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75화 (75/181)

14. 업보 그리고 위선자 (5)

“…옆에 누구야?”

“셰르카. 이쪽은 베르자인.”

“베르자인. 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실제로 보게 되니 반갑구나.”

베르자인은 셰르카를 경계했다.

“누구신데…. 아니, 뭐 하는 분이세요?”

“셰르카는 흑마법사야. 전쟁 중에 나를 도와서 흑사병을 만들고 절벽길을 막은…”

“페인과 같은 운명에 엮인 조력자 관계다.”

“조력자?”

나는 이렇게 될 줄 몰랐다. 무슨 이유가 있는 건지 베르자인과 셰르카는 첫마디를 나누기 전부터 기싸움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둘이 입을 열기 시작하니까 분위기는 왠지 더 험악해지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의 의미다. 페인은 나와 함께 지옥까지도 떨어져서…”

“잠깐, 거기까진 말 안 해도 되잖아.”

내 삶의 끝자락에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베르자인에게 알려서 어쩌겠다는 말인가. 설명하자면 한도 끝도 없는 이야기인데.

“지옥까지도 간다는 운명이 우리 둘만의 비밀이었나?”

“그게 아니라…”

“페인. 이 여자는 이간질하려고 데려온 거야?”

“그런 게 아니야. 단지 언젠가는 알게 될 사람이니까 이참에 서로 소개를…”

“이간질이라니? 나는 진실을 말했을 뿐이다. 헌데 페인이 너를 배려한 모양이구나.”

어쩌면 물과 기름처럼 서로 만나선 안 될 두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너의 짧은 수명으로 이해하기엔 너무 먼 나중의 일이다. 그래서 지금 말해봤자 좋을 건 없다는 그의 배려였지. 뭐, 방금은 내가 경솔했구나.”

“그쪽은 페인의 모든 걸 안다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얘가 흑사병을 퍼뜨린 죄 때문에 매일 죽어가는 사람처럼 살고 있다는 건 아세요?”

“그걸 각오하고 왕국을 구하지 않았느냐. 수많은 나라에 자유를 선사하고 제국의 오랜 패악질을 멈췄다.”

“아, 알겠다. 당신이죠? 페인이 그런 선택을 하도록 부추긴 사람이.”

“무슨 선택을 말하는 것이냐?”

“흑사병을 퍼뜨릴 생각이라면 본인이 직접 퍼뜨리시지 왜 굳이 페인의 손을 빌려요? 괜히 죄악만 쌓이게.”

“감염된 쥐만 퍼뜨리는 것보단 감염된 불나방까지 함께 뿌리는 게 낫기 때문이지.”

“아니요.”

베르자인은 익숙한 눈빛을 했다.

상대를 꿰뚫어보는 눈빛이다.

“페인이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죄를 쌓도록 만든 거잖아요. 그래야 당신한테 이득이니까.”

“나는 순수하게 페인을 도왔을 뿐이다.”

“거짓말이 서투르시네요.”

셰르카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참으로 건방지구나. 진짜 문제의 대상은 본 적도 없는 년이.”

“살면서 사람들과 대화할 기회가 별로 없었나 보네요. 그게 아니라면 노골적으로 심기를 건들면서 날 밀쳐낼 목적이겠죠. 내가 그런 의도도 못 읽을 것 같아요?”

“너야말로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지껄이지 마라. 네가 아라나크에 대해 무엇을 아느냐? 힘을 쓸 때마다 질병처럼 따라오는 업보에 대해 무엇을 알고 그 끝에 기다리는 끔찍한 진실에 대해 무엇을 아느냐?”

“적어도 당신처럼 페인을 혹사시키진 않을 거예요. 혹사시켜서 자기 소유물처럼 상황을 강제하진 않을 거라고.”

“망상에 미쳤군. 더는 대화할 가치도 없겠다. 말한들 무얼 알겠느냐.”

“셰르카, 이제 그만해. 처음부터 이상한 얘기로 빠지고 있잖아.”

“이 미친년이 말꼬리를 물면서 대화를 망쳤다.”

“지금 대화를 망치고 있는 건 당신이잖아. 나는 나한테 거짓말하는 인간이랑은 손 안 잡아. 페인, 너도 이 사람 너무 가까이하지 마. 네가 선택한 게 아니라 이 사람이 선택지를 강제한 거라고. 너도 내가 무슨 경고를 하려는 건지 알잖아?”

