈춰서 피를 뱉어냈다. 거친 호흡을 몰아쉬고 있다.

「지친 것 같아!」

촤아악!

페인은 흑기사들의 내장을 뽑아내 녀석들의 장검 수십 자루를 공중에 들어올렸다.

콰아아!!!

제물방류로 장검 수십 자루를 휘둘렀다. 곧이어 수십 개의 검기가 황제를 폭격하다시피 쇄도했다.

철그렁…!

흙먼지 섞인 강풍이 몰아쳤다. 동시에 황금 사슬들이 공중에 있는 장검들을 때려 부쉈다. 하지만 검기는 이미 황제를 수십 번이고 관통했다.

“끄으아아아아아…!!”

흙먼지가 걷히고 모습을 드러낸 황제.

그는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피를 흘리고 있다.

또한 그의 오른쪽 손 전체가 까맣게 변한 채다.

“강령술사아아아!!!”

촤아…!

그는 손날로 자기 오른팔을 절단해버렸다. 그리고 어지러운 듯 휘청거렸다.

그 순간에 페인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감각을 맛보았다.

「거의 끝이야!」

페인은 그를 향해 일직선으로 뛰었다. 주먹을 휘두른다면 온몸이 터져도 맞아줄 것이다. 사슬을 휘두른다면 머리가 떨어지고 팔다리가 잘려도 맞아줄 것이다. 강풍이 불어닥쳐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끝장낼 수 있어!’

페인은 뛰는 도중에 흑기사의 내장을 움직여 바닥에 있던 도끼를 주웠다. 손잡이가 반으로 잘린 도끼지만 다른 반쪽을 찾아내 재결합으로 붙였다.

“나는 엑수스의 화신이다!!!”

몸을 가누기 어려워진 황제는 임기응변으로 황금 사슬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건 페인의 예상 범위 안이었다.

카가각!

황금 사슬들이 바닥을 긁으며 마찰의 불꽃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순간에 이미 페인은 두 다리와 두 팔을 사슬에 맞아 잃어버린 상태였다.

도끼를 쥔 채 허공에 떠버린 두 팔. 그리고 페인 뒤에 쓰러진 두 다리.

페인은 포효했다.

“으아아아아아아!!!”

두 팔과 두 다리의 절단면에서 혈액과 혈관과 살점이 뒤엉켜 붉은 실을 뽑아냈다. 그것이 거미줄처럼 튀어나와 페인의 몸에 붙어버렸다. 잘렸던 사지가 붙어버린 것이다. 또한 한차례 휘몰아친 황금 사슬들은 벌써 제각기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그전에 페인의 도끼가 황제의 목에 도달했다.

……퍼억!

그래도 황제의 목은 떨어지지 않았다.

“끄으으…!”

“제발 좀 죽어! 제발!”

황제는 어깨를 틀어서 쇄골로 도끼를 막은 것이다. 도끼가 황제의 쇄골에 있는 살갗을 가르고 뼈를 깎아내듯 파고들었다.

그리고 도끼에도 강화된 흑사병이 묻어있어 황제의 윗가슴을 따라 피부가 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너만 죽으면 돼…! 너만…!”

“그럴 수 없지! 제국에는 내가 필요하다!”

“너 이미 흑사병에 걸렸다고!”

“나는 잔병에 죽지 않는다!”

황제는 페인의 도끼날을 맨손으로 쥐었다.

끼기기긱!

순수한 악력으로 도끼날을 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도끼날 바로 아래를 쥐어 손잡이까지 부러뜨렸다.

터엉!

도끼날이 발치에 떨어졌다.

“그렇지, 네놈…!”

촤라라락!

그때 황금 사슬들이 페인의 온몸을 휘감았다. 거대한 뱀이 먹잇감을 으스러뜨리려는 것처럼 살인적으로 옥죄였다. 사슬 사이에 살이 끼어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각 관절이 부러질 것 같다. 부러져서 뜯겨나갈 것 같다.

페인의 목을 옥죄던 황금 사슬 하나가 나무를 타는 구렁이처럼 올라와서 그의 방독면까지 휘감았다.

“내게 얼굴을 보여라!”

드득!

사슬이 방독면의 부리 부분을 조였다.

드드득!

부리가 일그러졌다.

“계속 궁금했다! 네놈이 사람인지 아닌지!”

투드드득!!!

사슬이 페인의 방독면을 힘으로 뜯어냈다. 페인의 머리칼과 두 귀가 방독면의 질긴 끈을 따라서 함께 뜯겨졌다. 격렬한 통증이 페인을 덮쳤다.

“끄아아아악!”

“이거, 이거, 이 녀석 봐라?!”

황제는 가학적으로 변했다.

“사람이 아니라 악령이었구나!!!”

페인은 그 단어만큼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난 악령이 아니야……!”

“전부터 거슬렸다! 네놈이 나를 대하는 태도를 고쳐주마!”

