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한없이 모진 운명 (5)
데이진타우의 항구는 제법 규모가 컸다. 멀리서 훑어보아도 어부의 배가 수십 척은 있는 것 같고,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돛이 달린 커다란 전쟁용 배도 몇 척인가 병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집집마다 어업에 종사하는 곳이 많은지 물고기를 걸어두거나 각종 해산물을 바깥에 시장처럼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어업을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었어도 길에 다니는 사람은 매우 적다.
이 나라의 황제라는 사람이 흑사병에 잘 대처하여 사람들의 접촉과 외출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저분이야?”
“진짜 강령술사님이 오셨다고….”
“옆에 까만 로브를 쓰신 분은 누구시지?”
길가 한쪽에서 낚싯대와 그물을 손보고 있는 남자들이 있다.
그들의 햇볕에 탄 피부, 마른 근육, 거친 손을 보니 딱 보기에도 어부다.
나는 그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뭐 좀 질문해도 괜찮겠습니까?”
“어?”
“무, 물론입니다. 강령술사님….”
“흑마법사 우토가 누군지 아시나요?”
“모를 리가요! 강령술사님을 도와서 비첸크로이의 황제를 단죄한 심복이지 않습니까! 하하!”
「뭐?」
“…누가 그런 말을 하죠?”
그들 사이에 지저분한 턱수염을 기르고 있는 어부가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기가 세보이지만 말투는 정중했다.
“폐하께서 말씀하셨소. 그리고 우토 공께서 역병을 예견하신 덕분에 우리가 이렇듯 잘 살아남은 게 아니겠소? 강령술사 공께서 그분을 이곳에 보내지 않으셨다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소. 감사드리오.”
그러자 셰르카가 나서서 재차 확인했다.
“강령술사가 이 나라에 우토를 보낸 덕분에 역병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는 뜻이더냐?”
“그렇소만….”
그녀의 말투에 기센 어부들은 저마다 작은 의문을 품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별달리 제지하지 않자 이내 의문을 접은 듯하다.
“그래도 역병에 걸린 사람이 없진 않을 것 같은데요.”
내가 그렇게 물으니 까무잡잡한 피부의 젊은 어부가 친절하게 답했다.
“처음에 환자들이 발생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우토 님이 나서서 방혈을 쓰니 더러운 피가 뽑아지고 금방 완치되는 겁니다.”
“막내야, 완치가 뭐냐?”
“우리 선장은 그것도 모르시나. 완치는 병이 다 낫는다는 소리요. 맞지?”
“네. 맞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우토는 홀로스트 수용소 근방의 사막에서 친위대와 함께 거미 악귀 군단을 상대하다가 이곳으로 도망쳤다.
그 당시에 내 공격은 실패했지만 수도는 아라나크의 타락이란 저주에 걸려 반쯤 몰락한 상태였다. 백만 이상의 악령들이 들끓어서 누구라도 수도에 진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때 누군가 수도를 멀찍이서 보았다면 황제의 황금 사슬과 철퇴를 보고 ‘엑수스’를 떠올릴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시간이 흘러 왕국군이 제국령에 들어왔고 속국들을 하나씩 독립시키기 시작했다. 아그니샤의 은 십자가가 수도를 폭격하였고, 수도에는 멸망한 문명의 잔해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면서 세인트 왕국은 승전보를 알렸다. 그것이 제국의 몰락을 확정했다.
‘우토는 황제를 버리고 내 쪽으로 붙은 거야.’
제국령에서 비첸크로이 제국 다음으로 규모가 큰 국가는 이곳 데이진타우다.
그만큼 제국과 큰 전쟁을 벌이다가 패배하여 합병당했으니, 데이진타우는 비첸크로이에 적대적인 게 맞았다.
‘이곳 황제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을 수 있었겠지. 비첸크로이 제국 멸망에 일조하고, 자신이 강령술사의 심복이라고 소개하면서 역병을 예건하고 치료했으니까.’
「우토 이 새끼, 살아남는 일엔 머리가 잘 돌아가네.」
살아남는 방법을 아는 것도 강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대처를 잘 하고 있던 것이구나. 이제 알겠다.”
“지금은 생일이 홀수인 사람과 짝수인 사람을 날마다 바꿔서 외출할 수 있게 하고, 시장을 여는 시간도 제한하고 있지만 곧 통제가 풀리겠죠.”
젊은 어부는 셰르카의 말에 호응했다.
“더는 환자도 없는데 우토 님과 강령술사 님까지 오셨으니까 정말 안심이 됩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심복은 아니신 것 같은데 누구…”
“감사합니다.”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항구가 있는 동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우토가 네 심복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다녔어.」
「죽여야 해.」
“혼쭐은 내주더라도 죽이기까지야 하겠느냐.”
