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96화 (96/181)

19. 뇌성이 울려퍼지다 (1)

“대부를 죽여주세요.”

“진심입니까?”

“마귀의 소행으로 위장해서 죽여야 해요.”

혹시 내가 대모라는 직책에 대해서 뭘 잘못 알고 있는 걸까.

디아나는 아마카라교의 ‘만카라’라는 천사를 따르는 국가다. 그리고 사신의 설명에 따르자면 이곳에서는 만카라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남녀 각각 한 사람에게 부여하는데, 그게 대부와 대모라고 했다. 그렇다면 대부와 대모는 같은 축에 속하는 인물이라는 게 아닌가.

그런데 대모가 대부의 죽음을 원한다니.

“대부와 친분이 있는 관계가 아니셨습니까?”

“친분이야 아주 두텁죠. 그런데 그 사람은 저한테만 착해요.”

타락한 승천자처럼 대부도 뭔가 구린 것을 숨기고 있다는 걸까. 그래서 대부를 죽여달라고 하는 걸까.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명분을 들어봐야겠습니다.”

“대부는 백성들을 소모품 취급하면서 혈세를 걷는 장본인이에요.”

“그게 답니까?”

“이 나라의 거리를 보았으면 아실 텐데요. 사람들의 차림새만 보더라도 민생이 굉장히 어렵다는 걸 느끼지 않았어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비중이 높다고는 생각했다. 대다수 사람들의 차림새도 그렇고 거리에서 하고 있는 일도 그렇고 모두가 농부처럼 보였다.

「외지인의 눈으로 봐서 좋게 말하면 농부라는 거네.」

기억을 더듬어보니 거리에 부유한 사람이나 귀족 같은 자는 없었다.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빈부격차는 당연히 있지만, 이 나라에서 본 사람들은 대체로 풍요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 많았다. 나는 그걸 농부라는 편견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수도의 거리가 이런 상황인데 외지의 촌락들은 어떻겠어요?”

지금까지 내가 경험해왔던 나라들의 수도를 생각해 보면, 이곳은 확실히 수도라고 하기엔 부족한 부분이 많다.

“군대를 보내서 마귀들을 토벌해도 모자란 판에 왕궁에서 혈세로 만든 진수성찬이나 즐기며 시시덕거리고 있죠.”

대모는 내 앞에서 처음으로 적개심을 드러냈다.

“왕궁에 있는 놈들은 일을 안 해요. 나름 바닷길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인데 상업이나 무역은 키우지도 않고요. 이런 와중에 민생이 어떤지도 모르는 노쇠한 왕을 보세요. 미래가 어둡다니까요.”

“만약 제가 대부를 죽인다면 그다음은 뭡니까?”

“낙인의 돌을 받고 돌아가시면 되죠. 강령술사님이라면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이쪽에서도 유명한 승천자와 엑수스의 화신까지 이겨냈다고 했으니까요.”

“아니요. 그걸 묻는 게 아닙니다.”

대모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냐고 묻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대부가 죽으면 그 아래에 있는 세력이 전부 대모의 밑으로 들어가죠.”

“그리고요?”

“마귀의 소행으로 죽은 것처럼 꾸며주시면, 저는 어려서부터 따르던 대부의 죽음에 분노하면서 대대적인 마귀 토벌을 강행하자고 주장할 명분이 생겨요.”

“…그리고?”

“왕도 저처럼 대부의 죽음에 노하겠죠. 대장군에게 명령해서 군사를 일으켜 나라 주변의 마귀들을 해치우라고 지시할 거예요.”

그다음부터는 듣지 않아도 감이 잡힌다.

큰 병력이 빠졌을 때, 내부에서 세력을 키운 자가 시도할 수 있는 일이라면 뻔하다.

“역모입니까.”

“왕궁에 있는 늙은 호랑이들을 전부 갈아치워야 나라가 살아요.”

“여왕이 되시려는 겁니까.”

“맞아요. 답답해서 제가 직접 하려고요.”

“그럼 본인이 직접 하시죠. 대부를 죽이는 것 정도는.”

“제가 하면 실패할 수도 있어서요.”

“그럼 제가 하면 무조건 성공합니까?”

“그럴 것 같은데요?”