황제는 페인의 입에 손을 집어넣었다. 네 손가락으로 아래쪽 잇몸을 쥐고 엄지 하나로 아래턱을 꾹 눌렀다.

“따라 해보거라! ‘폐하’!”

그의 요구와 달리 이번에도 페인의 대답은 같았다.

“……좆까!”

“이젠 좀 폐하라고 부르란 말이다! 이 천한 쓰레기 자식이!”

뚜드득!

페인의 아래턱이 빠졌다.

“그우우우…!!!”

퍼걱!

페인의 아래턱이 부러졌다.

“우우우우욱!!!!!!”

촤아아…!

페인의 아래턱이 뜯겨나갔다.

“그어어어어어아아아아!!!!!”

이제 그의 아래턱은 황제의 손에 들려있다.

두 사람의 발치에 있는 일그러진 방독면과 도끼날 위로 검붉은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쿨럭! 이런, 제기랄….”

황제는 또다시 피를 뱉어내곤 휘청거렸다.

황제 또한 한계였던 것이다. 밤낮없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며칠을 강력한 악령들과 싸웠다. 권력의 근원이라는 능력은 페인의 학살로 인해 약해졌다. 그리고 또 격렬한 싸움을 했다. 스스로 손을 잘라내 피를 쏟아냈고 가슴 주변에는 흑사병이 퍼지고 있다.

그때 페인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냈다.

콰아악!

“…!”

황제의 발치에서 흙과 돌로 빚어진 가시들이 튀어나온 것이다.

타닷!

황제는 뒤로 넘어지듯 재빠르게 굴러서 가시를 피했다. 그러는 순간에 페인을 옥죄던 황금 사슬의 힘이 약해졌다.

“이 자식…!”

페인은 구속으로부터 탈출했다.

그리고 등을 보이며 달아나고 있는 것이다.

“감히 내 앞에서 등을…. 우욱…!”

황제는 그 자리에서 피를 토했다. 두 손을 바닥에 대고 더 토해냈다.

“허억…. 흐으…. 후우….”

그런 상태여도 눈빛은 살아있었다. 그의 맹렬한 눈이 오로지 페인의 등에 고정되었다.

이제 황제는 자신에게 상처 입힌 먹잇감을 사냥하는, 피보다 분노에 굶주린 포식자처럼 변했다.

“흐으…! 흐으으!!!”

황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뛰었다. 뛰면서 황금 사슬의 길이를 늘려 페인의 등을 노렸다.

쩌엉!

이미 부서진 바닥이 사슬에 맞아 더 부서졌다.

쩌엉!

“도망쳐도 소용없다!”

이미 깨진 유리창이 강풍에 맞아 더 깨졌다.

쩌엉! 쩌엉!

바닥에는 그을린 불꽃과 함께 깊은 균열이 잇달아 새겨졌다.

“죽을 때까지 따라가서 죽여주겠다!”

페인은 황궁에서 나가버렸다. 뒤이어 황제도 황궁을 나왔다.

“강령술사!”

페인은 피로 물든 기나긴 계단의 중간쯤에 쓰러져있었다. 계단을 구른 것이다.

황제는 계단을 하나씩 내려갔다.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면서 수도의 광경을 눈에 담았다.

타오르고 있는 건물들. 메아리치는 괴성, 굉음, 비명. 갈라진 도로. 더럽혀진 거리. 형체를 이해할 수 없는 괴물들.

무너진 관문. 무너진 장벽. 무너진 성벽. 무너진 황궁. 끝도 없이 멀리도 쌓여있는 병사들의 시신. 피로 물든 차디찬 밤공기.

그야말로 몰락한 밤이다.

“네놈의 인생은 끝이다. 되살아나도 몇 번이고 죽여주겠다.”

쓰러진 페인의 붉은 눈에는 힘이 없었다. 가늘게 호흡하고 있는 것 같다.

황제는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네놈은…. 제국의 원수다.”

쿠저저저적!

황금 사슬이 페인의 이마를 수직으로 꿰뚫어 계단까지 파고들었다.

아래턱이 없고 이마가 뚫린 페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쓰러진 채 몸을 몇 번 떨더니 잠잠해졌다.

그렇게 페인은 또 죽은 것이다.

* * *

…털썩!

황제는 계단에 앉았다.

죽은 페인의 시신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사아아…

시신은 재가 되어 부서졌다.

‘……놈은 되살아났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여전히 괴물들이 싸우는 소리가 메아리치는 수도. 황제는 자신의 몰락한 수도를 잠시 지켜보다가 일어섰다.

‘……대군과 수도를 잃었어도, 역병이 퍼지고 있어도, 제국은 제국이다. 내가 살아있는 한.’

절대 황궁에서 벗어나지 않던 황제.

