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02화 (102/181)

20. 벼랑 끝에 피어난 꽃 (2)

이곳에서 가장 큰 범선은 대장군의 지휘함이다.

키이잉!

나는 셰르카가 만든 소용돌이를 급히 통과하였다. 전이에 비해서 짧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흑마법이었다.

좀 전까지 타고 있던 범선이 카프하니드에 붙잡혀서 심연으로 끌려가버렸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나도 악귀들처럼 저 범선과 함께 수장되었으리라.

곧이어 카프하니드가 만들어낸 거센 파도가 이쪽 지휘함을 때리고 지나갔다.

“강령술사…. 지금까지 무슨 일이….”

대장군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다. 대장군뿐만 아니라 갑판 위의 병사들 모두 바닷물에 젖은 채 혼란을 겪고 있다.

“모두가 세이렌에게 홀렸던 겁니다!”

“설마 우리가 공격하고 있던 유령선이…. 그, 그대가 타고 있던 배였소?”

이들은 세이렌이 죽은 직후에 유령선이 평범한 범선으로 바뀌는 걸 목도했으리라.

또한 갑판 위에 널린 어인들의 사체가 병사들의 시신으로 바뀌는 것까지 보았으리라.

“여, 여기 어인들이 왜 이렇게….”

“다들 홀렸던 거라고!”

대장군은 아군을 공격한 것으로도 모자라 자기 손으로 병사들을 죽인 꼴이다. 그래서 정신이 흔들린다는 건 이해하겠는데 지금은 충격에 빠져서 일을 그르칠 때가 아니다.

쿠와아아…!

카프하니드가 수면 아래에 바짝 붙어서 이쪽으로 접근하는 중이다. 거대한 그림자가 닥쳐오는 것 같다.

“이제 정신 차리고 놈만 상대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빌어먹을…!”

대장군은 빠르게 병사들을 통솔했다. 뱃머리를 측면으로 틀면서 작살 발사대가 전부 카프하니드를 조준하도록 하였다. 당장 범선을 움직여 도망치거나 회피한다는 건 불가능하니, 녀석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폭발하는 부적과 함께 작살부터 날리려는 것이다.

- 녀석이 온다!

대모의 외침이었다.

「바로 옆에 있었네?!」

대모의 지휘함이 제법 가까운 곳에 있었다. 저쪽도 다들 정신을 차리고 카프하니드에 대비하는 중이었다.

끼기기기긱!

범선이 옆으로 돌면서 갑판이 기울었다. 병사들의 시신으로부터 흘러나온 핏물이 한쪽으로 쏠려서 바다에 쏟아졌다.

“고동을 울려라! 놈을 저지하라!”

부우우우웅!!!

주변 범선들이 두 척의 지휘함을 지나쳐서 앞으로 나아갔다. 적이 싸우는 수법을 미리 파악하기 위한 배치이자, 지휘함을 보호하기 위한 기본적인 전술이었다.

“강령술사, 범선이 몇 척이나 남았는지 아시오?”

「몇 척이 침몰했더라?」

나는 세이렌만 보느라 못 세어봤다.

“남은 범선은 열 척이다!”

대장군은 셰르카의 대답을 듣고 입을 꾹 다물었다. 간절함, 두려움, 분노가 어지럽게 섞인 표정으로 전방에 시선을 고정했다.

지휘함의 고동을 들은 범선들이 집중포화를 준비했다.

지휘함 두 척을 최후방에 두고 나머지 범선들이 좌우로 갈라져, 전방을 향해 두 줄로 늘어서는 것이다. 그러면 카프하니드는 두 줄로 늘어선 범선 사이에 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돌진한 거리에 비례해서 집중포화를 맞게 될 것이다.

사전에 카프하니드가 접근해오면 이렇게 하자고 다들 약속한 것이다.

「제발…. 통해야 하는데….」

나는, 우리는 모두 숨을 죽이고 다가오는 순간에 온몸의 신경을 집중했다.

…퍼퍼퍼퍼퍼엉!

가장 앞에 있는 범선부터 차례대로 작살을 쏘았다. 그것이 수면 아래에 바짝 붙은 카프하니드에게 떨어지며 수중에서 폭발하였다.

