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95화 (95/181)

18. 전조현상 (5)

시원찮은 가랑비가 내린다.

이곳의 건물들은 점토 같은 것을 굳혀서 만든 벽 위에 돌로 된 판을 얹힌 느낌이다. 유리창은 없고 종이와 목재로 된 창문이 있으며, 건물들은 점토가 아니라면 대부분이 목재로 건축된 것들이다.

「너는 어딜 가든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네.」

포장되지 않은 길을 걷고 있으면 사람들이 날 보며 수군댔다. 그들의 대다수는 차림새나 외모 따위가 농업에 종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쪽 대나무 숲길인가?」

내가 사는 대륙의 서쪽에서나 보인다는 대나무가 이 나라에서는 아주 흔하디흔한 나무였다.

저 비좁은 숲길을 걸어서 오르막을 몇 번인가 거치면 대모가 사는 ‘궁궐 같은 집’이 나온다고 했다. 아마 저택이라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 게 아닌가 싶다.

「빨리 가서 낙인의 돌을 달라고 하자.」

‘그냥은 안 줄 것 같아.’

「뺏어버리면 되지. 설마 대모가 너보다 강하겠어?」

‘그러다 전쟁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낙인의 돌이 손에 들어오면 전쟁도 무섭지 않지.」

‘그 문제가 아니잖아.’

셰르카는 낙인의 돌을 찾으러 합류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다른 일을 추천했다. 그녀의 말투가 대모가 듣기에 무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침 그녀도 이 나라에서 유통되는 주물이나 서적에 관심이 많다고 해서, 내가 대모와 이야기를 끝낼 때까지는 이 근방에서 원하는 물건이나 찾고 있으라고 설득한 것이다.

「저곳이네.」

인적 드문 숲길을 계속 걷다 보니 대모의 집이 나왔다. 아까 거리에서 보았던 건물 지붕의 소재…. 돌로 된 판을 얹어서 꾸민 낮은 담벼락과 정문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담벼락 너머로는 집이 몇 채인가 더 있었다.

그리고 정문을 두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병사…. 같은 병사가 맞나?’

「왕궁에 있던 놈들이랑 무장이 달라.」

무장과 복장 때문인지 분위기도 완전히 다르다. 마치 다른 나라의 다른 병사들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넓게 펴낸 고깔모자. 혹은 우산처럼 생기기도 한 검은 모자를 쓰고 있다. 재질은 아주 질긴 풀과 철사를 엮어낸 것처럼 보여서 투구의 역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몸에 딱 붙어서 근육의 결까지 보이는 매끄러운 가죽을 내복으로 입고, 여러 겹의 철판 같은 방어구를 몸에 부분적으로 걸치고 있다.

부분 방어구는 어깨, 팔, 가슴, 허벅지 따위에 붙어서 헐겁게 흘러내리는 느낌이다.

‘관절이 절단되는 걸 막으면서도 기동력은 극대화하려는 무장이야.’

「방어구가 덮고 있는 면적이랑 내복이 드러나는 면적이 비슷한 건 이해가 안 되는데? 기동력을 살릴 거면 황금달 자객처럼 아예 방어구를 없애던가.」

‘자객들은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도 중요해서 그래.’

「그게 뭔 상관이야?」

‘방어구가 있으면 움직일 때 소리가 나거든.’

또한 저 병사들은 허리춤 한쪽에 칼집을 두세 자루씩 차고 있다.

「두 자루까진 그럴 수 있는데 세 자루는 뭐야? 손이 세 개는 아니잖아. 그보다 저렇게 한쪽 허리춤에만 칼을 몰아서 차고 있는 건 또 무슨 의미지? 진짜 이 나라의 것들은 하나도 모르겠네.」

‘칼이 잘 부러지나 보네. 그러니까 여러 자루를 차고 있지.’

나는 당당하게 접근했다.

그들은 허리춤의 칼집에 손을 올리며 날 경계했다.

“죽고 싶은 마귀 놈이냐? 여기가 어디라고 당당하게 혈향을 풍기면서 다가오느냐?”

“강령술사입니다.”

“….”

내 변조된 목소리가 일종의 증명이 되었을까. 둘은 칼집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표정을 보니 경계심은 풀지 않은 것 같다.

“그쪽입니까? 데이진타우 사신단과 함께 왔다는 귀인.”

