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한없이 모진 운명 (2)
루이츠의 영주는 목 주변에 검은 반점이 있고 팔다리가 붉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호흡도 가늘게 떨리고 있어 나는 솔직히 그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나는 영주로부터 굉장히 많은 피를 뽑아냈다. 자칫 잘못하면 과다출혈로 죽음에 이를 수 있을 정도였다.
“강령술사. 귀공 덕에 살았소.”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영주는 내 생각보다 건강했다. 그는 방혈 도중에 기절하지도 않았고 내 치료가 끝나자마자 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곧잘 거동했던 것이다.
“황제는 내 형제와 친족들을 말살하였소. 그래서 다음 왕위를 계승할 인물이 없던 참이오. 만약 내가 잘못되었다면…. 이 나라에는 역병이 도는 것보다 더 큰 혼란이 생겼을 것이오.”
나름 지배층인 사람한테 묻고 싶은 게 생겼다.
“어째서 아직 ‘영지’와 ‘영주’이신 채로 있는 거죠? 비첸크로이 제국은 몰락하였고 루이츠 영지는 다시 예전처럼 왕국이 될 수 있는 게 아닌지 궁금하네요.”
“제국과 전면전을 벌이고 승전한 주체는 세인트 왕국이 아니겠소? 우리가 아직 왕국이 되지 못한 건 세인트 왕국이 우리의 독립 의사를 확인하고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오.”
「그냥 알아서 예전처럼 땅을 나누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런다고 간섭할 제국도 없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전쟁이란 땅따먹기처럼 단순한 게 아니라는 것 같다.
“이 땅은 엄연히 제국령에 속하고 있소. 제국이 몰락했다는 소식은 제국령 전체에 퍼졌겠지만, 그것을 믿고 말고는 아직 각국의 판단에 의존하고 있소.”
“그래서 세인트 왕국이 하나씩 다 봐주고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소. 다들 제국 몰락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독립을 요청하기 위해 승전국인 세인트 왕국에 사신을 보내고 있을 것이오. 그리고 일부는…. 제국의 심장이 꺼졌어도 자신들은 몰락하지 않았다며 제국령의 권리를 유지하려 할 것이오.”
황제는 충성스러운 피지배층을 많이도 두었다. 백만 대군이 전멸하고, 흑사병이 만연하고, 수도가 멸망하고, 황제와 원로원이 죽고, 왕국이 정식으로 승전하여 각국의 자치권을 하나씩 인정하고 있는 시국인데,
그래도 자신들이 제국의 일부라며 버티고 있는 국가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역병이 있어 그들이 아직 뭉치지 못하고 있을 뿐이오. 그리고 언젠가 이 역병이 끝난다면, 제국의 잔당들이 고름처럼 터져 새로운 제국을 건국하려 할 것이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미안하오. 이 전쟁에 누구보다도 앞장선 귀공의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 소리만 늘어놓은 것 같소.”
「뼛속까지 노예인 새끼들. 독립을 시켜준다는데도 끝까지 제국으로 남아서 초를 치네.」
「아니, 황제가 그렇게 대단한 놈이었어? 제국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충성을 바칠 정도로?」
‘우리가 아는 황제와 그들이 아는 황제는 달랐을 거야.’
좀 전까지만 해도 생존에 기뻐했던 영주의 얼굴에는 어느새 근심이 서려있었다.
“하여…. 귀공은 세인트 왕국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몸이오? 귀공의 정체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어 구태여 묻고 싶소.”
“제 출신이나 이름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는 건 제가 그걸 비밀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 깊게 묻지는 않겠소. 다만, 이 얼굴에 궁색한 철판을 깔아서라도 귀공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소.”
힘을 빌려달라는 말이겠지 싶다.
“일단은 들어보겠습니다.”
“이 역병이 끝나면 영토분쟁, 이념 전쟁 등 다시금 피바람이 불어닥칠 것이오. 그리고 우리들의 피바람에 세인트 왕국이 매번 나서서 넓은 땅의 수많은 충돌들을 중재할 수도 없는 노릇이오. 일종의 자정작용, 후처리라고 설명하겠소.”
인간 대 역병이라는 피바람이 인간 대 인간이라는 피바람을 늦추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역병이 끝나면 제국령이었던 국가들은 다시 싸울 것이다.
