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새로운 씨앗, 깊어진 뿌리 (3)
르뉘아 가문의 영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새벽을 지세우면서 뭐라고 더 말씀하셔도 황금달과는 손을 잡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적대하는 건 말이 다르지 않습니까. 승천자의 주물이 강력하다는 건 이해하지만 그걸 아무리 강화한들 강령술사나 베르자인을 해하기엔…”
“더 하실 말씀이 없다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르뉘아 가문의 영주는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끼익. …끼익
그런데 누군가 바깥에서 판자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이어서 문이 열리는 소리다.
이 상황에 누군가 허락도 없이 오두막에 들어온다는 건 많은 것을 의미했다.
르뉘아의 영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결국 이 밀담도 날 처리하기 위해 마련한 장소였을 뿐이로군요.”
“네?”
“베르자인의 짓입니까?”
“아, 아니….”
르뉘아의 영주는 품속에서 어떤 단검을 꺼냈다.
십자가를 닮은 단검에는 세인트교를 상징하는 여러 그림이 작게 새겨져있다. 그리고 새겨진 그림들이 제각기 은은한 빛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누가 봐도 신성한 단검, 승천자의 주물이었다.
“잠깐, 오해입니다! 이 밀담에 그런 의도는 없었습니다! 지금 들어온 자가 누구인지는 저도 모른단 말입니다!”
…끼익. 끼익.
묵직하게 판자 바닥을 누르는 발걸음이 가까워지고 있다.
밖에 깔려있을 사병들은 조용하다. 그렇다면 사병들의 제지를 받지 않고 영주의 허락도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자가 누구란 말인가.
르뉘아의 영주는 소리쳤다.
“웬 놈이냐!”
짧은 벽 너머에서 그가 걸어 나왔다. 두 영주의 눈엔 그의 다리, 팔, 어깨, 몸, 독수리를 빼닮은 방독면이 차례대로 보였으리라.
“독수리….”
두 영주는 그를 보자마자 서로를 경계했다.
르뉘아의 영주는 상대 영주가 베르자인과 손을 잡고 자신을 죽이기 위해 역병 교수를 고용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레이젠뷔르의 영주는 자신이 르뉘아 가문과 이렇게 밀담을 나누고 있다는 것 자체가 황금달의 입장에서 적대적으로 보였으리라 생각했다.
먼저 자신을 변호하는 건 레이젠뷔르 측이었다.
“저, 저는 아닙니다!”
“무엇이 아닙니까?”
“저희 레이젠뷔르 가문은 과거를 청산하고 황금달과 협업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 이 밀담은 그저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는 전우에게 조언을 하고자 마련한…”
“관심이 없습니다. 그쪽은 나가도 좋습니다.”
레이젠뷔르의 영주는 그 말을 듣자마자 도망치듯 오두막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독수리 역병 교수와 르뉘아의 영주가 단둘이 남게 되었다.
“당신이 르뉘아 가문의 머리입니까?”
“황금달은 목표의 얼굴도 모르고 일처리를 하나?”
“일전에 자객이 찾아갔을 때, 당신은 타락한 승천자와 관계는 있었지만 받은 주물이나 재산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랬었지. 어쩐지 너무 순순히 넘어간다 싶었네. 결국 이렇게 쓸 명분을 아껴두었다는 말인가.”
“숨겨둔 주물과 재산은 어디에 있습니까?”
“고문을 해도 내뱉지 않을 거다!”
영주는 들고 있던 단검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그러자 단검이 그의 피를 흡수하면서 강렬한 섬광을 터뜨렸다. 밀폐된 공간에서 터진 섬광이라 맨눈으로 봤다면 눈이 타버릴 수도 있었다.
물론 독수리 역병 교수는 맨눈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의 손아귀가 영주를 조준했다.
이젠 속으로 주문을 외울 수 있다.
‘방혈.’
키이잉!
그러나 영주가 들고 있던 단검이 높은 소음을 내면서 또다시 섬광을 터뜨렸다. 그 빛이 어찌나 밝았는지 이번엔 독수리 역병 교수조차 고개를 돌리고 오두막 내부에 불이 붙어버릴 정도였다.
그때 독수리 역병 교수는 고개를 돌리면서 생각했다.
‘칼이 온다.’
고개를 돌린 탓에 한순간 목표물을 놓쳐버린 상황. 다시 말해 무방비한 상황. 바로 지금을 노려서 상대가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부웅!
그래서 재빨리 가시 박힌 몽둥이를 꺼내 수평으로 휘둘렀다. 하지만 영주는 없었다. 대신 오두막 바깥에서 영주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 아무도 없느냐! 다들 일어나라! 어서!
