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포기하지 않는 자가 발버둥 친다 (3)
“…안녕?”
아주 긴 팔다리, 아주 긴 머리, 그림자 같은 형상. 그것은 영적인 형태가 아니라 실체화되어 서있었다.
지면에 착지한 발키리는 그것의 악명을 알고 있었다.
“벨드샤!”
발키리는 왕국 성기사의 것보다 훨씬 커다랗고 고귀한 성검을 뽑아들었다.
“네놈이 기어코 현계에서 실체화를 하고 말았구나!”
“……천사?”
샤아아아악!
벨드샤를 중심으로 암흑이 퍼져나갔다. 밝은 햇빛을 무시하는 그림자가 드리우고 바람이 멈췄으며 공기는 새벽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보이지도 않는 아이들이 울거나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가 절벽길을 채웠다.
“……눈부셔.”
‘천명의 검!’
발키리가 성검을 내지르자 칼끝에서 무시무시한 폭풍이 발생했다. 그 폭풍 속에 별처럼 빛나는 입자들이 빠르게 회전하며 더욱 큰 검의 형태를 이루었다.
‘실체화가 되었어도 아직은 어린아이일 것이다!’
천명의 검은 바닥을 둥글게 깎아내며 빛나는 폭풍과 함께 그림자를 걷어냈다. 그 끝에 벨드샤의 몸을 정면으로 통과했다.
쿠콰콰콰콰아아!!
이어서 밝은 입자를 머금은 후폭풍이 발키리 앞으로 눈부시게 쇄도했다.
하지만 그 빛은 벨드샤로부터 퍼지는 어둠을 순간적으로 지우고 사라질 뿐이었다.
“이 세계는 세인트 여신님께서 수호하는 것이다! 네놈들 악마 따위가 망치게 두지 않겠다!”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울음과 비명.
어느새 그것이 소름 끼치는 웃음으로 변하였다.
“……아파.”
천명의 검을 정면으로 받아낸 벨드샤.
투두두두둑두두두두두두둑!!!
녀석의 몸이 기이하게 뒤틀리고 있었다. 팔다리가 빠르게 점멸하며 이상한 각도로 꺾이고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이다. 그리고 세로로 길쭉한 머리는 좌우로 미친 듯이 까딱이고 있다.
그런 벨드샤의 상태를 확인한 발키리는 날개를 활짝 펼쳤다.
‘여기서 해치울 수 있다!’
지잉! 지잉! 지잉!
펼쳐진 날개에서 신성한 비수들이 무수히 소환되었다. 발키리의 비수들은 공중으로 두둥실 떠올라 벨드샤의 위로 광범위하게 펼쳐졌다.
지이잉!
그것들이 일제히 벨드샤에게 칼끝을 향했다.
‘단죄(斷罪)하리라.’
두두두두두두두!!!
비수 하나가 떨어질 때마다 번개 같은 섬광이 터졌다. 고속의 흙먼지가 일어나고 돌 파편이 튀어 올랐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쏟아붓는 비수의 연쇄적인 폭격은 절벽길의 단단한 땅을 문자 그대로 터뜨려 뒤집는 위력이었다.
섬광이 1초에 수십 번을 점멸하고 굉음이 1초에 수십 번이나 터졌다.
그러자 절벽길에 드리운 그림자가 어느새 사라졌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는다.
얼핏 악을 단죄하고 악마의 하수인을 무찌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차원을 넘어서 도주했다고…?’
발키리는 좀 전까지 벨드샤가 있던 자리만을 멍하게 보았다.
자신의 눈을 믿고 싶지 않았다.
벨드샤는 그 짧은 순간에 도망친 것이다. 연쇄적인 섬광이 터지고 흙먼지가 겹쳐졌을 때 사라진 것이다.
방금 그건 벨드샤의 존재가 멀어졌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이 세계에서 사라졌다는 느낌이었다.
‘실체화가 되었는데도 스스로 차원을 넘을 수 있다니…. 어떻게 그런 능력이….’
순간, 발키리의 뇌리에 어떤 이름이 스쳤다.
‘…페인.’
그는 현계에 있는 인간임에도 차원을 넘어 다닌다. 자신과 공존하는 악령의 힘을 쓴다. 덕분에 다른 주술사들과 달리 능력 개방과 강화에 인간을 초월한 성장력을 가질 수 있던 것이다.