퍼퍼퍼퍼펑!

연쇄적인 폭음과 거꾸로 솟는 물줄기가 가까워지고 있다. 열 척의 범선이 쏘아낸 백 발 이상의 작살과 백 번 이상의 연쇄적인 폭발 속에 카프하니드는 어떤 상처를 입었을까. 얼마나 다쳤을까. 애당초 폭발하는 부적과 작살에 맞는다고 다치기는 하는 걸까.

퍼퍼퍼퍼펑!!

카프하니드는 멈추지 않았다. 양옆에서 작살을 쏘아대는 범선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이곳, 최후방에 있는 지휘함을 향해 돌진해오고 있다.

아니, 오로지 나를 노려서 돌진해오고 있다.

뒤이어 대장군이 외쳤다.

“쏴라!”

퍼퍼퍼퍼퍼펑!!!!!

그 순간에 나는 바로 앞에서 솟구친 폭발의 물줄기를 보았다.

「피…!」

솟아오른 물줄기가 붉었다.

녀석의 피가 바닷물에 섞여 나온 것이다.

“셰르카!”

그녀는 두꺼운 영혼의 벽을 전개했다. 카프하니드를 가로막을 정도로 견고하면서도 넓은 벽을 치면 영력 소모가 심하지만 그만큼 카프하니드에게 큰 충격을 가할 수 있는 것이다. 녀석의 덩치와 속도를 생각해 보면 말이다.

으직!!!

녀석은 영혼의 벽에 몸체를 들이박게 되었다. 아주 단단한 유리창에 부딪혀 으깨지는 새처럼 납작하게 붙어서 촉수 사이로 핏물을 터뜨렸다.

녀석의 거대한 덩치와 무자비한 속도가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크으읏…!”

영혼의 벽을 유지하려는 셰르카의 양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지금입니다! 대장군!”

그 즉시 대장군이 손짓했다. 다시금 고동이 울리자 앞서 두 줄로 늘어섰던 범선들이 카프하니드를 포위하는 배치로 다가들었다. 그리고 영혼의 벽에 바짝 붙은 카프하니드를 향해 무수한 작살을 쏘아댔다.

귀가 먹먹해지는 폭음이 뇌성을 가렸다. 수면 위로 드러난 카프하니드의 몸체에 작살이 꽂히고 폭발하며 엄청난 혈류와 살점을 흩뿌렸다.

그 와중에도 카프하니드는 병적으로 나를 노리고 있었다. 녀석의 몸체는 항구에 떠밀려오는 파도처럼 영혼의 벽을 따라서 위로 솟았다.

그러자 녀석의 새까만 눈알이 나를 내려다보는 위치가 된 것이다. 눈알 중심에 얼핏 보이는 심연 같은 동공으로부터 형언하기 어려운 미지의 시선이 느껴진다.

「탐식.」

꾸드득! 꾸드득!

녀석의 촉수가 영혼의 벽을 긁고 있다. 그 모습이 진열장에 놓인 과자를 탐하는 악령 같다.

「고통.」

폭발하는 부적과 불태우는 부적이 작살과 함께 녀석의 몸체 위로 퍼붓고 있다. 주변 바닷물이 빨갛게 물들 정도로 방대한 혈류를 흘리면서도 영혼의 벽에 바짝 붙은 채 떨어질 기미가 안 보인다.

「……그리움?」

저 끔찍한 괴물이 뭘 그리워한다는 말인가.

“퀴이익!”

이리가 녀석을 향해 으르렁댔다.

셰르카가 알려왔다.

“더는 못 버틴다!”

대장군도 내게 소리쳤다.

“곧 작살과 부적을 장전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오!”

영혼의 벽이 해제되고 범선들이 퍼붓던 공격은 멈추게 된다. 그러면 카프하니드는 내게 달려들 것이다.

그래서 지금이다.

타다닷!

나는 뱃머리를 향해 내달렸다.

「기회는 한 번이야….」

많은 악귀들이 세이렌을 상대하다가 죽었다.

이리는 나를 대신하여 많은 어인들을 처리해주었다.

셰르카는 나를 대신하여 범선의 침몰을 막아주었다.

