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74화 (74/181)

14. 업보 그리고 위선자 (4)

「너 지금 존나 웃긴 거 알아?」

마을에 남아있는 여관을 빌렸다.

나는 부엌에 앉아서 리안이 저녁밥 먹는 걸 구경하는 중이다.

“그거 다 먹고 새 옷으로 갈아입어라. 저기 침대 위에.”

“음읍, 넵….”

며칠을 굶었는지 텁텁한 빵을 고기처럼 뜯어먹고 있다. 빵을 찍어 먹으라고 준비된 수프는 접시째로 들어서 마시기도 한다.

「이런 애 하나 돌보자고 네 돈이랑 시간을 낭비해? 어?! 이게 말이 되냐고!」

‘영력이 없어서 사람들을 더 치료할 수도 없잖아. 어차피 내일까진 할 일이 없다고.’

「지랄 염병하네. 이럴 시간에 잿빛세계로 가서 사람들 관리나 하든가.」

‘애 잠들면 갈 거야.’

「너는 안 자고?」

‘잠 줄이면 돼.’

「야. 까놓고 말해서 너로 인해 생긴 수많은 피해자들 중에 하나일 뿐이야. 집도 잃고 부모도 뒈졌다고. 그 원인을 제공한 네가 이러는 게 오히려 몹쓸 짓이라고 할 수도 있어.」

‘알아.’

「그럼 왜 이렇게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데?」

이러고 싶으니까 이러는 거다. 내 안의 악령이 왜 이렇게 리안을 챙겨주냐고 물어도 딱히 명확하게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적어도 오늘 밤에 당장 잘 곳도 없고 배를 쫄쫄 굶고 있는 애를 그냥 무시하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악령화 때문에 위험했는데 리안이 도와주기도 했고. 덕분에 허리가 펴져서 성수를 집을 수 있었어.’

만약 거기서 조금이라도 더 악령화가 진행됐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마을 사람들에게 걸리는 건 둘째 치고 나 자신에게 크나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건…! 그건 인정하지만….」

전투적인 식사를 마친 리안은 내게 호기심을 보였다.

“그런데 아저씨 정체가 뭐예요?”

“강령술사다.”

“사람이에요?”

“사람이야.”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래요? 왜 얼굴이랑 이름도 숨기시고 아까는 등에서 왜 가시가…”

“나쁜 힘을 휘두르는 사람이라서 그래. 최근엔 죄를 많이 지어서 벌을 받는 중이지.”

“이 마을에 얼마나 머무를 거예요?”

“길어봐야 이틀.”

“왜요?”

“다른 마을도 돌면서 역병을 치료해야 해.”

“그러면 나쁜 사람 아니잖아요. 왜 벌을 받고 있어요?”

나는 일어나서 문 옆에 세워둔 도끼를 챙겼다.

“어디 가세요?”

“내일 점심쯤에 올 테니까 옷 갈아입고 자라.”

“같이 가면 안 돼요?”

적당히 하자.

한순간의 그리운 추억을 떠올리는 정도로.

위선으로 더럽혀진 한순간의 선행 정도로.

너무 가까워져선 안 된다. 언젠가는 잃게 될 테니.

“나한테 의지할 생각은 하지도 마. 아까 도와준 대가만 다 치르면 다시 볼일 없을 거야.”

“왜 나쁜 사람인 척해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여관을 나왔다.

시원한 밤공기에 시체 썩는 냄새와 시체 타는 냄새가 섞여서 은은하게 방독면을 뚫는다. 어디선가 많은 방향에서 울고 신음하는 소리까지 들려온다.

또한 저 어둠 속에서 어둠보다 짙은 음영을 가진 ‘그것’이 다가온다.

치이이익…!

나는 방독면에 네모난 구멍 하나를 열어서 성수를 부었다. 이 방독면 안에는 독성과 악취를 제거하는 약초가 들어있는데, 성수가 그 공간에 들어차서 내가 숨을 마실 때마다 몇 방울씩 입술을 적시게 된다.

지속적으로 악이 쌓이니까 지속적으로 악을 제거하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물론 여전히 악이 쌓이는 속도가 더 빨라서 임시방편이긴 하다.

「성수 진짜 싫어.」

이제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어두운 숲으로 들어와서 다차원 능력을 발동했다.