‘벨드샤도 페인도 근원이 사악한 힘이라는 것은 동일하니….’
페인은 벨드샤의 본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본인이 원치 않더라도 벨드샤의 스승이자 교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페인의 곁에 붙어서 그의 능력을 하나씩 훔쳐 배우고 있었구나.’
그렇게 하나씩 배우다가 지옥에 있는 존재들까지 넘나들 수 있는 차원의 균열을 열어버린다면.
그 순간에 비로소 악마가 강림하리라.
혹은, 벨드샤에 의해 잘 요리된 페인이라는 그릇을 통해 악마가 강림하리라.
‘어서 천계에 알려야 한다!’
천계에서도 익히 알고 있는 악마의 하수인 벨드샤.
녀석은 페인이나 발키리 본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 * *
발치에 깔린 먹구름이 지평선까지 이어져있다. 별이 없는 밤하늘보다 먹구름의 색깔이 더 밝다.
그래서 이곳은 아래쪽이 밝고 위쪽이 어두워서, 빛과 어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역전된 세계처럼 보인다.
- ……발키리. ……아파.
벨드샤는 먹구름 위를 걷는 중이다.
- …상처를 …회복해야지.
벨드샤의 온몸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다. 전부 발키리에게 당한 상처다.
- …악의 쉼터에서.
- …그리고 더.
- …발키리보다. ……강해져야지.
- …더 배워야지… 흡수… 해야지.
벨드샤는 먹구름 위를 걷다가 멈칫했다.
투두두둑!
머리를 180도 돌려서 뒤를 보았다.
아무것도 없지만 벨드샤는 알 수 있다.
- ……향기.
- 하아아……
- ……찾았다.
* * *
이젠 적응된 것 같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누군가에게서, 어떤 장소에서, 어떤 사물에서, 공기에서, 방향에서 불쾌하고 꺼림칙한 것이 종종 느껴진다.
나는 왠지 모르게 이런 감각이 ‘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싹 말라서 갈라진 평야.
구름에 슬쩍 가려진 태양. 서늘한 공기.
이곳은 데이진타우의 남쪽과 홀로스트 수용소의 북쪽 사이에 위치한 땅이다. 이곳에는 사람이 살지도 않고 왕래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 누구도 이곳에서의 싸움을 목격하지 못하리라.
“왔구나.”
때마침 셰르카도 사악한 기운을 느낀 것 같다. 그녀가 느낄 만큼 충분히 가까워진 것이다.
“어디에 있습니까? 소인의 눈엔 보이지 않습니다만.”
우토는 의욕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와 함께 있는 14명의 정예 역병 의사들도 우토를 따라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남쪽이야. 맞지?」
“퀴익!”
내 안의 악령과 셰르카의 이리 또한 느끼고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벨드샤가 가까워졌음을.
“다들 준비됐어?”
“강령술사님과 함께 싸우는 이 순간을 기다려왔습니다.”
“설령 죽이지 못하더라도 혼쭐을 내서 쫓아버리자꾸나. 다시는 널 탐내지 못하도록.”
「왔어!」
시야의 가장자리에 벨드샤가 보인다.
녀석이 뭔가 어둠 같은 것을 흘리고 있다. 제대로 쳐다보고 싶지만 그랬다간 녀석이 위치를 바꿔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직감할 수 있다. 지금 벨드샤의 상태를.
「고통……?」
“벨드샤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어.”
나는 주변에 그렇게 알리며 셰르카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눈빛이 뭔가 명확하게 보고 있는 것 같다.
“셰르카?”
“페인….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저놈입니까?!”
우토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셰르카가 보고 있는 방향을 명확히 가리키고 있다. 역병 의사들도 같은 방향에 시선을 모으고 있다.
“저놈이라니, 둘 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벨드샤가 보여?”
흑마법사인 셰르카와 우토라서 보이는 걸까. 하지만 벨드샤는 흑마법사라고 해도 보이지 않던 존재가 아닌가.
“역병 의사들아. 너희 눈에도 벨드샤가 보이느냐?”
그녀의 물음에 역병 의사들이 입을 모아 답했다.
“보입니다. 벨드샤.”
“그림자처럼 생겼습니다.”
“스승님의 그림자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사악하게 생겼습니다.”
직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안녕?”
영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공기를 통해 전해지는 소리였다.
“다들 저 목소리도 들리는 거야?”
