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05화 (105/181)

20. 벼랑 끝에 피어난 꽃 (5)

“카프하니드는 강했습니다.”

나는 디아나의 왕궁에서 모두에게 설명했다.

“녀석의 유령선에 있던 세이렌은 수백 이상의 어인 무리를 거느리고 저를 공격하였습니다. 동시에 세이렌은 대모와 대장군을 포함해 아군 전 병력에게 정신계 흑주술을 걸어 아군끼리 싸우게 하였습니다.”

카프하니드, 세이렌, 어인.

녀석들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위험한 것이었고 우리가 준비했던 계획들은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제가 세이렌과 어인 무리를 무찔렀을 때 아군은 이미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채였습니다.”

그때 대모는 죽어있었으며, 대장군은 바다에 수장되었다는 이야기.

“그래도 소수 살아남은 범선들은 저와 함께 총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카프하니드의 저항은 거셌고, 과정에서 녀석의 촉수에 당한 범선들이 차례로 침몰하였습니다.”

끝내 카프하니드를 해치우고 보니 무사했던 건 나와 셰르카가 타고 있던 지휘함 한 척이었다는 이야기.

왕은 카프하니드를 토벌했다는 기쁨보다 대모와 대장군을 잃었다는 슬픔에 잠겼다. 그래서 왕궁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왕을 따라 슬픔에 잠기는 듯했다.

「겨우 다 설명했네.」

어쨌든 도깨비 취락과 카프하니드 토벌까지 끝마쳤으니, 사신단은 내일 이른 아침에 돌아가기로 했다.

나와 셰르카는 왕궁에서 나왔다.

오늘 전장에서 살아남은 무사 열 명이 내 뒤에 따라붙었다.

“안내하겠습니다. 강령술사님.”

“예.”

“거기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무사들은 내 시야가 확보될 수 있도록 몸을 비켜주었다.

대부가 그들의 어깨를 밀어내며 걸어들어온 것이다.

“대모의 일은 유감입니다.”

“그 아이의 마지막이 어땠죠?”

「아이?」

‘대부가 대모를 키웠나 본데.’

내가 기억하는 대모의 마지막 모습은 처참했다. 두 다리를 잃고 지휘함의 난간에 기대앉아서, 상반신이 선혈로 젖은 채 소리 없이 입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 속았어요.

어떤 식으로 그런 싸움이 시작되었는지는 모른다. 당시에 나는 악령화로 인하여 생사를 오가고 있었고 셰르카는 그런 나를 봐주느라 바빴으니 말이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건 살아남은 무사들의 증언뿐이다.

「다이얀이라는 오른팔이 사실은 대장군과 한 편이었고, 둘이 화해하고 있는 분위기에 갑자기 등을 쳤다고 했어.」

「다른 범선에 있던 병사들은 그렇게 될 거라고 예상했다는 듯이 우르르 뛰어들었고.」

그래서 대부가 대모의 마지막 모습이 어땠냐고 묻는다면, 그녀가 용맹하게 싸우다가 전사하였다는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다.

“대부. 제가 본 대모의 죽음은 불가항력이었습니다.”

대부의 오른쪽 눈 밑 근육이 떨렸다.

“너무도 위험하고 다급한 상황에 전사하신 겁니다.”

“정녕 그 아이를…. 구할 수는 없었던 건지요?”

그러자 셰르카가 끼어들었다.

“우리는 세이렌과 어인 무리를 상대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아끄는 것이다. 더는 대부와 이야기도 나누지 말라는 듯이.

하지만 대부가 뒤에서 언성을 높였다.

“강령술사!”

나는 다시 그를 마주했다.

“타락한 승천자를…! 그 악명 높은 제국의 황제를…! 백만 대군을 무찌른 강령술사가…!”

「그냥 뭐라도 탓할 게 필요해서 너한테 지랄하는 거야.」

“어떻게…! 어떻게 그 아이의 목숨 하나를 구하지 못해서 일을 이렇게 만들었냐는 말입니까…!”

그의 붉어진 눈시울이 나를 원망하고 있다.

그러면서 나를 향한 대부의 손아귀.

