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87화 (87/181)

17. 새로운 씨앗, 깊어진 뿌리 (2)

어떤 나라도 예외는 없겠지만, 인간이 악에 대항하는 수단이 적었던 시절에는 세인트 왕국 또한 불안정한 시기가 있었다.

세인트교가 자리를 잡게 되면서 왕국은 안정화되었다. 그때 권력, 자본력, 무력을 가진 자들은 신분의 귀천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라도 외부로 나가서 자기들만의 영지와 가문을 개척해냈다.

덕분에 왕국은 성벽 너머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왕은 자국의 영토를 넓혀 국력을 증강하는 가문의 인사들에게 영주 직책을 주고 그들이 요구하는 영지에 대한 제한적인 자치권까지 정식으로 허가하였다.

그 시기에 자본력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가문이 있었다.

발렌잔타르.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상인이었던 발렌잔타르의 업적이 있다면 단연코 ‘시장’의 확립이다. 왕국에서 화폐를 만들어 유통하여도 마땅히 그것의 쓰임새가 없던 시절, 발렌잔타르가 상인 연합을 구성하여 왕국의 많은 곳에 설치한 시장은 세인트 왕국의 경제력 향상에 크나큰 힘이 되어주었다.

당시에 발렌잔타르의 공로를 높이 평가한 왕은 그를 왕궁으로 들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발렌잔트르는 왕의 부름에 답하면서도 속으로는 철저히 이익을 계산하던 사람이었다.

- 소인의 사병으로 쓸 500의 군사를 내어주십시오.

- 가문을 만들어 더 많은 것을 관리하고 싶사옵니다.

왕은 발렌잔타르를 왕궁에 들이는 조건으로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발렌잔타르 가문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 세인트교가 진정 필요악을 수용한다면, 자국은 향후 내정과 악령화 대응을 위하여 격리된 암흑가를 정해 국가의 관리 아래에 둠이 현명합니다.

왕의 그림자를 업은 발렌잔타르는 뒷골목이라는 개념까지 만들었다. 그를 머리로 두고 있는 상인 연합에서 작은 조직체가 분리되어, 뒷골목에서 왕국이 필요로 하는 어두운 수요를 관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주 많은 세대가 교체되었다.

왕이 죽고 왕세자가 왕이 되기를 반복했다. 발렌잔타르가 죽고 그의 친족이 영주의 자리를 세습하였다.

간혹 그 세대의 왕이 내정에 관심도 없이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으면, 땅과 자원을 노리는 영주끼리 사병을 만들거나 암살자를 쓰면서 무력 다툼까지도 하였다. 많은 가문들이 몰락하고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굉장히 초기부터 부와 권력을 쌓아둔 발렌잔타르 가문은 다른 가문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발렌잔타르 가문은 필요하다면 왕궁의 권력을 빌리거나, 선대부터 뒷골목에 뿌리내린 인맥을 통하여 무력까지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쯤 성벽 밖으로 한참 확장된 세인트 왕국의 영토는 많은 영주들이 관리하게 되었는데, 현명했던 왕은 모든 영주들이 힘을 합쳐도 역모를 꾸밀 수 없을 정도까지만 영토 확장을 제한하였다. 또한 가문들이 이에 반발하여 왕궁을 공동의 적으로 삼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왕은 각 가문에 불평등한 혜택을 나눠주고 그들 사이의 무력 다툼을 노골적으로 눈감아주었다.

르뉘아 가문.

그들은 타 가문과의 무력 다툼으로 인하여 쇠약해졌다가 끝내 악령화로 인해 몰락했던 가문이다.

몰락한 르뉘아 가문의 인사들은 왕국에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악령화 발생 빈도가 높은’ 영토는 아무 가문도 나서서 가지려고 하질 않았는데, 이를 기회로 본 발렌잔타르 가문이 자본의 힘으로 값싸게 차지하였다.

- 신관님. 저희는 억울합니다. 발렌잔타르 가문은 그 저주받은 땅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 젊은 신관이 있었다.

그는 말솜씨가 좋아서 많은 신관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가끔 승천자의 초대를 받아 중앙교회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던 아주 유망한 신관이었다.

- 강대한 가문들 사이에 끼어서 농지를 전장으로 제공해야 했습니다. 수십 년간 사병들이 죽어나간 땅은 저주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헐값에 팔려서, 음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가문의 손바닥에 넘어가고 만 겁니다.

