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한없이 모진 운명 (3)
“그 녀석은 내 것이다!!!”
검은 소용돌이와 이리의 촉수들이 페인에게 돌진했다.
검은 소용돌이는 페인을 집어삼켜서 붕 띄웠다. 그 속에서 이리의 촉수들이 달려들었다.
콰드드득…!
페인의 몸에는 상처 하나도 내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자라난 염소의 다리와 빨판 달린 촉수만을 휘감고 뚫어버리는 것이다.
“아아아아아안녀어어어어억…!!”
“페인! 놈에게 잠식당하지 마라!”
염소의 다리 여섯 개를 모두 제거했다. 입에서 튀어나온 촉수 세 개도 제거했다.
“정신 차려라!”
그 순간, 이리의 촉수들이 일제히 터져버렸다. 셰르카의 코와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페인을 띄웠던 소용돌이가 사방으로 터지며 사라졌다.
철퍽!
그는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기괴하게 일어섰다.
“퀴이익!”
그 즉시 이리의 촉수들이 재생되어 그를 포위했다.
“페인….”
방독면의 렌즈 너머에 붉은 안광이 선명했다.
“나다. 셰르카. 너의 조력자…”
“거어어어어억!!”
그는 셰르카를 향해 검은 피를 토해냈다.
사아아…
셰르카는 이리와 함께 몸을 전이하여 페인의 배후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저쪽 땅에 뿌려진 검은 피를 눈여겨보았다.
‘흑사병…!’
뚜둑! 드드득!
페인의 목이 180도 돌아갔다.
몸을 앞으로 향한 채 머리는 뒤로 향한 것이다.
‘좀 전에는 방혈을, 이번엔 흑사병이 내게 통한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셰르으으으그으카아아…?”
“그래! 나다! 너의 조력자 셰르카란 말이다!”
“허어으으…. 그거거극…. 무서어어….”
그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셰르카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두 팔을 벌렸다.
“괜찮다. 그 몸은 내가 고쳐주마. 무서울 것 없다….”
위아래로 벌어진 방독면의 부리 부분에 검은 피가 들어차있었다. 페인이 비틀거리며 셰르카에게 다가갈 때마다 검은 피가 출렁거리며 쏟아졌다.
그런 페인의 모습을 마주한 셰르카.
그녀는 다른 것이 아니라 조바심을 느꼈다. 불안했다. 화가 났다.
“망가졌어도 고쳐주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실 그녀는 페인이 지금 얼마나 아파하고 있는지,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이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는 유일한 ‘물건’을 누군가 망가뜨리거나 빼앗았을 때 느끼는 것과 비슷했다.
셰르카는 그런 인간이었다. 세월에 무뎌지고 오래전에 결여되어 불완전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어야 할 무언가를 조금씩 이리에게 먹혔기 때문이다.
“이성의 끈을 놓지 말거라. 지금 네 손을 잡아주겠다.”
“퀴이익!!!”
그러자 이리가 지면에 촉수를 꽂고 버텼다.
“퀴이이이익!!!”
“….”
셰르카는 자연히 걸음을 멈췄다.
페인은 비틀거리며 다가오고 있다. 이쪽에 얼굴과 등을 동시에 향한 채 뒷걸음질로 다가오고 있다. 그러면서 울고 있다.
울고 있다.
페인의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속을 뻔했구나. …힘으로 안 되니까 그런 쪽으로 공략하는 것이냐?”
“그으으으…. 나아… 무서어… 셰르으카…”
“내 평생 네놈만큼 사악한 존재는 본 적이 없다. 정말이지 격이 다르구나.”
그러자 페인이 움직임을 멈췄다.
페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것’이 움직임을 멈췄다.
“………안녕… 다음에… 또…”
드드득!
그의 목이 원래 방향으로 돌아갔다.
풀썩!
힘없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윽고 ‘그것’이 사라졌음을 증명하듯, 지면에 꽂혔던 이리의 촉수들이 본체로 돌아갔다.