나는 설득당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판단이 맞는 판단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대모는 내가 갈등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더 밀어붙이는 것이다.

“둘 중에 선택하시면 되겠네요. 지금 저와 무사들을 죽이시고 낙인의 돌을 가져가시거나, 아니면 거래를 받아들이시거나. 둘 중에 어느 쪽이든 실행해서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잖아요?”

당장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고 낙인의 돌을 빼앗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이 나라와 관련된 모든 것들과 적대 관계에 돌입한다는 것을 뜻한다.

반대로 거래에 응한다면, 나는 결과적으로 역모에 동참하는 것이다. 내 손으로 대부를 죽이면 그다음엔 대모가 왕궁에 있는 자들을 모조리 해치울 것이다. 그리고 대모가 정말로 나라를 위하고자 이런 역모를 꾸미는 것인지, 아니면 개인의 욕망 때문에 이러는 건지 지금으로선 분간할 수가 없다.

어느 쪽이든 달가운 선택지는 아니다.

「난 둘 다 좋은데?」

「지금 대모를 죽여서 돌을 뺏으면 또 전쟁을 할 수 있는 거잖아. 악령화 증상이 해결된 상태로 전쟁이라면…. 엄청 강해질 수 있는 기회야.」

「이대로 거래를 한다면 장차 여왕이 될 사람과 친분이 생기는 거라서 그것도 엄청난 이득이고. 저번에 제국의 역모는 실패해서 아쉬웠는데 이번엔 제대로 성공하는 걸 구경할 수 있겠어.」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자니 내게 시간이 충분치 않다. 사신단과 함께 돌아가기 전까지는 모든 일을 끝내고 낙인의 돌을 손에 넣어야만 한다.

“약속하시죠. 도깨비와 이무기를 토벌하고 대부의 일까지 제가 도와준다면 반드시 낙인의 돌을 넘기는 겁니다.”

“설마 제가 강령술사님 상대로 약속을 어길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래서 일단은 거래에 응하기로 했다.

* * *

나는 양쪽으로 시장이 자리한 길가에서 셰르카와 합류했다. 그녀는 이리를 펼쳐 비를 막으면서도 이리의 손잡이에 바구니를 달고 있었다.

“뭘 산 거야?”

“부적, 목탁, 염주, 비수, 인간의 혈에 관련된 각종 서적들이다.”

“돈은?”

“보석과 교환했다.”

“보석이랑 교환하면 네가 손해잖아.”

“재물 따위는 오랜 세월을 살다 보면 무가치한 것이다. 오히려 이런 타국의 지식을 고작 보석 몇 개로 살 수 있다면 굉장히 싼값이지.”

그녀는 물질보다는 지식의 가치를 얻었다는 점에서 만족하고 있었다.

「뭔 소리야? 무조건 돈이 최고지.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야.」

“낙인의 돌은 어떻게 되었느냐?”

“역시나 그냥 주진 않더라고.”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대가로 뭘 요구하였지?”

“저쪽으로 좀 걷자.”

나는 그녀와 함께 빗길을 걸었다. 인적이 많은 곳에서 벗어나 적당한 숲길로 들어왔다.

「미행하거나 엿듣는 자는 없어.」

“그냥 반타토룸을 발동해서 새어나가는 소리를 차단하면 될 일인데 굳이 여기까지 와야겠느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

츄욱…!

이리의 촉수 두 개가 그녀의 양쪽 눈알을 쪽 빨아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동공이 붉은 눈알을 끼워놨다.

“정리는 되었느냐?”

“대모는 역모를 꾸미고 있었어.”

“야심가였구나.”

“카프하니드랑 도깨비 무리를 토벌하는 일에 동참해야 돼. 그리고 마지막에 대부를 악령의 소행으로 위장해서 죽이면 낙인의 돌을 주겠다고 약속했어.”

나는 그러면서 대모와 나눴던 밀담을 전부 셰르카에게 털어놓았다.

그런데 그녀는 내가 갈등하고 있다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뭘 고민하고 있느냐? 네가 어느 쪽을 고르든 왕궁에 있는 자들은 파멸하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게 되나?”

“나도 눈치가 있다. 아까 시장을 돌면서 이 나라의 백성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어땠어?”