“아니야. 내가 고집부려서 절충안까지 만들고 다시 선택한 거야. 원래 셰르카가 제안한 건 더 심한 거였다고.”

“그러는 너는 전쟁 중에 뒤에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지 않았느냐. 가만히 있는 것보단 전장에서 함께 피를 묻히며 싸웠던 내가 더 나은 것 같다.”

“내가 이번에 전쟁 물자를 얼마나 지원했는지 알고 떠드는 거야? 종전하고도 피해 복구하려고 매일 뛰어다니고 있는 건 알고 그러는 거냐고.”

“아, 그러신가?”

“죽는 것만이 피해가 아니야. 건물, 재산, 농지, 자금 흐름이 끊겨버리는 것도 왕국엔 엄청난 피해라고. 난 전쟁 중에도 그걸 최소화하고 전쟁 후에도 피해를 복구하고 있어. 이런 재정적, 사회적, 국가적 피해에 대해 개념조차 없는 사람이 태반이야. 그래서 내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맡아서 하고 있다고.”

“그래, 정말 다리가 아프도록 뛰어다니고 입이 마르도록 말하고 피 같은 돈을 쓰느라 고생이 많았구나. …누군가들은 정말로 다리가 부러지고 혀가 뽑히고 진짜 피를 쏟았는데 말이지. 그렇게 뒤에서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너의 싸움은 훌륭했네, 잔인했네, 멀리서 지켜보며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이 전장에 서본 적 없는 햇병아리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왜 나까지 싸잡아서 욕하지? 내가 논하고 있는 건 당신의 옳고 그름이야. 당신이 페인에게 ‘강제’한 상황에 대해 따지고 있는 거라고.”

“자꾸 강제, 강제하면서 네가 옳다는 걸 전제로 하는데, 혹시 뇌보다 젖가슴이 커서 하찮은 자존심에 잠식당한 건가? 너 같은 미친년이 왕국 최고 조직체의 머리라니 가소롭구나.”

“방금 뭐라고 했냐, 씨발년아?”

“가소롭다고 했다. 미친년아.”

“둘 다 그만해! 싸우려고 모인 거 아니잖아!”

“쥐 불알만 한 게 할망구처럼 말하는 것도 존나 이해가 안 되네. 그리고 너 사람이랑 대화할 때 눈 좀 똑바로 마주치고 말해. 사회성 없는 거 티 내지 말고.”

“내 눈알이 거슬린다면 뽑아보지 그러냐? 그나마 사람 눈알이라도 뽑는 게 너의 유일한 재주가 아니더냐?”

“알았어. 지금 적출해 줄게.”

“안 뽑힌다, 이년아.”

「사실 이 자리에서 널 제일 잘 알고 진심으로 널 위하는 건 나밖에 없는 것 같아.」

“이젠 저 악령도 미친 소리를 하는구나. 페인에게 열 번의 기회가 있으면 열 번 다 악행을 추천하는 녀석이…”

“제발! 다들 그만해!”

도저히 끼어들 틈이 없어서 둘 사이에 뛰어들어 양쪽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악행이면 어때? 어차피 내가 말하는 게 너무 심하다 싶으면 페인이 알아서 거르고…」

‘너도 그만해. 제발 좀.’

「맨날 내가 말하려고 하면 조용히 하래….」

그제야 정신이 혼미해지는 싸움이 멈췄다.

베르자인과 셰르카 모두 내게 필요한 사람들이고 가장 중요한 관계들이다. 그런 두 사람이 서로 싸우는 건 보통 곤란한 게 아니다.

“자! 일단은…. 이건 말 한마디 오해로부터 시작된 싸움이야. 오해는 풀면 되는 거고. 그러니까 두 사람 다 화해하자.”

“싫다.”

“싫어.”

그럼 나중에 화해시키자.

「나는?」

넌 안 싸웠잖아.

* * *

셰르카는 하루 뒤에 합류하기로 했다. 한동안 비워질 저택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흑마법의 술식을 구축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마을에서의 볼일을 끝내려고 한다.

