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전조현상 (2)
바르드베쿠스의 흑사병은 오늘 밤에 이르러서야 정리되는 분위기다. 역병 의사들은 인근의 다른 국가를 향해서 뿔뿔이 흩어졌고 행인들은 코와 입을 가리고 있던 천을 홀가분하게 벗었다.
“북서쪽에서 온 구울 무리라고 하더라고요.”
“거긴 용이 죽은 땅이잖아.”
“네. 그래서 뭔가 저희들이 모르는 위협이 있을 거라고…. 매가 그곳에 들어가길 자처했다고 하네요.”
사람들은 오늘 출몰했던 구울 무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흑사병의 절망이 사라진 다음엔 구울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이어지는 것이다.
“매 역병 교수까지 행방불명이 되어버리면 진짜 위험한 게 있다는 건데….”
두 병사는 농지와 농지 사이의 길을 걷고 있다. 혹여나 밤을 노려서 구울 무리가 출몰할 수도 있으니 순찰을 하라는 지시가 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떤 존재가 우릴 노리고 있는 걸까요.”
“그게 용은 아니길 빌어야지.”
구울이 아니라 다른 평범한 악령이었다면 모르겠다. 놈들이 북서쪽이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 왔다면 또 모르겠다.
하필이면 무언가의 지령을 받는 구울 무리가 북서쪽 땅에서 습격을 해왔다. 누가 들어가더라도 반드시 실종되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 위험한 영역에서 말이다.
그런 위험한 영역에서 미지의 존재가 기어이 이 땅으로 손을 뻗은 것이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남쪽이나 서쪽으로 피신해야 하는 거 아니야?”
“데이진타우 제국 아니면 세인트 왕국이 가장 안전하겠죠.”
“제국은 이민을 받아주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세인트 왕국에 가자니 광인의 숲을 통과해야 하는데요.”
“제국이 그 숲에 독수리를 앞세워 길을 뚫는다는 말 못 들었어?”
“들었죠. 근데 통행이 허가되려면 더 기다려야 할걸요?”
두 병사는 걷던 중에 멈췄다.
가로등 하나도, 등불이 켜진 농가 하나도 없는 농지의 한복판.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 비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거기 웬 놈이냐!”
검을 뽑았다.
뽑았지만, 칼날이 떨렸다.
“누구냐고! 정체를 밝혀라!”
“대, 대답이 없어요…. 어쩌면 구울일지도…”
“알았으니까 닥쳐봐!”
딱 보기에도 북서쪽에서 농지를 가로질러 온 존재다. 허리는 굽었고 두 팔은 관절이 빠진 것처럼 좌우로 덜렁덜렁 흔들리고 있다. 그렇게 비틀거리며 어둠 속에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공포심에 칼날이 떨렸다.
“야, 횃불!”
화륵!
마법석이 박혀있는 횃불은 그들이 원할 때 불을 끄거나 켤 수 있는 것이었다.
“단독으로 오잖아요…! 혼자서 다 쓸어버릴 수 있다는 거 아니야?!”
“제기랄!”
휙!
다가오는 존재를 향해 횃불을 던졌다. 그 순간이 길게 느껴졌다. 던져진 횃불이 공중에서 몇 바퀴를 도는지 셀 수 있을 정도로.
투욱!
횃불은 상대의 발 앞에 떨어졌다.
마침내 정체가 드러났다.
“…매?”
“역병 교수님!”
두 병사는 들고 있던 검을 치우고 곧장 달려가 그를 양쪽에서 부축했다.
“의원까지 모시겠습니다! 어딜 다치셨습니까?!”
“완전히 중상이잖아!”
가까이서 본 매의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피가 묻지 않은 곳을 찾기 어렵고 날붙이에 베인 것 같은 상처가 너무 많다. 방독면에도 긁힌 자국이 수두룩하다.
“조금만 버티십시오!”
그때 매는 작게 웅얼거렸다.
“놈들이… 세계를 침공할 것이오….”
* * *
이렇게 사방에 펼쳐진 수평선을 보고 있으면 바다가 아득하게 넓고도 깊다는 것을 상상하게 된다.