“여전히 제국에 충성하는 자들은 제국령이었던 시절에 가지고 있던 권리, 영토, 자원 등을 되찾으려 할 것이오. 반대로 우리처럼 제국을 거부하고 독립하려는 국가들은 제국령보다 더 이전의 시대에 가지고 있던 것들을 되찾고 나누려 할 것이오.”
비첸크로이 제국이 어떤 속국들에겐 영광의 시대였고, 어떤 속국들에겐 강점(强占)의 시대였다는 것이다.
「그냥 인간은 다 전쟁광인 것 같네. 다들 전쟁을 못해서 난리라고. 기껏 풀어줬더니 또 자기들끼리 물어뜯지.」
“뿐만 아니라 독립을 추구한 국가들끼리도 싸울 수 있소. 왕국군이 철수하면 분쟁이 시작될 것이오. 사병을 둔 영주들이 무법지대를 앞다투어 차지하려고 했던 경쟁의 시기처럼, 모든 땅에서 제국령의 부스러기를 차지하고자 싸울 것이오.”
“제국을 거부한 나라들끼리 싸울 이유가 있습니까? 어차피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누구의 땅이었는지는…….”
말하다가 생각났다.
생각난 것을 영주가 그대로 말했다.
“황제는 각국이 가진 역사의 기록물과 산증인들을 모조리 제거했소.”
제국이 멀쩡했던 시절에 황제는 속국들에게 갈등의 씨앗을 끊임없이 퍼뜨렸다. 불평등하게 권리를 주고 빼앗으며 말이다. 그래서 제국령의 속국들은 끊임없이 분쟁과 내전을 겪어왔다.
“그러니 반(反) 제국 연합이 형성될 수가 있겠소? 무엇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사실을 확인할 증거도 증인도 없으니 말이오.”
‘황제….’
“각국 사이에 생긴 갈등의 골은 여간 깊은 것이 아니오. 그리고 역병이 끝나면 갈등의 골은 정점에 달할 것이오. 이젠 모든 걸 결정했던 압도적인 중재자가 없으니.”
「이건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났어. 몸이 여러 개도 아니고…. 사실을 확인할 증거도 증인도 없으면 어느 나라가 맞는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잖아. 무력으로 해결하려면 또 어딘가의 편을 들어주고 반대편을 해치워야 하는데.」
“상황은 충분히 이해가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뭘 어떻게 해드리면 좋겠다는 뜻입니까?”
“우리 편이 되어서, 우리 것을 지키고 되찾는 싸움에 힘을 보태주시오.”
영주가 얼굴에 철판을 깔아서라도 하겠다는 말이 이거였다.
“우리 루이츠 사람들은 왕국에 친화적이오. 황제가 말살하려고 했던 세인트교가 우리 영토에서 비밀리 활동하는 것도 묵인하였고, 언젠가는 왕국과 수교를 맺어 보다 생산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싶었소.”
「혀가 길다, 길어. 얘도 속이 깨끗한 놈은 아니네.」
“말씀하신 건 거절하겠습니다.”
“이런 감언이설로 붙잡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거금과 저택, 그 이상의 재물과 권리를 대가로 약조해도 불가능하오?”
“그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알겠소. 다만 영주로서 내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제안할 수밖에 없는 입장을 헤아려주길 바라오. 왕국이나 귀공의 미움을 사고 싶지는 않소.”
“예. 그것도 이해합니다.”
영주의 입장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자기 나라가 우선이라는 건 무엇보다 당연한 생각이니까.
「열심히 피 뽑아서 살려줬더니 상대한 시간이 아깝다. 이 새끼 상대 안 했으면 스무 명은 더 살렸겠어.」
못 들은 걸로 하고 흑사병이나 치료해야겠다.
“어서 영주님의 땅에 퍼진 역병이나 치료하러 가보겠습니다.”
“이곳에는 얼마나 머무를 계획이오?”
“역병에 잘 대처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리 오래 있지는 않을 것 같네요. 길어야 이틀입니다.”
“보수를 마련해두었으니 나갈 때 가져가시오.”
「이런 뱀 같은 새끼! 돈 안 받는다니까 억지로 처먹이는 거 아니야?!」
“…받아도 되는 건가요?”
