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72화 (72/181)

14. 업보 그리고 위선자 (2)

핏물 위에 미동도 없는 그의 몸이 비현실적이다.

내가 황제를 죽였다.

“안도하며 감상에 젖기엔 이르다. 저 악령들을 보아라.”

나는 무너진 성벽과 그 너머의 도심을 눈에 담았다.

“이곳의 악령들은 강해도 너무 강했다. 그리고 지나치게 많지. 네가 처음에 몰고 온 악귀 군단은 벌써 궤멸을 앞두고 있다.”

잿빛세계의 이물과 비슷할 정도로 강한 악령들이 아직도 백만 마리는 넘게 있었다.

흑기사들도 없는 상태에서 저것들을 돌파하여 수도를 탈출하기란 무리다.

‘돌파하는 건….’

“페인. 너는 차원을 건너면 그만이지만 나는 흑마법을 써서 전이(轉移)해야 한다.”

“전이에 쓸 영력은 남았어?”

“황제의 강인한 정신력을 태우기 위해 영력을 다 써버렸다. 나뿐만 아니라 이리 또한 지쳤으니 세 시간만 이곳에서 쉬어야겠구나.”

- 히이이이이이이이!

악령들의 존재가 느껴진다. 수백 마리가 내가 지나온 길을 따라서 여기까지 쫓아오고 있다. 그리고 그런 수백 마리의 움직임에 동조하여 수천 마리의 악령들이 황궁을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다.

셰르카도 악령들의 기세를 감지해냈다.

“쉬려고 했더니…. 미안하지만 세 시간을 혼자 방어할 수 있겠느냐?”

“안 그래도 돼. 이럴 줄 알고 불나방 한 마리를 잿빛세계에 남겨놨어.”

“나를 탈출시키기 위해서?”

“나는 잿빛세계로, 너는 하늘로 빠져나가면 돼. 남쪽 관문 앞에서 합류하자고.”

“착하구나.”

나는 차원 너머의 악귀에게 의식을 집중했다. 혹시라도 셰르카가 수도에서 탈출할 수단이 없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잿빛세계의 오두막에 불나방 한 마리를 남겨둔 것이다.

녀석은 오두막의 마당에 내려앉아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키이잉!

지면에서 핏물이 고여 복잡한 선을 이루었다. 목줄 능력으로 불나방을 소환하기 위한 소환진이다.

“무엇하고 있느냐?”

“….”

이상하다.

소환이 안 됐다.

잿빛세계에 있는 불나방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잿빛세계라는 차원 자체가 느껴지질 않는다. 갑자기.

“뭐지…?”

“차원의 벽에 막혔느냐?”

“벽에 막혔다는 느낌이라고 하기엔….”

나의 인지력이 실재세계라는 벽을 넘긴 넘었다. 그런데 왠지 멀고 깊었다. 잿빛세계와 그곳의 오두막에 있는 불나방 한 마리를 지나쳐서 더 깊은 어딘가로 방향을 잘못 잡은 느낌이다.

그때 내 안의 악령이 외쳤다.

「페인! 너 여기에 있는 거 맞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했다.

방금, 녀석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왜 이래? 무슨 일이야?’

「모, 모르겠어! 나는 분명 여기에 있는데…!」

내 머릿속에서 울려야 할 목소리가 어딘가 먼 곳에서 퍼져온다. 손을 뻗으면 닿지 않을 거리에 있는 것처럼 멀어진 것 같다.

손이 떨린다.

숨을 쉬기 힘들다.

「진정해……!」

미칠 듯이 불안하다. 무섭다. 화가 난다.

“날 두고 사라지지 마!!!”

“갑자기 왜 그러느냐?”

「나는 여전히 네 안에 있어……! 그런데 네 영혼에 있는 능력이나 축적된 악 같은 게 보이질 않아서 그래………! 뭔가 잘못됐다고………」

그 순간, 내가 보고 있는 시야의 귀퉁이에 무언가 있었다.

그래서 그쪽으로 눈을 돌렸는데 사라졌다.

방금 본 게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색깔이었는지조차 모르겠다. 그냥 시야의 귀퉁이에 무언가 걸쳐있었다.

“아, 아아…!”

“페인?”