대모와 대장군의 수군은 나를 대신하여 카프하니드에게 피해를 누적시켰다.

그래서 지금 영력과 힘을 가장 많이 아낀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다.

이 싸움이 시작된 순간부터 전력을 다하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아껴두었다.

카프하니드는 내 몫이기 때문에.

내가 카프하니드를 해치우지 못하면 모두의 희생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그렇게 계획했고, 모두가 그렇게 기대하고 있으니.

…타앗!

나는 뱃머리의 끝자락에서 힘껏 도약했다.

키이잉!

영혼의 벽이 사라졌다. 카프하니드가 내 쪽으로 쓰러지듯 다가온다. 녀석의 커다란 안구보다 촉수들이 먼저 쇄도해온다. 나를 죽이려는 건지 잡으려는 건지 막으려는 건지 의도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촉수들이다.

그리고 녀석의 촉수들은 상처투성이였다.

「이건 나한테 맡겨!」

촉수에서 흘러나온 선혈이 밧줄처럼 변하면서 도리어 다른 촉수들을 묶어버렸다. 나는 코앞에서 멈춘 촉수를 디딤돌로 삼았다.

터억!

다시 도약한다. 녀석의 벽처럼 세워진 안구를 향해 대각선으로 떨어진다. 등 뒤에서 나를 노리는 촉수들이 서늘하고도 위험한 감각으로 등골을 간질인다. 하지만 난 이미 녀석의 촉수들을 앞지른 상태다.

“카프하니드!”

순간, 녀석의 동공이 작디작은 한 점으로 축소되었다.

“나를 ‘사냥감’으로 여기지 말았어야지…!”

쿠저억!

나는 도끼로 녀석의 동공을 찍어버렸다.

그러자 소리 없는 비명이 느껴졌다. 도끼를 타고 전해지는 떨림이 무지막지하다.

「뒤!」

쐐애액…!

조종되는 혈액의 밧줄을 떨쳐낸 촉수들이 내 등을 노렸다.

나는 두 다리로 녀석의 안구를 밀었다. 도끼를 뽑아냄과 동시에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굴렸다. 그 짧은 순간에 나의 하늘과 바다는 위치가 역전되었다.

퍼억!

등을 노리던 촉수가 알아서 도끼에 긁혀주었다. 동시에 내 몸은 다시 역방향으로 회전하였고 내 시야 속 하늘과 바다는 위아래가 바뀌었다. 이어서 다른 촉수들이 날 노려온다.

「또 온다! 사방에서!」

좀 전에 전개되었던 영혼의 벽은 ‘아주 두꺼운 것’이었다.

무언가가 그 위에 올라설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방금 영혼의 벽이 해제되면서 추락하는 흑기사들이 있었다.

‘베어라!’

콰콰콰아아!

흑기사 30마리가 바다로 떨어지던 중에 일제히 검기를 날렸다. 그 검기들은 카프하니드의 본체가 아니라 지금 날 노리는, 날 노릴 것으로 예상된 촉수를 겨냥한 것이었다.

「놈이 당황했어!」

쯔어어억…!

아무리 두껍고 위압적인 촉수라도 여러 차례 닥쳐오는 흑기사의 검기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심지어 작살과 부적에 맞아서 안 그래도 상처가 많던 촉수들이었으니.

풍덩! 풍덩! 풍덩!

몸이 무거운 흑기사들은 바다에 떨어져 익사할 것이다. 그리고 검기에 베어진 촉수의 끄트머리들도 연달아 바다에 수장될 것이다.

그러기 전에, 나는 촉수의 절단면으로부터 다시금 피를 뽑아냈다.

그 피를 조종하여 내 발바닥을 순간적으로 밀어냈다.

이건 두 번째 공격이다.

좀 전에 도끼로 찍어두었던 자리가 있다.

…쿠저억!

나는 그 자리에 다시금 도끼를 찍은 것이다.

「이젠 널 두려워하고 있어!」

전보다 더 강한 떨림이 손끝으로 느껴진다.

나는 녀석이 그럴수록 도끼를 더 강하게 쥔다. 그리고 도끼에 진심을 다한 영력을 불어넣는다. 상처가 이 정도 깊이면 충분하다.

