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포기하지 않는 자가 발버둥 친다 (4)
정예들 중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은 역병 의사 세 명은 거친 호흡을 몰아쉬고 있다.
우토는 안절부절하며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셰르카는 눈을 크게 뜬 채 침묵하고 있다.
이리는 우산 속 그림의 형태로 돌아갔다.
“셰르카 님…. 지금 강령술사 님은….”
그녀는 단언했다.
“페인이 이겼다.”
벨드샤는 사라졌다.
페인은 정지한 석상처럼 가만히 서있다.
“악마의 하수인을 해치우셨다면 영혼에 더 많은 악이 쌓이는 게 아닙니까…?”
“악을 먹는 것은 이리다. 페인은 녀석을 잘 요리해서 이리에게 먹일 뿐이다.”
“그럼 이리는….”
“토해내고 있다. 아무리 소화력이 좋은 이리라도 악마의 하수인이 가지고 있던 악을 전부 먹을 수는 없으니.”
털썩!
페인이 힘없이 쓰러졌다. 우토와 역병 의사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페인이 쓰러져서 걱정하며 놀란 게 아니라, 그가 쓰러졌다는 사실 자체에 놀란 것이다.
“강령술사님!”
우토와 역병 의사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강령술사님! 정신 차리십시오!”
“깨우지 말고 두어라.”
“예?”
“그는 오래간만에 숙면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우토와 역병 의사들은 페인을 관찰했다.
곤히 잠든 그의 호흡이 아주 편안해 보였다.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하여도 대단한 일이지. 미치지 않고 제정신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 * *
천계. 다른 말로는 천국.
새하얀 구름이 지나다니는 세계.
이곳에서는 위나 아래, 어디를 보나 하늘이다. 하늘에 띄워진 크고 작은 땅덩이들 위에 세인트교의 교회와 비슷한 양식의 신전들이 아름다운 정원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천사들은 모두 날개가 있어 각 신전과 땅덩이 사이를 누빌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 다른 새하얀 신전들과 달리 황금빛이 물씬 풍기는 신전이 있었다. 그 크기가 현계에 있는 산처럼 거대하고 내부에는 마차 스무 대를 일렬로 세워도 채워지지 않을 너비의 황금빛 복도가 있다.
유리판이 없는 창으로부터 초자연적인 햇빛이 들어와 신전 내부를 더욱 찬란하게 밝히는 가운데, 네이트라 불리는 상위 천사가 홀로 걷고 있다.
그때였다.
쿠구구구구구궁…
돌산보다는 작고 바위보다는 큰 존재가 네이트 앞을 거대하게 가로막은 것이다.
“문지기 ‘가르간’이여.”
금빛 자수가 박힌 새하얀 천이 문지기의 머리부터 종아리까지 내려와 세로로 살짝 갈라져 있다.
만약 인간들이 이 문지기를 본다면 로브가 아니라 매우 큰 식탁보라도 뒤집어쓴 것 같다고 표현하리라.
“부디 길을 비켜주시죠. 엑수스에게 볼일이 있답니다.”
쿠구구구구궁…
널찍한 통로를 다 가릴 정도로 큰 문지기는 동작 하나하나가 장엄했다. 비켜서지 않고 앞으로 살짝 나오는 걸 보니 네이트를 통과시켜줄 의향은 없는 것 같다.
“악마의 강림과 관련된 중요한 일인데요.”
그래도 문지기는 미동도 없이 태산처럼 버티고 있다.
“당신을 또 부수고 싶진 않아요.”
순간, 네이트의 눈이 금빛 안광을 냈다.
“상위 천사 네이트로서 명령합니다. 길을 비키세요. 당신이 길을 비킨 것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내가 감당할 테니.”
쿠구구구구구…
문지기 가르간이 거대하게 몸을 틀며 한쪽으로 물러섰다.
그리고 가르간만큼 거대한 황금빛 문이 열렸다. 그곳의 풍경은 옛 비첸크로이 제국의 황궁과 닮았다. 아치형의 커다란 창문과 기둥들이 있으며 바닥에는 정열적인 색감의 붉은 카펫이 드넓게 저 멀리 깔려있는 것이다.
붉은 카펫의 양쪽으로는 ‘포드키엘’들이 도열하고 있다.
