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00화 (100/181)

19. 뇌성이 울려퍼지다 (5)

세이렌이 아군들을 홀려버렸다. 예상보다 어인이 많았다. 예상과 달리 카프하니드가 몸을 숨기고 있다. 유령선도 세이렌도 숨기고 있다.

“네가 세이렌을 해치워야 한다!”

범선들이 서로에게 작살을 쏘아대며 싸우고 있다. 벌써 두세 척은 침몰 위기에 놓인 것 같고 어떤 범선들은 서로 충돌하여 백병전을 벌이고 있다.

그중에 절반 이상의 범선들은 우리를 노리고 있으며,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어인 무리도 내가 타고 있는 범선을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다.

「세이렌만 죽이면 홀린 놈들과 어인 무리도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승천자와 전언이 연결되어 있으니 그에게 말해서 이쪽으로 천사라도 보내달라고 할까.

안 된다. 천사들은 성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벗어난다고 하여도 이곳까지 오려면 시간이 걸리며, 천사는 아무 때나 요청한다고 쉽게 강림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지금이라도 갑판 아래로 내려가서 다차원 능력을 발동할까. 잿빛세계를 경유하여 왕국의 교단으로 가서 변수가 될 수 있는 특별한 주물이라도 찾아볼까.

안 된다. 그럴 시간이 없다. 그리고 내가 다시 다차원 능력을 써 이곳에 있는 범선까지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장담도 할 수 없다.

「악귀를 존나 많이 소환해서 일단 들이박는 건?」

악귀를 소환할 때마다 영력은 소모된다.

물론 차원침공을 발동한다면 적은 영력으로 악귀를 몇 마리라도 소환할 수 있지만, 차원침공은 밤처럼 어두운 지역에서만 발동이 가능하다. 게다가 악귀 군단을 소환한다고 하여도 수면 아래에 있는 세이렌을 공격할 수 있는 악귀가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잿빛세계에서 바다라도 가볼 걸 그랬다. 지금이라도 잿빛세계의 바다를 찾아가서 이런 환경에 쓸만한 악귀를 찾아볼까. 안 된다. 이 범선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잿빛세계의 바다까지 갈 시간도 없다.

「씨발,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면 어쩌려고?!」

‘그러니까 생각하고 있잖아.’

* * *

쏟아지는 빗물이 몸을 무겁게 만든다. 하늘에 드리운 먹구름에서 두려운 뇌성이 울린다. 대적할 수 없는 대자연의 공포에 잡아먹히는 듯하다.

“장군님! 위험합니다! 갑판 아래로 대피…”

“병사를 모두 잃은 장군이 혼자 무얼 할 수 있겠나! 지금은 칼 한 자루라도 귀중한 상황이다!”

“거기 난간에서 물러나! 바다로 끌려가잖아!”

“너무 많아…!”

“자리들 지켜!”

대장군은 이곳에 오기까지 많은 생각을 정리해두었다. 카프하니드가 얼마나 강할지, 녀석을 어떻게 해치울지, 강령술사가 어떻게 움직일지, 그 속에서 대모의 등은 어떻게 노릴지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생각들이 지금은 폭풍 앞에 놓인 촛불처럼 지워져버렸다. 이제 강령술사를 관찰하며 상황을 잰다거나 대모의 뒤를 노린다는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게 되었다.

쿠웅!!!

어인들에게 점령당한 범선이 이쪽에 작살을 꽂고 뱃머리를 충돌시켰다.

“놈들이 넘어옵니다!”

“작살을 쏴 침몰시켜라! 이것들을 전부 상대하다간 카프하니드를 보기도 전에 전멸할 것이야!”

대장군은 온몸이 빗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판자로 된 연결 다리를 놓아서 갑판 위로 넘어오는 어인들도 문제지만, 아직까지 보이지도 않는 세이렌과 카프하니드가 신경을 긁는다.

“흩어지지 마! 사각을 내주지 말라고!”

“빠르게 빠르게 죽여! 둘러싸이면 끝장이야!”

