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89화 (89/181)

17. 새로운 씨앗, 깊어진 뿌리 (4)

르뉘아 가문의 영주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시신의 최초 발견자는 그와 친분이 있던 레이젠뷔르 가문의 영주였다.

사인은 자신의 몸을 태워서 죽는 분신자살.

그의 자살 동기에 대해서 왕궁과 가문들은 다양한 추측을 내세우며 혼란에 빠졌지만 베르자인의 고발이 그들의 혼란을 잠재웠다.

- 그의 저택에서 교단의 신성한 주물과 금은보화가 무더기로 발견되었습니다.

전 승천자가 빼돌린 주물과 막대한 재산을 그가 숨기고 있었으며, 그의 시신에서 악의를 섬광으로 태우는 단검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 부패한 영주는 악령화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완전한 악령으로 변한 순간, 그가 소지하고 있던 신성한 단검이 섬광을 터뜨려 그를 불태워 죽였다는 결론이었다.

왕은 명분을 기다렸다는 듯 르뉘아 가문 측에 노여움을 표출했다.

그러면서 르뉘아 가문이 검은 돈을 써 국가에 신고한 것보다 많은 사병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사병들을 전쟁에 투입하지 않았으며, 왕국과 교단의 귀중한 재산인 주물들을 유폐하고 있었다는 것을 잇달아 강조했다.

- 전 승천자로부터 뿌려진 악습과 폐단은 왕국의 근간인 세인트교를 위협하고, 더 나아가 왕국의 악령 발생 빈도를 높이는 질병이 된다.

왕과 왕궁의 명분이 뚜렷해지면서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 르뉘아 가문은 오늘날 영주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를 널리 알리는 본보기가 될 것이다.

왕은 왕궁, 교단, 르뉘아 가문의 구성원들을 포함한 모든 영주들과 이 사건의 고발자인 베르자인이 보는 앞에서 멸문을 명했다. 그래도 세인트 왕국에서의 멸문이란 관련된 친족들을 모조리 말살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던 권리와 재산을 몰수하는, 다른 국가에 비해서 다소 온건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르뉘아 가문이 차지했던 영토를 어느 가문에 맡길까 의논이 오가던 중, 때를 기다리고 있던 왕궁 측에서 발렌잔타르 가문을 언급한 것이다.

* * *

르뉘아 가문의 영주와 일가족이 차지했던 저택은 본래 발렌잔타르 가문이 세운 것이었다. 그래서 저택의 규모는 웬만한 영주의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베르자인은 르뉘아의 영토와 사병들을 자신의 가문으로 흡수하고 기존에 있던 르뉘아 가문의 관계자와 친족들까지 포용하기로 했다. 물론 그녀가 원한다면 그들을 땅에서 내쫓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괜히 그들의 적대감을 키워서는 좋을 게 없다는 계산이었다.

넓디넓은 저택에서는 발렌잔타르 가문의 부활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들 모두가 각자의 가문에 소속된 인사들이었다. 왕궁이나 교단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연회라서, 가문의 인사들은 서로 거리낌 없이 교류하며 보다 물질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왕국의 성벽, 숲, 발렌잔타르 가문의 관리 아래에 놓인 민가들이 심심한 야경을 만들고 있다.

바쁘게 모든 이들과 인사를 나눈 베르자인은 잠시 저택의 발코니에서 담배를 태우는 중이다.

야경을 보는 그녀의 눈빛은 지쳤지만, 아주 홀가분해 보였다.

“날마다 영주들 상대하는 것도 피곤하네.”

“삶의 목표를 이루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름 모를 자객이 그녀의 한 발자국 뒤에 서있다. 그는 이 순간에 베르자인과 단둘이 있으며, 그녀가 담배를 태우고 있을 때 자신도 담배를 태울 수 있는 자객이었다.

그래서 이 자객이 그녀의 오른팔이거나 그에 준하는 인물이라는 건 확실해 보인다.

베르자인은 털털하게 웃었다.

“이제 결혼하고 애라도 낳아야 하나?”

“가문의 구성원은 천천히 확보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연회가 끝나면 이 커다란 저택도 휑하게 비겠지.”

“집사와 하녀들을 고용하시겠습니까?”

“응. 그리고 자객과 사병들을 저택에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렇게 쓰고도 공간이 남을 것 같아.”

성벽, 숲, 민가.

농지, 목장, 풍차, 강, 언덕, 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발렌잔타르 가문의 영토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다 되찾았는데 기분이 왜 이럴까.”

발렌잔타르 가문의 부활을 목표로 평생을 달려왔다.

평생의 목표를 너무 일찍 이룬 걸까.