방금 또 보였다. 시야의 귀퉁이에 뭔가 있었다. 지나갔다. 사라졌다.

“이상한 게 보였어!”

“…특수한 악령인가.”

셰르카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도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안 보인다.

“페인. 이 세상에 어느 악령이 감히 널 해칠 수 있겠느냐? 진정하거라.”

“악령이 아니야. 악령이 아닐 수도 있어, 악령이 아닐 수도 있다고….”

또 보였다.

“나와! 이 개새끼야!!!”

콰콰쾅!!

나는 검기를 날렸다.

아무것도 없는 성벽만 부쉈다.

“뭔가 보인다는 걸 알겠다. 그러니 설명부터 해보거라. 무엇을 보았느냐?”

“검은색이었어…!”

“형태는?”

“팔다리가 있었어! 키는 나보다 세 배는 커 보였고…!”

“거리는?”

“몰라….”

“얼굴은 어떻게 생겼지? 인간이냐? 동공의 색은?”

“몰라, 몰라, 몰라. 그런 건 전혀…. 그런 것까지 자세하게 볼 틈이…”

보인다.

내 시선은 지금 셰르카의 얼굴에 두고 있다.

내 시야의 귀퉁이에 ‘그것’이 또 나타났다.

“허억, 허억, 허억….”

‘그것’에게 조금도 시선을 옮기지 않고 나는 셰르카의 얼굴만 병적으로 쳐다봤다.

“여러 가지 위협이 떠오르는구나. 우선은 너의 안에 있는 악령한테 묻거라. 지금 네 영혼에 얼마나 많은 악이 축적되었는지.”

셰르카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지금 내 시야의 귀퉁이에 있는 ‘그것’은 그림자처럼 까맣고 연기처럼 흔들거린다. 두 다리, 두 팔, 머리 하나.

너무 긴 팔다리.

그리고 그보다 더더욱 긴 머리통.

“머리가 세로로 존나 길어……!”

“내 말 못 들었느냐? 당장 네 안에 얼마나 많은 악이 축적되었는가 확인해보라는 말이다.”

‘그것’이 내게 걸어오고 있다.

시야의 귀퉁이에서 다가오고 있다.

이 와중에 내 안의 악령은 아무 말이 없다.

그렇다. 생각났다. 생각이 났다.

- 지옥과 연결성이 짙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데?

- 끌려간다.

저게 날 잡으러 온 것이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을 것 같다.

당장 저지해야 한다.

저것은 내 시선을 받으면 사라진다. 그러니 이렇게 시야를 그녀에게 고정한 채로 검기를 휘두를 것이다.

“가까이 오지 마!!!”

퍼억!

순간, 가슴에 묵직한 통증이 퍼졌다.

“성수를 꺼내라.”

셰르카가 날 때린 것이다. 아니 그보다,

“지금 나한테 걸어오고 있다니까!!”

“닥치고 성수부터 꺼내라 하였다! 페인!”

그녀의 호통을 듣고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성수가 담긴 병을 꺼내기까지, 짧지만 긴 순간이었다.

예상보다 많은 악을 가진 악령들. 예상보다 머릿수가 많은 악령들. 예상보다 큰 성수 소모량.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없는 격렬한 전투.

그래서 방금 그 짧은 순간에 내게 남은 성수가 있었나 확신이 들지 않아서, 극도의 공포를 맛보았던 것 같다.

다행히도 마지막 한 병이 남아있었다.

“빨리! 이 녀석아!”

셰르카는 소리치면서 내 방독면을 거칠게 벗겨냈다. 나는 그녀가 방독면을 풀어주는 사이에 병을 열어서 목구멍에 성수를 들이부었다.

다가오는 ‘그것’에 대한 공포 때문에 성수를 마시는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말해라! 아직도 그 이상한 것이 보이느냐?!”

「페인! 방금 뭐였어?!」

이제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 내 안의 악령도 제대로 머릿속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해, 해결된 것 같아…. 잠깐, 나 지금 얼마나 악이 쌓인 거야?”

“그걸 내가 어찌 아느냐?”

「아까 7천을 넘겼었어. 지금은 600까지 줄었고.」

“셰르카! 나 방금 성수 마시기 전에 얼굴에 이상한 부분은 없었어?”