“대모의 말은 사실일 확률이 높다. 다들 가난과 배고픔에 허덕이는 삶을 살고 있었다. 혈세만으로도 버거운 와중에 부쩍 늘어난 마귀…. 악령들도 골칫거리라 촌락에 있는 자들은 삶의 하루하루가 생지옥이라고 한다.”

「이러면 됐어. 정해졌네.」

“그래. 정해졌다. 이대로 거래에 응하는 것이 최소한의 희생으로 우리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길이다.”

「야, 셰르카. 솔직히 차원침공이랑 흑사병까지 써서 이 나라에 있는 인간들 다 죽이는 것도 괜찮지 않아?」

“악령화에 면역이 된 다음에 겪는 전쟁이라면 단숨에 강해질 수 있는 기회가 되겠지. 허나 업보는 업보인 것이다. 페인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악마를 유혹하는 달콤한 향기가 풍길 것이다.”

「나중에 지옥 갈 것도 대비해서 강해져야 하잖아.」

“단계적으로 강해지는 것이 옳다. 벨드샤 같은 녀석이 하루에 열 마리, 백 마리씩 찾아온다고 상상해 보아라.”

「그건 좀…. 한 마리로 그 고생을 했는데….」

“결국 꾸준한 성장이 핵심이다. 단숨에 강해지는 지름길을 택했다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 * *

어제부터 계속 내리던 가랑비는 오늘 아침이 되어서 소나기가 되었다.

농지에 채워진 물이 넘쳐서 역류하고 곳곳에서 산사태가 발생하여 멀쩡한 민가를 덮친 채다.

“마귀다! 마귀 무리가 나타났다!”

“꺄아아악!”

“여자랑 아이들부터 뒤로 빼내!”

“마귀 놈들…! 이번엔 우리 차례냐!”

농기구로 무장한 사내들이 촌락의 중심에 옹기종기 모여서 서로의 등을 맞댔다.

그들의 몸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이유는 비에 젖어서가 아니라 다가오는 공포에 의한 것이다.

“마귀가 몇 놈이오?!”

“저도 제대로 못 봤어요! 숲에서 막 튀어나오는데 그게 몇 마리인지는…”

“난 싸울 줄 몰라…. 마귀랑은 싸울 줄 모른다고…. 다들 죽을 거야…. 우리도 옆 촌락처럼…!”

“좆밥처럼 찡얼대지 마! 여기서 뒈지더라도 네 가족들은 도망칠 시간을 벌어야 될 거 아니냐!”

용기를 내는 건 어렵다.

“나, 난 도저히 못해…. 우리가 이런다고 무슨 의미가 있냐고….”

“저 씨발놈이 아까부터 힘 빠지게! 누가 저 새끼 주둥이 좀 닥치게 해라!”

“거기 계속 찡얼댈 거면 불알 자르고 엄마 젖이나 처먹으러 가! 누군 안 무섭냐?! 누군 안 무섭냐고!”

용기를 내는 건 어렵기 때문에, 그들의 본능은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분노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고 있어도 공포는 모든 감정을 이기는 것이었다.

- 카아아아아아아아아!!!

괴이한 함성이 빗소리를 뚫고 그들의 심장을 자극했다.

이윽고 길가로 올라온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다…. 온다…. 온다…!”

도깨비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통일된 모습의 악령들. 이곳에서는 마귀라고, 도깨비 무리라고 하는 악령들.

녀석들은 사실 페인이 온 대륙에서는 ‘구울’이라고 칭하는 것들이었다.

“만카라 님…! 용기를 주소서…!”

“하! 좆됐네!”

“너무 많잖아!”

그냥 악령도 일반인에겐 위험한 존재다. 그런데 녀석들은 무리를 지은 구울이다. 한 마리 한 마리가 일반적인 악령보다 강한데 집단적으로 싸우기까지 한다. 그런 녀석들이 당장 보이는 것만 해도 40마리는 족히 넘는 것 같다.

“으, 으아아아!”

쩌억! 쩌억!

녀석들은 농기구로 찌르고 때려도 쓰러지지 않는다. 고통조차 느끼지 않는 미친 군대처럼 달려들어서 허우적대는 손과 이빨을 들이댄다.

“죽기 싫어어어어…!”