“귀공이 내 제안을 거절하여도 어차피 줄 생각이었소. 다른 의도는 없으니 염려 마시오. 사실 그 액수도 귀공에게 입은 은혜에 비하면 부족하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내가 더 감사한 입장이오. 앞날에 행운이 있기를 기도하겠소. 강령술사.”
영주의 저택 앞에는 셰르카와 리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 날 여기까지 안내했던 젊은 남자가 큼지막한 돈주머니를 들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는 자그마치 1만 루아 상당의 동전과 보석이 들어있었다.
「영주…. 사실은 좋은 놈이었네.」
* * *
이곳 이오루이츠에는 황제 몰래 설치된 교회가 있고, 그 교회가 보육원을 운영한다고 했다.
그래서 교회를 수소문해 찾아와보니 딱 보기에도 세인트교의 성녀 같은 노파가 날 반겨주었다.
“황제는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잦은 분쟁과 전쟁으로 인해 매일 같이 고아들이 생겨나도 무시하였죠.”
“황제의 외면에 반발은 없었습니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공개적으로 보육원을 설치해 지원금도 받으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불량한 청년들이 나타나 모든 일을 방해하였습니다. 제국의 아이들은 거친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죠.”
“황제가 벌인 짓이겠군요.”
“황제가 벌였거나, 벌어지고 있음에도 황제가 묵인한 것이겠죠. 훗날 다른 속국의 신도에게서 들었는데, 황제는 수많은 전쟁고아들을 모두 수용하는 것이 국가적 낭비라고 발언하였다 합니다. 아, 이쪽입니다.”
작은 마당이 딸린 큰 집이다. 얇고 새하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성녀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역병이 퍼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병을 이겨낸 강령술사님과 리안이라면 괜찮겠지요.”
“애들은 집 안에 있어요?”
“예. 아이들이 바깥으로 나오는 것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한창 밖에서 뛰놀아야 할 아이들인데 말이죠. 그런 아이들을 집에 가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제가 이오루이츠를 떠날 때쯤이면 바깥으로 나와도 될 겁니다.”
나는 성녀와 함께 보육원 내부를 돌아보았다. 모든 것이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 있고 아이들의 상태도 건강해 보인다.
“강령술사다!”
“진짜? 어디?”
“진짜로 가면을 쓰고 있어!”
“가면 아니고 방독면이야.”
“가면이거든? 얼굴을 가리잖아.”
“바보야. 너 방독면 뭔지 모르지?”
“옆에 애는 누구지?”
또래 아이들의 시선을 받은 리안은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세인트교의 타락한 승천자와 제국의 황제까지…. 저로선 상상하기 힘든 거악을 무찌르시고 이렇게 먼 타국까지 오셔서 치료 활동을 펼쳐주시니, 한없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저도 한 성녀로서 강령술사님의 헌신을 본받고 싶은 마음입니다.”
나는 성녀에게 작은 돈주머니를 넘겼다. 대충 3000루아는 될 것이다.
“이건…?”
“보석들만 좀 빼서 넣었습니다. 급할 때 쓰시죠.”
“저희가 사례를 해드려도 부족한 입장인데 이러시면…. 이곳에 재정적인 문제는 없으니 남은 여행에 보태 쓰시지요. 이 돈은 강령술사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편이 세상에 더 이로울 것 같네요.”
“아닙니다.”
적당히 이유를 붙이자.
“사실…. 여행 중에 보석은 돈으로 교환하기 번거로워서요. 그렇다고 바닥에 버릴 수도 없으니까 좋은 곳에 쓰려는 겁니다.”
“정 그러시다면….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성녀는 위층에 올라가더니 자그마한 나무 십자가를 들고 왔다.
“가시는 길에 거악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
나는 거절하지 않고 나무 십자가를 받았다.
「앗! …따갑네.」
은이 아니라 나무로 만든 것인데 통증이 느껴진다. 이런 아무 효과도 없는 재질에 신성함을 더하느라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을까.
“잘 쓸게요.”
“세인트 왕국의 십자가만큼 신성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성녀들이 열심히 만든 것입니다.”
“이 아이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리안의 등을 살짝 밀어서 성녀 앞으로 보냈다.
“리안?”
리안은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자 성녀는 리안과 눈높이를 맞춰서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리안. 여기엔 좋은 친구들이 많단다. 그리고 씩씩하게 기다리면 나중에 강령술사님께서 또 찾아오실 거야. 강령술사님은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실 수 있는 분이거든. 그렇죠?”