“끄아악…!”

마귀를 상대로 경험이 없는 병사들이다. 그런 이들이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어인 무리를 상대하고 있다.

지금은 각자 자리를 지키며 나름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여기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하나둘씩 죽고 지칠 것이다.

퍼엉! 퍼엉!

바로 옆에 붙은 범선을 향해 작살을 쏘아낸다. 폭발하는 부적과 불태우는 부적이 불과 수십 분 전까지만 해도 아군의 것이었던 범선을 파괴한다.

다른 곳에 있는 범선들을 둘러보아도 상황은 이곳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제길! 이게 무슨 낭패냐!”

약 1500명이 투입된 작전이다. 다른 나라와 바다 위에서 전쟁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숫자가 이번 작전에 투입된 것이다.

그런데 카프하니드는 보이지도 않는다. 웬 어인들만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와서 아군 범선들을 침몰시키고 점령하고 있다.

‘마귀 따위가 범선을 점령해 작살을 쏘고 노를 젓고 있다…! 틀림없이 세이렌이 유혹의 노래를 불러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도망칠 곳 없는 바다 위. 어인이 너무 많다. 카프하니드와 세이렌은 전방의 어딘가, 아득한 심연 아래에서 혈향만 풍겨오고 있다.

‘대모….’

갑판 위 치열한 혈투 속에서 대장군은 대모의 지휘함을 보았다.

대모의 지휘함에서도 싸움이 한창이었다. 하지만 이곳과는 달리 방어가 아니라 공격에 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역시 무사들은 악령을 상대로 노련했다.

‘와중에 유령선을 노리고 있다니…. 저쪽 어인들은 해치웠다는 말인가?’

대모의 지휘함에서 유령선을 향해 작살을 쏘아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유령선에서는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운 듯 날아드는 작살을 모조리 막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 난리 통에 가장 강한 아군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강령술사…! 강령술사는…!’

대장군의 눈은 희망을 찾아 이리저리 간절하게 움직였다.

‘어디로 간 거지…?’

강령술사, 제국의 대륙에서 가장 강하다는 흑마법사 셰르카, 강령술로 소환한 차원 너머의 괴물들.

그 존재들이 승선한 범선은 분명 따로 있었다. 그들의 범선은 혈향을 풍겨 카프하니드를 꾀어내고 대적할 목적으로 가장 앞서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로 사라진 건지 도통 보이질 않는다.

퍼엉! 퍼퍼펑…!

지금 가장 앞에 있는 것은 유령선을 노리고 있는 대모의 지휘함이다.

그때 대장군의 직감이 외쳤다.

대모의 등을 노릴 때가 아니라고. 대장군으로서 자존심이고 뭐고 지킬 때도 아니라고.

“크읏…!”

지금 지켜야 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과 부하들의 목숨이었다.

다른 일은 생각할 때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대모 쪽에 합류해야 한다! 깃발을 올려라!”

집결을 뜻하는 깃발이 돛대 위로 힘차게 올라갔다.

* * *

셰르카는 필요할 때마다 영혼의 벽을 세워서 날아드는 작살을 막아냈다. 그리고 이리는 아예 셰르카의 손으로부터 떨어져 그녀와 페인을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중이다.

“퀴익!”

“그어어…!”

“키에에에엑!”

이곳의 갑판은 인간이 아닌 것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전장이 되었다.

쿠적! 쿠적! 쿠적!

이리는 촉수를 너무 많이 꺼낸 탓에 머리보다 다리가 큰 해파리처럼 변하였다. 페인과 셰르카 사이에 자리를 잡고서 오로지 촉수만을 휘둘러 어인들을 찍어 죽이고, 뜯어 죽이고, 비틀어 죽이고, 가차 없이 쳐냈다.

“퀴이익…! 퀴익…!”

하지만 영력이, 체력이 무한한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이리도 마찬가지였다.

“퀴이이…!”

끊임없이 몰려오는 어인들.