“없었다. 그런데 7천이라니? 너도 악령도 그 지경이 되도록 몰랐단 말이냐?”

영혼에 쌓인 악이 7천을 넘겼는데 악령화 증상이 없었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증상이 없어서 그만큼 쌓였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나도 네 몸에 바뀐 부분이 느껴지지 않아서 곧바로 알아차리질 못했어.」

“…육체까지 악에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내 몸이?”

“결코 희소식은 아니다. 몸이 썩어나고 있음에도 정말 아픈 부위까지 썩기 전엔 무증상이라는 뜻이니깐.”

그 사이에 그만한 악이 축적될 정도였으니, 지금 제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역병에 당하고 있는지 상상도 안 된다. 나는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학살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나한테 다가온 ‘그것’의 정체가 뭐야? 악마야? 날 잡으러 온 거야?”

“악마인지 악령인진 몰라도 지금껏 네가 상대했던 사악한 존재들보단 배로 위험한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쌓이는 악을 경계하거라. 지옥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

「미안해. 내가 항상 확인하고 있을게.」

이제 다 알았으니 불나방을 소환하여 셰르카를 보내줄 차례다.

그런데 잿빛세계에 남겨둔 그 불나방 한 마리가 없어졌다. 존재 자체가 지워졌거나 목줄이 끊긴 것 같다.

“어쩔 수 없겠어….”

“음?”

“여기서 세 시간을 버티자. 불나방이 없어졌어.”

“아무 악귀나 한 마리 소환해서 불나방으로 바꿀 순 없는 것이냐?”

“내가 남겨둔 악귀는 불나방 한 마리였어. 나머지는 전부 황제와의 싸움에 써버렸다고.”

“낙원 사람들을 지키는 악귀는 있을 것 아니냐?”

“낙원은 안전해. 그 사람들은 이제 악귀와 싸울 수 있게 되었거든. 그리고 배척자도 있어서.”

“이런…. 정말 황제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었구나.”

악령들의 소리가 가까워졌다. 무너진 성벽 사이로 수백 마리가 다가오고 있다.

「조심해. 한 마리 한 마리의 강함이 잿빛세계의 이물과 맞먹어.」

잠깐.

그럼 내가 저것들을 해치우면 또 악이 쌓인다는 소리가 아닌가. 안 그래도 시시각각 미친 듯이 쌓이고 있는데 말이다.

성수는 방금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 써버렸다.

「이거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 아니야?」

“왜 그러느냐?”

“남은 성수가 없어.”

셰르카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지, 지금이라도 잿빛세계로 도망쳐야 해!」

영력을 다 써버린 셰르카를 혼자 두고 갈 수 없다. 그녀가 온 사방에서 몰려드는 악령들로부터 무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 악령들은 너무 많고 까다로울 정도로 강하다.

「뾰족한 수가 없잖아!」

“나는 괜찮으니 다녀오거라.”

쩌어!

그녀는 비장하게 이리를 펼쳤다.

“네가 성수를 구해서 돌아올 때까지 버티고 있으마.”

- 끼이이이이이!!!

발 빠르고 왜소한 악령들이 벌써 안뜰까지 진입해 우리 쪽으로 달려들었다.

쿠직! 쿠직!

이리의 촉수가 녀석들을 꿰뚫어 죽였다.

“만일 네가 늦는다면 난 이곳에서 지쳐죽을 것이다. 난 황제처럼 밤낮없이 며칠간 싸울 수 있는 몸이 아니니깐.”

“셰르카….”

“내 목숨을 맡기마.”

날 어떻게 믿고.

내가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걸릴 줄 알고.

그런 의문을 표할 시간조차 없었다.

퍼억!

이리의 촉수가 내 등을 떠밀었다. 그녀가 나보다 앞에서 악령들을 상대하게 되었다.

“기회가 있을 때 가란 말이다! 어서!”

“퀴이익!”

나는 다시 황궁을 향해 뛰었다. 피가 쩍쩍 말라붙은 계단을 도약하다시피 뛰어올라서 허벅지가 뜨겁도록 달렸다. 뒤쪽, 아래쪽에서 싸움의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돌아볼 여유 따윈 없다.