쿠저저저저저저…!!!

나는 카프하니드의 눈알을 세로로 그으며 쭉 떨어졌다.

* * *

대모는 무사들에게 재촉했다.

“작살 좀 빨리빨리 끼워!”

그녀는 자신에게 화가 난 상태였다. 강령술사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세이렌에 홀려서 충성스러운 무사들을 제 손으로 죽이고 강령술사의 범선까지 공격했으니 말이다.

이러는 와중에도 카프하니드와 싸우고 있는 강령술사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자신에게 더욱 화가 났다.

다이얀이 짧게 외쳤다.

“조준!”

대모의 지휘함에 설치된 작살 발사대들이 일제히 카프하니드의 몸체를 조준했다.

“발사!”

터터터텅!

대모의 시선은 카프하니드를 향해 날아가는 작살을 따라갔다. 자연스레 페인을 보게 되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경이로운 무공이었다. 그가 카프하니드의 눈을 세로로 갈라버린 것이다. 울음소리도 없는 거대한 존재의 비명이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다이얀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놈의 혈향이…. 놈의 혈향에서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대모도 카프하니드의 변화된 혈향을 맡았다.

“호랑이한테 물어뜯긴 토끼의 혈향 같잖아!”

“도대체 강령술사는…”

“저게 말이 돼?! 저건 이무기잖아! 이무기, 카프하니드라고!”

오랜 세월 바다의 공포로 군림했던 괴물이다. 그런 괴물이 포식자 앞에 놓인 사냥감처럼 벌벌 떠는 모습은 보면서도 믿기가 힘들었다.

부오오오오오!!!

그리고 대장군의 지휘함으로부터 돌격 명령이 떨어졌다. 두 지휘함을 제외한 범선들이 카프하니드를 향해 돌격해서 갑판을 연결하고 병사들이 녀석의 촉수를 하나라도 더 상대해 주는, 목숨의 소모를 각오한 백병전이다.

“처음부터….”

대모는 중얼댔다.

“처음부터 낙인의 돌 따위…. 그냥 힘으로 빼앗을 수도 있던 거잖아….”

그렇기에 강령술사가 ‘인간’이라는 주장을 거부할 수가 없다.

그는 거래를 했고 약속을 지켰다. 마음만 먹으면 디아나를 통째로 궤멸시킬 수도 있을 것 같은 사내가 말이다.

도깨비를 만나기 전까지는 힘을 확인하기도 어려웠다. 그가 힘을 과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힘을 과시한 건 이쪽이었다. 이쪽에서 힘을 과시하며 그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그냥 줘야겠다….”

“낙인의 돌 말씀입니까?”

“나는 ‘저분’과 거래를 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니었어.”

“그러면 대부는 어쩝니까? 저자가 대부를 적절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무례해….”

대모는 어제까지의 자신을 책망했다.

‘내가 저런 분께 무슨 일을 부탁한 거냐….’

대부를 죽이는 일.

다시 말해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닌, 사람을 죽이는 일.

얼마나 심란했을까.

사신단이 와서 만찬을 즐기고 기껏 국가 사이의 교류가 있었는데, 뒤에서 그런 무례한 부탁을 해버렸으니 말이다. 아마 싫지만 억지로 수락한 것이리라.

그는 최소한의 희생이 있는 방향을 강요당한 것이다.

그만큼 강령술사에게 낙인의 돌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것도 지금 당장.

“다이얀.”

“예. 대모.”

“조금 미루자. …물갈이.”

도깨비가 죽었다. 카프하니드도 강령술사의 손에 곧 죽임당할 것이다. 데이진타우 제국과의 교류도 재개되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 나라에 새로운 해가 떴다고 생각해도 괜찮은 게 아닌가. 강령술사 덕분에 나라에 좋은 일들이 생겼으니, 조금 더 나아질 것을 기대하는 것 정도는 괜찮은 게 아닌가.

“조금 더 지켜봐도 괜찮을 거야. 조금이라면.”

“대모의 뜻이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대장군이 허튼짓하지 않는지만 잘 보면서 돌아가자고.”

“예.”