「만카라의 손가락.」

「상대방의 목을 조르는 마법이야.」

“정말 그리도 여유가 없었어요?! 강령술로 부리는 괴물 몇 마리만 그 아이 곁에 붙여줬어도 됐잖아…! 어디 말해보시오!”

대부가 발동한 만카라의 손가락은 내 목을 조르지 못했다.

내게는 마법 저항 6계가 있기 때문이다.

“….”

대부의 손아귀가 저절로 내렸다.

방금 마법을 한번 발동한 것으로, 내게 상당한 저항 능력이 있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그럴 여력이 없었습니다. 아까도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죽어선 안 되는 아이라고요…. 이렇게는…. 이런 죽음은….”

“우리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토벌에 나섰습니다. 토벌 과정에서 대장군과 대모가 전사했습니다. 여기에 어떤 말을 붙이더라도 죽음이라는 결과는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그렇게 비정한 결론만 내리고 끝이라고…?”

「이제는 또 다른 걸로 지랄하네.」

터업!

나는 대부의 멱살을 거칠게 쥐었다.

그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당신만 비극을 겪고 있는 것처럼 지랄하지 마.”

“아니….”

“아니면 내가 대모를 살리지 못했다며 슬퍼하고 자책이라도 할까?”

이래저래 상대하고 있으면 참기가 어렵다.

대모가 왕궁을 뒤집어엎으려고 했던 것도 이해가 된다.

“그것도 아니면 대모의 죽음에 더 비극적인 서사라도 부여하길 원하는 건가?”

“….”

“지금 당신은 대모의 죽음을 더 비참하게, 더욱더 비극적으로 만들고 있는데. 대모와 잠시나마 손을 잡았던 나는 그러고 싶지가 않다고.”

나는 대부를 밀쳐냈다.

그는 차마 말이 나오질 않았는지 날 죽일 듯이 노려보기만 했다.

- 저게 무슨 일이랍니까?

- 대부님께서 강령술사한테….

어느덧 왕궁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목을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목소리를 적당히 키웠다.

“저는 단지 대모의 죽음이 앞으로 의미가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대부.”

죽은 자가 겪는 죽음의 의미.

그것은 죽은 자가 아니라 남겨진 자들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이 경우에 죽은 자는 대모이며, 남겨진 자는 대부다.

* * *

무사들을 따라서 죽은 대모의 집으로 왔다.

지금 왕궁에 있는 그녀의 시신은 내일 아침에 이곳으로 옮겨져서 장례식을 치른다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아녀자들이 하얀 꽃이나 향 같은 것을 옮기며 내일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함께 온 무사 아홉 명이 흩어지고 한 명이 앞으로 나가 안내를 맡았다.

나는 그가 우리를 어디로 안내하고 있는 건지 묻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 괜히 말을 꺼내고 싶지가 않아서다. 그리고 대충 어디로 안내하는 건지 알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셰르카가 대뜸 물었다.

“낙인의 돌은 어디에 있느냐?”

“뒤뜰을 통과해야 합니다.”

무사는 즉답하고는 계속 앞장섰다.

곧 우리는 큼지막한 집을 돌아서 뒤뜰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이곳의 뒤뜰이란 집 뒤쪽에 있는 대나무숲과 맞닿은 곳이었다. 낮은 담벼락의 가운데에는 대나무로 가려진 자그마한 뒷문이 있었다.

끼이익!

무사는 뒷문을 열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쪽 길을 따라서 산을 오르다 보면 하얀 꽃이 보일 겁니다. 그 꽃을 등불로 삼아 숲에 들어가시면 돌탑이 나옵니다.”

“알아서 찾아가란 말이냐?”

“숲에 백주술이 걸려 있어, 혈향을 맡을 수 없는 자는 하얀 꽃을 볼 수 없습니다.”

“흠. 그래서 돌탑이 어쨌다고?”

“그 돌탑을 무너뜨리십시오. 그러면 낙인의 돌이 나옵니다.”

“돌탑에도 주술이 걸려있나?”

“낙인의 돌은 액운을 퍼뜨립니다. 돌탑은 낙인의 돌로부터 퍼져나가는 액운을 차단하기 위하여 세운 수호물입니다. 그래서 돌탑을 무너뜨린 이후에는 가급적 신속하게 낙인의 돌을 처리하셔야만 합니다.”

