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73화 (73/181)

14. 업보 그리고 위선자 (3)

사체가 발에 치일 정도로 많다.

악령의 사체마다 비석처럼 꽂혀있는 은 십자가들이 바람에 날려 가루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셰르카와 함께 황궁을 나와서 거리를 빠져나가는 중이다.

- 찾았다!

- 강령술사다!

멸망한 수도에 왕국군이 진입했다.

앞줄에 있는 자들은 성기사 같다. 저들이 쓰고 있는 특수한 방독면은 투구를 개조한 것으로, 정화통 하나와 안면의 극세사로 흑사병을 막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흑사병을 경계하여 평소엔 입지도 않는 두꺼운 망토를 걸치고 있다.

“정말로 강령술사가 황제를….”

“옆에 여자는 누구지?”

“모르겠어.”

나는 왕국군을 마주한 채 멈춰 섰다.

그들 사이에서 여전사의 갑옷으로 무장한 장신의 여성이 걸어 나왔다. 그녀의 축복받은 육체에는 흑사병에 대비할 정화통, 망토가 불필요한 것이었다. 투구는 써봤자 시야만 가릴 것이고.

「저게 저렇게도 쓸 수 있는 무기였구나….」

그녀의 등에는 이 주변에 수없이 꽂힌 은 십자가와 비슷한 것이 붕 떠있었다.

“용케도 살아남으셨군요.”

“아그니샤. 역시 너였구나.”

“수도의 상황과 황제의 생환을 반드시 확인하라는 왕명이 있었어요.”

아그니샤는 왕국을 지킬 최후의 보루다. 그래서 그녀는 절대 왕국을 벗어날 수 없다고 전에 내게 단언했었다.

“이러면 왕국은 누가 지켜?”

“새로운 승천자가 지키죠.”

그랬구나.

「새로운 승천자가….」

그랬던 거구나.

“중앙교회에 발키리 님이 강림하셨어요. 그리고 제가 전에 말씀드렸죠? 새로운 승천자가 되기에 가장 유력한 신관이 있었다고요. 결국 천사가 스스로 내려와서 새로운 승천자를 임명하고 말았어요.”

“지금 우리 세계에는 악이 범람하고 있어.”

제국과 왕국이 전쟁 중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살인하며 죄악을 쌓아가고 있다. 전장과 각지에서 발생할 악령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뿌린 흑사병이 있다. 전쟁으로 죽이고 죽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숫자가 흑사병에 당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천사가 나타났다는 거야?”

“당신 덕분이죠.”

그 대답을 듣고 속에서 무언가 울컥했다.

“발키리 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세인트 왕국의 잿빛세계에 악보다 선의 영향력이 강해졌다고요. 덕분에 천계에서 현계로 차원을 넘을 수 있는 빛을 찾아내셨다고 했어요. 그동안엔 어둠이 막고 있었는데 드디어 한 줄기 빛을 찾아낸 거죠. 당신 덕분에.”

덕분에, 덕분에.

무표정한 그녀의 말투, 함께 있는 병사들의 수군거림이 나를 칭찬하고 있다. 나를 높이 평가하고 내게 감사하고 있다.

그런데 나로선 받아들일 수가 없다.

「왜? 저 여자 말이 맞잖아.」

「너는 잿빛세계에서 왕국 폐허의 이물들을 청소했어. 거기에 사람들을 데려다 놓고 문명을 만들어서 세인트교를 전파했지. 그것도 조금은 선의를 가지고 말이야.」

「당연히 그 일대는 악의 힘보다 선의 힘이 강해졌을 거야. 그 영향으로 실재세계의 같은 일대에서도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고.」

「네 덕분이 맞잖아.」

맞지만, 틀렸다.

뭐라고 설명하기엔 어렵다.

“페인.”

셰르카는 내가 답답하다는 눈을 하고 있다.

“너는 다른 차원의 사악한 존재들을 해치우고 그곳의 인간들에게 선을 가르쳤다. 적국의 영토 전체에 궤멸적인 피해를 가했으며, 수도를 파괴하고 황제를 해치웠다.”