- 염려 마시지요. 르뉘아의 영주님. 발렌잔타르 가문의 땅이 너무 넓다는 것에 왕궁 측에서도 경각심을 가지고 있답니다.

- 제발 저희 선조들의 한을 풀어주십시오. 발렌잔타르 놈들은 뒷주머니로 성수를 거래하고 그것을 저주받은 땅에 뿌리고 있습니다. 악에 취약한 계층들을 위해 제공되어야 할 성수가, 한 가문의 탐욕에 의해 흙바닥에 뿌려져도 되는 것입니까?

- 땅을 잃었어도 가문의 인사들은 저마다 힘이 있고 줄이 있지요.

모두에게 존경을 받던 젊은 신관은, 르뉘아 가문의 생존자에게 달콤한 제안을 건넨 것이다.

- 제가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승천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겠군요. 돈도 돈이지만 다양한 직종에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젊은 신관은 아주 많은 사건들을 만들고 조작했다. 아주 위험한 악령을 처단했다거나, 아주 힘들고 불쌍한 사람을 뒤에서 도왔다거나, 광장에서 어느 불구의 다리를 기도로 고치는 기적의 연극까지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가 사건들을 만들고 조작하기 시작한 날부터 천사는 강림하지 않았다. 천사는 승천자의 기도에도 응답하지 못했다.

왕국에 기나긴 가뭄이 찾아왔다.

- 동쪽의 신묘한 대국으로부터 간신히 공수한 최고의 부적입니다.

그때 젊은 신관은 승천자와 밤길을 산책하였다. 천계와의 접촉이 끊긴 것부터 왕국에 찾아온 가뭄까지, 직면한 문제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밤길을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누면 입이 마르는 법.

- 향긋한 차를 가져왔습니다. 드셔보시겠습니까?

승천자는 독을 마셨다. 자연에서 추출한 것을 인공으로 걸러내고 농축하여 만들어낸 무자비한 맹독이었다. 뒷골목으로부터 주술사들을 모아 강력한 저주까지 담은 맹독이자, 승천자 전용의 사약이었다.

- 스, 승천자님…!

- 그으윽…. 네… 네 이놈…. 내가 너를 아비처럼 인도해 줬는데…!

- 아, 조, 조금만 조용히!

- 인두겁을 쓰고 있었구나……!

승천자는 녹은 내장을 토해냈다.

눈의 혈관이 심각하게 터져서 동공과 흰자위조차 없이 붉은색이 되었다.

젊은 신관은 그것으로도 멈추지 않고 승천자의 등에 부적까지 붙였다.

- 사람입니다. 인두겁까진 아니고….

- 언젠가 벌을 받게 될 거다…! 악령이 되면…! 사람들이 널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 제가 승천자가 되어도 그럴까요?

- 잔악무도한 놈…. 반드시 끔찍한 최후가 네놈을…….

밤길에 목격자는 없었다.

만약 목격자가 있다면 하늘이 유일하다.

그래봤자 개입도 못하는 하늘이었다.

승천자의 죽음을 세상에 알린 것은 다음날 그 길을 지나던 아녀자였다.

- 악마의 저주라도 받으신 게 분명해요. 요즘에 천사가 강림하지 않는 거나 가뭄도 그렇고….

모든 상황은 젊은 신관에 의해 설계되어 있었다.

- 승천자님께서는 악에 대항하기 위해 마법의 힘을 써 자결을 하신 거라고 추측됩니다.

- 악마가 세인트교를 노리고 있었다니….

비첸크로이 제국을 경계했던 왕은 승천자의 부재를 심각하게 여겼다. 그래서 왕은 천사의 강림을 기다리지 않고 교단 측에 명령해 즉각 승천자를 정하게 하였다.

악마가 세인트교를 노린다는 이야기가 퍼졌을 때, 유망한 신관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잠시라도 망설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악마라는 것은 그만큼 두려운 존재이며, 내장을 입으로 쏟아낸 승천자의 시신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누군가 승천자를 해야만 한다면 누군가는 나서서 승천자를 자처했을 것이다. 단지 그들이 잠시 망설이던 순간에 젊은 신관이 빠르게 나서서 기회를 잡았을 뿐이었다.

- 만약 악마가 세인트교를 노려 승천자를 계속 해하려 한다면, 경험 많은 신관님들이 다음 승천자가 되는 건 피해야 합니다.

다급한 상황. 두려운 상황. 그리고 죽은 승천자에게서 누구보다도 신임을 얻고 있던, 누구보다도 상심이 클 훌륭한 신관이 자기희생까지 자처했다.