왠지 저 수평선으로 끝없이 항해하게 되면 어딘가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만 같기도 하다.
목적지인 디아나의 항구까지는 15일에서 18일이 걸린다고 하였다.
나는 지루함에 못 이겨 물었다.
“이제 17일째인데 왜 아직도 땅이 보이질 않는 거죠?”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면 문득 나타날 거요.”
범선에는 어부들도 타고 있었다. 이들은 굉장히 큰 낚싯대를 갑판에 고정한 채 고기를 낚는 중이다.
“우리와 함께 낚시라도 즐기지 않겠소?”
“지루해 보이는데요.”
“대어를 기대하며 세월을 흘려보내면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소.”
“17일째 한 마리도 못 낚지 않았느냐.”
셰르카는 어부들 사이에 들어가서 망망대해를 보았다. 그녀도 나처럼 어지간히 지루한 모양이다.
“낚는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해도 좋은 것이오.”
“안일한 사고방식이구나.”
“급하고 불안했던 마음이 잠잠해지지 않았소? 17일 전, 처음 배에 올랐을 때와 비교해서 말이오.”
“흠….”
“그런가요?”
“그게 바다의 효능이오. 낚시의 효능이지.”
맞는 말 같기도 하고 적당히 꾸민 말 같기도 하고.
어쨌든 어부의 말대로 처음 범선을 탔을 당시와 비교해서 내 심신이 평온해진 건 맞다.
「셰르카도 그럴까?」
‘쟤는 심신이 평온하다는 개념을 모를 거야.’
쏴아아…
…툭!
뭔가가 배의 앞쪽에 부딪쳤다.
셰르카는 배의 앞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툭! 투투투툭!
뭔가 많은 것들이 배의 앞쪽에 연속적으로 부딪치고 있다.
나는 자연스레 도끼로 손이 갔다.
“싸움에 대비하거라. 페인.”
“존재감이 뚜렷하지 않은 놈들이야.”
그러자 어부들이 별일 아니라는 듯 인상 좋게 웃었다.
“고기떼를 만난 것이오.”
“생선이 무리를 지어요?”
“그런 종류의 고기가 있소.”
직후, 수많은 생선들이 수면 위로 푸른 등을 보이며 범선을 통과하는 것이다.
촤좌좌좌!
햇빛을 머금은 등이 살짝 휘어져 있어서 무지개 같다. 그런 것들이 수백 마리, 많게는 수천 마리까지도 나타나 주변을 지나가는 것이다.
셰르카는 눈을 반짝였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그물을 펼치지 않고!”
“고깃배가 아니라서 그물은 없소.”
“그냥 보내주나? 이렇게나 많은데?”
“저 고기떼를 잡는다고 한들 도착하기 전에 다 먹지도 못하여 썩을 것이오.”
“아쉽구나.”
그 순간, 이리가 몸을 폈다.
“퀴익!”
티티티틱!
이리는 촉수를 바삐 움직여서 난간을 기어올랐다. 녀석의 촉수를 처음 본 어부들은 기겁을 하였다.
“뭐야?!”
“어떻게 저런 해파리 같은 생물이 있지?”
“육지의 해파리 같구먼!”
“퀴이이잉!”
“이리. 넌 헤엄을 쳐본 적도 없지 않으냐.”
“퀴익! 퀴익!”
이리는 난간에 서서 촉수를 좌우로 들어 올렸다. 그 모양새가 마치 두 팔을 활짝 벌린 사람 같다.
셰르카는 이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해한다. 그간 마음껏 배를 채울 수 없었겠지. 하지만 조금만 더 참으면 곧 육지가 나타난다. 새로운 대륙의 새로운 먹을거리가 널 기다리고 있다.”
“퀴이익!”
“여기 있는 자들을 잡아먹어선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퀴이이이이이잉!”
“오냐! 네 멋대로 해라! 그러다 네가 바다에 버려지면 신경도 쓰지 않을 거다!”
“셰르카. 그게 뭔 소리야?”