“그래서?”

“너는 학살자다.”

그러면서 내 등을 토닥이는 것이다.

“또한 영웅이다.”

적당히 나쁘고 적당히 착한. 이중적인.

제국의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왕국의 수많은 사람들을 살린.

원망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면서도 고마움의 대상이 되는.

타락한 승천자를 처단했지만 전쟁의 원인을 제공해버린.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지만 최선을 다해서 승리로 이끈. 속국들이 해방되어 독립할 수 있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나라를 역병으로 물들인.

“원래 선악이 절대적인 인간은 없다. 다들 각자의 비율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너도 그렇다.”

* * *

왕국군은 제국령의 속국들을 방문했다. 그들에게 제국의 몰락을 알려준 후 이제부터 독립할지, 아니면 계속 제국의 편에서 전쟁에 임할지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이다.

대다수 속국들은 제국의 몰락이라는 소식에 환호하며 왕국에 감사를 표했다. 물론 일부 속국들은 지도층이 여전히 제국에 충성하는 국가라 몰락을 달갑지 않게 여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흑사병이라는 공통의 재해였다. 속국들은 예외 없이 치명적인 역병을 앓고 있었었기에, 더는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제국의 백만 대군이 전멸했고, 수도가 함락되었고, 황제가 사망하였고, 황제를 대체할 지도층의 원로원까지 말살당했다. 여전히 제국에 충성을 하더라도 독립밖에 선택권이 없는 것이다.

결국 제국 하나의 몰락이 새로운 국가들의 독립을 촉진하게 된 것이리라.

한편, 세인트 왕국에서는 새로운 승천자가 탄생하고 발키리가 종종 강림하게 되었다.

백조 같은 날개, 숨 막히는 미모, 육감적인 몸매, 순백의 피부, 옅은 황금빛 머리칼, 신성하고도 새하얀 갑옷, 장검 길이의 성검을 허리춤에 차고 있는 이 존재가 바로 천계에서 현계로 강림한 ‘발키리’다.

발키리는 왕궁의 어느 귀빈실에서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중앙교회를 확인했다.

“새로운 승천자가 된 렌달틀란크가 그간 있었던 모든 일들을 내게 설명하였다.”

발키리의 뒤에는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파보크가 있었다. 그리고 로브 차림의 아그니샤가 파보크의 의자를 쥐고 있다.

“아그니샤. 8일 동안 제국을 돌아본 결과가 어떻던가?”

“저는 수도까지만 갔다가 바로 귀환한 터라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비첸크로이 제국은 확실히 없어졌습니다.”

“백만 대군을 멸하고 역병을 퍼뜨리고…. 제국의 수도를 저주하여 함락하고 황제의 숨통까지 끊어낸 자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대가 그를 구원하였지.”

“그를 구하고자 의도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단지 제국에 창궐한 악령들을 처단하고 황궁까지 갈 길을 확보해 황제의 생사를 확인하려 했을 뿐입니다.”

“인간은 종종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거짓을 고하곤 한다.”

발키리는 파보크와 아그니샤를 돌아보았다.

“강령술사는 근원이 사악한 힘을 다루는 존재가 아닌가?”

“악령의 힘이라도 올바르게 쓴다면 괜찮을 것입니다. 칼이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도구라고 하여 칼을 들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험하게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백만 단위로 무고한 자들을 죽인 인간을 너무 포장하는군.”

그러자 파보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발키리 님. 그자가 선악 중에 어느 쪽으로 더 기울었냐고 물으신다면 물론 악의 성향이 더 짙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파보크도 알고 있는 사실을 아그니샤는 외면한 것 같구나. 나는 어째서 네이트 님의 단호한 십자가가 그곳의 존재들을 ‘차별’하여 멸했는지 묻는 것이다.”

아그니샤는 당당하게 발키리의 눈을 응시했다. 그야말로 천계의 존재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여전사의 기개였다.

“존재 자체가 사악한 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자가 있는 방향으로부터 악마의 기운이 느껴지는 건지 설명해라.”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악마라고 하셨습니까?”