겁에 질려서 혼자 도망치는 자는 먼저 죽었다. 구울들은 무리에서 이탈한 사냥감을 놓치는 법이 없다.

뚜드드드드득!!!

“끄아아아아!!!”

한번 잡힌 사람은 축축한 땅 위에 쓰러져서 산 채로 해체당하였다. 구울은 사람의 부드러운 복부에, 배꼽에 그악스러운 손가락을 찔러 넣어서 내장을 들어내고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팔다리와 머리칼 따위를 붙잡아서 사방으로 잡아당겨 뜯어버렸다.

그렇게 사내들은 전멸을 앞두었는가 싶었다,

- 저쪽이다!

그들이 만든 조금의 시간은 실낱같은 희망을 만들고야 말았다.

만약 싸우지 않고 도망쳤다면 구울들이 달리는 속도를 이겨내지 못해 더 많은 이들이 죽었으리라.

“무사들이 왔어!”

……쩌저저적!

이번엔 구울들의 팔다리가 잘려나갔다.

“대, 대모님이다…!”

그녀의 몸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구울들이 차례로 쓰러지는 게 아니라 거의 동시에 쓰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우린 살았어!”

대모는 구울의 질긴 살갗을 깔끔하게 베어내며 전장을 누볐다.

그러다 구울들에게 포위당하여 몸이 잡히기라도 하면 그대로 잔상이 되어 사라지고는 다른 구울의 배후에서 나타났다.

“그아아아!”

촤악! 촤악! 촤악!

소나기가 퍼붓고 지면에서 진흙이 튀었다. 대모는 구울 한 마리를 단칼에 쓰러뜨리고 발치에서 튀는 진흙만 남긴 채 사라졌다가 다른 구울을 연달아 베어냈다.

이어서 그녀의 무사들이 합류하여 구울 무리와 맞붙었다. 그들 모두가 평생을 사람보다 악령을 더 많이 상대하며 경험을 쌓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사각을 기민하게 봐주며 구울 무리를 능숙하게 베어넘겼다.

“우린 걸림돌이야! 괜히 잡혀서 인질이 되면 안 돼!”

“다들 뒤로 나와!”

그 현장에서 사내들은 자신들이 빠질 길을 찾기 위해 하나둘씩 뒤로 몸을 틀었다.

“……어?”

저 멀리 기이한 분위기의 두 인물이 서있었다.

“대모는 싸우는 방식이 매와 비슷하구나. 그 녀석처럼 직접 두 다리로 뛰는 건 아니지만.”

“너도 대모처럼 연속적으로 전이할 수 있어?”

“짧은 거리라지만 저렇게 점멸하듯 초 단위로 위치를 바꿀 수 있는 흑마법은 없다. 무엇보다 저건 전이가 아니라 고유 능력의 영역이다.”

두 인물 모두 사내들에겐 낯선 차림새였다.

눈이 붉은 여자가 들고 있는 우산은 안쪽에 이상한 눈알과 입술 그림이 그려져 있어 마녀라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기괴한 가면을 쓰고서 도끼를 들고 있는 남자는 저승사자라도 보는 것만 같다.

“우토랑 비슷한 급인가?”

“실력은 우토와 비슷한 것 같다. 하지만 영력에 압도적인 격차가 있어 본디 위력은 우토가 더 뛰어나겠구나.”

“무사들도 잘 싸우고 있어. 진짜 자객이랑 병사를 합친 느낌이야.”

“대모도 무사들도 저만한 힘이 있는데 어째서 도깨비를 진작 해치우지 않은 건지 의문이구나. 도깨비가 그리도 강한가?”

“도깨비의 무리가 위험하다고 했어. 놈을 따르는 구울 무리가 아주 많나 봐.”

“후딱 해치우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편이 좋겠다. 우리의 진짜 적수는 도깨비가 아니라 카프하니드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 안에 도깨비 정도는 끝장내려고. 얼마나 강한 악령인지는 봐야 알겠지만.”

“강해봤자 카프하니드만큼은 아닐 것이다.”

소나기를 맞으며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페인과 셰르카.

“그런데 저들은 왜 우릴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것이냐? 어서 이쪽으로 도망쳐오지 않고.”

촌락의 사내들은 그 둘을 보면서 아군인지 적군인지 몹시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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