“저 해파리 같은 생물이 저희를 잡아먹는다는 말씀이오?!”
타앗!
이리는 난간에서 뛰었다.
갑판의 어부들을 노린 게 아니라 바다의 생선들을 노려서 뛰어내린 것이다.
우리는 모두 난간에 쪼르르 붙어서 이리를 쳐다봤다.
첨벙첨벙!
이리는 수면 위에 떠서 정신 사납게 촉수를 움직였다. 일부 촉수는 물장구를 하고 또 일부 촉수는 지나가는 생선을 낚아채 삼켜버리고 있다.
“가라앉진 않는데?”
“흥.”
셰르카는 팔짱을 낀 채 이리를 외면하듯 난간에서 물러났다.
토라진 그녀와 달리 나와 어부들은 이리를 흥미롭게 구경했다.
“아주 공격적인 해파리로군.”
“해파리가 뭐죠?”
“가끔 물밑에 떠다니는 둥그런 촉수 달린 어종이 오. 저 살아있는 우산처럼 둥근 몸통에 촉수를 여럿 달고 있소.”
첨벙첨벙첨벙!
주변을 지나는 생선이 아주 많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촉수를 놀려도 생선이 알아서 치이는 것 같다.
“신나게 포식하네….”
“강령술사 공. 저게 배가 고프면 사람도 잡아먹을 수 있다는 것이오?”
“원래 사람을 더 많이 잡아먹는 악령이었어요.”
“저런 악령을 강아지 대하듯 다루는 셰르카 공이 두렵소.”
첨벙! 첨벙!
이리의 촉수들이 느려졌다. 이제 배가 찬 걸까.
…잠깐.
이리는 하루에 만 명을 잡아먹고도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는 악령이 아니었나.
「어?」
저 잠깐 사이에 생선을 아무리 많이 먹었어도 사람 만 명의 살점에 비하면 턱없이 적을 것인데.
“이리?”
첨벙…! 첨벙…!
설마.
「야, 야, 야! 쟤 가라앉고 있잖아!」
“왜 저러는 것이오?”
“셰르카!”
갑판 위에서 그녀가 뛰어왔다. 내가 부르기도 전에 뛰어왔다.
이리의 울음소리가 물고문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 퀴이이기기긱….
그때 셰르카가 다급히 소리쳤다.
“헤엄을 못 쳐서 가라앉는 게 아니다!”
주변을 지나는 수많은 물고기들.
그것들의 아래에 사람을 닮은 섬뜩한 그림자가 무리를 지어 지나고 있었다. 녀석들을 눈에 담자마자 사악한 존재감이 엄습해왔다.
「악령이야!」
이리는 정체불명의 악령 무리와 싸우고 있던 것이다. 이윽고 이리가 등에 붙은 악령이 수면 위로 뛰어올라서 갑판에 떨어졌다.
퍼어억!
“퀴이이이이!”
으드득! 뚜둑!
이리는 녀석의 온몸을 구렁이처럼 휘감아 으스러뜨렸다.
그와 동시에 어부들이 반응했다. 녀석의 정체에 대해 뭔가를 아는 것처럼.
“맙소사…!”
촤아아!
이리는 악령의 피를 갑판에 쏟아내고는 후다닥 셰르카에게 달려와 안겼다. 그리고 어부들은 갑판 위에서 죽은 악령을 가리키며 내게 외쳤다.
“저건 어인(魚人)이오!”
「어인.」
「225」
「바다의 구울 같은 녀석들이야.」
양쪽 발목이 생선의 꼬리를 닮았다. 머리도 생선을 닮았다. 몸의 군데군데에 징그러운 비늘과 뾰족한 따개비가 덮여있다. 살짝 휘어진 척추를 따라 지느러미가 나있다. 갈비뼈를 따라 붉은 아가미가 있다. 아가미 틈새로 맥동하는 장기가 보인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나도 어인의 특성에 대해선 안다.
녀석들은 구울과 흡사한 악령의 일종이다. 언제나 무리를 지으며, 지능은 낮지만 배후에 어떤 존재를 두고 지령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으아앗!”