“세인트 여신님께서 그러라고 현계에 하사하신 성수가 아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강령술사. 그자는 쌓여가는 업보를 성수로 무마하고 있었다. 마치 전에 있던 타락한 승천자처럼 말이다. 절대 공존해선 안 될 사악한 영혼과 함께 어두운 힘을 휘두르며 편법을 쓰고 있지.”

듣다 못한 아그니샤는 강하게 주장했다.

“네이트 님께서는 제게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악업이나 악행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투명하게 보고, 그 존재가 현계에 있어선 안 되겠다고 판단되면 그때 생명을 거두라고 말입니다.”

“아그니샤. 나는 그대의 판단이 차별적인 집행을 행하였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곳이 강령술사의 무덤이 되었어야 했다.”

“제가 강령술사를 죽이지 않은 것이 그렇게나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차라리 네이트 님께 말씀하시죠.”

파보크는 안절부절하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잠깐, 아그니샤…. 지금 발키리 님께 무슨 언행을….”

“저는 발키리 님의 종자가 아닙니다. 만일 네이트 님께서도 강령술사의 존재를 살아있어선 안 될 절대악으로 규정하신다면 그때는 마땅히 강령술사를 상대하겠습니다.”

“그 또한 거짓말이 아닌가?”

발키리의 눈이 빛났다.

아그니샤는 발키리의 시선이 자신조차 모르는 내면을 훑는 듯한 감각을 맛보았다.

“그대는 강령술사에게 죄악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젠 그보다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지. 또한 수도에서 무리를 해서라도 기어코 전쟁을 매듭지은 그에게, 같은 인간으로서 호감까지 품게 되었다.”

“아닙니다.”

“올바른 마음은 사랑을 낳지만, 잘못된 존재를 향한 마음은 욕정과 타락을 낳는다. 지금 그대의 모습이 그것의 출발점과 흡사하지 않나?”

“아닙니다.”

“아니기는.”

발키리는 갑자기 파보크의 손을 잡아서 그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으앗! ……어?”

불타는 바위에 맞아서 불구가 된 파보크다. 그랬던 그가 멀쩡하게 서버린 것이다.

발키리는 파보크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아그니샤를 노려봤다.

“엑수스 님께서 노하고 계신다.”

“황제가 정말로 엑수스의 화신이었다는 말씀입니까?”

아그니샤도 발키리를 노려봤다.

“화신까진 아니지만 그대가 네이트 님께 축복을 받은 것처럼 황제도 엑수스 님께 축복을 받은 몸이었다.”

“그자는 폭정을 일삼는 최악의 전쟁광이었습니다.”

“자기 자리를 지킬 줄 아는 정치인이자, 천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순수한 인간의 힘으로 악령에 대항하는 강한 지도자였다.”

“전투를 맡은 발키리 님과 천계의 정복자 엑수스 님이라면 그렇게 여길 수도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정말이지 네이트 님만 바라보는 종자구나. 하지만 알아두어라. 네이트 님께서도 강령술사 주변에서 느껴지는 악마의 기운을 부정하지 않으셨다.”

발키리는 아그니샤를 차갑게 지나쳐서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성수는 악한 기운을 씻어주는 것이지, 결코 영혼에 쌓인 ‘업보’를 영구적으로 지워주는 편리한 도구가 아니다.”

발키리가 아그니샤에게 하고자 했던 말은 그것이었다.

“만일 징조가 보이면 늦기 전에 단호히 처단할 것이라고 희망하겠다. 아그니샤.”

“강령술사는 제가 알아서 볼 겁니다.”

“이래서 인간이란….”

이후 발키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을 받으며 천계로 돌아갔다.

* * *

흑사병에 걸린 자들이 전부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마땅한 치료제도 없는 흑사병은 몸에서 검은 피를 방혈하여 치료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너무 늦으면 뽑아야 할 피가 많아서 과다출혈로 사망하게 된다. 병세가 너무 악화된 사람은 살릴 수 없는 것이다.

「흑사병이 끝날 때까지 악이 쌓일 거야.」

나는 제국의 영토였던 땅을 무작정 돌아다녔다. 그러다 흑사병에 당하고 있는 마을을 찾아냈다.