「우토의 쓰임새가 없어지면 그때 죽이자는 말이지. 페인을 이용해서 거짓말하고 다니는 새끼는 용서 못 해.」
“악령은 악령이로구나.”
* * *
항구의 한쪽에는 웬만한 소규모 마을 크기를 자랑하는 구역이 있었다. 건물들은 모두 커다란 창고처럼 생겼는데 용도는 제각각이다.
어부들이 바다에서 잡아온 해산물을 보관하거나 가공하는 곳, 어업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고 정비하는 곳, 배를 만드는 조선소, 각종 자재를 보관하는 대형 창고 등이다.
그러한 건물들 사이에 일정한 구획은 담벼락으로 나뉘어 분리된 채다.
담벼락으로 분리된 구획의 출입구는 철창으로 된 커다란 문이 가로막고 있는데, 이곳을 지키고 있는 민간인도 병사도 없다.
누군가 출입을 제한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이 구획엔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또 실패했습니다. 또, 또 실패했습니다. 실패.”
초췌한 몰골을 하고 있는 남녀 대여섯 명이 그림자 드리운 창고 안에 모여있다.
“다시 합니다. 다시, 방혈술은 쉽지 않다.”
“방혈, 방혈, 방혈. 안 됩니다. 실패.”
푸어억!
이들은 큼지막한 생선을 둘러싼 채 온종일 방혈을 연마하고 있었다.
“방혈.”
푸어억…!
물고기가 빨갛게 터져버렸다.
“또 실패입니다.”
“피만 빼낼 수 있어야 합니다. 정교하게. 정밀하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방혈술은 쉽지 않은 일.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동안 몇 차례의 방혈을 시도하고 있던 걸까. 그들의 발치에는 핏물이 가득 찼고 창고 한쪽에는 흉하게 터져서 내장이 드러난 생선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 애옹….
터진 생선을 탐한 고양이들이 만찬을 즐기고 있다. 데이진타우에 있는 고양이들이 소문을 듣고 모인 듯 그 숫자가 상당하다.
덕분에 파리나 구더기가 꼬이진 않는 것 같다. 쥐새끼 한 마리도 없이 오로지 고양이들만이 생선의 주인이 되었다.
“…누구입니까?”
그들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동시에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 페인이 있었다.
“나는 강령술사다.”
창고가 만들어낸 음지와 바깥의 양지 사이, 그 경계선에 페인과 셰르카가 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반응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까마귀를 닮은 방독면. 검붉은 로브. 도끼. 진짜 강령술사?”
“조심합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강령술사는 분신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가짜 강령술사.”
“강령술사는 스승님의 스승입니다. 그러면 강령술사도 우리의 스승입니다.”
“가짜 강령술사는 스승이 아닙니다. 침입자입니다. 이곳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니라면 들어올 수 없습니다.”
“방혈. 물고기가 아닌 것에도 써보고 싶습니다.”
“좋은 기회입니다. 침입자를 처단합시다.”
셰르카는 로브를 벗었다.
동시에 이리가 촉수를 드러냈다.
“페인. 저놈들은 광인이다.”
“우토는 이 창고 뒷문으로 나가면 있어.”
“어이, 광인들아. 이 친구는 진짜 강령술사다. 두 다리로 멀쩡하게 서있고 싶다면 순순히 우토를 데려와라.”
“스승님은 바쁩니다. 가짜 강령술사와 진짜 강령술사의 구분. 그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는 침입자를 막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스승님은 바쁩니다. 방혈하겠습니다.”
셰르카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내가 처리하지. 너는 영력을 아끼거라.”
“아니야.”
페인은 셰르카보다 앞서나갔다.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고 싶다고 하잖아.”
이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방혈을 연마했는지는 모른다.
흑마법사 우토가 환자들의 피를 뽑아내서 역병을 치료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우토의 방혈은 페인의 방혈과 비교가 되지 않으리라.
“가짜 강령술사. 방혈합니다.”
“방혈.”
“방혈.”
“방혈.”
그들은 페인을 향해 일제히 손아귀를 뻗었다. 그대로 방혈을 발동했다.
퍼억! 퍼어억!
페인과 그들 사이에 널린 생선들이 빨갛게 터졌다. 바닥에 고인 핏물이 거품을 일으키며 낮은 분수를 쏘아 올렸다.
하지만 페인은 기침 한 번도 없이 아주 멀쩡했다.
저주 저항 5계와 영적 저항 1계까지 개방한 페인에게 이들의 미완성된, 그것도 아주 기본에 불과한 주술이 통할 리가 없는 것이다.