‘도주를 택했다.’
화아아악!
불이 바닥과 벽에 옮겨붙어 거세지고 있다. 독수리 역병 교수는 불길을 피하면서 오두막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쿠구궁!!!
천장을 지탱하던 목재가 무너져서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자부심이 있었다. 역병 의사들 중에서도 정예이며, 그 정예들 중에서도 강령술사와 함께 벨드샤를 상대하여 무찌른 정예로서 역병 교수로 임명받았다.
스승인 우토, 스승의 스승인 페인, 페인의 조력자인 셰르카에게 직접 영력을 나누어 받고 많은 능력들을 깨우쳤다.
지금 쓰고 있는 방독면도 페인이 흑기사의 사철이라는 특수한 재료를 써 직접 만들어준 것이며, 입고 있는 로브와 방망이까지 그들의 은혜를 입어 완성된 것이다.
‘마주치자마자 다리를 부러뜨리고 심문하는 게 옳았다.’
그는 깊게 반성하며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빌어먹을 놈들!”
같은 순간, 영주는 오두막을 빠져나왔지만 마당에 보이는 사병들은 모조리 쓰러져있었다.
“어서 일어나란 말이다!”
그는 가장 가까운 곳에 쓰러진 사병에게 달려가 몸을 흔들어보았다. 그래도 반응이 없어서 생사를 확인해 봤는데 숨은 멀쩡하게 내쉬고 있다.
어떤 주술에 당해서 깊은 잠에 빠진 걸까.
‘아니야. 투구가….’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는 날붙이의 공격이나 외부의 충격에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당연히 머리의 모든 부분에 가해지는 충격을 고르게 흡수하기 위해, 멀쩡한 투구는 반드시 좌우가 대칭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투구의 옆면이 살짝 일그러져있는 것이다.
‘때려서 기절시켰구나!’
어쨌든 저 불타는 오두막 안에 갇힌 녀석이 살인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령술사의 심복이라는 게 살상을 피했다고…?’
강령술사는 살상을 피한다거나 그런 느낌이 아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십, 수백만까지도 무자비하게 죽이며 피비린내 풍기는 왕도를 걷는 자다.
그런 강령술사의 심복이 오늘 새벽엔 살상을 피했다. 변수를 차단하려면 죽이는 편이 더 확실했을 텐데.
이유가 뭘까.
‘…사병들까지 죽이면 뭔가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좀 전에 레이젠뷔르 가문의 영주는 그냥 보내줬다.
레이젠뷔르 가문은 비록 타락한 승천자와 관계가 있었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자신들의 과오를 황금달에 솔직히 알리고 끝내 황금달과 협업까지 하게 된 박쥐같은 가문이다.
‘베르자인, 이 간사한 년…!’
따라서 모든 것은 베르자인 하나로 설명된다.
‘왕국이 모르게 날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날 죽여서 모종의 정당한 이익을 보려는 것이로다!’
영주는 일단 뛰었다. 역병 교수라는 존재가 불타는 오두막 따위에 갇혀서 죽을 리가 없다.
당장 오두막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야만 한다. 작은 숲 하나만 통과하면 저택이 있을 것이다. 또한 저택에 있는 자들도 불타는 오두막의 불꽃과 연기를 보고 사병을 대동해 이쪽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 그들과 합류해야 한다.
‘내가 먼저 알리면 된다! 모두에게!’
독수리 역병 교수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그 사실 하나를 여러 가문과 왕궁에 알릴 수만 있다면 베르자인을 내심 경계하는 자들이 하나둘씩 나설 것이다.
‘이건 어찌 보면 위기이자 기회다!’
* * *
콰아앙!
독수리 역병 교수는 오두막의 벽을 부수고 나왔다. 불에 그을린 방독면과 몽둥이는 차가운 새벽 공기 닿아서 뜨거운 열기를 발산했다.
‘불을 피하는 게 아니라 불을 뚫는 게 옳았다.’
그는 이 와중에도 반성하고 있었다.
‘놓쳤다. 순간순간의 어설픈 판단으로 인해.’
그에겐 밤눈도 존재 추적 능력도 없다. 이 어두운 새벽에 숲속 어딘가로 도망친 영주를 추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타닷!
그래도 쓰러진 사병들 사이를 뛰면서 최선의 판단을 하려고 노력했다.
‘도망친다면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갈 것이다.’
가까운 곳에 르뉘아 가문 영주의 저택이 있다. 영주의 입장에서 그리 넓은 숲도 아니니까 두 다리로 열심히 뛰면 금방 도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더 많은 자들이 나타나면 살상을 피하기가 어렵다.’