발키리가 천계의 대부분을 수호하고 간혹 인간들을 위해 현계로 내려가는 역할이라면, 큰 덩치와 우락부락한 근육에 무자비한 철퇴를 자랑하는 이 포드키엘들은 일정한 주기로 차원을 건너서 직접 악마들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병력인 것이다.
네이트가 엑수스의 신전을 가로지르자 포드키엘들이 차례대로 고개를 숙여 존경심을 표했다.
그런데 저 끝에 엑수스의 자리가 비어있다.
“포드키엘. 엑수스는 어디에 있죠? 정찰을 마치고 돌아왔다고 들었는데요.”
“안식실에서 악을 씻어내는 중입니다. 고결한 대천사시여.”
네이트는 카펫을 벗어나서 드넓은 내부의 한쪽에 있는 커다란 문으로 걸어갔다.
상위 천사의 신전마다 하나씩은 있는 방이 안식실이다.
안식실에서는 악을 정화하여 천사의 타락을 예방하고 몸과 마음의 상처까지 치유할 수 있다.
“엑수스! 나 왔어!”
네이트가 허공에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그러자 안식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구름 같은 것이 채워진 욕조 안에 엑수스가 나체로 있었다.
호리병을 든 아기천사들이 작은 날개를 펄럭이며, 그의 우락부락한 몸에 반짝이는 물을 뿌리는 중이다.
“이, 이런 망측한 천사를 보았나! 썩 나가지 못해?!”
“헤어진 지 703년밖에 안 됐는데 부끄러워하기는….”
“뭣이?”
“그러게 왜 문지기한테 나를 못 들어오게 시켜놨어?”
“또 가르간을 부쉈나?! 또?!”
“안 부쉈어. 정중하게 비켜달라고 했지.”
“가르간은 정중하게 말한다고 가벼이 비켜주는 존재가 아니다!”
엑수스는 벌떡 일어나서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네이트의 시선이 그의 사타구니로 향했다.
“오….”
“그건 나의 문지기다! 가르간이 네 말을 들어주는 건 703년 전에 끝났단 말이다!”
“엑수스. 당신이 불같은 성격인 건 알겠는데, 이 정도로 화낼 일은 아니지 아마?”
“에잇! 시끄럽다!”
아기천사들이 엑수스에게 반짝이는 입자를 뿌려주었다. 그러자 의복, 갑옷, 망토 따위가 차례대로 소환되어 엑수스의 몸을 가렸다.
엑수스는 씩씩대며 안식실 바로 옆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의 뒤를 네이트가 따라 들어갔다.
기나긴 벽에 황금 철퇴들이 수백 개는 걸려있는 방이었다.
“당신의 예비 화신이 죽은 게 그렇게나 싫었어?”
쿵!
엑수스는 네이트에게 눈도 마주치지 않고 황금 철퇴 하나를 꺼내서 정비하기 시작했다.
“비첸 오솔로니오 아바타라 폴 엑수스…. 그게 선한 인간은 아니었잖아. 나 말고도 많은 대천사들이 너의 예비 화신에 대해 반대하고 있었다고.”
상위 천사와 대천사는 같은 뜻이다. 다만 대천사는 조금 더 존경을 더한 표현 방식이다.
철그럭!
엑수스의 손바닥이 빛나더니 황금 사슬이 쭉 뽑아져 나왔다. 그렇게 뽑혀 나온 황금 사슬이 황금 철퇴에 융화되듯 흘러들어갔다.
“더 좋은 인간을 찾아서 화신으로 만들면 되잖아. 솔직히 걔는 좀 아니었어. 진짜 좀 아니었다고.”
“네이트. 너는 아그니샤가 죽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나? 더 좋은 인간을 찾아서 새롭게 화신을 만들라니.”
“그건 아니지만…. 아그니샤랑 그 황제는 엄연히 다르잖아. 아그니샤보다 좋은 인간을 찾는 건 어려워도, 그 황제보다 좋은 인간을 찾는 건 쉬울 거라고.”
“내가 아끼던 놈이었다.”
“당신 이름에 먹칠이나 하던 놈이겠지. 인간들이 천계의 정복자 엑수스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아?”
“그래도 상관없었다.”
엑수스는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네이트와 눈을 마주쳤다.
“녀석은 천계의 힘을 빌릴 시간에 자신의 군사와 정계에 대해 하나라도 더 고민하려고 하는 지도자였다. 가만히 눌러앉아서 기도만 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엑수스….”
