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07화 (107/181)

21. 폭풍 (2)

이렇게 세인트 왕국의 중앙교회를 보는 건 오랜만이다.

타락한 전 승천자가 만들어낸 분지에 재건된 건물들이 가득 들어섰고 찬란한 중앙교회와 아름다운 정원까지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되찾았다.

정원에는 성기사, 성녀, 퇴마사, 자객들이 있었다.

「어우, 숨 막혀.」

그들은 잡담하는 일 없이 내게 가만히 시선만 보내고 있다. 뭔가 굉장히 엄중한 분위기를 지키려는 것 같다.

「어? 쟤도 있네.」

이름은 모르지만 낯익은 자객이 눈에 들어왔다. 중요한 현장이나 베르자인의 집무실에서 자주 보이고, 종종 담배를 태우기도 하는 남자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다들 강령술사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지금 여기에 올 걸 어떻게 알고 기다리고 있던 거죠?”

“강령술사님께서 오늘 이렇게 돌아오실 거라고, 천계의 분들이 예견하셨다고 합니다.”

천계의 분들.

천사가 여럿이 강림했다는 말인가.

「그런데 자객들은 왜 이곳에 있지? 안 어울리게.」

“베르자인도 왔어요?”

“이런 자리에 빠질 수 없는 분이 되셨습니다.”

발렌잔타르 가문을 부활시키고 왕궁과 가문들 사이에서 단단한 입지를 확보한 그녀다.

최근에는 세인트 왕국의 영토 확장 정책에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하였으니, 그녀가 이런 자리에 오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겠다.

나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정원을 가로질렀다.

중앙교회의 커다란 문을 열고서 내부에 발을 들였다.

다시금 내게 시선이 쏟아졌다.

그리고 내 안의 악령은 두려움에 사무쳤다.

나 또한 ‘저 존재’의 형상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압도당했다.

관능적이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그저 절대적인 미를 상징하는 듯한 육체다. 하얗고도 성스럽게 하늘거리는 의복, 허리 뒤에 달린 고결한 백조의 날개.

정수리 위에 살짝 떠있는 천사의 고리는 은 십자가를 네 개나 달고 있다.

「네이트…!」

괜스레 부끄럽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두려움과 환상을 저 존재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하지만 들켰으리라. 저 황금빛 동공이 1초 만에 나를 꿰뚫어보았으리라.

“반가워요. 강령술사.”

부드러운 목소리가 고막을 녹이는 것 같다.

“앞으로 와서 앉으세요.”

나는 어지러운 심신을 애써 다스리며 앞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단 위에 서있는 대천사 네이트의 양옆에 발키리가 한 명씩 있다.

단 바로 아래에는 승천자가 서있다.

「나, 나는 모르겠다…. 어디에라도 숨고 싶어.」

나처럼 앞줄에 앉은 자들이 있다.

네이트의 축복을 받은 여전사. 아그니샤.

왕국에서 가장 강한 물의 마법사. 파보크.

황금달의 머리이자 발렌잔타르 가문의 영주. 베르자인.

그리고 나다.

나를 포함해 다섯 인간만이 지금 이 공간에 있다.

그리고 딱 봐도 이 자리는 네이트가 주도하고 있다. 네이트의 허가 없이는 말도 꺼내지 못할 것 같다.

“좀 괜찮아요?”

누구한테 하는 말인가.

설마 나한테 하는 말인가.

“강령술사 씨.”

나한테 하는 말이었다. 내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

“아, 저는…”

“타락천사의 돌을 쓰셨네요.”

“…예. 어제 그 돌을 쓰고 새로운 육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사악한 힘을 받아들인 기분이 어때요?”

뭐라고 대답할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너무 경계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 편이니까요.”

저런 존재가 저런 목소리로 지금의 내게 저렇게 말하니까 무언가 따뜻한 것이 마음으로 스며들어서 없던 신앙심이 생기려고 한다. 참회라도 하고 싶다. 고해성사라도 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으며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웠는지 다 털어놓고 싶다. 목구멍이 아프다.

진짜 대천사가 저 앞에, 나와 같은 공간에 있다.