“역병 탓에 교류가 끊겨서 다른 곳의 상황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영주님이 역병에 당하지 않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마을의 촌장이라는 사람은 근방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잔악한 황제는 왕가의 3족과 4족까지 처형했습니다. 우리 영주님은 왕가의 마지막 후계자이고요. 그래서 영주님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다들 큰 혼란을 겪게 될 겁니다.”

“영주 이름이 뭐죠?”

“루이츠 왕가의 루이츠 4세 영주님입니다. 악의적인 주술을 피하기 위해 전체 이름은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핀터루이츠 마을을 포함해 세 마을을 루이츠 영지로 정해 다스리고 계십니다.”

“황제에게 당하기 전에는 왕국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마을 세 곳은 왕국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은데요.”

“제국령이 되어 영토를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속국들이 가지는 영토의 크기를 제한하기 위해 멋대로 각 지역을 분열시켜 속국들에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지도를 보시면 이렇습니다.”

촌장은 벽에 걸린 커다란 지도를 가리켰다.

「굉장히 인위적인 영토네.」

국가의 영토라는 것은 산맥을 따라, 강을 따라, 지형을 따라 때로는 구불구불하고 때로는 비대칭의 영토를 가지게 되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제국령에 있던 국가들은 모두 균일한 크기의 영토를 가지고 차곡차곡 쌓아진 벽돌처럼 나뉜 것이다.

“저희뿐만 아니라 제국령에 합병된 국가들은 황제로 인해 왕가, 가문, 가보를 잃었습니다. 역사의 기록물이 태워지고 역사를 기억하는 산증인들이 처형당해, 저희가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누구의 영토였는지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황제는 무력만 휘두르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전쟁으로 싸워서 합병하고 정복하는 게 끝이 아니었다.

“황제가 말살하고자 했던 것은 자유뿐이 아니라 각국이 가지고 있던 역사와 문화까지도 포함합니다. 세대가 흐름에 따라 정체성을 잃고 제국의 완전한 노예…. 속국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영지, 변경주, 제후국, 그런 다양한 명칭을 가진 속국들조차 황제는 ‘소국’이라고 낮추어 불렀습니다. 차곡차곡 쌓인 닭장 속 닭들을 취급하듯 말입니다.”

“그럼 결과적으로…. 이제는 자유가 되었으니 각자 영토를 찾아가는 과정에 마찰이 생길 수도 있겠네요.”

“세인트 왕국이 중간에서 잘 조율했으면 좋겠습니다.”

“왕국에 사정을 설명하면 성심성의껏 조율해 줄 겁니다.”

그러자 촌장은 내게 허리까지 숙였다.

“강령술사님께 어찌나 감사한지 이루 표현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예….”

“황제를 심판하고, 우리의 나라를 되찾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듣기 거북한 감사 인사를 들었다.

이 마을에 퍼진 흑사병은 거의 다 정리되었다. 흑사병에 걸린 자들은 치료되거나, 치료를 버티지 못하여 죽었다. 남은 자들은 흑사병에 걸렸다가 살아났거나, 아예 흑사병에 걸리지 않은 건강한 자들이었다.

나는 늦은 점심에 여관을 찾아왔다.

여관 주인이 날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사람들의 상태가 크게 호전되었습니다. 허허. 강령술사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리안은요?”

“방에 얌전히 있답니다. 아침이랑 점심도 잘 먹었고요.”

그래서 방으로 올라오니, 리안은 침대 구석에서 다리를 끌어모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도 반응이 없다.

“울었냐?”

“아니요.”

그러면서 고개를 든 리안의 눈가가 부어있었다.

「울었네.」

나는 의자에 무거운 몸을 앉혔다. 그리고 방독면에 성수를 채워 넣었다.

“나랑 같이 이오루이츠로 가자.”

“옆 마을이요?”

“촌장한테 들었어. 거기가 루이츠 영지의 수도라고.”

“네. 수도 맞아요.”

“거기엔 황제 몰래 설치된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에서 보육원을 운영하고 있대. 넌 거기로 가야 해.”

“가기 싫어요.”

“왜 가기 싫은데?”

“여기가 제 집이란 말이에요….”

「고작 부모 잃은 거 가지고 염병하네.」

‘야.’

「또 조용히 하라고? 알았어.」

“리안.”

“….”

리안은 소리 없이 울고 있다. 울음도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다.

“너한테는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 이오루이츠의 보육원으로 가지 않으면 여기 길바닥에 앉게 될 거라고.”