범선을 보호하느라 바쁜 셰르카.

좀 전부터 가만히 서서 하염없이 전방만 바라보고 있는 페인.

“퀴이! 퀴이이잉…!”

“불평할 시간에 한 마리라도 더 해치워라!”

쿠지직!!!

이리는 홧김에 어인 두 마리의 몸을 씹어서 바다에 뱉어버렸다.

“퀴이이익!”

“페인을 믿어라!”

“퀴이익!”

“그게 아니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쿠웅!

이리는 페인의 뒤를 노리던 어인을 촉수로 집어서 흑기사의 발치로 던져버렸다.

스어억!

흑기사는 쓰러진 어인의 목을 베어버렸다.

“이리! 가급적이면 네가 죽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페인에게 악이 쌓인다고!”

“퀴이이이잉!”

이리는 어렸다.

이리가 어리다는 것은 성인보다 지능이 낮고 감정을 통제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사냥이라면 즐겁지만 싸움이라면 힘들고 지친다. 그리고 어린 이리는 이런 상황을 인내하는 것이 싫었다. 견디고 이겨내는 것이 싫었다. 싸움이 너무 길었다.

“퀴익! 퀴익!”

“그런다고 내가 뭘 해줄 수 있냐는 말이다!”

“퀴익! 퀴이익!”

이제는 아이처럼 떼를 쓴다. 말을 듣지 않는다. 어인들의 목숨을 자꾸만 악귀에게 떠넘긴다.

그때 셰르카는 이리를 쏘아보았다.

“…쓸모없는 새끼.”

“퀴이이익!”

“착각하지 마라. 너의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버릴 것이다. 내가 언제 너한테 티끌만큼이라도 정을 준 순간이 있는 것 같으냐?”

“퀴이이이익!!!”

이리의 촉수들이 심하게 떨었다. 우산에 박힌 눈알들이 부풀었다. 입술 사이로 가시처럼 촘촘한 이빨이 드러났다.

“퀴이이이이잉…!”

“뭐라고?”

“퀴이이이잉!”

이리가 뭐라고 말한 걸까. 그 순간에 셰르카는 이리에게 경멸하는 시선을 보냈다.

“처음엔 나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너였지. 다음은 페인이다. 이젠 너 따위 없어도 된다는 뜻이다. 시끄러운 새끼야.”

이리의 부푼 눈알들이 눈물을 쏟아냈다. 언제나 촉수만 날름거렸던 입술들은 더욱 크게 벌여져서 이빨을 드러낸 채 높은 울음을 토해냈다.

“퀴이이잉…! 퀴이이이이잉…!”

이리는 어렸고, 셰르카는 결여되었다.

“꼴사납게 울지 마라. 안 그래도 소음에 시달리는 나한테 그렇게 억지 부리며 울어대면…”

“퀴이잉…!”

소음.

“시끄럽다.”

“퀴이잉…! 퀴이잉…!”

소음. 소음. 소음.

“알았으니까 그만해라.”

“퀴이이잉…!”

“너무 시끄러워서 뇌가 부서질 것 같다…. 부탁이니까 이제 그만하고…”

“퀴이잉…!”

소음.

영혼의 목소리가 들리는 저주.

평생토록 겪은 ‘소리’.

소음. 소음. 소음. 소음. 소음. 소음. 소음. 소음. 소음. 소음. 소음. 소음. 소음. 소음. 소음. 소음. 소음. 소음. 소음. 소음. 소음. 소음. 소음. 소음. 소음. 소음. 태어났을 때도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도 푹신한 침대에서 쉴 때도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을 잘 때도 이리가 어머니의 배를 찢고 나왔을 때도 이리가 눈알을 파먹었을 때도 홀연히 숲을 걸을 때도 페인과 대화를 할 때도 저택에서 연구를 할 때도 무언가와 싸울 때도 모든 순간에 들려와서 머릿속에 가슴속에 쌓이고 쌓이고 쌓이고 쌓이고 쌓이고 쌓이고 쌓인 소음에 몇 번이고 울부짖다가 미쳤다가 날뛰었다가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어 다시 미쳐버려도 결코 끝나지 않는 소음.