“페인!”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가 페인의 상태를 살폈다.
* * *
핏물처럼 붉은 하늘.
영혼의 얼굴이 뒤섞인 먹구름이 비명을 지르며 떠다니고 있다.
공기까지 붉다. 방독면을 뚫고 피비린내가 들어와 코끝을 역하게 찌른다.
「여긴 어디야?」
나도 모르겠다. 악몽일까.
하지만 악몽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하며, 가위라고 하기엔 너무 비현실적이다. 눈에 보이는 것부터 몸으로 느껴지는 감각까지 믿을 수가 없다.
나는 손목을 살짝 비틀어봤다.
‘…꿈이 아니야. 꿈이 아니잖아?’
「도대체 뭔데? 약을 먹고 잠든 거 아니었어? 왜 이런 곳에서 깨어난 거야?」
나로 인하여 퍼진 흑사병이 수많은 이들을 죽이고 있다. 그래서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영혼에 악이 쌓인다. 그래서 잠을 자더라도 도중에 깬다. 몸이 악령화 증상을 호소하든 ‘그것’의 위협을 느끼든 어떤 식으로든 깨는 것이다.
그리고 셰르카가 키우는 이리는 무엇이든 먹는다. 실존하는 물체와 살점부터 시작해 영혼이나 기억이나 감정까지도 먹을 수 있는 악령이다.
「이리를 이용해서 ‘그것’의 기억을 보려고 한 거잖아.」
‘맞아.’
따라서 내가 잠든 도중에 ‘그것’이 나타났을 것이다.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셰르카는 ‘그것’을 기습하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그것’에 대한 정보를 얻어보려고 시도한 일이다.
‘당했다는 건가?’
「누가? 셰르카? 아니면 너?」
‘어느 쪽이든 당한 것 같아.’
혼란하게 뒤틀린 앙상한 나무들이 주변에 있다. 발치에는 핏물 섞인 축축한 흙이 밟힌다. 흙 알갱이 사이사이에 무언가의 뼛조각이나 살점 따위도 섞여있는 것 같다.
‘내가 잠들었을 땐 분명 밤이었어.’
다시 비명이 울리는 하늘의 구름을 보았다. 이곳은 밤처럼 어둡지만 빛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하늘에 별들이 없다.
온통 이 세상을 물들이고 있는 붉은빛의 근원을 찾아 이리저리 하늘을 둘러보았다.
「저게 뭐야….」
하늘에 새까만 구멍이 뚫려있었다.
아니, 그 새까만 구멍은 이곳의 ‘달’이었다.
새까만 달 주변에서 붉은 광원이 둥글게 퍼지고 있었다.
‘개기일식(皆旣日蝕).’
「그게 뭔데?」
전에 리인한테 들어본 적이 있는 현상이다.
또한 세인트교의 성서에서 읽어본 적이 있는 현상이다.
‘훗날, 달이 태양을 집어삼키면 그 세계는 거악의 시련을 받으리라.’
시련을 이겨내지 못한 세계는 멸망하였다.
지천에서 악마의 하수인들이 생명을 벌하고 혼돈의 피조물들이 광기를 낳아 모든 것을 파괴했다.
강에서는 핏물이 흐르며 토양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니, 곧 모든 것이 핏빛으로 변하였다. 사람보다 커진 벌레들은 떼 지어 무고한 이와 무고하지 않은 이를 가리지 않고 살점을 탐하였다.
풀과 잎사귀는 핏빛 광명에 녹아내려 세상을 물들이는 새로운 핏물이 되었다. 혼돈에 빠진 자들은 한순간도 버티지 못해 생명을 잃었고 방황하는 영혼들은 검은 구름이 되어 영원히 절규하였다. 죽지 못하여 악마들의 잔악한 놀이에 당한 자들은 차라리 자신들의 숨통이 끊어지기를 간절히, 또한 영원히 바랐다.
모든 것은 업보요, 선택이리라.