이견 없이 새로운 승천자가 되었다.

천사에게 직접 선택을 받는다면 더 강한 승천자가 될 수 있었겠지만, 천사가 강림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많은 신관들이 그에게 영력을 나누어주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는 르뉘아 가문의 사람들을 모아서 발렌잔타르 가문의 토지에 저주를 걸도록 하였다.

수십 년이 흘러서 승천자는 악령이 되었고 발렌잔타르 가문은 몰락. 아니, ‘말살’에 가까운 수준으로 무너졌다. 그들의 가보는 불태워졌고 그들의 재산과 주물들은 뒷골목에 숨겨졌다. 그러면서 발렌잔타르 가문의 빈자리를 꼭두각시인 르뉘아 가문이 차지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왕은 언제부터인가 수상하게 부를 축적하고 있는 르뉘아 가문이 눈엣가시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 그때 길바닥에 버려졌다는 씨앗이 하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신경도 쓰지 않았던 어린 계집이 어느덧 자라서 허드렛일을 하는 소녀가 되었다고 한다.

- 그렇군. 그 계집은 살아가다보면 르뉘아 가문을 원망하기도 하겠구나.

그래서 그 계집에게 주물을 주었다. 역사에 남은 발렌잔타르의 핏줄은 남달랐는지, 계집은 주물 하나를 수단으로 써서 인생을 개척해나갔다.

그때 계집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발렌잔타르 가문의 부활을 꿈꾸고 있었다.

- 물갈이가 필요한 시점이긴 하다.

르뉘아 가문을 발렌잔타르 가문으로 교체할 씨앗이 무럭무럭 잘 자라난 것이다.

* * *

베르자인은 독수리 역병 의사에게 자세한 명분을 설명하였다.

“르뉘아는 비밀문서에 있던 가문 중에 하나였어. 타락한 승천자와 연관된 증거품이 아주 많겠지.”

“그들이 증거품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압니까?”

“뒷골목에서 유통되고 있는 신성한 주물의 숫자가 내 계산보다 적거든. 아직도 숨겨진 주물이 많다는 거야.”

지금은 없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비밀문서.

그 비밀문서에 있던 가문들은 모두가 베르자인에게 약점을 잡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베르자인은 르뉘아 가문이 가지고 있는 약점 하나를 이번에 꺼내서 이용하려고 할 뿐이다.

게다가 그녀는 세인트 왕국에서 가장 큰 정보력까지 쥐고 있다.

“르뉘아 가문 영주의 일정을 알려줄게.”

“놈을 죽이면 됩니까?”

“다른 자들은 죽이지 말고 목표만 죽여. 그래야 처리하기 깔끔해.”

“황금달 자객의 지원은 있습니까?”

“없어. 자객을 움직이려면 소수로 가야 하는데, 그보단 너 한 명이 확실할 것 같더라고.”

단독 의뢰였다.

* * *

새벽 공기가 싸늘하다.

우거진 풀숲 사이에 큰 마당을 두고 마련된 2층 오두막을 약 30명의 사병들이 지키고 있다. 그중에 절반은 르뉘아 가문의 인장을 팔뚝에 차고 있고 나머지 절반은 ‘레이젠뷔르’ 가문의 인장을 차고 있는 것이다.

오두막 안에서는 두 가문의 영주가 새벽의 밀담을 나누는 중이다.

“요즘엔 황금달을 거치지 않고서야 통하는 게 없습니다. 르뉘아 가문도 이제는 새로운 실세를 받아들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전 승천자와 너무 깊은 관계를 맺은 적이 있어 힘듭니다.”

“그런 영주가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저희도 타락한 승천자와 거래를 몇 번인가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실세가 바뀌고서 자객들이 찾아오길래 솔직하게 토로하고 주물을 반납했죠.”

“황금달의 머리가 발렌잔타르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라는데 저희가 어찌 황금달과 손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과거에 얽매여 현재를 망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영주님.”

“저희 르뉘아는 승천자에게 은혜를 입은 가문입니다. 타락하였어도 은혜는 은혜이고 그분께서 남겨두신 주물과 재산을 다른 이에게 넘길 수는 없습니다.”

“그 고집을 어떻게 바꾸면 안 되겠습니까?”

“르뉘아의 신념을 고집이라 하시는군요….”

르뉘아의 영주는 레이젠뷔르의 영주를 도끼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래서 이 새벽에 밀담을 요청하신 건지요?”