어부들은 갑판 아래로 대피했다. 갑판 위에 있던 병사들은 저마다 검과 방패를 들었다. 이어서 갑판 아래에 대기하던 병사들이 추가로 합류했다.
“강령술사님! 셰르카 님!”
그런데 방금 갑판 아래에서 올라온 병사들이 나쁜 소식을 가져온 것이다.
“선장이 뭔가에 홀렸습니다!”
“언제부터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범선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는 겁니다!”
툭! 투투투툭!
더 많은 어인들이 뛰어올라 갑판에 떨어졌다. 생선을 닮은 녀석들의 비린 몸뚱이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구역감이 치민다.
“우아아악!!”
어째선지 녀석들은 어부들부터 노렸다. 생선의 꼬리를 닮은 발목으로는 보행할 수가 없는지 두 손으로 바닥을 기면서 어부들에게 달려드는 것이다.
쩌어어…!
녀석들은 주둥이를 벌려서 성인 남성을 한입에 집어삼켰다. 크게 벌어진 주둥이를 따라 목구멍도 함께 커지는 것이다.
- 우우우우!
어부의 하반신이 발버둥 쳤다.
촤악!
병사들은 어인들을 베며 소리쳤다.
“어부들은 대피하십시오!”
“강령술사님! 갑판 아래에는 사신단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지켜야 합니다!”
셰르카는 이리를 들고 갑판 위를 누비며 녀석들을 상대했다. 나로선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며 녀석들의 눈이 멀게 하거나, 검은 연기를 쏘아내 녀석들을 밀치거나, 이리의 촉수를 휘둘러 싸우는 것이다.
퍼억!
나도 도끼를 쉼 없이 휘둘렀다. 어인의 비늘은 판금처럼 단단했지만 다행히 내 도끼는 상대를 베는 것이 아니라 찍어서 부수는 쪽에 가까운 것이었다.
“꾸어어어!”
크게 벌어진 주둥이 속에 보이는 목구멍이 심연처럼 깊고도 어두워 보였다. 이빨 하나도 없이 오로지 상대를 집어삼키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다.
“야! 거기 잡으라고!”
“자리 지켜!”
“이 새끼들 너무 질기잖아!”
어인에게는 병사들의 칼이 잘 듣지 않았다.
「실재세계의 웬만한 악령들은 가진 악이 두 자릿수잖아.」
「어인의 225라는 악이 결코 낮은 게 아니야.」
평범한 병사들에겐 너무 버거운 상대였다. 벌써 다섯 명은 어인에게 삼켜진 모양이다. 사람을 통째로 삼킨 어인은 배가 잔뜩 부른 채 난간으로 기어갔다.
- 우우! 우우우!
어인의 복부 속에서 사람의 비명이 들려왔다.
첨벙!
「무작정 삼킨 다음에 바다로 뛰어드는 방식이야.」
혹여나 다가올 더 큰 위협에 대비해서 영력을 아끼고 있었지만 더는 안 되겠다. 일단 저 병사들은 살리고 봐야 한다.
나는 도끼질을 멈췄다.
키이잉!
갑판 위에 거미 악귀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병사들과 함께 싸워라!’
“키에에에에엑!”
“꾸어어…!”
다재다능한 거미 악귀들은 16개의 눈으로 넓은 시야각을 확보했다. 위기에 처한 병사가 보이면 재빠르게 뛰어들어서 어인을 덮치고 거미줄을 쏘아댔다.
갑판이 선혈과 거미줄과 바닷물로 더럽혀졌다.
키이잉!
흑기사도 한 마리 소환했다. 흑기사는 너무 많이 소환하면 갑판이 무게를 견디지 못해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너는 아래로 내려가서 사신단을 지켜라!’
쿵쿵쿵쿵!
흑기사는 앞길을 막는 어인 두세 마리의 몸통을 일격에 갈라버린 후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누군가 위험할 때마다 방혈도 써가며 싸웠다.
쿠구궁!