대립하는 선악 사이에 선택권이 있던 인간들이 곧 세계의 선악을 구분하는 주체였으니, 선은 힘을 잃어 사라지고 악은 힘을 얻어 잉태하였다.
자, 이제 하나의 세계가 악마의 손에 들어가 재창조되었으니.
피처럼 붉어진 세계 또한 그곳에 살아가던 만인의 선택이리라.
‘세인트교 성서에서 읽었던 지옥이랑 똑같아.’
「너 안 무서워? 악령인 나도 무서운데…?」
‘진짜 지옥은 아닐 거야.’
「무슨 근거로?」
악마, 악마의 하수인, 혼돈의 피조물, 죄인과 죄인의 영혼 따위는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지금 존재로서 느껴지는 것은 하늘에 떠다니는 영혼의 구름밖에 없는데.
이 세계는 뭔가 그럴싸하게 흉내만 낸 것 같다. 부실한 근거로 내세운 직감에 가까운 결론이지만.
‘아마도 영혼 안에 만들어진 세계야. 리비카의 구름 위 세계처럼.’
「설마 ‘그것’의 영혼인가?」
「…그러면 왜 너랑 나랑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지? 리비카의 세계에서 우리는 따로 떨어졌다가 실재세계의 부활하는 육체에서 만났잖아.」
‘모르지.’
이해할 수도, 정의할 수도 없으니까.
* * *
그리고 눈을 깜박이자 아주 가까워진 셰르카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어느 순간에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깨었느냐?”
“왜 이렇게 얼굴을 들이밀고 있어?”
“안구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래서?”
“너의 안구는 운동하지 않았다. 꿈을 꾸진 않았다는 뜻이지.”
그녀의 얼굴 뒤로 하늘이 보인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하늘의 색깔이 날 안심하게 하였다.
그런데 입 주변이 뭔가 허전하다. 축축한 것 같기도 하고.
「네 입술에 성수를 뿌렸네. 아까보다 악이 줄어있어.」
그런데 입 주변이 허전한 건 왜일까. 어째선지 실재세계의 신선한 공기가 너무도 시원하게 내 속을 오가고 있다.
그래서 직접 손으로 만져보았는데, 방독면의 부리 부분이 벌어져 있었다.
“페인. 내 추측이 맞았나?”
“뭐가?”
“잠든 너에게서 안구 운동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꿈을 꾸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
나는 좀 전에 보았던 붉은 세계를 셰르카에게 설명했다. 셰르카 또한 내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설명해 주었다.
“이렇게 되면 악몽을 꾼 게 아니라 진짜 그 세계에 갔다 왔다는 거네.”
“네가 보았던 세계는 ‘그것’의 영혼이 가진 기억의 일부였다. 영혼이 만들어낸 다른 차원의 세계이자, 환각이자, 체험이었지. 리비카의 그것처럼 말이다.”
“이리가 먹었다는 극히 일부의 기억은 어땠어?”
“이걸 기억이라고 해야 할지 난감하구나.”
셰르카는 풀잎 사이로 지나가는 이름 모를 벌레를 밟아 죽였다. 그리고 가만히 벌레의 사체를 내려다보았다.
쩌어…
이리의 촉수 하나가 발치로 내려가서 벌레를 삼켰다.
“예를 들어…. 돼지의 기억을 본다면 어떨 것 같나?”
“무슨 말이야?”
“돼지의 시선, 돼지의 생각을 인간인 내가 보자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겠지.”
“나는 ‘그것’의 기억을 보았다. 극히 일부에 불과한 기억이었지만 그보다 해괴한 경험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언어를 쓰고 무엇을 원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단 말이다. 인간이 아닌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도 뭔가 유의미한 정보가 있을 것 같은데.”
“악명은 ‘벨드샤’. 지옥에 근원을 두고 있는 악이 실재세계로 흘러들어와 하나의 존재로서 잉태한 ‘악령’이었다.”
벨드샤.