“우리는 비록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 선조들이 힘을 합쳐 분쟁을 이겨냈던 전우가 아닙니까. 최근 르뉘아의 행보를 보면 걱정되어 지켜보기가 힘듭니다.”

“숨김없이 말씀하시지요. 제가 지금까지처럼 황금달을 거부한다면 앞으로 거리를 두겠다는 속셈이 아닙니까. 이건 그러기 위한 밀담이 아니었습니까?”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제가 영주님의 르뉘아 가문을 걱정하는 마음은 진심입니다.”

“그것 참 고맙군요.”

“영주님. 그렇게 르뉘아 가문의 도리를 지키려다 자칫 화를 볼 수도 있습니다. 왕궁, 교단, 강령술사까지 황금달의 뒤를 봐주고 있는 새로운 시국입니다.”

같은 순간, 두 영주가 모르는 바깥에서 습격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습격이 잠입이나 암살은 아니었다.

“저기 움직이는 거 뭐야?”

“어디?”

숲을 경계하던 사병들은 수상한 음영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나가는 사람인가, 동물인가를 따질 겨를도 없이 가까워졌다.

상대가 대놓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강령술사의 것보다 작은 렌즈, 아래로 뾰족하게 휘어진 부리. 그 방독면의 형태를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독수리….”

“역병 교수잖아? 세인트 왕국에 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독수리 역병 교수는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가 강령술사의 밑에 있는 특수한 능력자라는 것도 이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상대에게 적의가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다. 적의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지도 않는다.

“역병 교수님. 이쪽에는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사병은 역병 교수가 이 주변에 볼일이 있겠거니, 생각하며 가볍게 그를 막아섰다.

새로운 정세를 만들어낸 강령술사는 누가 뭐라고 해도 세인트 왕국의 편이 아닌가. 그런 강령술사의 밑에 있는 역병 교수가 아닌가.

“왜 말씀이 없으시지?”

“혹시 근처에 용무라도…”

퍼억!

그를 막아섰던 사병이 복부를 움켜쥐며 쓰러졌다. 동료가 쓰러진 것을 코앞에서 본 다른 사병은 당혹감부터 표했다.

“엇, 왜, 왜 이러시는…?”

독수리 역병 교수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가시 박힌 몽둥이가 흉악하게도 생겼다. 상대를 때려 부수면서도 찢어발길 수 있을 것만 같다.

처걱!

그런데 가시가 몽둥이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죽일 생각은 없다는 걸까.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진의를 알 수 없는 방독면과 큰 키가 두렵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무슨 말씀이라도 해주셔야…!”

그는 사병의 옆머리를 몽둥이로 가볍게 후려쳤다.

카앙!

기절하여 쓰러진 사병의 찌그러진 투구에서 징징 울리는 소리가 났다. 친절하게도 가시를 숨긴 몽둥이로 힘 조절까지 해준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쯤 사병의 머리는 찢어진 투구 속에서 부서졌으리라.

“거기 무슨 일이야?!”

“잠깐, 독수리 역병 교수잖아!”

“도, 독수리가 왜 우리를….”

방금 쓰러진 사병 두 명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들로선 알 길이 없다. 그래서 독수리 역병 교수가 자신들을 죽이려는 건지 제압하려는 건지 분간할 수가 없다.

와중에 독수리 역병 교수는 모여든 사병들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오시면 안 됩니다! 더, 더 들어오시면…. 여긴….”

사병들은 쉽사리 발바닥을 뗄 수 없었다. 허리춤에 있는 칼을 쉽사리 뽑을 수가 없었다.

그때 그의 낮게 울리는 음성이 새벽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나는 한 놈만 죽이러 왔습니다.”

사병들은 행동을 멈췄다.

독수리 역병 교수가 주술을 쓴 건 아니다. 그러나 사병들은 허리춤의 검 손잡이를 쥔 채 움직이질 못했다. 다리가 굳고 말문이 막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르뉘아 가문의 영주만 죽으면 됩니다.”

르뉘아 가문의 사병들은 울상이 되었다. 반면에 레이젠뷔르의 사병들은 숨길 수 없는 안도의 호흡을 옅게 내쉬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은 아니다. 선택에 따라 피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사병들의 시야는 좁아졌다.

피 한 방울도 없이 쓰러진 동료 두 명. 그리고 피 한 방울도 묻지 않은, 가시 없는 몽둥이가 눈에 들어온다.

“검을 뽑지 마십시오.”

“뽑으면 죽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 살벌한 협박이 사병들에겐 희망적으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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