그의 강렬한 눈매가 슬퍼 보였다.
“그는 드넓은 영토에 시시각각 출몰하는 악령들을 모조리 군사력으로 처단했다. 그건 천계의 힘을 빌리지 않은 인간 고유의 순수한 힘이었다. 천계의 힘이 없어도 인간들이 스스로 악에 대항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선을 넘었어. 인간의 순수한 힘으로 악에 대항하는 것까진 좋아. 좋다고. 그런데 매번 전쟁을 일으켜서 현계에 있는 악의 농도를 키웠잖아. 그 대륙에 있는 인간들이 가뭄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가뭄 따위가 중요한가? 더는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그가 현계를 제패하게 될 날이 올 터였다.”
“하지만 만약 그가 타락해서 악마 강림의 그릇이…”
“만약 그러기 전에 악의 농도가 너무 짙어졌다면 내가 직접 나설 생각이었다. 그를 진짜 화신으로 삼아 빙의할 생각이었지.”
엑수스는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슬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페인…. 그 사악한 놈이 덜컥 그를 죽여버리고 말았지.”
“페인의 잘못이 아니야.”
“페인의 잘못이 아니지만 페인의 죄는 맞다.”
“….”
“네이트. 악마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천사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고 있지. 이렇게 느슨한 태도로는 수천, 수만 년이 지나도 악을 토벌할 수 없다. 때로는 우리도 강경하게 나설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필요악이 아닌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게 문명인의 증거이자 선함이야. 덕분에 인간들이 아무것도 몰랐던 원초적인 옛 시대보다는 악의 농도가 옅어졌잖아. 옛 시대보다는 천사들이 현계로 더 자주 갈 수 있게 되었다고. 반면에 악마의 하수인은 수백 년째 무소식이지.”
“수백 년째 무소식이었는데, 페인에 의해 악마의 하수인이 현계에 출몰했다.”
엑수스는 황금 철퇴를 벽에 걸었다.
“페인이 무고할 수도 있다. 필요악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발키리가 설명하지 않았나?”
“설명이 아니라 변명이었어. 명분이었고.”
“그를 살려두기엔 현계가 감당할 위협이 너무나도 크다. 내가 그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쨌든 페인은 악의 새싹을 자르기 위해서라도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마의 그릇이 될 수 있으니까?”
“그렇지. 게다가 그의 업보는 차원 너머의 악마들을 유혹할 정도로 지나치게 강렬하다. 언제든 악마에게 홀려서 타락해도 이상하지 않을 영혼이란 말이다.”
“페인이 벨드샤를 해치웠어.”
“…!”
엑수스는 벽에 황금 철퇴를 걸다가 말고 네이트를 돌아봤다.
그의 눈빛에 당혹감과 의구심이 가득했다.
네이트는 그에게 한걸음 다가들었다.
“이래도 페인이 타락할 것 같아?”
“인간이 악마의 하수인을 해치웠다고?”
“발키리가 치명상을 입히고 몇 인간들이 페인을 도와주긴 했지만…. 맞아. 결과적으로 페인이 벨드샤를 해치웠어. 악마의 속삭임을 거부하고, 대항할 방법을 생각하고, 그걸 실행에 옮겨서 직접 처단했다는 거야.”
“……믿기 어렵군.”
“이래도 그가 악마의 그릇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타락하지 않겠다는 본인의 자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가엾잖아.”
“이중적이고도 모순적인 살인귀 같은 놈이지.”
“그래서 더 가여운 인간이잖아. 업보의 경계선에서 매번 갈등하는 모습이.”
엑수스는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꽉 쥐었다.
엑수스 또한 천사였다. 페인이 아무리 미워도 엑수스는 천사였다. 그것도 일반적인 천사를 능가하는 상위 천사였다.
천사가 왜 천사인가. 천사의 마음은, 그들의 선심은, 배려심은, 이해심은, 이타심은 인간의 마음보다 초월적인 것이 아닌가.
하물며 상위 천사라면.
“인간이 이렇게까지 했으면 충분하잖아.”
엑수스는 페인에게 분노했다. 페인을 원망했다. 철퇴로 머리를 깨부숴도 시원치 않을 놈이다.
하지만 천사로서 페인의 삶이 가여운 것 또한 사실이다. 그의 사정이 이해가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는 꾸준히 증명해왔어. 그런 일들을 겪고도 타락하지 않을 인간이라는 것을.”