“알겠다. 그리 어렵지도 않겠구나.”

그리고 자리를 뜨려는 무사에게 나는 물었다.

“아직 대모와의 거래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받지 왜 그래? 대충 넘어갈 수 있었잖아.」

도깨비, 이무기, 대부.

이렇게 셋을 죽이면 낙인의 돌을 받기로 하였다. 대모와 그렇게 약속했다.

“왕궁에는 대부가 남아있습니다.”

“그건 강령술사님의 선택에 맡기겠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대모는 내게 원했다.

대부를 비밀리에 죽이고, 그가 마귀에 당한 것처럼 꾸며달라고 하였다.

“대모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뭔 헛소리냐?”

“대모께서도 이러길 원하고 계실 겁니다.”

「아무튼 됐네. 그냥 받아 가면 되겠어. 그렇지?」

“심경에 변화라도 생겼나 보구나. 뭐, 진심으로 그 여자를 신봉하는 자들이 그렇다니까 그런 줄 알고 가겠다.”

나는 긴가민가하면서 뒤뜰을 벗어났다.

어째서 대부를 처리하지 않아도 낙인의 돌을 그냥 주겠다고 마음이 바뀐 것인지. 나는 그런 것들을 무사에게 더 물어보거나 따지지 않고 일단 움직였다.

너무도 낙인의 돌을 손에 넣고 싶기 때문일까.

대모의 의도나 마음보다는 낙인의 돌이 더 중요하다고, 내 마음보다는 머리가 은연중에 판단하고 있기 때문일까.

우리는 그렇게 숲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모가 낙인의 돌을 진짜로 봉인해둔 거야? 대장군이 했던 말이랑 다르잖아.」

“그런 것도 봉인인가.”

“사악한 기운이 퍼지는 걸 막았고, 아무나 함부로 쓸 수 없도록 숨겨놨으니 대모가 나름의 봉인을 해놨다고 할 수도 있겠구나.”

“그게 사악한 기운도 퍼뜨리는 돌이야?”

“주변에 있는 악의 농도에 따라 다르다. 그것이 세인트 왕국의 중앙교회에 보관된다면 아무런 기운도 퍼뜨리지 않을 것이고, 홀로스트 수용소 같은 곳에 보관된다면 죄인들을 모조리 악령으로 만들겠지. 실로 변덕스러운 주물이다.”

“그런 주물을 누가 만든 건데?”

“태고의 시대, 인과율이 혼란을 겪던 시절…. 천사와 악마들이 실재세계에서 전쟁을 벌였을 때 어느 타락천사가 만든 것이라고 했다.”

「타락천사가 자기 수족들을 늘리려고 만든 주물인가?」

“그 이상 자세한 건 나도 모른다. 알 수 있는 방법도 없고.”

낙인의 돌을 써 부정한 속성을 육체에 받아들인다. 그러면 인간도 악령도 아니게 된 육체가 된다. 악령화 증상으로부터 영구적인 면역을 갖추게 된다. 먹을 필요도 마실 필요도 없게 된다.

대신 내가 가지고 있는 힘. 악령의 힘.

근원이 사악한 힘을 포기하기 전까지는 ‘낙인’의 저주를 벗어날 수 없다. 저주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얼굴과 목소리를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네 힘을 포기한다는 건 나를 포기한다는 거잖아.」

「나중에….」

「정말 나중에 더는 내가 불필요하게 되면…. 그땐 나 버릴 거야?」

정말로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페인 또한 인간이다. 그러니 누군들 평범한 인간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지 않겠느냐.”

「네가 뭔데 끼어들어? 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셰르카는 단순한 진리를 이야기하듯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악령아. 너와 나는 반드시 페인과 헤어지게 될 운명이다.”

「난 아니거든?」

“아니기는. 우리의 끝에 아름다운 작별이나 행복한 죽음 따위 있을 수가 없다.”

「그래도 난 죽을 때까지 페인이랑 있을 거라고!」

“그럼 사별이 되겠구나.”

「닥쳐! 미친 운명론자 년아!」

그때 하얀 꽃이 보였다.

빼곡하게 솟은 대나무 사이에, 어느 대나무의 중간쯤에 이질적으로 피어있는 꽃이었다.

나는 길에서 벗어나 숲으로 들어왔다.