“지금 바로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하루 이틀은 여기서 역병을 치료하고 마지막 날 아침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러시겠다니 더 안심이 되네요. 다음엔 교회 말고 곧장 여기로 와주시면 성녀들이 알아서 문을 열어드릴 겁니다.”
나는 리안과 눈을 마주쳤다.
성녀는 눈치껏 리안의 어깨를 잡았다.
“자, 어서 강령술사님께 인사드려야지?”
“아저씨….”
“금방 돌아올게.”
울먹이는 눈망울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다. 손에 들고 있는 십자가의 쓰라림보다 어딘가 설명할 수 없는 곳이 더 아픈 것 같다.
“아무튼 조만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부디, 다치는 일 없이 건강하시길….”
나는 애써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 *
페인은 영력이 다 떨어질 때까지 셰르카와 함께 흑사병을 치료했다. 페인이 검은 피를 뽑아내면 셰르카가 흑마법을 써 그 위험한 피를 검은 연기로 만들어 없애버리는 것이다.
원래는 페인 곁에서 검은 피를 치워줄 사람들이 필요했는데, 셰르카 한 명이 보조하면서 치료의 효율은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그냥 이리를 써서 검은 피만 포식하면 편할 텐데 말이다.”
“사람들이 그 촉수를 보고 가만히 있겠냐.”
흑사병을 치료하고 있으면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처음엔 육체적, 영적 소모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소모가 컸다.
하지만 반복적인 치료 속에 페인은 점차 무뎌지는 감각을 느꼈다.
밤이 되어서 페인은 도심 바깥에 잘 곳을 마련했다. 저번처럼 길가 옆 숲에 마차를 세우고 모닥불을 피워둔 것이다.
「아무한테나 말하면 좋은 방을 제공해 줄 것 같은데 이게 뭐야?」
“넌 어찌 그렇게 불평만 많은지 의문이구나. 너는 페인의 생각을 가장 잘 아는 악령이 아니더냐?”
「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참견하지 마.」
“아까도 그렇고 항상 페인의 생각을 모르는 것 같구나.”
「흑사병으로 사업하는 게 어때서? 여기서 흑사병을 더 퍼뜨리고 돈 많은 인간들을 치료하는 거잖아.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야?」
“이럴 때 보면 네 광기가 셰르카보다 더 심해. 이 악령 자식아.”
「이젠 둘이서 날 따돌리네.」
“생각이란 걸 해보아라. 흑사병을 의도적으로 퍼뜨려서 그걸 돈벌이로 쓰면 얼마나 큰 업보가 되겠느냐? 우리가 지금 흑사병을 치료하고 낙인의 돌을 찾으려는 것도 다 그것 때문이라는 걸 모르나? 차라리 페인한테 지옥에 떨어지라고 저주를 해라.”
「난 페인을 저주하지 않을 거야.」
“말이 안 통하는군. 저런 것을 안고 살아가는 네가 존경스럽다.”
“그래도 나한테 힘을 준 놈이야. 항상 내 생각만 해주는 내 편이고.”
어느덧 모닥불이 약해지고 있다.
“이제 자야겠어.”
“알겠다.”
“준비는 됐지? 셰르카.”
“지금 악의 숫자가 얼마인가?”
「겨우 300.」
“그럼 난 자리를 비우도록 하마.”
셰르카는 사라졌고 페인은 악귀 한 마리도 소환하지 않은 채 잠들었다.
수면의 자유를 빼앗긴다는 것은 페인을 점점 피폐하게 만들었다. 24시간 피곤한 몸이 금방 수면을 취해도, 결국 어딘가에서 사람들이 흑사병에 죽는다면 어김없이 악은 쌓인다.
그리고 악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것’은 더 자주 출몰하게 된다.
밤의 어둠이 짙어졌다.
스으으….
바람이 풀잎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주변에서 우는 풀벌레들이 침묵했다.
- 안녕……
오늘 밤에도 ‘그것’이 페인을 찾아왔다.
- …….
‘그것’은 페인의 머리맡에 있는 나무 십자가를 주워들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옆으로 90도 꺾었다.
- 귀여워……
뚜둑!
‘그것’은 나무 십자가를 한 손으로 부러뜨렸다.