“절 아시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이쪽 사람들보다 키가 크고, 까마귀를 닮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며, 끓는 목소리를 낸다고 들었습니다.”

이쪽에도 나름의 소식통이 있는 것이다.

“흑주술의 문자가 적힌 도끼를 확인해 보아도 되겠습니까?”

나는 거리낌 없이 둘에게 도끼를 보여주었다.

도끼에 살짝 영력을 집어넣자 악마의 문자가 붉은빛을 발했다.

“…확인했습니다. 아침부터 찾아오신 용건이 무엇입니까?”

“대모를 만나 뵙고 싶습니다.”

“대모께서는 지난 새벽에 무사들을 거느리고 마귀 촌락을 토벌하러 가셨습니다.”

「무사? 마귀 촌락?」

“언제 돌아오시죠?”

“가랑비가 그치기 전에 돌아오겠노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강령술사가 찾아온다면 일단 안으로 모시라고 하여… 괜찮으시다면 안쪽 별채로 안내하고자 합니다.”

「별채?」

“저야 좋죠.”

“그럼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내가 이곳에 찾아오리라는 것도 대모가 짐작했다는 어투였다.

그렇게 나는 ‘무사’라고 불리는, 친위대와 자객을 합친 느낌의 병사에게 안내를 받았다. 그리고 사방이 훤히 뚫린 목재 구조물의 마루에 방석을 깔고 앉게 되었다. 어젯밤에 만찬이 있었던 왕궁의 그 구조물과 비슷한 것이었다.

「대충 디아나의 문화를 알겠어. 귀빈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거야.」

앉아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니, 반투명한 천으로 얼굴을 가린 소녀가 와서 아무 말도 없이 차와 떡을 두고 갔다.

담벼락을 따라 마당을 순찰하는 무사들은 흘깃 시선을 던지며 내 맨얼굴을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당연히 나는 방독면을 쓴 채로 떡이나 차에 입도 대지 않았다.

투두두두두…

빗소리 사이에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와 철판 스치는 소리가 섞였다.

나는 정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덜컥! 끼이익…

아까 보았던 두 무사가 문을 열고 먼저 들어왔다.

이윽고 비와 하나가 된 것처럼 아주 조용한 걸음으로, 또한 호수에 파장이 퍼지듯 은근한 힘이 있는 걸음으로 어떤 여인의 옆모습이 등장했다.

그녀를 보는 주변 무사들의 경외심 어린 눈빛만 보아도, 그녀의 절도 있는 기세만 보아도 그녀가 대모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도저히 백주술… 아니, 마법을 쓰는 용모처럼 보이진 않는다.

이윽고 나의 강화된 청각은 그녀의 첫 마디를 들을 수 있었다.

- 가서 시체 치우고 물 뿌려.

-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만…

- 씨발, 가랑비잖아. 이걸로 핏물이 지워질 것 같아?

- 소, 송구합니다!

악령 퇴치를 하느라 피곤해서 화가 났다고 생각해도 꽤나 언행이 거친 사람인 것 같다.

까만 장발에 평범한 키다. 모자, 방어구, 내복까지 무사들과 비슷한 복장이다. 다만 허리춤에 칼을 세 자루, 단검을 여덟 자루나 차고 등에는 도끼 같은 창을 두 자루나 사선으로 교차시켜 메고 있다.

그리고 왼손에 곰방대를 들고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데, 이 빗속에서 용케도 담뱃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 저 챙이 넓은 모자 덕분인가.

「네가 만나는 여자들은 왜 다들 저 모양이냐?」

‘내가 이런 영역에서 활동하는 놈이니까 그런 거겠지.’

철그럭…. 철그럭….

대모는 내게 걸어오면서 무사들에게 무기를 하나씩 넘겨주었다.

철그럭.

그대로 마루에 올라와서 미리 마련된 내 앞자리에 앉는 것이다.

인사나 하자.

“반갑습니다. 대모님.”

“반가워요. 바다 건너서 오시는 길 고생 많았다고 들었어요. 몸 상태는 좀 괜찮으세요?”

“다치진 않았습니다.”

“대단하시네요.”

“마귀 촌락은 무사히 토벌하셨습니까?”

“풋내기 네 명이 죽긴 했지만 토벌은 완료했죠. 그런데 그 네 명의 시체 냄새보다 더 짙은 혈향이 저 바깥에서부터 풍기더라고요.”