“들리는구나.”
“들립니다.”
나는 녀석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나 아파.”
벨드샤의 온몸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어째서일까. 내 눈에는 녀석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검은 연기가 고통에 찬 선혈처럼 보인다.
“이 끈질긴 놈! 감히 강령술사님을 해하려 하다니! 오늘이 네놈의 마지막 날이 될지어다!”
우토가 앞으로 나섰다.
“드라쉬르!”
우토 밑에 깔려있던 그림자가 일어섰다. 그것은 야수 같은 손톱을 돌출시키며 우토 뒤에 바짝 붙었다.
동시에 역병 의사들이 저마다 몸에서 피를 뽑아냈다. 그 붉은 것들이 허공에서 뱀처럼 움직여 우토의 배후에 있는 그림자에 흘러들어갔다.
“튤리아. 가하쉬안. 라토움.”
내 뒤에서 셰르카가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우토의 그림자가 자유로워졌다. 우토의 배후에서 벗어나 벨드샤를 향해 뛰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우토의 발치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반다토움. 데우샤.”
투두두둑!
우토의 그림자는 뛰는 와중에 등의 척추를 따라 14개의 붉은 가시가 자라났다.
츄우욱!
붉은 가시들은 더욱 길어졌다. 그리고 흐물흐물하게 변해서 촉수가 되었다. 저 14개의 촉수들은 역병 의사들이 하나씩 조종하는 것인데, 셰르카의 흑마법에 의해 각 역병 의사의 심장과 연결된 촉수다.
“……아파.”
촤아악!
그래서 벨드샤가 촉수를 쥐어서 터뜨리면 그 촉수 하나를 맡고 있는 역병 의사는 그만큼의 혈액을 빼앗기게 된다.
대신 역병 의사가 과다출혈로 죽지만 않는다면 14개의 촉수는 파괴되어도 순식간에 재생될 수 있으며, 각각 지능을 가진 생명체처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오늘 강령술사님을 위해 활약한 자들은 반드시 역병 교수(敎授)로 임명하도록 하겠다!”
나를 포함해 모두가 의욕적이다. 반면에 벨드샤는 평소와 달리 기운이 없어 보인다.
‘약화된 건가?’
「실체가 생긴 거면 더 강해졌다고 봐야 하지 않아? 존재감만큼은 더 뚜렷하게 느껴지는데.」
우토의 그림자가 벨드샤에게 손톱을 그었다. 그러자 벨드샤는 몸을 빠르게 점멸하며 뒤틀었다.
투두두두두!!!
벨드샤는 우토의 그림자에 달린 촉수들도 같은 방식으로 피했다. 몸을 뒤트는 속도와 각도가 너무도 기이하다.
“녀석이 흘리는 피에 신성한 잔향이 남아있구나.”
“역시 저 검은 연기가 상처였네.”
“녀석에겐 피 같은 것이지.”
나는 승천자와 연결된 전언에 의식을 집중했다.
‘승천자님. 혹시 교단에서 벨드샤를 공격한 적이 있습니까?’
- 없습니다. 지금 벨드샤를 상대하고 있는지요?
‘놈이 상처를 입은 채로 나타났어요. 실체화까지 되었는지 다른 사람들 눈에도 보인다고 합니다.’
- 교단에서는 달리 말이 없었는데…. 제가 최대한 빨리 알아보겠습니다.
‘예. 부탁합니다.’
촤아악!
우토의 그림자가 벨드샤의 다리를 노려 할퀴었다. 하지만 벨드샤는 다리를 역방향으로 꺾어서 회피하였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사각을 노리는 촉수들을 팔로 쳐내고 있다.
「네 도끼는 영혼까지 베어내잖아.」
내가 들고 있는 도끼날이 나의 영력을 머금어 붉은 문자를 빛내고 있다.
콰아…!
평소보다 더 힘을 실어서 검기를 날렸다. 벨드샤는 가만히 서서 그림자의 손톱질이나 역병 의사들의 촉수를 피하고 있으니까, 저 자리에서 벗어나야만 피할 수 있도록 커다란 검기를 날린 것이다.
“정말이지 유연한 놈이구나.”
벨드샤의 머리와 다리는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몸이 오른쪽으로 둥근 원을 그리듯 2초 동안 휘어진 것이다. 그 2초 사이에 내가 날린 검기는 벨드샤의 머리와 다리 사이에 만들어진 둥근 공백을 통과하고 말았다.