“자꾸 방혈이라고 주문을 외우는데, 그거 속으로 외워도 발동되는 주술이야.”
“속으로 발동됩니까?”
“익숙해지면 주문을 외우거나 손으로 가리키는 행위조차 필요 없게 되고.”
“거짓말입니다. 스승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방혈술을 쓰는 방법은 목표를 정확히 봅니다. 목표를 인식하고 손을 목표에 향합니다. 인식이 정렬됩니다. 그리고 주문을 외웁니다. 방혈.”
퍼억…!
그래봤자 페인의 발치에 있는 핏물만 끓어오를 뿐이었다.
“우토가 이런 것도 보여줬나?”
“무엇입니까?”
‘제물방류.’
촤아아아아!
죽은 생선과 핏물이 가득한 환경.
분쇄된 살점, 뼛조각, 핏물 따위가 뒤엉켜 페인의 주변에서 용오름처럼 솟았다. 그리고 그 붉은 것이 이내 허공에서 헤엄치는 뱀처럼, 혹은 광기의 춤을 추는 촉수처럼 퍼져서 그들에게 돌진했다.
그때 코앞에서 진정한 방혈술을 목도한 그들은 더욱 기이하게 반응했다.
“오오오…!”
죽음의 공포보다 경이로움이었다.
꾸드드득!
붉은 것이 그들의 사지를 옥죄어 포박하였다. 이대로 온몸을 비틀어 죽일 수도 있고 몸의 구멍에 붉은 것을 집어넣어 속에 있는 것을 모조리 뽑아낼 수도 있다.
하지만 페인은 그러지 않았다.
끼익! 쾅!
뒷문이 거세게 열리며 우토가 허겁지겁 뛰어들어온 것이다.
“강령술사님!!!”
촤아아…!
우토는 미끄러운 바닥을 뛰다가 생선을 밟고 넘어졌다. 살점과 핏물을 몸의 전면에 묻히면서 페인 앞까지 미끄러졌다.
쭉 미끄러진 그는 두 다리로 일어서지도 않고 넙죽 무릎부터 꿇었다.
“소인이 열심히 키운 제자들입니다! 목숨만은 살려주소서!”
“네가 세뇌한 건 아니고?”
“세뇌를 자청한 자들입니다! 세상엔 그런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악마 숭배자, 흑마법 숭배자, 추종자, 광신도, 광인…! 무엇이라도 추종하고 어둡더라도 힘을 원하는 자들 말입니다!”
“원래 광인이었던 자들을 세뇌했다는 거네.”
“그,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토. 네가 이곳에 와서 나와 관련된 거짓말을 많이도 내뱉은 것 같더라고.”
우토는 눈을 하얗게 뜨면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부정하는 말은 내뱉지 못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믿어?”
“제발 고통스럽지 않게만 죽여주십시오!!!”
퍽! 퍽! 퍽!
우토는 바닥에 머리를 찍어댔다. 이마가 찢어졌는데 그게 우토의 피인지 생선의 피인지 분간이 안 된다.
셰르카는 흡족하게 웃었다.
“저 녀석도 광인의 기질이 있구나.”
촤아아아….
그들을 옭아매 구속했던 붉은 것이 스르르 무너져내렸다.
“오오…!”
“이것이 진짜 방혈…!”
“아름답습니다! 경이롭습니다!”
얼굴 전체가 피에 젖은 우토는 절박하게 외쳤다.
“이 녀석들! 제발 닥쳐라! 저분은 진짜 강령술사님이시다! 살고 싶으면 당장 숙이란 말이다!”
“스승님의 스승님!”
“강령술사! 존경합니다!”
“존경합니다!”
퍽! 퍽! 퍽!
그들은 좀 전에 우토가 했던 행동을 고스란히 따라 했다. 바닥에 넙죽 엎드려서 머리를 찍는 것이다.
이젠 도리어 페인이 당황한다.
“뭐 하는 짓이야? 다들 그만해!”
처벅처벅….
우토는 페인이 한 발자국씩 가까워질 때마다 그 발걸음에 맞춰서 몸을 한 번씩 떨었다.
“하…. 우토.”
페인은 우토 앞에 쪼그려 앉았다.
캉!
그리고 우토 옆에 도끼를 찍었다.
“주, 주,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고통스럽지 않게만…”
“안 죽일 거야.”
“…예?”
우토는 가까스로 페인을 올려다보았다.
“너를 좀 이용해야 해서.”
“이런 미천한 흑마법사라도 이용해 주신다면 소인은…!”
카가각!
페인은 도끼를 거칠게 끌었다. 그 살벌한 철 소리가 우토의 영혼까지 공포에 물들이는 듯했다.