영주가 다른 이들과 합류하기 전에 빠르게 추적해서 죽여야만 한다. 만약 그러지 못하면 일이 크게 틀어지게 된다. 강령술사와 깊은 친우라는 베르자인과의 거래를 망치게 된다.
‘절대 안 된다.’
그는 철인의 몸으로 무작정 뛰었다. 일반인보다 월등하게 빠른 다리로 뛰어서 영주를 따라잡을 것이다.
‘……그런데 영주가 이걸 예상해서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면…’
바로 그때였다.
“이 쓰레기 놈들아!”
영주는 숲속에서 등을 보이고 있었다. 신성한 단검을 허공에 휘두르고 있었다.
독수리 역병 교수는 곧 뜀박질을 멈추게 되었다.
황금달의 자객들이 영주의 앞길을 막고 있던 것이다.
“승천자의 주물이 두렵지도 않나?!”
자객들은 영주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서 쉽사리 달려들지 못하는 것이다.
“날 죽이려거든 네놈들 중 몇 놈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또한 자객들은 독수리 역병 교수를 보고도 시선을 피하는 듯하였다.
일부러 시선을 향하지 않는 것이다.
독수리 역병 교수는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였다.
…퍼어억!
영주의 가슴 정중앙을 가시 박힌 몽둥이가 뚫고 나왔다.
그의 가슴뼈가 앞으로 열린 날개뼈처럼 되었으며, 몽둥이의 둔탁한 끄트머리에는 굵은 혈관을 달고 있는 심장이 매달려서 애처롭게 맥동하고 있었다.
“……끄윽…!”
뒤에서 몽둥이를 던진 것이었다.
“끄어….”
풀썩!
마침내 영주가 쓰러졌다.
자객들은 영주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굉장히 일상적인 말투로 반응했다.
“곤란하던 참에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할 말입니다.”
대다수 자객들은 숲속을 경계했고 소수의 자객들만이 영주의 시신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독수리 역병 교수는 당장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베르자인 님은 자객의 지원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들이 이곳에 있습니까?”
“르뉘아 가문은 굉장히 적대적입니다. 저희는 이자가 전 승천자의 주물로 저항할 것도 대비하여 투입되었습니다.”
만약 독수리 역병 교수가 별 탈 없이 오두막 내에서 그를 죽였다면, 이렇게 자객들과 마주칠 일도 없었다는 말이다.
“알겠습니다. …사병들은 살려두었고 레이젠뷔르 가문의 영주는 보내줬습니다.”
“혹시 과정에 죽은 자는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레이젠뷔르 가문의 영주가 자신의 사병들을 두고 혼자 사라진 게 의문입니다. 영주가 홀몸으로 숲길을 통과하기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우리 사병들이 깨어나면 함께 이동해야지요.”
그때 수풀 사이에서 레이젠뷔르의 영주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독수리 역병 교수는 르뉘아의 영주와 그를 번갈아보다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전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레이젠뷔르의 영주는 태연하게 웃었다.
“가문의 선조들이 전우였다고 하여 여기 쓰러진 영주와 제가 전우라는 건 아니지요.”
“사전에 레이젠뷔르 측에서 밀담을 요청한 겁니다.”
“본래 르뉘아 가문이 차지하고 있는 땅은 발렌잔타르의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나는 영주로서 올바르고 합당한 선택을 했을 뿐이랍니다.”
자객들은 영주에게 고개 숙여 감사함을 표했고 영주는 손사래를 치며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독수리 역병 교수는 그런 자객들과 영주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나는 계획된 판 위에 놓인 하나의 말에 불과했다.’
베르자인이 자신에게 모든 정보를 주진 않았던 것이다.
이 밀담에 참여한 레이젠뷔르 가문의 영주가 이쪽 편이라는 것을, 자객들이 숲속에 포진하여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베르자인에게 하나의 말로써 취급되고 있던 것이다.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 협력자가 아니었다.
‘독수리 역병 교수라는 이름 하나만으론…. 그분의 신뢰를 기대할 수 없었다.’
* * *
둥그런 방독면.
얼굴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큰 렌즈. 얼굴에 바짝 붙은 짧은 부리. 왜소한 신장.
그녀는 세상에 셋만 존재하는 역병 교수의 구성원 중 하나인 ‘올빼미’다.
후우우우웅…
조용한 밤의 항구에 바닷바람만이 침묵을 깼다. 올빼미 역병 교수는 지붕에 앉아서 시커먼 밤바다를 지켜보고 있다. 그녀가 몽상에 빠졌는지 잡념에 빠졌는지는 본인을 제외하고선 아무도 모른다.