병든 사람들과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듯 새로운 국가의 깃발이 드문드문 세워져있는데 마을의 분위기는 전혀 기쁘지가 않은 것이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아직 환자들이 많습니다.”

나는 영력이 소진되고 발바닥 가죽이 벗겨지도록 매일 움직였다. 하루 내지 이틀 안에 마을 하나의 흑사병을 처리하고 다시 이동해서 새로운 마을을 찾아내 사람들을 치료하기를 반복했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새로운 환자들의 상태는 악화되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건너갈 때마다 사망자와 환자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오늘 영력도 다 썼어.」

농부가 죽어서 먹을 게 없다. 상인이 죽어서 돈을 벌 수도 쓸 수도 없다. 시장과 거리까지 암울하게 죽었다. 환자뿐만 아니라 전쟁과 역병이 낳은 걸인이나 고아들까지 있었다.

일가족이 흑사병에 걸린 집은 불태워졌다. 흑사병에 걸려서 죽은 사람들의 몸뚱이는 쓰레기처럼 한곳에 버려져서 매장되거나 불태워졌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강령술사님.”

“환자들은 따로 격리하고 있습니다.”

“제발 저희 아이 좀 살려주세요!”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살려달라는 말, 감사하다는 말을 듣고 있으면 나도 함께 병드는 기분이었다.

오늘도 그런 나날이다.

“으으으으으….”

환자들이 격리된 넓은 집이다.

“으으으….”

이 환자는 병세가 악화되었다. 그래도 검은 피를 뽑아내 살려야만 한다. 살려야만 했다.

“…….”

「죽었어.」

살리지 못했다.

* * *

오늘 영력도 다 썼다. 더는 방혈을 발동할 수 없다.

해가 떨어지고 있는 암울한 거리를 걷고 있으면 도움을 바라는 시선들이 내게 쏟아졌다. 하지만 내게 가까이 오지는 못한다. 내 손에는 더러운 피가 흥건하게 묻어있기 때문이다.

“저…. 저 좀…….”

“죄송합니다. 오늘 영력은 끝나서요.”

“저, 정말 내일까지는 못 버틸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다가와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열에 아홉이 죽음의 문턱을 본 환자였다.

- 안녕……?

이젠 시야 귀퉁이에서 다가오는 ‘그것’이 보여도 놀라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섭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도 없는 골목이나 수풀에 들어가 조용히 성수를 꺼내서 마실 뿐이다. 그러면 ‘그것’은 금방 사라졌다.

「472까지 떨어졌어.」

‘안 아프냐? 성수.’

「아픈데 적응이 되더라고. 나도 내가 성수의 고통에 이렇게까지 적응할 수 있는 줄은 몰랐어.」

나는 잠시 수풀에 앉아서 숨을 돌렸다. 가끔은 이렇게 아무도 없는 수풀 속에 숨어있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해선 안 될 짓이다.

뚜득…!

등에서 원인 모를 통증이 느껴진다. 뭔가가 자라나서 로브를 뚫은 것 같다.

‘또 악령화야?’

「2900까지 올랐어. 어디서 단체로 죽었나….」

뭔지도 모를 것이 등에서 계속 자라나고 있다.

‘성수 좀 마실게.’

그때, 여러 개가 살갗을 뚫고 로브까지 뚫어서 자라나고 말았다.

“끄으윽!!”

갑작스러운 격통이 내장까지 퍼지고 있다.

「빨리 성수부터!」

성수를 쥔 손이 파르르 떨린다.

“아아악…!”

툭!

성수를 놓치고 말았다. 두 걸음 앞까지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리고 등이 더 아파졌다. 신음을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파졌다. 계속 아파지고 있다. 뭐 이런 좆같은 악령화 증상이 다 있나.

나는 떨리는 손으로 풀밭을 기었다. 성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뚜드드득!!!

“끄아아악…!”

척추가 강제로 휘어버린 것 같다. 도저히 두 다리로 일어설 수가 없다. 바닥을 기는 자세가 아니면 움직일 수 없다.