하얀 꽃을 만지려고 손을 뻗었는데, 갑자기 사라졌다.

“너도 보였어?”

“만지려고 하니 사라졌구나.”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페인. 저쪽에 또 있다.”

조금 더 깊은 숲속에 이질적인 하얀색이 있었다. 그것을 향해 다가가면 그것이 하얀 꽃이라는 걸 알 수 있었고, 손을 뻗어 만지려고 하면 또 사라졌다가 더 깊은 숲속에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저거 돌탑 아니야?」

‘어디?’

「지금 너한테도 보이잖아. 색깔 차이를 봐.」

대나무 사이로 보이는 이질적인 회색.

나는 그 색깔을 향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윽고 대나무로 둘러싸인 공터에서 돌탑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렇게 작은 것도 탑이라고 부른단 말이냐?”

“이 나라에서는 그런가 보지.”

삼각형으로 깎아낸 돌을 한 층씩 각도를 틀어서 뾰족뾰족하게 쌓아올린 돌탑이다. 높이는 내 신장과 비슷하고 너비는 쌍두마차의 폭과 비슷하다.

“낙인 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려?”

“낙인은 순식간이다.”

셰르카는 나보다 앞장서서 돌탑을 만졌다.

“굳이 낙원으로 가서 성수 찾을 필요도 없겠네. 그 부두인형의 효과가 내일까지 가잖아.”

“너의 대답은 변함이 없겠지만 그래도 묻겠다.”

돌탑 안에 낙인의 돌이 있다.

낙인의 돌과 그녀의 흑마법을 써 인간도 악령도 아닌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

“네가 살아갈 세계와 앞으로의 삶이 바뀔 것이다. 그것은 결코 밝은 운명이 아니다.”

고민도 하지 말자.

“잘 부탁할게.”

“…나야말로.”

투두두둑!

그녀의 작은 손바닥으로부터 검은 연기가 흘러나와 돌탑을 휘감았다. 삼각형으로 깎여서 쌓여있던 돌들이 제각기 회전하면서 두둥실 떠올랐다.

- 샤아아아아아!

목소리가 들린다. 모든 것이 피처럼 진하고 심연처럼 어두운 차원 너머. 알 수 없는 그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영혼의 포효 같다.

그렇게 돌탑은 허공에서 분해되었다. 철로 만든 상자가 검은 연기를 타고 허공에 떠올랐다.

콰자자작!

상자가 찌그러지더니 이내 갈기갈기 찢어졌다.

- 샤아아아!

상자 안에서 낙인의 돌이 모습을 드러냈다.

숫자 6이 각 꼭짓점에 새겨진 삼각형의 돌.

카프하니드를 해치웠던 그 바다처럼 깊고도 어두운 색감이다.

「사악한 기운이 모여들고 있어!」

“낙인의 돌이 너의 업보에 반응하는 것이다.”

- 샤아아아아! 샤아아아!

이제는 낙인의 돌이 울부짖는 것 같다. 검은 연기에 붙잡힌 채 발버둥 치듯 허공에서 아무 방향으로나 회전하고 있다.

“낙인이 완료된 후에도 너 자신을 잃지 말거라. 이것은 어디까지나 육체의 악령화를 막는 수단이지, 너의 정신이 타락하는 것까지 막는 일은 아니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

“잠시만 숨을 참아라.”

“왜?”

“악마에게 들켜선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멈췄다.

- 샤아아아…! 샤아아아…!

셰르카가 주문을 외우고 있다.

이제껏 내가 들었던 그 어떤 주문보다도 이상한 발음이었으며,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었다. 실은 저게 주문이 맞는지조차도 헷갈릴 정도다.

- 샤아아!!!!

울부짖던 낙인의 돌이 내게 돌진해왔다. 몸이 움찔해서 하마터면 참고 있던 숨을 내뱉을 뻔했다.

티디디디디딕!

검은 연기가 나를 집어삼켰다.

온 세상이 칠흑으로 변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빛이 꺼져버린 것 같다.