후우우웅…
이번엔 바닷바람의 소리가 아니다.
그림자가 이동하는 소리였다.
“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셈이냐?”
뒤에서 우토가 다가왔다.
“독수리는 세인트 왕국으로, 매는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넌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여기가 조용해서요.”
그녀의 변조된 목소리는 피리처럼 음이 높으면서도 밤의 숲처럼 신비로웠다.
“낮엔 어디로 갔었지?”
“잤어요.”
“역병 의사가 되기 전부터 밝은 건 질색하더니, 여전하군.”
“셰르카 님은 언제 돌아오시죠?”
“그분은 강령술사님과 함께 낙인의 돌을 찾으러 가셨다. 두어 달은 기다려야 하겠지.”
그러면서 우토는 불만이 섞인 시선으로 그녀의 등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세상만사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그녀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네가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셰르카 님이 실망하지 않겠나.”
“….”
“독수리와 매는 역병 교수의 머리가 되겠다면서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말이다. 두 분께서 돌아오셨을 때 너희들의 그간 활동을 보고받은 후 머리를 결정하겠다고 하셨다.”
“머리가 되는 건 관심 없어요.”
“왜지?”
“앞에 나서는 건 싫어서요.”
“답답하군.”
물론 우토가 생각하기에도 그녀의 성향은 역병 교수의 머리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도 내가 추리고 추려서 뽑아낸 정예인데 아무런 활동이 없다는 걸 보고하면….’
올빼미 역병 교수가 뭐라도 활동을 해야 자신의 체면이 실추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우토였다.
“역병 교수의 머리는 독수리나 매. 둘 중 한 녀석에게 주겠다.”
“….”
“네가 어떤 활약을 하더라도 머리가 될 일은 없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스으으.
줄곧 밤바다만 쳐다보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우토를 보았다. 단, 지금처럼 머리가 180도 돌아간다는 건 우토가 보기에도 매번 적응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그녀와 이렇게 몇 마디를 나누고 있으면 우토도 덩달아 음침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떠냐? 머리가 될 일이 없다고 한다면.”
“약속할 수 있어요?”
“약속하지. 어차피 너에겐 머리가 어울리지 않는다. 활동량이 적고 활동하는 시간대도 제한적이고 지나치게 과묵하니까.”
자꾸만 비교하게 된다. 비교하고 있으면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들 비슷한 수준의 능력을 갖고 있는 역병 교수들인데, 독수리나 매는 정말 잘 해주고 있는데 왜 이 녀석만 이렇게 의욕 없이 시간이나 버리고 있는 걸까.
“결국 머리 역할은 독수리나 매가 가져갈 것이다. 너는 단점이 너무 많으니깐.”
“….”
“그러니까 이젠 뭐라도 좀 하란 말이다. 강령술사님께서 돌아오셨을 때 내가 그분을 볼 면목이 있어야지 않겠나. 너는 너대로 셰르카 님을 볼 면목이 있어야 하고.”
“…알겠어요.”
“대답은 좀 빠르게 해라. 너랑 말할 때마다 여간 답답해야지.”
스으으.
올빼미 역병 교수의 머리가 정상적인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아무튼 약속했으니, 이제 어떤 활동을 할 건지 내게 말해보아라.”
“…그건 지금부터 찾아볼….”
“뭐라…?”
우토는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아무도 없다.
시선을 모아서 보고 있던 인물이 갑작스레 사라졌다. 목표 잃은 시선은 파도 소리를 내는 밤바다와 별을 담은 밤하늘 사이를 방황했다.
그녀는 우토의 인식으로부터 조용히 사라진 것이다.
‘불쾌하기 짝이 없군. 아무리 같은 편이라지만….’
우토의 세상은 페인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페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쪽에서 점차 큰 세력을 만들고 능력 있는 심복을 길러내야 한다. 그리고 페인에게 당당하게 선보여 그의 깊은 신뢰를 얻는 것이 우토의 목표였다.
‘그분께서 낙인의 돌까지 손에 넣으신다면…. 세상 무엇도 그분을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우토의 광신에는 근거가 있었다.
‘나는 신이 될 남자를 섬기고 있음이 확실하다.’
악령화라는 제약이 사라진 페인은 결국 인간을 초월하는 경지에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평범한 자들보다 일찍이 깨달은 자신은 누구보다도 축복받은 운명이다.
우토는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미래를 그렸다. 그리고 지붕에서 내려와 새로운 역병 의사들에게 밤새도록 방혈을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