소음은 이성을 살해한다.

“퀴이잉!!!”

그 순간, 영혼의 벽을 전개하던 셰르카의 두 팔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그리고 줄곧 범선의 후방으로 몸을 향하고 있던 셰르카는 이리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

어느덧 그녀의 표정이 인형처럼 굳어있었다.

차갑게 식어있었다. 죽어있었다.

“왜…. 너도…. 나를…. 괴롭… 히지…?”

“퀴익!”

셰르카의 손아귀가 천천히 이리를 향했다.

그 행동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리는 서러움에 눈을 감은 아이처럼 무작정 울어댔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어어어!!!”

이리를 향한 셰르카의 손아귀와 팔이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그녀의 가짜 눈알에 진짜 눈물이 차올랐다. 무엇 때문에 차오른 눈물인지는 모른다.

그때였다.

쿠우우우!

범선이 움직였다.

“…?”

쏴아아아아!

범선이 전방으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범선 아래에 달린 노가 힘차게 움직이고 있다.

그녀를 괴롭히는 수많은 소음 속에, 뒤를 돌아보고 있는 페인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방법을 찾았어.”

그녀의 팔과 손아귀를 휘감아 빙빙 돌던 검은 연기가 흩어졌다. 이리도 울음을 멈추고 페인의 말에 집중했다.

“…어떻게?”

그녀는 빗줄기 속에 눈물을 가렸다.

“차원침공을 할 거야.”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발동한단 말이냐? 이런 환경에서.”

차원침공의 발동 조건은 밤처럼 어두운 지역에서만 가능하다는 것. 다시 말해, 차원침공을 발동할 때 전개되는 소환진이 충분히 어두운 상공에 그려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거센 빗줄기와 뇌성이 치고 있는 하늘이다. 짙은 먹구름이 가득하지만 그것이 햇빛을 가릴 정도는 아니다. 먹구름이 아무리 짙게 드리워도 대낮의 햇빛을 완벽하게는 막을 수 없으며, 대낮이 밤처럼 어둡게 되는 일은 없다.

그래도 범선은 전방을 향하고 있다.

이곳보다 더욱 끔찍한 빗줄기와 뇌성이 몰아치고 있는, 저 깊고도 어두운 바다를 향해서 말이다.

“페인…. 저곳으로 들어갔다간 자살행위가 될 수도 있다. 범선이 번개에 맞아 갈라지거나 파도에 뒤집힐 수도 있는 일이다.”

“그걸 네가 막아.”

“내가…?”

“할 수 있잖아.”

셰르카의 젖은 머리칼 아래로 빗물이 쉼 없이 흘렀다. 파도가 범선을 치며 갑판 위로 어인과 바닷물을 올렸다.

“퀴익!!!”

그녀의 옆을 이리가 몸으로 막아섰다. 폭력적인 파도를 우산으로 쳐내고 파도에 숨은 어인들을 촉수로 꿰뚫어 공중에 수놓았다.

페인은 다시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범선을 보호해야 해.”

이쪽을 노리는 작살들, 세이렌에 홀린 무사와 병사들, 날뛰는 파도, 갑판으로 올라와 혐오스러운 낯짝을 들이미는 어인들.

그런 것들로부터 주의를 돌려서 저 앞의 심연 같은 바다를 본다. 바다가 어두운 게 아니라 바다를 비추는 빛이 약해서 어둡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저곳이라면, 저곳의 한복판에 간다면 차원침공을 발동할 수 있으리라.

저곳은 짙은 어둠에 햇빛이 가려졌지만, 그나마 밝은 희망이 오히려 저곳에 있던 것이다.

“차원침공을 발동한 다음엔?”

“수면 밑에 숨은 개자식들을 끄집어낼 거야.”

페인은 거대하고도 두려운 뇌성이 소리치는 곳에 제 발로 들어가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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