나를 헤아려주고 있다. 근원이 사악한 힘을 휘두르며 수백만을 학살한 나를 내려다보면서 저렇게나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다. 여전히 발키리들은 차가운 시선이지만.

“천천히 심호흡부터 하세요.”

“….”

“다들 나를 보고 그렇게 반응했거든요. 승천자 씨랑 베르자인 씨는 눈물까지 보였어요.”

진정하자. 정신 차리자. 감격할 때가 아니다.

됐다.

“황송합니다.”

“자….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볼까요.”

네이트는 우리를 한 명씩 살펴보았다. 승천자, 파보크, 아그니샤, 베르자인, 그리고 다시 나를 보았다. 초월적인 시선이 공기를 훑는 게 황금빛 동공을 따라 느껴졌다.

“우선은…. 강령술사 씨.”

“예.”

“태고의 잠에 빠졌던 크라켄 한 마리가 깨어났어요. 그리고 사라졌죠.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같은 시기에 바다를 건넜던 강령술사 씨가 알려줄 수 있겠는데요?”

“깨어난 크라켄의 악명은 가라앉은 카프하니드였습니다.”

“가라앉은 카프하니드?”

네이트는 옆에 있는 발키리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러자 발키리가 설명했다.

“666번째 크라켄입니다.”

그 한마디가 내게는 충격이었다.

「설마 카프하니드는 666마리 중에 가장 막내였다는 거야?」

한낱 인간으로서는 진실을 알 수 없는 태고의 이야기.

…를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는 천계의 존재들.

“알겠어요. 그래서 강령술사 씨가 카프하니드를 해치웠다는 건가요?”

“디아나의 해군, 흑마법사 셰르카와 힘을 합쳐 토벌했습니다.”

“카프하니드가 혼자서 다니던가요?”

“세이렌과 어인들을 붙이고 다녔습니다.”

“카프하니드가 강령술사 씨를 노리던가요?”

“예. 저를 노골적으로 탐식했습니다. 그리고 전투 도중에 뭔가를 그리워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창조주인 악마를 그리워한 거겠죠. …디아나에서 다른 특별한 일은요? 악령이랑 관련된 일이요.”

“대규모 구울 무리를 통솔하는 도깨비라는 악령이 출몰했습니다.”

“그 존재들도 해치우셨나요?”

“그렇습니다.”

“고마워요.”

이번에는 그 한마디가 또 새로운 충격이 되었다.

나는 대장군의 병사들을 바다 위에서 학살했다. 그리고 네이트라면 내게 쌓인 업보까지 꿰뚫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고맙다고 하는 것이다.

“아, 아닙니다….”

“정말 고생이 많았겠어요.”

네이트는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 내가 디아나에서 겪었던 일들의 내막을 간단히 해석해 주었다.

“크라켄은 업보를 쌓고 악을 흡수해서 용이 되고자 하는 악령이에요. 또한 악마의 피조물이죠. …강령술사 씨의 업보는 그런 존재들에게 굉장히 유혹적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태고의 잠을 자던 크라켄이 그것만으로 깨어날 리가 없어요.”

그렇다면 카프하니드가 깨어나게 된 계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강령술사 씨의 업보가 크라켄을 깨울 정도라면, 카프하니드 말고 다른 크라켄들까지도 동시에 깨어났어야죠. 그래서 발키리. 지금 크라켄이 몇 마리나 남아있죠?”

“가라앉은 카프하니드가 죽었으니 이제 일곱 마리가 남았습니다.”

남은 크라켄은 일곱 마리.

그것들이 동시에 깨어났을 경우가 가히 상상이 되질 않는다. 게다가 그 무시무시했던 카프하니드가 666번째로 막내라서 가장 약한 녀석이었다면,

나머지 일곱 마리가 다 깨어났을 때는 바다의 악령으로 대군을 만들어 내륙까지 침공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한 사태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일곱 마리는 심연 어딘가에 존재를 감춘 채 조용히 잠들어있어요. 그런데 훗날 악마의 손길이 닿으면 그것들도 깨어날 수 있다는 거예요. 카프하니드가 깨어난 것처럼.”