가문과 영토와 권리를 되찾았지만, 두 손바닥에 다 담기지도 않을 정도로 정말 많은 것을 얻게 되었지만, 어째선지 마음은 너무도 공허하다.

목표를 이룸과 동시에 목표를 잃었다.

“…야. 내가 저 숲에서 마을 남자애들이랑 뛰어놀고 있으면 하녀들이 달려왔던 시절이 있어.”

“하녀들이 어째서 달려왔답니까?”

“발렌잔타르 가문의 중요한 막내딸이니까 막내딸답게 행동하라는 거지.”

“그게 뭡니까?”

“치마랑 손에 흙을 묻히면서 남자애들이랑 뛰어노는 막내딸은 이상하다는 거야.”

“…어려서부터 활동적이셨군요.”

“재밌었어. 그렇게 뛰어놀다가 집으로 끌려가면 대기하던 하녀들이 목욕을 시켜줬지. 집사는 매번 서재에 날 데리고 가서 이런 책을 읽어라, 저런 책을 읽어라, 이걸 공부해라, 저걸 배워라….”

그땐 그런 게 싫었다. 종이를 만지는 것보다 나뭇가지를 만지는 게 좋았다. 의자에 앉아서 글자를 보는 것보다 풀숲에서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뛰어노는 게 좋았다.

그런데 지금 또 생각해 보면 싫은 기억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오히려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하는 짓이 남자아이 같았겠지…. 진짜 남자아이였다면 좋았을 거야. 그래서 아빠가 날 더 증오했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잠시나마 주어졌다는 점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큰 도움이 되었지. 긴 세월 배우지 않은 사람과 배운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생기거든.”

“그 격차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저로선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상대와 말 몇 마디만 나눠 봐도 알 수 있어.”

“저 뒤에 모인 영주들 중에 베르자인 님과 격차가 벌어진 자가 많습니까?”

“당연하지. 정말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멍청한 놈이 있는 반면, 같은 사람이라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 있어.”

“베르자인 님보다 뛰어난 자는 경계하고 싶군요.”

“경계하는 게 아니라 뭐라도 배우고 얻어야지. 저들 중에 적군은 없으니까.”

“…뭔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던 도중, 자객의 눈빛이 돌변했다.

“베르자인 님. 누군가 이쪽 층으로 올라오는 기척이…”

“또 왔네.”

자객은 단검을 뽑으려던 손을 멈췄다. 베르자인에게서 경계하는 기색이 하나도 보이질 않는 것이다.

그녀가 아는 사람일까, 자객이 여러 사람들을 떠올리던 중에 누군가 발코니에 들어왔다.

그는 다름 아닌 독수리 역병 교수였다.

“연회가 한창인데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영주들 상대하다가 피곤해서 잠시 쉬러 왔지.”

자객은 자연스럽게 독수리의 뒤쪽 벽에 기대어 섰다. 그때 독수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자객의 배치 또한…. 나를 완전히 신뢰하진 않는다는 증거다.’

베르자인은 물었다.

“그러는 너는 왜 여기로 왔어? 나랑 볼일 다 끝났으니까 제국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었나?”

“제가 베르자인 님께 볼일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말을 이상하게 해서.”

“뒤에서 살기가 느껴집니다.”

“저 자객의 살기가 느껴진다고?”

“예.”

“육감이 뛰어나구나? 누구 제자 아니랄까 봐.”

베르자인은 그러면서 자객과 시선을 교환했다.

“지금은?”

“살기가 지워졌습니다.”

“네가 말하는 방식 때문에 내 자객이 경계심을 높였던 거야.”

“경계심이 살의까지 이어집니까?”

“적당한 각오로 달려들어선 너를 막을 수 없을 테니까.”

그러자 독수리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그가 어째서 한 걸음만큼 거리를 벌리는 건지 궁금했다. 무슨 의미가 있다고.

“제가 전에 말씀드린 게 있습니다.”

“어떤 거?”

“역병 교수 세 명 중에 누가 머리가 될지에 대해서입니다.”

“네가 될 거라면서?”

“그것은 반드시 제가 머리가 되겠다고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습니다.”

“뭔 소리야?”

“제가 역병 교수들의 머리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강령술사님께서 돌아오셨을 때, 다른 두 역병 교수보다 더 훌륭한 활동 기록을 세워놔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너희 셋이서 누가 머리가 될지 경쟁 중이라는 뜻이야?”

“예. 그래서 저는 베르자인 님의 신뢰를 얻고 싶습니다.”

“결론이 왜 그렇게 돼?”