‘불나방이 왜 사라진 거야, 왜!’

억울하다. 이런 상황도 대비해서 남겨둔 불나방인데 영문도 모른 채 사라졌다.

「아직도 널 보고 있는 악령들이 있어서 다차원 능력은 발동할 수 없어! 이대로 황궁까지 들어가야 돼!」

「그리고 벌써 2000의 악이 쌓였어!」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지만 그보다 심장이 더 빨리 뛰어서 두 다리를 재촉했다.

나는 높은 계단을 올라와서 무너진 황궁까지 들어왔다. 좀 전에 격렬했던 전투를 증명하듯 황궁의 내부는 난장판이었다.

‘됐어! 빨리 잿빛세계로…’

그러나 황궁에도 악령들이 있었다.

“히익. 히익. 히익.”

“히익히익.”

나보다 먼저 황궁에 있던 저 녀석들은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존재감을 숨기는 능력이 있거나 존재감 자체가 옅은 악령들이다.

「기회주의자.」

「325.」

기회주의자라는 악령 여섯 마리가 흑기사의 사체에 붙어서 피를 핥고 있었다. 팔이 네 개가 달려있고 팔 사이에는 박쥐 날개 같은 피막이 있다. 하늘을 날아서 황궁에 들어온 것이다. 박쥐처럼 말이다.

「빨리 다른 곳으로…」

“그럴 시간 없어!”

황궁을 둘러싼 성벽을 중심으로 수도의 악령들이 몰려들고 있다. 아래쪽에는 이미 너무 많은 악령들이 있어서 내게 다른 곳이란 없다.

다른 악령이 황궁까지 올라오기 전에 저 녀석들을 해치우고 다차원 능력을 발동해야만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셰르카는 악령들에게 둘러싸여 흑마법도 없이 육탄전으로 싸우고 있을 것이다.

‘방혈!’

푸허억…!

나는 기회주의자 여섯 마리를 모조리 터뜨려 죽였다.

- 히익히익히익!

「또 왔어!」

기회주의자 다섯 마리가 밤하늘을 날아서 뚫린 천장 사이로 황궁에 난입했다.

“히익! 히익!”

“씨발!”

나는 그 다섯 마리도 방혈로 터뜨렸다. 고작 325의 악을 가진 악령들은 내 상대가 되지 않는다. 놈들을 해치우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325에 10을 곱하면 3250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3250에 2000을 더하면….

「페인!」

절망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다. 극심한 공포에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다. 숨이 막힌다.

또 ‘그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야의 귀퉁이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 내 안의 악령은 목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잿빛세계라는 차원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서 잿빛세계로 가서 성수를 가져와야 하는데.

“으아아!!! 오지 마!!!”

검기를 날렸지만 ‘그것’은 사라졌다. 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뒤를 돌아봤더니 또 시야의 귀퉁이에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방금 전보다 더 가까이에서 다가오고 있다.

- 안녕……?

‘그것’의 서늘한 음성을 접한 순간,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검기와 주술을 난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하늘이 밝아졌다.

아주 예리한 은 십자가가 ‘그것’이 있던 자리에 떨어져 박혔다.

…쐐앵! 카아앙!!!!

잠깐이지만 ‘그것’은 자기 얼굴을 쥐어뜯으며 사라진 것 같다.

“…허억…! 허억…! 허억…!”

밝아진 하늘에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법진들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마법진들이 수많은 은 십자가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허억…! 허어…. 흐으으으으….”

나는 온몸의 힘이 풀려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래도 바닥을 기었다. 무너진 벽 틈으로 수도의 광경을 눈에 담았다.

「저게 다 뭐야?! 무슨 마법인데?!」

은 십자가들이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누군가 신성한 힘으로 수도를 정밀하게 폭격하고 있는 것이다.

「지, 진짜 천사라도 강림한 거야…?」

‘천사가 아니야.’

황제가 쓰러지고 ‘그것’이 왔다.

‘그것’이 사라지고 그녀가 왔다.

몰락한 밤이 지나고 아침과 함께 찾아온 그녀다.

「천사가 아니면 누구야?」

수도 전체에 범람한 악령들을 쓸어버리고 있는 저 단호한 십자가들.

“아그니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래서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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