키이잉!

그러면 잿빛세계가 보인다.

문명의 빛이 있는 잿빛세계다.

「이런 야경을 볼 때마다 여기가 잿빛세계라는 게 놀랍기도 해.」

분지를 건물들이 꽉 채우고 있다. 중앙교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건물들이 퍼져나가듯 문명이 형성된 것이다. 분지 위쪽에는 높은 풍차와 물레방앗간이 있고, 항상 송수로를 통해 흐르는 잿물이 커다란 통을 지나서 걸러지고 가마솥에 모여서 끓여진다.

분지를 오르내리는 돌계단도 완성되었다. 나무로 만든 손잡이를 쥐어서 천천히 분지로 내려왔다.

“헤에에엑….”

울타리 안에 갇힌 산양들은 나를 보더니 구석으로 도망가서 옹기종기 뭉쳤다. 내가 무슨 양치기 개라도 된 것 같다.

* * *

중앙교회에서 두 배척자와 후계자를 만났다. 그리고 이번엔 후계자 말고도 15명 정도가 자리를 채우고 있다.

내가 잿빛세계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방법이 이런 식으로 굳어진 것이다.

“가로등, 집안 등불에 쓸 마법석. 필요하다. 나무나 기름을 소모하는 것. 잿빛세계 같은 환경에서는 비효율적이다. 이 세계에서 무엇이든 자원을 소모하는 행위는 최소화해야 한다.”

“마법석이 몇 개나 필요해?”

“후계자가 안다.”

후계자가 어떤 문서를 보더니 대답했다.

“가로등에 쓸 마법석 50개, 등불로 쓸 마법석 200개는 있어야 하겠군요.”

“큰 거 50개, 작은 거 50개?”

“예.”

“알겠어요. 다음은?”

어떤 덩치 큰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나섰다.

“강령술사님. 저희에겐 더 많은 도구와 무기를 생산하기 위한 철광이 필요합니다.”

“그쪽은 뭐라고 불러드리면 되죠?”

“경비대장 ‘후안’입니다.”

“도구가 필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무기는 왜요?”

“더 많은 경비대를 조직하여 낙원의 활동 범위를 확장하고자 합니다.”

“멀리 나갈수록 강한 이물이 나올 텐데 괜찮겠어요?”

“이 근방에서 출몰하는 이물 목록이 있어 사전에 충분한 훈련과 대비로 극복하고 있습니다.”

“이물 목록?”

내가 배척자에게 시선을 옮기자 녀석이 대답했다.

“대체로 살인마, 사냥꾼, 범죄자와 같은 전생을 가진 이물이 주로 출몰한다. 비슷한 외형과 전생을 가진 이물들. 싸우는 방식 또한 비슷하다. 따라서 목록을 작성해 각각의 이물에 대한 공략법을 문서화하고 있다.”

이곳의 활동이 체계적으로 변한 것이다. 그 가운데 나는 최고 결정권자였다.

“폐허에서 수집하는 고철로는 물량이 부족한가요? 후안 씨.”

“물량보다 효율의 문제입니다.”

“자세히 말해보세요.”

“저희는 폐허에서 수집한 고철을 주조하여 물건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품질이 좋지 않습니다. 고철을 수집하는 시간도 많이 소모되고요. 그래서 성벽 너머에 있는 주조소까지 영역을 확장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 더 많은 경비대를 조직하는 중에 무기가 필요해졌습니다.”

그러면 내가 고품질의 철광을 계속해서 공급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러기엔 내게 지속적인 수입원이 없다.

“활동 범위를 확장하는 건 좋은데 제가 앞으로도 계속 철을 공급해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신관님께서 서쪽에 철광이 나오는 광산이 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잊고 있었다. 실재세계에서 세인트 왕국이 쓰는 철광은 모두 성벽 너머의 서쪽에 있는 광산에서 나온다는 것을.

실재세계의 지도를 알고 있는 배척자가 이들에게 광산의 존재를 알려준 것이다.

“거듭 부탁을 드리게 되어 죄송하지만…. 그 광산에 있는 이물들만 처리해 주시면 저희는 앞으로 품질 좋은 철제 물건들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그런 곳에 쓸 영력은 없는데.」

내가 직접 광산까지 가서 이물들을 정리하는 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다. 하지만 지금은 흑사병에 걸린 자들을 치료하는 것만 해도 영력과 시간이 부족하다.