“베르자인 님은 강령술사님과 가장 깊은 친우이기 때문입니다. 베르자인 님의 신뢰를 얻는다는 건 강령술사님의 신뢰를 얻는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베르자인은 그 말을 듣고 내심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만족감은 잠깐뿐이었다.

어떤 여자가 생각나고 만 것이다.

“내가 페인이랑 가장 친한 거 맞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셰르카는?”

“지금은 베르자인 님께서 강령술사님과 가장 깊은 관계가 맞습니다.”

그녀는 묘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셰르카가 낯선 땅에 가서 페인을 어떻게 구워삶을지 상상하면 부아가 치민다. 페인이 셰르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년은 뭔가 인간으로서 중요한 부분이 없어….’

한번 만났을 뿐이지만 베르자인은 확신한다.

셰르카는 심히 불안정하고 어딘가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을.

그녀의 존재가 페인에게 분명 큰 도움이 되긴 한다. 하지만 그만큼의 어두운 이면이 느껴져 불안하다. 마치 양날의 검이 페인 곁에 붙어있는 것 같다.

베르자인은 가만히 머리를 굴리다가 독수리에게 제안했다.

“…그럼 역병 교수의 머리가 정해지기 전까지만 나랑 일할까?”

“허락만 해주신다면 돕겠습니다.”

“이제 막 가문이 부활한 참이라 나도 여러모로 손이 있으면 든든하거든. 불안한 것들도 한두 가지가 아니고.”

“제가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베르자인 님께 이득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그럼.”

“영광입니다.”

“내일 다시 찾아와.”

베르자인은 그렇게 독수리를 보냈다.

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던 자객이 물었다.

“독수리를 감아주신 목적이 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미리 작업하는 거야. 나중에 쟤를 이용해서 셰르카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셰르카는 요주의 인물이긴 합니다.”

흑사병을 만들고 그것을 강령술사가 선택하도록 유도하고, 이번에는 낙인의 돌을 찾겠다고 단둘이 바다를 건너갔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독수리가 역병 교수의 머리가 된다면 페인과도 자주 붙어 다니겠지. 그러다 보면 그년도 자주 만나게 될 거고.”

따라서 베르자인은 자신의 눈을 만들려는 것이다.

감시까진 아니지만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도록, 뭔가 일이 터지려고 할 때 이쪽에서 대처라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흑사병 건은 진짜 위험했어. 그러니까 두 번은 안 돼.”

페인이 흑사병 같은 업보를 또 선택하게 되어선 안 된다. 이번엔 그렇게 되기 전에 손을 써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페인이 천사든 악마든 어느 한쪽한테 당할 것만 같다.

* * *

독수리, 매, 올빼미 중에 누군가는 역병 교수의 머리가 될 것이다.

누가 머리가 될지는 페인이 판단하는 것이므로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페인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하는 것이 유리할 수 있으리라.

이곳은 한때 제국령 소속으로서 북쪽 변경주로 불리던 나라.

원래 있던 변경백이 처형을 당하고 지도층까지 흑사병에 당해서 아직 왕이라고 할 사람이 없는 나라.

가까스로 존속하고 있는 바르드베쿠스 영지이자, 백작령이자, 백국이다.

‘강령술사님께 업보가 되는 흑사병부터 정리해야 한다.’

역병 의사들과 함께 이 나라에 와서 흑사병을 치료하고 있는 남자.

그는 데이진타우 제국의 병사들이 쓰는 넓적하게 휘어진 칼 두 자루를 허리춤에 차고 있으며, 로브 대신 갈색의 가죽 갑옷을 몸에 걸치고 있다.

날렵한 역삼각형의 머리에 갈고리처럼 휘어진 부리가 특징적인 짙은 갈색의 방독면.

그 생김새가 영락없이 ‘매’를 닮았다.

“저쪽에도 위중한 환자가 더 있다고 합니다.”

“안내해라.”

그는 앞서 도착해 활동하고 있던 역병 의사들과 합류하여, 이 나라의 흑사병을 치료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데이진타우 제국과 거리가 먼 나라일수록 흑사병의 피해가 막심했다. 이는 제국의 인력이나 물적 지원을 상대적으로 늦게 받은 탓이다.

“이쪽은 끝났습니다.”

“다음은 저쪽 능선 너머에 있는 촌락입니다.”

잠깐만 거리를 걷고 있어도 누군가의 신음이 들려온다. 길바닥에 쓰러진 몸뚱이들은 시신인지 걸인들인지 직접 생사를 확인해야만 알 수 있을 지경이다.

매는 한탄했다.

“보면 볼수록 다른 변방 국가에 비해서 상태가 심각하군.”

“이 나라는 반란을 실패한 여파에 흑사병까지 겪게 되어서 그렇습니다.”