벨드샤의 모든 움직임이 기이하게 점멸하고 있다. 도저히 이쪽의 속도로는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다.
“안 되겠어. 셰르카.”
“이럴 줄 알고 아까부터 속으로 외우고 있었다.”
셰르카는 벨드샤가 모르게 속으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 주문이란 99개의 문장을 외워야 하는 강력한 흑마법의 준비과정이었다.
그리고 이제 준비가 끝난 참이다.
“힘껏 속박할 테니 기회를 놓치지 말거라.”
타닷!
나는 벨드샤를 등진 채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셰르카를 지나쳐서 아무것도 없는 평야를 내달리듯, 이 전투에서 도망치듯 벨드샤에게 등을 보이며 뛴다.
벨드샤는 매번 나타날 때마다 교활해지고 강해졌다. 그래서 이번엔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수작을 부릴지 나로선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없이 녀석을 마주하면서 깨닫게 된, 녀석의 일관성 있는 특성이 있다.
그것은 나를 향한 병적인 집착이었다.
“……가지 마.”
「우토의 그림자를 무시하고 너한테 뛰어오고 있어!」
바로 그 순간에 셰르카의 흑마법이 발동되었다.
키이잉!
내 앞에서 평면적인 검은 소용돌이가 전개된 것이다. 나는 지체 없이 그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벨드샤의 등이다.
“퀴이이익!!!”
이리의 촉수들이 벨드샤의 팔다리를 거칠게 휘감았다. 그와 동시에 셰르카도 벨드샤에게 손아귀를 뻗은 채 어떤 흑마법의 조준을 완료한 것이다.
“슈탈룬헤르토툼.”
온 사방에서 어둠이 몰려왔다. 내 뒤에서도 어둠이 몰려와 나를 통과하였다. 이윽고 그녀가 구축한 영혼의 벽은 우토의 그림자, 우토, 역병 의사들까지 통과해서 벨드샤를 중심으로 좁혀졌다.
투두두두두두두둑!!!!
벨드샤의 몸이 영혼의 벽에 미친 듯이 충돌하는 소리다.
어쨌든 녀석은 저 어두운 원기둥 속에 갇힌 것이다.
“우토! 지금이야!”
우토는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튤리아! 가하쉬안! 데우샤!”
스스스스!
우토의 촉수 달린 그림자가 순식간에 내 뒤로 붙었다.
‘제물방류!’
…의 대상은 나다. 나는 나에게 제물방류를 걸어서 등으로부터 혈액을 길쭉하게 뽑아냈다. 그것을 내 뒤에 있는 그림자의 배꼽 부분에 탯줄처럼 연결했다.
쿠직! 쿠직!
“으윽!”
내 배후의 그림자가 나의 혈액과 영력을 공급받는다. 그림자의 촉수가 더욱 길어지고 두꺼워진다. 혈관 같은 것이 그림자의 몸속에 거미줄처럼 퍼져나감이 느껴진다.
14개의 심장을 가지고 있으며 나의 혈액과 영력을 머금게 된 그림자.
소리는 없지만, 녀석이 내 뒤에서 희열을 표출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벨드샤가 갇힌 어두운 원기둥 앞까지 달려왔다. 이어서 우토가 외쳤다.
“드라쉬르!”
푸푸푸푹!
내 뒤에 붙은 그림자가 14개의 촉수를 땅에 꽂아서 자신의 몸을 지탱하였다. 나는 재빠르게 그림자의 뒤로 물러섰다.
직후, 그림자의 안면이 위아래로 갈라졌다.
쩌어!
그대로 흑염(黒炎)을 뿜어냈다.
- 흐으어어어어어어!!!
촉수로 몸을 지탱하지 않으면 반동에 나가떨어질 위력이다. 빠르게 사출되어 크게 퍼지는 흑염이 원기둥을 덮쳤다.
그때 원기둥 속에 얼핏 보였다. 와중에도 벨드샤는 머리를 등 쪽으로 돌려서 나를 쳐다보고 있던 것이다.
“커억…!”
“끅…!”
역병 의사 두 명이 쓰러졌다. 심장이 타버린 것이다.
셰르카와 우토가 내 양옆으로 합류했다.
“계속합니까?!”
“페인! 검은 불이 너무 강렬하여 놈의 존재를 찾을 수 없다!”