몇 십분을 싸웠을까. 어느샌가 온 바다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천둥번개가 치고 있다. 뭔가에 홀린 선장이 날씨가 위험한 곳으로 배를 진입시킨 걸까. 아니면 이곳 바다의 날씨가 급변한 걸까.
불안할 정도로 비가 쏟아진다.
“페인!”
“왜?”
나는 셰르카와 서로의 등을 봐주게 되었다.
“영력을 아껴야 한다!”
“아끼고 있어!”
“더 아껴야 한다!”
“그러니까 왜?!”
“바다를 보아라!”
나는 그 뜻을 단번에 이해하고 말았다.
촤자자자자자작…!!!!
바다에 어인들이 너무 많았다. 녀석들의 물장구만으로 파도가 부서질 지경이었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끝도 없이 갑판 위에 뛰어들어서 싸움을 걸고 있다.
그렇다면 바다에 있는 녀석들이 한꺼번에 이곳으로 올라오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갑판이라는 장소가 협소하기 때문이라는 걸까.
「무리 사냥의 한 방식일 수도 있어. 상대가 지칠 때까지…」
“장기전이 될 것이다!”
그것은 어인들의 전략이었다. 어인들에게 그런 전략을 지시한 존재가 우리를 노리고 있다.
우리는 어인들의 배후에 있는 존재에 의해 천천히 사냥당하고 있는 것이다.
“장기전으로 가봤자 그게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는 거잖아.”
“그럴 것이다….”
“상대의 노림수대로 흘러갈 수는 없어.”
“돌파하겠다는 셈이냐?”
“적어도 이대로는 안 될 거야.”
제물방류를 쓰자. 지금 바다에서 첨벙거리는 무수한 어인 무리를 향해 발동하는 것이다. 영력의 소모가 크지만 상대가 많을수록 파괴력이 증가하는 제물방류라면, 지금 같은 구도에서 변화를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제물…’
뚜드득!
“크으윽…!”
제물방류를 발동하려고 했지만 격통이 찾아왔다.
이건 언젠가 느껴본 적 있는 것이다.
무언가 내 등을 뚫고 자라났다. 척추가 휘어지는 느낌과 함께 내장까지 끔찍한 고통이 퍼진다. 몸속의 뼈가 위치를 바꾸며 내장을 압박하고 찌르는 듯하다.
「아직 1600밖에 안 됐는데 왜 이러지?! 방독면에 성수도 채워져 있잖아!」
업보다.
고작 1600 가지고 이럴 정도면 내 영혼에 얼마나 악이 쌓였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그냥 업보라는 것이다. 죄인에게 벌을 주는 세계의 법칙 같은 것이다.
“퀴이익!”
그때 이리의 촉수가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녀석은 내 등에서 자라난 가시를 뽑아주었다.
분명 가시만 뽑혔을 뿐인데 심장까지 뽑히는 것처럼 가슴이 철렁하고 고통스럽다.
“끄아아…!”
동시에 셰르카가 와서 내 정수리에 성수를 들이부었다. 지나친 고통 탓에 시야의 테두리가 하얗게, 혹은 까맣게 변한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 시야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
그녀가 말없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수평선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라앉은 카프하니드.」
「2666.」
심해에서 수면으로 올라온 그것은 노 대신 빨판 달린 촉수를 달고 있는 유령선이었다.
아니, 촉수를 달고 있는 ‘유령선’이 아니라.
‘가라앉은…. 카프하니드.’
촉수를 달고 있는 심해 속 괴물이었다. 녀석이 유령선을 장난감처럼 쥐어서 수면 위에 내놓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저곳의 바다 밑에 새까만 구멍이 생겼다.
저곳의 바다 밑에,
유령선 밑에 보이는 구멍.
이 세상의 심연처럼, 영원한 밑바닥처럼, 한번 떨어지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구멍.
쿠구궁!
하늘의 분노와도 같은 뇌성이 울리고 온 바다가 번쩍였다. 그렇게 ‘본체’가 보이고야 말았다.
그것을 목도하고서 온몸에 전율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페인…. 저 괴물은 너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사실 내가 보고 있던 건 구멍이 아니라, 심해 속 괴물의 공허한 눈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