가만 생각해보니 굳이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광산은 악귀들을 보내서 정리할게요.”

“페인. 광산의 깊은 곳에 있는 이물들은 강할 것이다. 거미 악귀로는 단번에 정리가 안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거미 악귀가 약하다는 건 아니지만. 확실한 게 좋지 않겠나?”

“흑기사도 같이 보낼 거야.”

세인트 왕국 폐허에서 가장 강한 이물이 역병 마녀였다. 그런 역병 마녀보다도 훨씬 강한 것이 흑기사다.

그날 밤, 나는 서쪽 광산으로 흑기사 세 마리를 보냈다. 말도 안 되게 단단한 갑옷과 괴력을 갖춘 그것들은 검기까지 쏘아대는 악귀였다. 그래서 광산에 있는 해괴한 이물들은 흑기사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흑기사는 상처 없이 복귀하였고 아침이 되자 정리된 광산에 사람들이 투입되어 채광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왕 흑기사를 쓴 김에 새벽 동안 주조소까지 가는 길도 정리하여 사람들이 고품질의 철제 물건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아침에 황금달을 방문하였다. 4500루아를 지불해 마법석도 대량으로 구매하였다. 마법석은 영원히 빛난다는 특성이 있어 굉장히 비싼 물건인데, 베르자인이 무려 1000루아를 깎아준 것이다.

의식주가 해결된 낙원은 경비대라는 소규모 군사를 조직하면서 활동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앞으로 낙원은 더 강한 조직을 움직이면서 철제 물건도 생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너 이제 주머니에 1000루아 조금 넘게 남은 거 아니야?」

그동안 낙원을 개선하기 위해 상당한 지출을 해왔다. 앞으로도 잿빛세계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을 실재세계에서 구하여 대량으로 공급할 것인데, 그럴 때마다 상당한 지출이 있을 것이다.

그런 고민을 베르자인에게 상담했더니 그녀는 아주 명쾌한 조언을 해주었다.

나는 잿빛세계로 돌아와서 후계자의 집을 찾아갔다.

“후계자님.”

“예. 말씀하시지요.”

“세금이라는 걸 걷으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재세계에 있는 개념에 대해선 문외한이라…. 세금이 뭔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지요?”

그가 내게 세금의 정의를 물었는데 나도 정확한 정의는 모른다. 그래도 설명은 할 수 있다.

“일정한 영토에 소속된 백성들이 나라에 주기적으로 돈을 내는 것입니다.”

“돈이요…?”

“혹시 화폐가 뭔지 아세요?”

“죄송합니다. 처음 듣는 단어라….”

나는 후계자에게 화폐에 대한 것과 세금에 대한 것을 전부 설명했다.

낙원에도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고는 하는데 다들 물물교환 방식을 채택하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광산이 계속 넓어지고 있으니까 이곳의 화폐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동전이라는 것으로 말씀이지요?”

“네. 광산에서 캐고 남은 동, 은, 금으로 만들면 돼요. 그게 돈이 되고 사람들은 그 돈을 세금으로 제게 내야 한다는 뜻이죠.”

“강령술사님 덕분에 저희가 누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누구라도 세금에 대해 반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부분은 배척…. 신관들이 더 잘 아니까요. 세금을 개인마다 어떻게 부여하고 기간에 따라 얼마를 낼지는 함께 의논하도록 하세요. 부유한 자와 빈곤한 자에 대한 개념도 신관들한테 물어보시고요.”

“알겠습니다.”

세금을 많이 받을 생각은 없다. 그냥 내가 낙원을 위해 지출하는 것이 적자만 나지 않을 정도면 된다.

「베르자인이 들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겠다. 이왕이면 최대한의 이익을 추구하는 게 맞지 않겠어? 까놓고 말해서 네가 혈세를 거둬도 이 사람들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낼 텐데.」

‘오히려 베르자인은 지금 네 말에 동의하지 않을걸?’

「왜?」

‘어차피 규모가 커지면 이익은 따라올 거잖아. 당장 큰 이익을 추구해봤자 마른 걸레 짜는 것밖에 안 될 거야.’

그렇게 후계자의 집을 나오면서 이곳의 볼일이 끝났다.