그래도 나는 벨드샤가 어디에 있는지 느낄 수 있다.
“계속해! 벨드샤는 저 흑염 속에서 버티고 있어!”
영혼을 태워도 쓰러지지 않는다면 쓰러질 때까지 불태워주마.
강렬한 흑염이 계속 사출되는 와중에 역병 의사 네 명이 더 쓰러졌다.
「처음보다 더 고통스러워하고 있어!」
“강령술사님! 이제 슬슬…”
“계속해!”
아직 부족하다. 녀석은 쓰러지지 않았다. 저 흑염 속에 두 다리로 서있다.
“끄어억…!”
역병 의사 다섯 명이 연달아 쓰러졌다.
“페인. 과투자는 피해야 한다.”
“거의 다 됐어.”
분명히 통하고 있다. 벨드샤의 영혼이 바람에 깎이는 바위처럼 잘게 부서져서 흩어지고 있다. 벨드샤라는 존재를 이루고 있던 영혼이 흑염에 의해 분해되어, 세상에 떠도는 평범한 악으로 변하는 것이다.
“끄으으윽…!”
또 어느 역병 의사가 쓰러지려던 찰나,
나는 손을 들어서 그림자의 흑염 사출을 멈췄다.
- 허어어어으으스으으으…
그림자는 힘을 다하였는지 우토의 발치로 돌아갔다. 그림자에 연결되었던 혈액 또한 힘을 잃고 지면에 쏟아졌다.
흑염이 까맣게 태운 자리에 벨드샤가 쓰러져있다.
하지만 그렇게 흑염을 맞고도 힘이 남아있던 모양이다.
“……아파아…”
이번엔 벨드샤를 중심으로 어둠이 퍼져나갔다. 하늘이 혼탁하게 변하더니 잿빛보다 어두운 잿빛이 되어버리고 지상에 그림자보다 어두운 음지가 드리웠다.
그리고 어디선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이, 이게 뭡니까?!”
“최후의 발악이다. 그렇지? 페인.”
“끝내자.”
나는 셰르카의 눈을 쳐다봤다.
셰르카도 나를 쳐다봤다.
이윽고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녀가 사라졌다.
우토도 사라졌고 역병 의사들도 사라졌다.
이제 시선을 돌려 벨드샤를 볼 차례다.
“……여긴?”
“여기가 어디냐고?”
푸우욱!!!
벨드샤의 복부에 커다란 탯줄이 처박혔다.
“……허으으으…!”
“이리의 세계.”
벨드샤의 뒤에 거대한 태아가 떠있었다. 배꼽과 양쪽 눈에 탯줄을 달고 그것을 벨드샤의 배꼽에 연결한 태아다.
“…가져가지 마……!”
- 으애앵! 퀴이이이익! 헤헤헤!
이리는 아이처럼 까르륵 웃었다.
그러자 벨드샤는 울부짖는다.
“내 기억……! 가져가지 마……!!!”
태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리.
이리는 탯줄을 움직여서 벨드샤를 내 앞에 끌어다 놨다.
“잘 잡고 있어. 이리.”
- 땨아아! 에헤헤헤헤킥킥퀴이익!
나는 도끼를 치켜들었다.
“…아아아아아아…”
“혹시나 부서져서 지옥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악마한테 전해.”
“……안 돼…안 돼…안 돼…”
“내 영혼에 빈자리는 없다고.”
쿠직!
벨드샤의 몸과 머리가 분리되었다.
쿠직!
벨드샤의 오른팔이 잘렸다.
쿠직!
벨드샤의 왼팔이 잘렸다.
쿠직! 쿠직! 쿠직!
벨드샤의 온몸이 고기처럼 다져진다. 녀석의 몸과 영혼을 토막 낸다. 그간 당했던 일들을 생각하며 분풀이하듯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도끼질을 한다. 녀석의 질긴 목숨이 끊어지지 않아도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철저하게 부순다.
- 움음음음….
이리의 탯줄이 거머리처럼 주둥이를 벌려서 벨드샤의 조각들을 하나씩 씹어삼켰다. 악은 흡수하지 않고 이리에게 양보한다.
나는 그렇게 이리의 세계를 도살장처럼 이용해, 벨드샤를 산 채로 해체한 것이다.
“……아아… 하지 마… 하지 마아아아…!”
녀석은 마지막 한 조각까지도 처절하게 절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