“놈이 변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는 없다.”
“나는 페인이 벨드샤를 해치웠다는 소식을 듣고 울었어.”
“….”
“뭔가를 증명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어서.”
페인이 직접 악마의 하수인을 해치웠다고 한다. 발키리가 코앞에서 놓친,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장하고 있던 그 녀석을 말이다.
“다시 물을게. 이래도 페인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해?”
콰앙!!!!
엑수스는 커다란 주먹으로 벽을 쳤다.
그 자리에 걸려있던 황금 철퇴가 종이처럼 납작하게 찌그러졌다.
“…내가 놈을 주시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타락할 조짐이 보이면 그땐 정말로…”
“발키리의 집행 명령은?”
“잠시 철회하고 지켜보겠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등을 홱 돌리는 엑수스다.
네이트는 그의 널찍한 등에 대고 작게 말했다.
“고마워.”
“헛소리 집어치워라! 그가 벨드샤를 자기 손으로 해치웠으니 조금 더 지켜볼 명분이 생겼을 뿐이다!”
* * *
시간이 흘러 정세가 안정화되고 있다.
오늘날 새로운 정세의 중심에서 데이진타우 제국과 세인트 왕국은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했다. 승천자를 필두로 한 교단과 제국의 원로원이 전언을 연결하면서 서로에게 필요한 일들을 지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역병의 처리.
제국령에 속했던 국가들의 독립.
황제의 잔당 제거.
세인트교의 전파.
그리고 교역로 확립이다.
“진짜 끔찍이 단단하구먼!”
“괜히 광인의 숲이겠소? 이곳의 거목들을 베어내려면 노동자가 더 필요할 것이오.”
“그래서 인력은 언제 충원된답니까?”
“보름 안에 더 많은 노동자들이 일거리를 찾으러 올 겁니다.”
다양한 국가에서 합류한 노동자들이 광인의 숲에 길을 내고 있다. 거목과 무성한 풀을 베어내고 땅을 다져서 평탄하게 만드는 것이다.
광인, 악령, 짐승, 독초 등 갖가지 위협이 도사리는 숲이기 때문에 이들 노동자를 지키는 인원 또한 있었다.
“잠시 작업 중단하고 대기하겠습니다!”
데이진타우 제국의 병사들이다.
“아이고! 살았다!”
“망할 도끼가 또 상했어.”
“벌써 쉴 시간이라고? 병사들은 왜 다 앞으로 몰려갔답니까?”
한 노동자의 질문에 병사가 답했다.
“전방에서 광신자 무리가 발견되어 처리 중입니다.”
“뭐, 뭐, 뭣, 광신자?! 무리?! 한 놈이 아니라는 소리잖아!”
그런데 기겁하는 노동자를 다른 노동자들이 구경하며 즐겁다는 듯 떠들었다.
“이게 웃긴 일인가? 광신자들이 나타났다고! 흑마법이나 주술이라도 부리면 우린 끝장이야!”
“그럼 광인의 숲에서 작업하는데 그런 것도 모르고 오셨나?”
“여러 놈이 나타날 줄은 몰랐지! 우, 우리도 뭐라도 들고 무장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
그러자 노동자들은 더 큰 소리로 웃어댔다.
“어이, 아저씨! 이리 와서 좀 쉬어요. 뭘 그렇게 무서워하고 있어? 광신자 따위가 뭐라고.”
“이 사람들아! 여기가 왜 광인의 숲이겠어?! 짐승이나 도적이라면 몰라도 광신자들은 진짜 위험하다니까!”
“역병 교수가 저 앞에 오십 보는 먼저 가 있는데 호들갑 좀 그만 떱시다.”
“역병 교수가 뭔데? 우리 땅에 돌아다니는 역병 의사랑은 다른 거요?”
“세상에 셋 밖에 없는 귀인들이 있죠. 제국 병사들이 알려줬는데 저 아저씨는 모르시나 보네.”
그러더니 이곳의 일을 봐주고 있는 역병 교수가 언급된 것이다.
“독수리, 매, 올빼미. …병사들 말로는 그중에 ‘독수리’가 왔다고 하던데요.”
* * *
큰 키. 독수리를 닮은 방독면. 주술적 힘이 있는 검은 깃털과 흑기사의 갑옷으로 무장한 역병 교수.