나를 두고 하는 소리다.

“그래도 저는 사람입니다.”

“물론, 사람이니까 절 찾아오신 거라 생각해요.”

“제가 찾아올 걸 알고 계셨습니까?”

“사람이니까, 마귀가 되지 않으려고 낙인의 돌을 찾는 거잖아요?”

내가 낙인의 돌을 찾고 있다는 건 사신단과 대장군밖에 모르는 정보다.

설마 내 생각이라도 읽었다는 건가.

이러면 따로 설명할 것 없이 이야기가 빨라서 좋긴 하지만, 그녀가 내 목적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하다.

오늘 처음 만나서 첫 대화를 하고 있는 거니까 대장군처럼 순수하게 추측한 건 아닐 텐데.

“제가 낙인의 돌을 찾고 있다는 건 누가 알려줬습니까?”

“오, 맞췄나 보네요.”

당했다.

「죽이고 싶네.」

따로 정보를 얻은 것도 아니고 내 생각을 읽은 것도 아니었다. 들려오는 소식통과 내 모습만을 보고서 날 떠본 것이었다.

「운 좋게 때려 맞춰놓고 이겼다는 표정이나 하고 있잖아. 그냥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자.」

“그리고 또 이런 모습을 확인해 보면 역시나 사람이 맞구나 싶어요. 마귀였다면 화를 내면서 절 죽이러 달려들었겠죠.”

“제가 당했네요.”

“저도 나름 확신이 필요해서 그런 거니까 용서해 주실 거죠?”

“어차피 말할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론은, 말씀하셨다시피 저는 낙인의 돌을 찾아서 여기까지 온 겁니다.”

“대장군이 그래요?”

또 떠보는 건가.

- 그리고…. 내가 이 이야기를 했다는 건 비밀에 부쳤으면 좋겠소.

여기선 대장군의 말을 따르자.

“낙인의 돌이 남긴 흔적을 추적해왔을 뿐입니다.”

“대장군이 아니라면 대부일 것 같은데.”

대모는 곰방대의 담뱃불을 손가락으로 눌러서 껐다.

“이 대륙에서도 위협적인 마귀들이 날뛰기 시작했어요. 제가 갔던 촌락의 마귀들도 배후에 어떤 존재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무리였죠.”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이무기…. 그쪽 나라에선 크라켄이라고 하죠? 녀석도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여러 방향에서, 전대미문의 다양한 혈향들이 풍겨온다는 말이에요.”

“….”

“제가 지금 강령술사님께 세계가 위험하다고 주장한다면, 믿으시겠어요?”

“믿고 말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원래 백주술을 쓰는 사람이에요. 이해하기 쉽게 마법을 쓰는 마법사라고 할게요.”

“예.”

“제가 하는 일이 언제나 액운을 상대하다가 도리어 자신의 액운을 쌓게 되는 일들이라…. 시답잖은 발동 조건을 따지는 마법 따위 포기하고 흑마법으로 틀어야 할 것 같아서요.”

* * *

디아나의 왕궁.

가랑비가 내리는 조용한 별채에 대장군과 대부가 밀담을 나누고 있다.

“대부의 뜻대로 강령술사를 대모에게 보냈소.”

“그렇다면 일이 잘 진행되기를 바라면 되겠군요. 이미 우리 손을 떠난 일이니 너무 노심초사하지 마시죠. 대모가 잘 판단할 테니.”

“대모는 신뢰가 가지 않는 인물이오. 강령술사의 막강한 무공을 이용하여 역모라도 일으키면 그땐 돌이킬 수 없소.”

“인품이 그런 모양이어도 역량이 뛰어난 사람이니 무사들은 대모를 존경하며 꼬리를 자처하는 법이죠. 본인의 역량이 뛰어나서 세력이 자연히 커지는 걸 가지고 어찌 미워할 수가 있겠습니까. 가뜩이나 마귀들도 많아지는 상황에.”

“마귀들이 많아지고 있어 대모의 세력 확장을 다소 허가하는 점은 납득하고 있소. 하지만 이건 대모에게 또 다른 기회가 되지 않겠소?”