쿠우…! 쿠우우…!

카프하니드는 괴롭게 날뛰고 있다. 녀석의 너무도 큰 촉수는 몸부림만으로 주변 범선들을 때려 부술 수 있었다.

지휘함도 녀석의 촉수에 위협을 당하는 건 다른 범선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래도 대장군의 지휘함에는 셰르카가 있어서 영혼의 벽으로 촉수를 방어할 수 있었다.

자연히 카프하니드의 촉수는 날뛰던 중에 다른 지휘함을 노리게 되는 것이다.

“촉수가 온다!”

대모의 지휘함이었다.

“도열하라!”

다이얀의 외침에 실력 좋은 무사들이 몇 줄로 늘어섰다. 위에서 떨어지는 촉수의 그림자에 맞추어 도열한 것이다.

대모, 다이얀, 그리고 무사들은 촉수가 떨어지는 순간에 합을 맞추어 일제히 옆으로 피하였다. 그러면서 칼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들고 있는 칼은 지휘함만큼이나 두꺼운 촉수를 절단할 길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칼집을 내버리면 카프하니드는 움찔하는 법이었고, 배에 떨어지는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것이었다.

콰지직!

갑판이 빨갛게 부서졌지만 침몰은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름 강령술사를 도와 카프하니드의 촉수 하나도 무력화한 셈이다.

쿵!!!

그런데 지휘함의 아래쪽에서 커다란 울림이 엄습했다.

“대모! 배에 구멍이 뚫렸습니다!”

‘방금 촉수는 눈속임이었나…!’

대놓고 촉수 하나를 보내면서 이쪽의 이목을 끌어모았다. 그러면서 수면 밑으로는 지휘함의 밑바닥을 파괴할 촉수를 하나 더 숨겨서 보낸 것이다.

때마침 다이얀은 바로 옆에 인접한 대장군의 지휘함을 의식했다.

“배를 버리고 몸을 옮겨야 합니다!”

대장군의 지휘함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행이면서도 불안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대로 바다에 빠져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장군 쪽으로 갑판 연결해!”

부오오! 부오오!

같은 순간, 구조를 요청하는 고동에 대장군은 마음이 흔들렸다.

‘지금이라면 대모가 바다에 빠져 죽도록 만들 수 있다….’

방금 카프하니드의 촉수 하나가 대모의 지휘함 밑바닥을 때리는 걸 보았다.

따라서 저쪽 지휘함에는 물이 찼을 것이다. 그래선 노를 제대로 저을 수 없으니, 이쪽에서 대모의 지휘함 쪽으로 다가가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저 앞에서 날뛰는 거대한 존재는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대장군은 더 중요한 것을 우선하기로 했다.

‘저울질이고 뭐고 당장의 아군을 살리는 게 옳다.’

“대모의 지휘함으로 후진하라!”

대장군의 지휘함은 카프하니드를 상대로 측면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노를 거꾸로 저어 후진하여 대모의 지휘함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덕분에 대모의 지휘함은 침몰하기 직전에 대장군의 지휘함과 연결 다리를 놓을 수 있었다.

* * *

카프하니드는 기가 죽었다. 열심히 촉수를 움직이며 병사들을 죽이고 범선을 부수고는 있지만 처음에 보였던 기세는 온데간데없다.

각 범선에 소환된 흑기사들이 병사들과 힘을 합쳤다. 그들의 칼이 촉수를 벨 때마다 카프하니드는 고통을 느꼈다. 그래서 각 범선을 하나씩 내려쳐 일격에 부수고 싶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

문자 그대로 ‘눈앞’에 있는 페인이 모든 의식을 빼앗은 탓이다.

페인은 촉수나 혈액을 밟으며 카프하니드의 눈앞에서 싸웠다. 촉수를 열 번 베어낼 때 눈을 한 번 베는 꼴로 싸웠다. 그러면서 깊어진 상처의 틈새로 방혈을 걸고 방혈로 분출된 혈액을 다시금 무기로 삼았다.