“무엇이 그것의 악명을 벨드샤라고 정했는가 생각해 보면 악마의 뜻임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잿빛세계의 이물들은 모두 악명을 가지고 있다. 이물들의 악명을 누가 어떻게 정하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매일 날 쫓아오던 ‘그것’은 벨드샤라는 악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지옥에서 넘어온 악이 실재세계에서 잉태한 악령이자 악명을 가지고 있다는 건, 벨드샤라는 존재에 악마의 개입이 있었음을 의심할 수 있다.
“벨드샤는 언제나 너의 주변을 맴돌았다. 너에게서 짙은 악의 향기가 날 때마다…. 물론 ‘향기’라는 것은 벨드샤의 기준이지만 아무튼, 녀석은 너에게서 악의 향기가 짙어질 때마다 너를 향한 소유욕이 강해졌다.”
“소유욕이라면 벨드샤가 날 가지고 싶어 한다는 거야?”
“널 가진다는 개념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 자체를 빼앗고 싶다는 뜻이겠지. 벨드샤는 지금의 너를 지우고 새로운 ‘너’가 되려고 한다.”
내 머릿속에서 지난 일들이 떠올라 하나씩 정렬되었다.
- 너의 마음이 아주 위태로운 상태라고. 조금만 더 건드리면 네가 악령이 되어버릴 거라고 했어.
실재세계에서 내가 사라진다는 경고가 있었다. 내가 악령이 되어버린다는 경고였다.
- 그 정체불명의 존재가 나를 밀쳐내고 너를 차지한다는 건가?
- 그리고 나 자신까지 차지하는 거야.
내 안의 악령과 나는 사라지고 ‘그것’이 된 페인이 남게 된다. 그렇다면 진짜 페인은, 진짜 나의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 내 아버지는 너에게 경고한 것이란다. 동시에 내게도 경고한 것이지.
- 지옥과 연결성이 짙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데?
- 끌려간다.
- 현실과 악몽이 역전된 것처럼 끌려가지.
자의와 상관없이 다녀왔던 그 붉은 세계로.
아니, 실제로 있는 진짜 붉은 세계로 끌려간다.
“그러면 내가 방금 본 세계가…?”
“그렇다.”
그것.
벨드샤는 ‘지옥’을 알고 있었다.
“너에게 지옥을 보여준 것이다. 미래에 대한 공포를 주입하여 널 무너뜨리고 훗날엔 널 차지하기 위해서다. 또한 벨드샤는 악마가 악명을 정해준 존재.”
따라서.
따라서….
“너의 죄에 이끌려 잉태한 벨드샤. 녀석은 악령이자 악마의 하수인이다.”
악마의 하수인이 하는 일은 악마의 명령을 따르는 것.
악마가 원하는 것은 선악이 대립하는 실재세계에서 악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
유일하게 선과 악을 다 갖고 있는, 선악에 대한 선택권이 있는 존재는 인간.
장소든 사람이든, 선한 곳에서 천사가 강림하고 악한 곳에서 악이 만연한다.
천사는 인간에게 선을 가르친다. 종교나 신관이나 승천자 따위를 만든다. 그렇게 확립된 인간들의 선한 영향력으로 차원을 건너온다.
반대로 실재세계에 정말로 악마가 강림하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악마 역시도 악마만의 승천자나 신관 따위가 필요한 것이다.
바로 그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들이 악마의 하수인, 악을 추종하는 광신도 등이다. 하지만 악마의 입장에서 그것으론 부족하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어 반드시 협력을 필요로 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대체로 선한 생각과 선한 행동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윤리라는 교육에 의해, 그것이 옳다고 믿을 수 있는 종교에 의해.
“이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천사는 강림하기 쉽지만 악마는 강림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악마 측에서도 무언가 더 적극적인 수단을 갖춰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를 노리는 벨드샤가 악마의 하수인이다.
“페인. 놀라지 말고 듣거라.”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네가 존재함을 악마가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