캄캄한 어둠 속에 그림자로 된 손아귀들이 헤엄치며 내 온몸을 더듬었다. 그러다가 살갗 밑으로 무수한 손가락이 들어와서 내 뼈를 쓰다듬고 심장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캄캄한 어둠보다도 새빨간 혓바닥이 온몸을 기어 다니는 듯하면서 내 눈알을, 눈 뒤쪽의 머릿속을, 목구멍의 깊숙한 안쪽과 위장까지도 핥는 감각이 이어졌다.

고통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렇게나 음산하고 불쾌한 감각이 육체적으로 쾌락을 주고 있다는 것에 공포를 느꼈다. 나는 내 몸을 어루만지고 있는 어둠에 욕정을 하면서도 불쾌해서 없애버리고 싶었고, 목구멍이 꽉 막혀서 갈증이 있었고, 느닷없이 배가 고팠고, 그 어둠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강해지고 싶기도 했으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깊은 잠을 청하고 싶기도 했다.

한마디로 혼란했다.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힘들었다.

차라리 미쳐서 실소라도 터뜨리고 싶었다. 내 살갗과 내 몸 안에 붙은 것들을 부둥켜안고서 광기의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그렇게 나를 놓아버리면 차라리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미치고 싶지는 않아서, 버티다 못해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오로지 칠흑이다.

이제는 몸도 없이 그저 의식만이 잔재한다.

배가 고프다.

「나 배고파.」

그런데 지금 배가 고프다고 느끼는 것은 뭔가를 먹어서 위장에 음식물을 채우고 싶다는 감각이 아니다.

내 안의 악령이 느끼는 배고픔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사람이 느끼는 배고픔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

그러한 욕구가 생겼다.

남은 인생을 멋지게 산다는 ‘페인’의 이성과 공존하는 ‘악령’의 욕구다.

아주 원초적이고, 폭력적이고, 가학적이며, 탐욕적이다. 거부하고 싶지만 거부할 수 없다. 아니, 사실은 딱히 거부해야 할 이유도 모르겠다.

「사냥하자.」

뭐라도 악을 사냥하고 싶다. 사냥해서 그것들이 가진 악을 마시고 더 강해지고 싶다. 배가 고픈 것처럼, 목이 마른 것처럼, 본능적으로 원하게 되었다.

굳이 사악한 상대가 아니더라도 망설이지 않을 것 같다. 이제는 그냥 살육과 파괴를 자행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뭐라도 좋으니까. 죽이고 싶다.

뭐라도 좋으니까. 부수고 싶다.

뭐라도 좋으니까. 악을 마시고 싶다. 악을 쌓고 싶다. 업보를 쌓고 싶다.

뭐라도 좋으니까.

- 그저 자네의 안에 있는 녀석에게 물들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었네.

- 너희도 나와 함께 매질을 하고 나와 함께 화형을 하지 않았느냐! 내가 주는 성수를 받아 처먹고 행복해하지 않았느냐! 내가 던져주는 마녀와 악령을 함께 벌하면서 즐기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내게 감사하지 않았느냐! 인간은…! 인간은 누구나 ‘해소’를 필요로 한단 말이다! 그게 없고선 살아갈 수가 없어!

- 오빠가 내 오빠라는 게 나한텐 축복이었어!

- 페인. 너 또한 이들을 구원하고 인도한 것.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 따라서 왕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 그것이 다른 이들의 피로 물든 왕관이든. 너 자신의 피로 물든 가시관이든….

- 항상 말 안 듣는 악귀라서 미안했다.

- 그것 말고도 이래저래 많이.

- 그래도 페인.

- 너라서 다행이었어.

- 나보다 네놈이 더 많이 죽였기 때문이다. 무고한 자들을.

- 즉, 네놈은 천하의 쓰레기 새끼다.

- 아저씨……. 죽어주세요….

내가 인간으로서 겪고 갈등한 일들은,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괴로워한 경험들은 결코 잊어선 안 된다.

따라서 ‘뭐라도 좋으니까’ 죽이고 부수고 싶다는 새로운 욕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하아아아아…. 흐, 흐흐흐흐흐흐.」

「나… 차원을 찢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

돌이켜보면 내가 많이 변하긴 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변했다간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제는 악령화라는 경고까지 사라졌으니.

「……아.」

「미안. 좀 흥분했었어.」

절대 잊어선 안 된다.

아니, 절대 잊지 않겠다.

내가 누구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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