「3000 넘었어.」

요즘엔 잘 때마다 거의 한 시간 간격으로 깬다. 대충 그 정도 간격으로 영혼에 3000 이상의 악이 쌓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마다 여섯 번 이상의 악몽을 꾼다. ‘그것’이 다가오는 악몽을 말이다.

그런 악몽을 꾸고서 일어나면 창밖에서 어김없이 ‘그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계속 성수를 흘려주는 방독면을 쓰고 자도 악이 축적되는 건 어쩔 수가 없네.」

나는 방독면에 성수를 채우고 생각했다.

이건 서늘한 번개처럼 떠오른 의문이다.

‘잿빛세계인데도 보이는 이유가 뭘까.’

「……그러게?」

가만히 생각해보면 등골이 오싹하다.

나는 ‘그것’의 정체가 뭔지 모른다. 목적도 악명도 모르고 내게 악의가 있는 건지 다른 의도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저 지옥과의 연결성이 강해지면서 보이기 시작한 어떤 끔찍한 존재로만 알고 있다.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갈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존재 정도로 알고 있다.

‘실재세계와 잿빛세계를 오갈 수 있는 존재라는 건가?’

「악귀처럼 네 영혼에 연결된 존재일 수도 있겠어.」

‘나한테 계속 그러잖아. 안녕…. 안녕…. 이러면서.’

「그리고 녀석이 가까워지면 난 너한테서 멀어지는 느낌이지. …아! 설마 내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밀어내려고…? 그런 방식인가?」

뭔가 알 것 같다.

‘셰르카는 너무 많은 악이 쌓이면 지옥으로 끌려간다고 했어. 그리고 전에 베르자인이….’

내가 한창 승천자를 노리고 있던 날.

베르자인은 내게 말했었다.

- 너의 마음이 아주 위태로운 상태라고. 조금만 더 건드리면 네가 악령이 되어버릴 거라고 했어.

- 널 배신하라고 하더라.

내가 무너져버리면 ‘페인’이었던 ‘악령’이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내 안의 악령이 나를 차지하는 게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존재라는 게 ‘그것’인가.

너무 많은 악이 쌓이고 마음이 무너져서 내가 바뀌게 된다면 ‘그것’에게 나 자신을 빼앗기게 된다는 말인가.

「그 정체불명의 존재가 나를 밀쳐내고 너를 차지한다는 거야?」

‘그러면서 나 자신까지 차지하는 것 같아.’

내 안의 악령과 나는 사라지고 ‘그것’이 된 페인이 남게 된다.

앞뒤의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그게 가장 유력한 것 같다.

* * *

이곳은 셰르카의 저택이다.

“흑사병에 감염된 쥐들은 모두 치웠다. 이제 남은 건 너의 악령화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이들을 살리는 일뿐이구나.”

그녀는 내 방독면을 살펴보고 있다.

“성수를 채워놓고 조금씩 계속 마신다는 건 제법 괜찮은 발상이구나. 허나 이걸론 악이 축적되는 속도를 따라잡기에 부족하지 않으냐?”

“네 흑마법으로 어떻게 안 될까? 흑마법은 마법과 달리 신성한 속성이 아니잖아.”

“안 되는 건 아니다. 내가 네 육체를 강화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몸이 자꾸 괴물처럼 변해.”

“흑마법으로 육체의 악령화는 막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보이는 증상까지 해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몸이 변하는 것이라도 해결하고 싶어.”

지금은 역병이 퍼지고 있어 끊임없이 악이 쌓이고 있다. 그리고 결국 제국에 창궐한 역병이 사라지게 되더라도 나는 강한 악을 상대할 때마다 악령화의 문제를 겪게 될 것이다.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다. 부정한 속성을 육체에 받아들이는 것이지. 그러면 영혼에 얼마나 악이 쌓이더라도 육체는 변하지 않을 수 있다. 마치 인간이 아니라 악령의 몸을 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뭔데?”

“대신 이 방법을 쓰면, 너는 너의 힘을 포기할 때까지 그 방독면을 영원히 벗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어쨌든 인간의 얼굴과 목소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라….”