어서 성수부터 쥐어야 한다.

“아저씨?”

나는 그대로 정지했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보니 대충 열두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내 모습이 어떨지 생각해보면 이보다 곤란할 수가 없다.

등이 굽은 채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자라난 모습일 것이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괜찮으니까 저리 가! 너는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알겠어?!”

“하지만 아저씨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 안녕……?

그리고 어김없이 다가오는 ‘그것’.

풀숲을 연기처럼 통과하며 다가오고 있다.

“제발 좀 꺼져!!!”

“아….”

“너 말고! 아, 아니 너한테 소리 지른 게 아니…. 그게 아니라….”

사람이 횡설수설한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그, 그래! 너는 잠시 밖에서 기다려! 그리고 얘기하자! 알겠지?”

하지만 아이는 쪼르르 달려왔다. 다가오는 ‘그것’보다 더 빠르게 달려와서 내 뒤로 갔다.

“이 새끼야! 오지 말라니까! 내 옷에 묻은 게 다 역병이야! 너도 병에 걸려서 뒈지고 싶…!”

나도 모르게 말이 멈췄다.

내 등에서 자라난 가시를 아이가 낑낑대며 잡아당기고 있었다.

「허리가 좀 펴진 것 같은데?! 빨리 기어!」

아이의 힘은 아주 미약했다. 하지만 그 작은 힘이 척추에 자극을 준 걸까. 굳었던 허리가 순간적으로 펴지는 느낌이 들면서 손을 크게 뻗을 수 있었다.

- 안녕……?

「빨리!」

나는 성수가 담긴 병을 머리 위에 댔다. 그대로 쥐어서 깨버렸다.

마침내 ‘그것’이 사라졌다.

“으앗!”

등에 자라난 가시 하나가 아이의 손에 쑥 뽑혀나갔다.

“저리 가있어…. 옮는다.”

“네.”

나는 아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가시를 하나씩 다 뽑아냈다. 대충 서른 개는 넘게 뽑아낸 것 같다.

악령화 증상이 날이 갈수록 지독해지고 있다. 그만큼 내가 쌓고 있는 죄가 크다는 뜻이리라.

“이제 괜찮아요?”

“야.”

“네?”

“너는 오늘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이 풀숲에 들어온 적도 없고 내가 등에서 가시를 뽑아내는 것도 본 적 없는 거라고.”

“왜요?”

“그러지 않으면 널 죽일 수도 있어.”

겁주려고 한 건데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아니면 알아듣고도 믿지 않는 건가.

「그냥 죽이자. 저 애새끼가 너한테 악령화 증상이 보였다고 떠들고 다니면 어떡해?」

‘애를 죽이면 죄가 엄청 쌓여서 안 돼.’

「…애새끼 목숨은 성인보다 더 귀하게 계산됐었나?」

“아무튼 너는 아무것도 못 본 거다. 알겠어?”

“네…. 약속할게요….”

시원치 않은 대답이다.

더 확실하게 설명해야 할까.

이름부터 알아보자.

“야. 너 이름이 뭐야?”

“저요?”

“내가 너 아니면 누구랑 대화하고 있냐.”

“리안이요.”

“뭐?”

“제 이름이요.”

“그러니까, 네 이름이 뭐라고?”

“리안이라고요. 리안.”

굉장히 비슷한 이름이지만 아무 연관성이 없다. 정말, 정말이지 아무 연관성도 없다.

“너 이렇게 위험하게 돌아다니는 거 부모님이 아냐?”

“엄마랑 아빠 둘 다 역병에 죽어서 몰라요.”

제기랄.

“그러면 널 지켜줄 사람도 없으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야지.”

“역병 때문에 집이 불타서 없어졌어요.”

제기랄.

“…너는 왜 역병에 안 걸렸냐?”

“방에서 고양이랑 같이 자서요. 우리 할머니가 그랬는데요. 고양이랑 친하게 지내면 심한 병을 피할 수 있데요.”

제기랄.

“아저씨도 고양이랑 친해서 살아있는 건가요?”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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