“….”

“그래도 가기 싫어?”

“싫어요…. 가기 싫어….”

“그럼 여기에 너 돌봐줄 사람은 있어?”

“없다고요!”

“그러면 싫어도 가야 돼.”

“안 갈 거야…!”

이해한다. 저 나이에 그런 일을 겪는다는 게 어떤 심정인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이 세계는 그런 사정을 이해해 줄 정도로 다정하지 않다.

나는 침대 앞으로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럼 여기서 나랑 같이 자살할래?”

그러자 리안의 눈물이 멈췄다.

“그것도 싫지?”

“….”

“네가 너무 힘들고 괴로운 건 알아.”

“모르잖아요….”

“안다고. 나도 그게 얼마나 지독한 느낌인지.”

그리고 모르겠다. 내가 지금 애한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일단은 내뱉는다.

“그렇게 주저앉아 울기만 해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진짜 몇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다고. 지금처럼 죽지 못해서 살 거라면 자기 상황을 받아들이고 움직여야 해.”

내가 리안한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이럴 자격이 없겠지만.

“계속 괴로운 것보단 차라리 괴로운 기억으로 안고 가는 게 낫다는 말을 하는 거야. 자살하지 않고 계속 살아갈 생각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

“그러지 않으면 살아도 산 게 아니야. 네가 20살, 30살이 되어서도 지금의 어린 모습처럼 마냥 무력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해봐.”

어릴 때 그런 걸 상상하고 있으면 두렵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두려움이 행동과 사고를 바꾸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 미래를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 순간을 과거로 만들어. 그러면 하루가 지날 때마다 점점 더 과거가 될 거야.”

“그러면 다 괜찮아지는 거예요?”

“더는 아프지 않게 돼.”

걱정이다. 이 말을 리안이 이해할 수 있을까. 지나친 충격요법이 되진 않을까.

“아저씨 가족들도 저처럼 됐어요?”

“…비슷해.”

“그러면…. 지금 아저씨는 안 괴로워요?”

“적어도 그 어린 시절의 기억을 탓하며 지금까지 괴로워하는 패배자 새끼는 아니야.”

리안은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그리고 아늑한 침대에서 스스로 벗어나 딱딱한 바닥에 섰다.

“그래. 어른스럽네.”

어른스럽다고 말하자마자 팔을 벌리며 내게 안기려는 것이다. 벼랑 끝에서 유일하게 의지가 되는 어른이 어떻게 보이는지, 역시나 그런 어른에게 안기고 싶은 것이 어떤 마음인지는 나도 잘 알지만.

나는 리안을 거부하고 그대로 일어났다.

“조심해. 너한테 호의를 베풀었다고 무조건 좋은 사람인 건 아니야.”

“아저씨는 착한 사람이잖아요.”

“그렇게 보여도 의심하라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앞으로 리안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리안의 상황에 행복해지는 방법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비극을 최대한 예방하는 방법이라면 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해주면, 어떻게 말해주면 얘한테 이 이상의 비극이 생기지 않을까.

“너한테 누군가 접근할 때 이 말을 항상 명심해.”

나는 고민하다가 내뱉었다.

티 없이 맑은 아이의 인생에 나의 혼탁한 가르침을 퍼뜨리는 기분이다.

그렇게 한 사람의 인생에, 평생에 관여하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강자한텐 대체로 좋은 사람들이 꼬이고 약자한텐 대체로 나쁜 사람들이 꼬여.”

* * *

핀터루이츠에서 마차를 빌려 해가 떨어질 때까지 동쪽으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마주치는 행인이나 마차는 하나도 없었다.

“원래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었어요.”

“이오루이츠에 가본 적 있어?”

“딱 한번이요. 마을이 엄청 커요.”

“엄청 크면 마을이 아니라 도시라고도 불러.”

“그럼 도시라고 할게요. 이오루이츠에는 3층짜리 건물도 있거든요. 실제로 보면 엄청 높아요.”

마차는 적당히 한쪽 길목에 세워두었다.

모닥불을 피우고 리안과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아저씨, 아까부터 궁금했는데요. 눈이 왜 악령처럼 빨간색이에요?”

“악령의 힘을 쓰니까. 그렇다고 내가 악령이라는 건 아니야.”

“악령의 힘은 어떻게 쓰는 건데요?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

“음…….”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가만히 방독면을 보았다.