“정말 악마라도 본 것 같은 반응이구나.”
우토는 페인 뒤에 있는 셰르카를 보면서 더욱 공포에 휩싸였다.
‘저건 뭐야, 저 촉수는 또 뭐야, 뭐야, 도대체 뭐야, 왜, 뭔데….’
“네가 내 심복이라고 떠들고 다녔잖아.”
“벼,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 말고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
우토는 심한 오한을 느끼는 사람처럼 떨면서 자신의 과오를 끄집어냈다.
“소인은 강령술사님을 적대하고…. 그, 수용소에서 고문과 세뇌까지 하려고 했던…. 도저히 소인은…. 소인을 이용하고 고,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주시길 바랄…. 바랄 뿐이옵니다….”
두려워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여기 사람들 병은 왜 치료했어?”
“그건…. 시, 실은….”
“네가 ‘실은’이라고 붙인 다음엔 거짓말이 나오잖아.”
“아…. 송구합니다!”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너와 나누고 싶은 말이 없게 될 거야.”
그제야 우토의 미칠 듯한 공포심이 조금은 잠잠해졌다.
그것은 비첸크로이 제국의 황제에게 바쳤던 충성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황제가 강하고 두려워서 충성을 했던 그는 언제나 황제와 황제 주변 원로들의 눈치를 살펴왔다. 그래서 내뱉는 말들의 8할이 사탕발림이었다.
반면에 눈앞의 존재.
황제보다 더 강하고 두려운 존재.
‘내가 그동안 이런 귀인(貴人)에게 무슨 짓을….’
황제보다 더 강하고 더 두렵다. 또한 더 잔인한 것 같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기에 더 자비로운 것 같다. 눈앞의 강하고 두렵고 잔인한 존재가 베푸는 자비는 너무나도 대비가 극명해서, 오히려 자비의 극치와도 같았다.
“소인이 이 나라의 역병을 치료한 까닭을 물으신다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말해봐.”
“첫 번째 이유는 소인이 이곳에 자리를 잡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겠지.”
“이, 이 나라는 비첸크로이 제국과 황제에 적대적입니다. 그래서 소인은 사실 강령술사님의 숨겨진 심복이었다는 것으로 거짓말을 시작했습니다. 강령술사님의 명성을 빌려 역병을 예견하고 치료하고 황제의 신임을 얻어내 이렇듯 양지에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네가 살 길을 찾아냈다는 거네.”
“이게 아니었다면…. 소인은 죽은 황제와 같이 미움을 받는 악인이 되어,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강령술사님의 자비를 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건 페인의 예상외다.
“저 또한 귀가 밝습니다. 강령술사님께서 역병을 치료하기 위해 제국령을 순회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언젠가 강령술사님을 뵙게 되었을 때 조금이라도 자비를 구하고자 역병을 치료한…. 것입니다.”
페인은 이렇게나 길고 진솔하게 말하는 우토를 처음 보았다. 언제나 간신 같은 흑마법사가 아니었는가.
“나한테 만회하고 싶겠네.”
“소인이 강령술사님께 저지른 만행…. 그것은 만회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압니다…. 그래도 소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렇게 벌레처럼 목숨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나한테 잘 보이고 싶지 않아? 너 정도 흑마법사라면 심복으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 순간, 정적 속에 우토의 떨리는 호흡이 희망을 담고 맴돌았다.
“…소인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때 우토가 페인에게 갖고 있던 절대적 공포는 절대적 경외심으로 전환된 것이다.
마치 다른 차원의 어딘가에 있는, 형체도 알 수 없는 미지의 두려운 존재를 숭배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우토가 느끼는 두렵고도 존경스러운 감각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뭘 시키더라도 해야겠지.”
예를 들면 목숨 걸고 악마의 하수인과 싸운다거나.
“소, 소인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영혼을 원하신다면 그것까지도 바쳐 따르겠습니다. 심복이지만 권속처럼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쓸모를 다하면 죽겠습니다.”
“이용하고 편하게 죽여준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니까.”
“예?”
“심복이라고. 말 그대로 심복.”
페인은 우토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원한이 있어서 싸운 건 아니잖아. 상황이 그렇게 된 거지.”
“그 말씀은…. 진짜로 소인을…?”
“같이 잘 해보자. 우토.”
그 순간부터 우토는 눈빛이 바뀌었다.
아마도 이 대륙에서 두 번째로 강한 흑마법사 우토.
“아, 아아…. 진리의 귀인이시여….”
“뭐라는 거야?”
“그간 소인이 한참 어리석어 눈이 멀고야 말았습니다…. 눈이 멀어서 귀인을 몰라뵈었습니다….
그는 페인을 광신(狂信)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