역병 교수로서 기본적인 능력인 방혈을 3계까지 강화한 후 페인에게 영력을 지원받아 철인 1계를 개방한 남자.
그의 가시 박힌 몽둥이에 진득한 선혈이 흥건하다.
“부상자들부터 옮겨주십시오. 내상이 심합니다.”
“뭣들 하고 있어? 빨리 들것 가져와!”
굉장히 낮게 변조된 음성을 들은 병사들이 서둘러 부상자를 옮겼다.
그리고 가시 박힌 몽둥이 앞에는 피떡이 된 광신자들이 신음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 몇 명은 이미 으깨진 내장을 쏟아낸 채 절명하였거나 부서진 두개골에서 뇌수를 흘리며 죽어가는 중이다.
또한 역병 의사들이 몽둥이를 쥐고 있는 남자의 뒤에 배경처럼 늘어선 채다.
“말도 안 돼…. 우리의 주술이….”
살아남은 소수의 광신자들은 그의 가시 박힌 몽둥이를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어째서…! 어째서 방혈을 당하고도 멀쩡한 것이냐!”
“내겐 너무 약한 방혈이었기 때문입니다.”
광인의 숲에서 살아가며 어두운 힘에 심취해 매일 자신들의 능력을 갈고닦던 광신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간의 소식에 귀가 어둡고, 오늘처럼 갑자기 나타나서 단신으로 자신들의 무리를 휩쓸어버린 상대를 보고 있으면 분통이 터지리라.
불합리한 힘의 격차에 억울할 수밖에 없다.
“개소리하지 마라! 방금 그건 방혈 2계였다고! 여섯 명이 동시에 발동한 2계의 방혈술에 어떻게 기침 한번 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이냐!”
“네놈들은 방혈 6계에 처맞아본 적이 있습니까?”
그의 묵직한 질문에 광신자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들의 상식으로 방혈 6계라는 건 실재세계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휘두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절대 ‘인간’은 아니리라.
그렇다고 방혈 6계라는 주술을 터득한 존재가 결코 ‘천사’는 아닐 것이기에,
“저희가 몰라뵈었습니다!”
광신자들은 넙죽 엎드려서 눈앞의 강력한 상대가 섬기고 있을 초월적인 존재를 갈망하는 것이다.
“저희는 그대가 ‘악마’의 권속인 것도 모르고 그만…! 쓸모가 없더라도 충실한 몸종이 될 테니 부디 이 눈먼 산양들을 거두어주시길 비나이다!”
“네놈들은 단지 마법과 반대의 영역에 있는 어두운 힘을 갈구하던 게 아니었다는 겁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힘이 아니라 악마를 숭배했던 것입니까?”
그러자 광신자들은 구원의 빛이라도 본 눈을 했다.
그 모습을 역병 의사들의 뒤에서 지켜보던 병사들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자리를 피했다.
“숭배합니다! 보이지 않아도, 말씀이 들리지 않아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의 세계에 만연하고 있는 악령과 악인이야말로 그분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까.”
“저희는 그분께서 이 세계에 남겨주신 악을 취하고 있는데 어찌 그분을 섬기지 아니하겠습니까! 저희는 정말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네놈들은 악마를 숭배했던 것입니까. 힘을 추구했던 것이 아닙니까.”
“예! 정말 진심으로 그분의 발자취를…! 그분의 잔향이라도 접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입니다!”
“그렇게나 진심이라면 당장 만나러 가십시오. 방해가 됩니다.”
“아, 하하! 당장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래서 항상 산 제물들을 준비하여 피를 바치고 있습니다. 또한 악에 대해서 무지한 자들에게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전파하여…”
“방해가 됩니다.”
쩌억!!!
그는 가시 박힌 몽둥이로 광신자의 머리를 부숴버렸다.
“히익!”
허둥지둥 기어서 도망치려는 다른 광신자들의 손등, 발목, 등을 차례로 밟았다.
꾸드득!
“끄아아아아아!”
쩌억!
다시금 무자비한 몽둥이질이 시작된 것이다. 그 움직임에 사사로운 감정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다. 고기 다지는 단순한 작업이라도 하듯 사람의 몸을 으깨고 있는 것이다.
“어, 어째서 이러십니까! 어째서!”
“방해가 됩니다.”
쩌억!
광신자들은 죽어가면서도 그가 자신들을 죽이는 이유를 끝끝내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