방독면은 내 진짜 얼굴이 되고 변조된 목소리는 내 진짜 목소리가 된다는 이야기다.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게 된다. 누구도 너의 표정을 볼 수 없고 사랑하는 여자와 키스도 나눌 수 없게 된다. 지금까지 인간으로서 누렸던 것들을 아주 많이 포기하게 될 것이다.”

“….”

“악령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간도 아닌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일종의 저주라는 것이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괜찮아.”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구나.”

“어차피 힘을 포기하면 그 저주도 끝나는 거라며? 죽기 전까지도 언제든 저주를 풀 수 있는 선택권이 있는 거잖아.”

“…그렇지.”

“그럼 알려줘.”

이 지긋지긋한 악령화 증상을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발목을 붙잡힐 것이다.

“낙인(烙印)의 돌을 찾아야 한다.”

“주물이야?”

“자연적으로 발생한 주물이다. 숫자 6이 각 꼭짓점에 새겨진 삼각형 돌의 형태를 하고서 아주 깊고 어두운 바다 같은 색을 하고 있다지.”

“그건 어디에 가면 찾을 수 있어?”

“미안하지만 나도 그 돌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나는 널 만나기 전까지 광인의 숲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흑마법사다.”

“흑마법사들은 다들 그 돌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거야?”

“흑마법사라면 모를 리가 없다. 애당초 흑마법이란 마법을 쓸 수 있는 인재가 스스로의 선과 신성함을 포기하고 부정함을 받아들인 타락의 결과물이다. 자기 스스로를 ‘낙인’하는 것이지. 그러한 흑마법의 기초 원리는 낙인의 돌로 설명되곤 한다.”

“흑마법사들을 찾아서 물어보면 되겠네.”

“네가 알고 있는 흑마법사가 나 말고 달리 있느냐?”

“우토.”

“아하. 그 녀석, 사막에서 싸우다가 도망쳤다고 하였지. 게다가 황제의 심복이었으니 제국의 넓은 영토를 이곳저곳 많이도 돌아다니며 흑마법을 연구했을 것이다.”

그러던 도중 셰르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허면 우토가 어디로 도망쳤는지 너는 알고 있다는 뜻이더냐?”

“지금부터 알 수 있어.”

나는 우토를 안다. 그의 얼굴과 이름을 안다.

그렇다면 쓸 수 있는 주술이 있다.

「존재 추적.」

우토의 이름이 가짜라면 추적할 수 없지만.

가짜 이름은 아니었다.

“……우토는 동쪽에 있어. 이 대륙의 동쪽 끝이야.”

“멀리도 도망쳤군. 네가 어지간히 두려웠나 보구나. 너는 거기까지 가본 적이 있느냐?”

“없어. 내가 직접 거기까지 여행해서 머릿속 지도를 넓혀야 해.”

“나도 가본 적이 없어서 전이를 하기엔 무리다. 그보다 나는 거리에 따라서 소모되는 영력이 비례하기 때문에 가본 적이 있다고 한들, 동쪽 끝까지 전이하는 건 불가능하구나.”

“같이 가려고?”

“너는 내 조력자다. 당연히 따라가지.”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넌 낙인의 돌을 보더라도 그것이 진짜인지 사기꾼이 만든 가짜인지 구분하지 못할 게 아니냐.”

그렇다면 이 대륙의 동쪽 끝까지 가기 위해 준비할 것이 좀 있다. 나 혼자라면 저번처럼 차원을 건너면서 다닐 수 있겠지만 셰르카는 다르다.

방을 빌리고 식사를 할 돈, 식사를 만들 수 있는 식자재와 조리기구, 장작, 기름, 약품, 그 모든 것을 운반하고 야영까지 할 수 있는 마차 따위가 필요하다.

전부 거미 악귀에 싣고 이동하다간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나를 딱 보고 강령술사라는 걸 모르는 자들은 나와 거미 악귀를 악령으로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인트 왕국에 가서 준비하고 당장 출발하자. 잘 모르는 사람들한텐 역병을 치료하러 계속 이동하는 거라고 둘러대면 되겠어.”

“베르자인에게도 한 번쯤 물어보는 게 좋겠구나. 낙인의 돌에 대한 정보가 황금달 정보망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어차피 물건들 준비하려면 베르자인도 봐야 해.”

그저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 알고 있는 낙인의 돌.

그게 어디에 있든 무조건 찾아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지긋지긋한 악령화 증상으로부터 면역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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