“낙인의 돌을 이용하고 싶던 참에 강령술사가 갔으니, 그 돌을 대가로 더 커다란 마귀를 토벌하겠죠. 이를테면 이무기라던가, 도깨비라던가.”

“대부는 대모를 너무 신뢰하는 것 같소.”

그러자 대부는 인상 좋게 웃었다.

“대모는 억울하게 미운 털이 박힌 걸 알고도 왕궁의 사정을 이해하여 순순히 바깥에 자리를 잡지 않았습니까.”

대장군은 대모를 의심하지만, 대부는 그 반대였다.

“마귀 토벌이라는 책무도 기꺼이 수행하잖아요? 대모는 나라의 안팎을 안전하게 만드는 진짜 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무엇보다 이 나라를 생각하며 마귀에 맞서는 인물이랍니다.”

“잘 모르겠소. 대모가 정말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여 세력을 키우고 있는 것인지.”

대부는 창문 너머로 가랑비가 내리는 풍경을 보았다.

왠지 아련한 눈이었다.

“본성은 정의롭고 선한 아이니까…. 훗날 왕궁에서도 시선을 바꾸고 따뜻하게 감싸주었으면 하는군요. 대장군.”

“어릴 적 대부 앞에서 목검을 들고 뛰어놀던 철부지 소녀가 아니오.”

“알지요. 허허. 그래서 내가 대장군보다는 대모를 더 잘 안다는 말이죠. 마귀에게 친족을 잃고도 액운에 먹히는 일 없이 씩씩하게 자라지 않았습니까. 조금 비행을 하긴 했어도.”

그 말은 대장군도 부정하지 못했다.

결국 대장군은 마지못해 답했다.

“대부가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대모가 이번에 강령술사라는 기회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조금 더 지켜보도록 하겠소.”

“허허허. 두고 보라니까요. 대모는 장차 더 큰 인물이 되어서 이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 테니.”

* * *

“하지만 낙인의 돌은 보통 귀한 게 아니잖아요?”

“금은보화를 제시해도 살 수 없습니까?”

“돈으로 거래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그 돌의 가치를 잘 알고 있거든요. 꾸준히 그 돌에 대해서 탐구도 하고 있고요.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정말 중요한 일에 쓰려고 했어요. 하지만 저의 ‘나중’을 포기해서 강령술사님께 드릴 수 있다는 거예요.”

“저도 맨입으로 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저와 세 가지 일을 함께 하시죠.”

“세 가지나 됩니까?”

“제가 낙인의 돌을 갖고 있을 이유가 없어지려면 그 세 가지 일을 처리해야 하니까요.”

“들어보겠습니다.”

대모는 자신의 세력과 힘을 키워서 디아나를 강한 나라로 만드는 일에 목적이 있다는 것 같다.

그 어떤 적국이라도, 그 어떤 악마와 악령들이 찾아오더라도 쓰러지는 일 없이 이겨내는 강국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첫째는 이무기. 그쪽이 크라켄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악귀를 무찔러야 항구와 각 바닷길을 안전하게 만들 수 있어요.”

「카프하니드 말하는 거지?」

“그래야 물건과 돈이 돌면서 망가진 민생이 회복되고 나라에도 힘이 생기는 법이거든요. 망할 이무기 때문에 최근 촌락에서는 배를 곯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어요.”

「혼자서 해치우기엔 무리야.」

대모는 본인의 신성한 마법까지 포기하고 기꺼이 흑마법을 받아들일 각오를 해두었으며, 민생과 국가를 위협하는 악령들을 늦기 전에 토벌해야 한다고 한다.

“둘째는 도깨비. 최근에 부쩍 많아진 마귀들을 포섭하여 군대처럼 부리는 녀석이죠.”

“녀석도 마귀의 일종입니까?”

“악마와 직접 관련된 존재는 아니에요. 마귀의 일종이라고 하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좆밥이네.」

“매번 도깨비로 인한 피해가 누적되고 있어요. 게다가 녀석이 부리는 마귀 무리가 너무 많아져서 이대로 두면 나라라도 세우고 우릴 침공할 기세에요.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강령술사님과 힘을 합쳐서 씨를 말려버리려고요.”

내가 원하는 건 대모가 갖고 있는 낙인의 돌이며, 대모가 내게 원하는 건 나의 무력이었다. 그렇게 서로 거래하여 원하는 것을 얻자는 뜻이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대부를 죽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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