“다섯 살 때였어. 내 아빠는 술만 마시면 나와 여동생을 때렸지. 우리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면서 말이야.”

자연히 그때의 나는 나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폭력에 당할 때마다 나쁜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고, 다섯 살이라는 나이에 살의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사실,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어도 그런 살의를 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몇 년간 멍이 들고 피를 흘리면서 정말로 이대로는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그 남자를 미워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품게 되어버린 것이다.

아마도 생존 욕구에 가까운 살의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못하겠는가.

“맞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더라고. 여섯 살, 일곱 살, 여덟 살, 아홉 살이 되어도 폭력은 계속되었어. 몇 년이 지나도 상황은 바뀌지 않는 거야.”

그러다 날 움직이게 한 결정적인 계기는 그 남자의 악령화였다.

그의 눈이 빨갛게 변하고, 그의 주먹이 악마처럼 웃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모습으로 내 여동생을 때리고 있었어.”

늦은 밤, 비명을 지르지 못하도록 리인의 입을 틀어막고, 어째선지 리인의 옷을 발가벗긴 채.

과거의 기억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지독하게 선명하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 하고 끊어지더라.”

놀라웠던 건 극한을 넘어선 분노가 오히려 침착함을 가져다준다는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승천자한테 당했을 때도 그때만큼 화가 나진 않았던 것 같다. 내 평생에 그때만큼 화가 난 적이 없다.

어리기도 했고, 그런 경험이 처음이기도 했으니까.

“몰래 부엌으로 들어가서 무기를 찾았어.”

식칼을 쥐었다. 그런데 칼 손잡이가 당시 내 손보다 두꺼워서 잡히질 않았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손도끼였다.

그나마 쥘 수 있는 날붙이들 중에는 가장 손잡이가 얇기도 했고, 왠지 손도끼라면 칼보다 쉬울 것 같다는 직감이 있었다.

“뒤에서 머리를 찍었어.”

짐승처럼 위아래로 움직이던 그 등짝을 충동적으로 내려찍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는 죽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정수리를 찍었다. 아무런 지식도 없이 그냥 그곳이 약점처럼 보였다. 그 또한 직감이었다.

그렇게 악령이 된 그 남자를 쓰러뜨리고 쓰러진 그 악령을 몇 번이고 더 내려찍은 것 같다.

내 팔이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녀석의 몸은 고기처럼 변해갔고, 혹여나 녀석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욱 팔을 움직이게 하였다.

한참을 그러다가 팔에 쥐가 나서 멈출 수 있었다.

“그때가 열다섯 살이었지.”

그날 밤, 퉁퉁 부은 눈으로 잠든 리인을 지켜보고 있는데 머릿속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당시에 내가 너한테 뭐라고 했더라?」

잘 했어. 힘을 빌려줄게. 나쁜 놈들한테 더는 당하지 말자. 허락만 해주면 너와 영혼을 함께하겠다. …대강 그런 소리들을 늘어놓았다.

「네 영혼과 내가 합체되지 않아서 당황스러웠어. 그래서 급하게 공존하는 방향으로 가느라 횡설수설했나 봐.」

어렸던 나는 그게 악령인지도 모르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 받아들이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힘이 있었으면 진작 해결될 일이었어. 거기에 용기까지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

“….”

“그래서 오늘 낮에 너한테 한 말이 이 이야기의 교훈이라는 거야.”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밤.

조용하고 진솔한 이야기가 끝났다. 불길이 조금 약해진 모닥불 앞에 리안은 곤히 잠들었다.

「오늘은 잿빛세계로 안 가고 여기서 잘 거야?」

‘그래야지.’

나는 거미 악귀 네 마리를 소환해서 동서남북에 두었다. 녀석들은 무언가 이쪽으로 접근하면 날 깨울 것이다.

쏟아지는 별들을 보며 눈을 붙였다.

그리고 자던 중, 갑작스레 내 심장이 수축하였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리안을 보았다.

- 쟤가 죽였어……

리안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처럼.

- 쟤가 죽였어……

- 쟤가죽였어쟤가죽였어쟤가죽였쟤가죽였어쟤가죽였어쟤가죽였어쟤가죽였어쟤가죽였어쟤가죽였어

‘그것’이 리안에게 밤새도록 속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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