“으으으….”
페인은 몸을 뒤척이며 작게 신음했다.
‘그것’은 페인의 머리맡에 서서 허리를 곡선으로 기괴하게 굽혔다. 그대로 가만히 페인을 내려다보았다.
그저 자고 있는 페인을 보며 인사를 할 뿐,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다.
- 안녕……
혹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이거나.
- 안녕……
“슈탈룬헤르토툼.”
그 순간, 이리의 붉은 촉수가 ‘그것’의 허리를 재빠르게 통과했다.
쐐애액!
그와 동시에 어둠 속에 숨어있던 셰르카가 모닥불 옆에 착지했다.
“자고 있는 녀석한테 인사하는 꼴이 우습구나.”
셰르카는 해진 로브를 벗어던지고 이리저리 가짜 눈알을 굴렸다. 이리의 안쪽에 있는 눈알 그림들도 바쁘게 시선을 옮겨 다녔다.
‘역시 보이지 않는군.’
- 안녕……
‘하지만 영혼의 소리는 들린다.’
부웅!
이리의 촉수들이 한쪽으로 거칠게 쇄도했다.
콰앙!
촉수에 강타당한 나무가 쓰러졌다.
“약을 마신 페인은 널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그의 잠을 방해하며 즐거웠느냐?”
- 안녕……
“널 사냥하기 위해 준비한 함정이란 말이다. 그러니 살고 싶다면 날 상대해라.”
‘그것’은 셰르카의 도발에도 침묵했다.
비정상적으로 조용한 숲이 되었다. 바람 소리도 풀벌레 소리도 없는 적막 속에 그녀와 페인의 호흡 소리만이 작게 퍼졌다.
‘도망쳤나?’
스으으…
풀잎에 바람 스치는 소리가 들린 순간, 셰르카는 그 방향으로 흑마법을 발동했다.
‘기형.’
그러자 이리가 촉수를 움찔했다.
“뭔가 걸렸느냐?”
“퀴이이이익!”
‘사라졌다고?’
셰르카는 주변을 빠르게 돌아보았다.
모닥불의 빛이 옅어지다가 밤의 어둠에 맞닿는 경계선. 그 둥근 경계선을 따라서 검은 연기가 벽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흑마법으로 영혼의 벽을 쳐도 사라질 수 있는 존재…. 아니야…. 그것이 가능할 리가….’
“퀴익…. 퀴이익….”
넓게 펼쳐졌던 촉수들이 본체 쪽으로 돌아왔다. 그러더니 셰르카의 상반신에 붙어서 겁먹은 강아지처럼 오들오들 떠는 것이다.
“녀석의 기억을 보았느냐?”
이리는 조용히 떨기만 했다.
“…보았구나. 극히 일부를.”
그때, 이리의 촉수 하나가 페인을 가리켰다.
드드드드드드득!!!!!
누워서 자고 있던 페인의 허리가 번쩍 들렸다. 그의 발바닥이 지면에 붙고 그의 두 팔이 머리 위로 꺾여서 두 손바닥을 지면에 붙였다. 그리고 허리가 더 들렸다. 누운 그대로 일어선 듯 기괴한 자세가 되었다.
“페인?”
푸푸푸푹!
페인의 등이 뚫리면서 그림자 같은 염소 다리가 여섯 개나 튀어나왔다. 동시에 빨판 달린 검은 촉수들이 방독면의 부리 부분을 위아래로 벌리면서 세 개가 튀어나왔다.
뚜둑!
페인의 목이 직각으로 꺾였다.
“안녕…?”
그의 턱이 양쪽 쇄골 사이에 파묻힐 지경이다. 그런 기괴한 모습으로 셰르카를 보고 있다.
“안녕…? 안녕…? 아아아안녕…?”
‘그것’의 목소리 사이에 페인의 절규가 뒤섞여있었다.
“안녀어어커커거거걱어아아아아아…! 그으으으으으으으으…!”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셰르카는 저절로 주먹이 쥐어지고 눈이 떨리고 얼굴이 일그러진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경지의 화가 치밀어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고 목구멍이 아프도록 소리를 지르게 된다.
그녀는 광분(狂忿)했다.
“그 녀석은 내 것이다!!!”
동시에 검은 소용돌이와 이리의 촉수들이 페인에게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