병사들의 칼질, 폭발하는 부적, 불태우는 부적, 작살, 셰르카의 검은 연기가 카프하니드를 에워싸 공격한다. 그중에서 페인 다음으로 골칫거리인 셰르카를 노려 지휘함에 촉수를 휘두르면 이리가 몸으로, 거미 악귀들이 거미줄을 펼쳐 막아냈다. 그래서 촉수를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를 써야 지휘함을 침몰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느새 남는 촉수가 없다.

카프하니드는 진퇴양난에 처한 것이었다.

그렇게 수백 명이 죽고 범선 다섯 척이 더 침몰했다. 카프하니드의 몸체는 병든 생선처럼 점점 기울어졌고 촉수는 점점 더 느려졌다. 그중에 촉수 몇 개는 너덜너덜한 고깃덩이가 되어서 힘없이 수장되었다.

바다가 더욱 빨갛게 물들었다. 그러자 바다까지도 카프하니드를 공격했다. 카프하니드가 심연으로 도망치려고 하면 몸체 아래쪽에서 혈액으로 된 그물이 펼쳐져 도주를 막는 것이다.

“너 사람 말 알아듣냐?”

페인은 이제 기울어진 카프하니드의 눈알 위에 올라선 채다.

쿠직쿠직!

이제 그는 카프하니드가 촉수로 때려도 대수롭지 않게 방어하고 있다. 그의 온몸에 칠해진 혈액이 필요할 때마다 고슴도치처럼 돋아나서 촉수를 막는 탓이다.

피로 만들어진 가시 갑옷이라도 입은 것 같다.

그런 페인이 카프하니드에게 말하고 있다.

“내 말 알아듣잖아.”

「분노. 경멸. 원망.」

“너 같은 괴물 새끼들이 먼바다에 더 잠들어 있다며?”

그때쯤 카프하니드에게 페인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저 맛있는 요리의 대상으로 보였을까.

어떤 그리움에 이끌려 반드시 손에 넣고 싶은 보물이었을까.

처음에 봤을 땐 쉽지 않은 사냥감처럼 보여서 일단 보내주었다. 그러나 녀석은 유혹적인 향기를 풍기며, 인간이라는 미물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래도 녀석 또한 인간이었으니, 맛있게 요리한 후 악을 먹어치우려고 했다.

“너의 혐오스러운 친구들도 언젠가 모조리 죽을 거야.”

지금쯤 카프하니드에게 페인은 어떤 존재로 보이고 있을까.

그저 바다를 침범한 생물일까.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생물일까.

쉽게 죽지도 않고 해롭고 위험한 생물일까.

이 세계에 있어선 안 될 침입자일까.

작지만 징그러운 존재일까.

어떤 존재라고 설명하든, 두려움이 깔리게 된 건 사실이다.

“네가 그리워하는 것들도 내가 모조리 파괴해버릴 거야. 그게 무엇이든.”

자신의 영역이라는 개념을 정하고 사는, 일정한 수준의 지능이 있는 존재라면.

지금껏 학습된 두려움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방어적인 본능이라는 게 있으리라.

인간들은 그러한 본능을 이렇게 정의하기도 한다.

「혐오.」

카프하니드의 눈알. 투명한 막 너머에서 자그마한 생명들이 태어났다.

“역시, 사람 말 알아듣는구나. 악마로부터 태어난 것들은.”

페인은 도끼질을 멈췄다.

카프하니드는 움찔움찔 경련을 일으켰다.

사사사사사삭…!

투명한 막 너머에서 새끼 거미들이 저마다 다리를 놀리며 기생충처럼 득실댔다.

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삭…!

카프하니드의 눈알을 뚫고 새끼 거미들이 범람했다. 거미들은 페인의 몸에도 달라붙었지만 그건 페인의 살점이 아니라 그의 로브에 묻은 혈액을 탐하였기 때문이다.

녀석들의 ‘탐식’은 카프하니드에 밀리지 않았다.

“너의 신화는 여기서 끝났어. 카프하니드.”

사사사사사사사악…!

새끼 거미들은 카프하니드의 눈알을, 촉수를, 빨판을, 살점을, 혈관을, 심장을, 뇌를 게걸스럽게 파먹었다.

그때 범선 위에 있는 자들은 모두 페인을 지켜보고 있었으니.

하나의 신화가 죽고 새로운 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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