분산된 마을을 돌며 환자를 치료하고 도심으로 와서 다시 환자를 치료하고 다시 마을을 돌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치료를 받아 목숨을 부지한 사람보다 너무 늦어서 죽은 몸들을 더 많이 보게 되었다.

그래서 하는 일의 절반이 환자를 치료하는 일이라면, 다른 절반은 시체를 옮겨 태우는 일이었다.

“백성을 통제하고 지켜야 할 병사들의 숫자도 심각하게 적어 보이는데.”

“반란에 투입된 병사들이 전부 노예가 되어 제국령에 흩어졌다고 합니다.”

“그럼 이 나라는 군대를 잃어버린 거네.”

“그러면서 지도층을 잃어버리고 흑사병까지 당했습니다.”

“최소한의 군대는 좀 남겨주지….”

“그것이 황제의 방식이었습니다.”

매 역병 교수가 다시 도심으로 돌아와 거리를 돌던 와중이었다.

“악령이 나타났다!”

“다들 도망치세요!”

“악령들이 온다!”

좀 전에 방문했던 촌락이 있던 방향이다. 그곳으로부터 사람들이 도망쳐오고 있다.

“악령들? 한 마리가 아닌가?”

“전쟁에 흑사병까지 있었습니다. 악령이 무리를 지어 출몰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도망쳐오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뛰고 있는 자들은 정말 극소수의 병사들이었다. 당장 저 앞쪽 거리에서 뛰는 병사들이 어림잡아 열 명은 될까 싶다.

“평상시라면 지금보다 더 많은 병사들을 보내서 처리했겠군.”

“가보시겠습니까?”

“너희 역병 의사들은 계속 흑사병을 처리해라. 악령들은 내가 해치우지.”

타앗!

그는 한 번의 도약으로 주변 건물의 지붕까지 올라왔다. 높은 곳에서 시야를 확보하여 도망치는 사람들과 싸우러 가는 병사들이 각자 향하는 방향을 확인한다.

‘망원(望遠).’

망원은 시야만 확보되어 있으면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는, 매 역병 교수가 가진 고유 능력이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대략 서른 마리.’

놈들은 넓은 농지를 가로질러 정돈된 풀밭 위까지 접근한 채였다.

농지 뒤로 보이는 촌락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질 않는다.

‘기껏 치료하고 살려둔 자들이….’

놈들은 촌락에서 집단적으로 발생했거나, 촌락 바깥의 ‘외부’로부터 접근한 놈들일 것이다.

그리고 놈들의 습격에 대비해 검을 뽑아든 병사들의 규모가 조촐해 보인다. 저곳에서 달려오고 있는 악령보다 숫자가 많아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데, 도리어 병사들이 악령보다 머릿수가 부족한 것이다.

반란의 실패에 이어진 흑사병. 그리고 또 이어지는 악령의 집단적인 습격.

당장 몰락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라였다.

‘고속화 4계.’

‘가속.’

…쐐애액!

그는 지붕을 박차며 발사되듯 허공을 가로질렀다. 화살보다 몇 배는 빠르게 날아서 순식간에 도심을 벗어나 병사들의 진영 앞쪽으로 거칠게 착지했다.

쿠웅!!

그의 주변으로 바람이 몰아쳐 작은 돌덩이와 풀잎이 달아났다.

“역병 교수님?!”

“뒤로 물러나서 내가 흘리는 놈들을 맡아주시오. 한 마리라도 거리에 들어가면 민간인들은 무방비로 당할 테니.”

촤앙!

그는 넓적하게 휘어진 칼 두 자루를 양손에 뽑아들었다. 병사들에게 등을 맡긴 채 곧이어 닥쳐오는 서른 남짓의 악령들을 노려보았다.

- 캬아아아아!

- 캬아아아가가가가각!

놈들 한 마리 한 마리의 울음이 비슷하다.

온몸에 있는 털이 다 빠진 것 같은 몰골이다. 또한 부패한 피부와 긴 손가락이 눈에 걸린다.

‘울음도 똑같고 생긴 것도 똑같다.’

그리고 자기들끼리는 싸우지 않고 있다. 마치 촌락에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 다음에 도시라는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서 무리 지어 몰려오는 것 같다.

매는 병사들에게 알렸다.

“저것들은 지능이 없지만 단체로 목표를 정하고서 파괴와 살육을 일삼은 악령들이오.”

“지능이 없는 악령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배후에 있는 존재로부터 지령을 받은 것이지.”

즉, 놈들의 행동과 생김새를 하나씩 종합하면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병사들도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단어였다.

“구울.”

“아….”

“지령을 받은 구울 무리가 이 나라를 노리고 있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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