그는 스스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정말로 백만 대군이 전멸했다면, 왕국은 약화된 소국들을 노리기 위해 군대를 보냈음이 타당하다. 왕국의 성향은 합병이 아닌 독립이니까. 소국 놈들이 하나둘씩 독립하면 내 능력은 몇 배로 약해질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다. 이 정도론 지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보이는 수도의 광경처럼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내 개인의 힘을 보여버리고 말았으니 더는 숨길 필요가 없고. 그렇다면 왕국이 보냈을 군대부터 내가 앞장서 파괴해버리고 소국들로부터 군사를 모은다. 그러면 이 전쟁의 판도를 다시 뒤집을 수 있다.’

그리고 되뇐다.

‘내가 있는 곳이 제국이다….’

“황제.”

계단을 거의 다 내려왔을 즈음, 황제의 뒤에서 변조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등만 보인 채로 싸울 거냐?”

어쩔 수 없이 몸을 틀었다.

자연스레 황제가 페인을 올려다보는 구도가 되었다.

“이렇게 네놈을 보고 있으면 많은 생각이 드는구나.”

계단 위에 있는 페인은 멀쩡한 로브, 멀쩡한 도끼, 멀쩡한 방독면, 멀쩡한 사지에 멀쩡한 영력으로 서있는 것이다.

“이건 왕국의 백성으로서 주적을 향한 반격이야.”

“….”

“또한 아라나크를 잃은 나의 복수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론 지치지 않을 것이다.

수도처럼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억울하게 죽은 성녀로부터 시작된 일이지.”

“그뿐인가?”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진 안 했을 것 같아. 결국 당신도 나도 대가를 치르겠지. 그걸 말하고 싶었어.”

“이제야 바른 소리를 하는구나.”

황제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여전히 페인과 싸울 힘이 남아있는 것이다. 간단하게 꺾일 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에겐 다음이 문제였다.

“아까 당신이 힘이 빠진 척을 했던 건지, 정말로 힘이 빠졌던 건지 나로선 알 수 없어. …그래서 준비한 게 하나 더 있어.”

그때 황제는 보았다.

별들이 꺼져서 완전한 암흑이 되는 밤하늘을.

수도에서 메아리치던 소리가 사라지는 침묵을.

페인의 배후에 떠오른 거대한 태아의 형상을.

그리고 자신의 배꼽과 연결된 탯줄을.

“방사.”

그리고 황제는 타오르고 있는 자신의 몸을 보았다. 그래도 페인에게 달려들면서 황금 철퇴를 움직이려고 했다.

“방혈.”

황제는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으로부터 울컥울컥 피를 흘렸다. 앞이 보이지 않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마른 익사.”

황제는 호흡할 수 없게 되었다. 몸속에 피가 차올라서 숨 쉬는 통로를 막힌 것 같다. 날숨은 나오지 않고 들숨은 괴롭다.

“자살 충동.”

그리고 포기하지 않으려던, 지치지 않으려던, 뒤에 있는 수도처럼 무너지지 않으려던 황제는 무너지고 싶어졌다.

“교수척장분지형.”

그리고 황제는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간 사지를 보았다.

“…광란의 집단부화.”

그리고 황제는 자신의 사지를 파먹는 수많은 새끼 거미들을 보았다.

그리고 황제는 자신의 발밑에 달빛으로 그려진 ‘흑마법’의 마법진을 보았다.

그리고 황제는 밤하늘의 달조차 꺼지는 세상을 보았다.

그리고 집정관, 법무관, 호민관, 친위대장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백성들의 환호성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소국을 합병했던 기억을 잃었다.

흑마법사 우토를 포섭했던 기억을 잃었다.

혁명에 성공하여 황제가 되었던 기억을 잃었다.

처음으로 황궁에 발을 들였던 기억을,

전장에서 적장의 목을 베었던 기억을,

대련에서 목검으로 상대를 기절시켰던 기억을,

형제들과의 놀이를,

아버지의 듬직한 어깨를,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삶이란 기억에서, 빛나는 부분들이 꺼졌다. 별들이 사라진 저 밤하늘처럼.

돌아보니 망각이었다.

칠흑보다 어두운 삶이었다.

그건 살아있어도 죽은 삶이었다.

* * *

셰르카가 내 곁에 나타났다.

“다행이구나. 이거 한방에 영력을 다 썼으니 말이지.”

황제는 계단 아래에 쓰러져서 뜬 눈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초점을 잃은 채다.

“이왕이면 너와 함께 싸우고 싶었는데 그건 아쉽게 되었구나.”

“너는 혹시라도 죽으면 끝이니까.”

“앞으로 몇 번이나 부활할 수 있느냐?”

셰르카의 이런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겐 내 목숨이 얼마나 남았는지 대답해선 안 될 것 같다.

“대답하기 싫은가, 아무튼…. 이렇게 되었구나. 여기까지 그를 몰아붙이느라 고생이 많았다.”

나는 황제의 목에 도끼를 겨누었다.

그러자 황제는 초점 없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내게 후회는 없다….”

“하지만 네놈은 어떻지……?”

그 순간에 황제의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어서, 곧장 도끼를 내려쳐 그의 숨통을 끊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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