즉, 카프하니드는 악마가 깨웠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악마는 북서쪽의 광인들까지 같은 시기에 움직인 거예요. 강령술사 씨를 카프하니드로 견제함과 동시에 사악한 수족을 부려 이 대륙을 침공하려는 의도였겠죠.”

그리고 네이트는 승천자에게 질문했다.

“승천자 씨. 지금 악마의 수족들이 북서쪽에서 일어나 현계를 침공하고 있어요. 이러면 무엇이 가장 큰 문제일까요?”

승천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이 세계의…. 악의 농도가 짙어집니다….”

“정답.”

네이트는 단호한 어조로 사태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악령들이 빈번하게 출몰하고 있어요. 이건 악의 농도가 짙어진 게 원인이에요. 농도가 짙어져서 악령이 더 많이 출몰하면 사람들은 더 많이 죽고 싸우겠죠. 그러면 농도가 더 짙어져서 더 많은 악령들이 출몰해요. 악순환이죠. 그리고 악순환의 고리는 이미 시작되었어요.”

악마가 카프하니드를 깨워서 나를 노렸다.

악마가 북서쪽에 광인들을 모아서 침공을 지시했다.

실재세계가 가진 악의 농도가 더 짙어지고 있다.

더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악마의 세력은 강대해진다.

악순환이 가속된다. 더 많은 악령들이 출몰한다. 심연에서 잠자고 있는 태고의 괴물들까지 깨어날 수 있다.

그뿐이 아니다.

“…용은 엑수스에게 당해서 진작 죽었지만 용의 뼈에는 영력이 남아있어요. 악마가 제대로 강림한다면 용을 부활시키는 것도 가능한 일이죠.”

죽은 존재를 되살리는 건 인과율을 해치는 금기다.

하지만 악마라면 할 것이다.

“그리고 용은 악마의 세력으로서 아주 강대한 적수가 될 거예요. 그렇게 용이 부활하게 된다면….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은 살아남기 힘들겠죠.”

이대로 용까지 부활한다면 실재세계의 인간들은 종말을 앞두게 되리라.

그것이 악마의 계획이다.

「그냥 천사들이 내려와서 다 끝내버리면 안 되는 거야? 아주 옛날에는 천사랑 악마들이 실재세계에서 한바탕 싸웠다면서? 이번에도 그렇게 하면 되잖아.」

그때는 혼돈의 시기였다.

본래 우주에는 실재세계(현계), 천국(천계), 지옥만 있었고 각 세계는 차원이라는 개념으로 격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옥 그 자체이자 만악의 근원인 악마, ‘샤’가 차원의 틈을 열어버리면서 모든 세계의 인과율이 혼돈의 시기를 겪은 것이다.

그 시기에 차원의 틈으로부터 생겨난 세계가 잿빛세계이며, 잿빛세계가 생기면서 망가졌던 인과율이 안정되어 오늘날이 된 것이다.

‘지금 천사나 악마들이 단체로 강림하지 못하고 있는 건 인과율이 안정된 상태라서 그런 거야.’

악의 농도가 높아지면 악마가,

선의 농도가 높아지면 천사가 개입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그런 ‘법칙’이 존재한다는 건 ‘인과율’이 있기 때문이다. 인과율이 망가진 세계에서는 법칙이라는 개념 자체를 논할 수 없으니까.

이제 나를 포함해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악마의 계획과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하였다.

어느덧 네이트의 황금빛 동공이 날 응시하고 있다.

“이제 우리들 각자가 할 일을 알려줄게요.”

* * *

그 후로 일주일이 지났다.

네이트는 세인트 왕국에 강림하기 위해서 상당한 영력을 소모하였다. 세계 전반에 걸쳐 악의 농도가 짙어지고 있음에도 자신의 영력을 써 억지로 강림한 것이다.

그리고 천계에서는 태초부터 악마와의 싸움이 계속되어왔기 때문에, 오늘날 실재세계의 일들은 대부분 인간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천사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순간에도 인간들이 모르는 세계에서 악마들과 신화적인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날 내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이트를 보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승천자는 최악의 사태가 되었을 때 천사가 강림할 수 있도록 중앙교회에서 자리를 비울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천사들에게 있어 실재세계 최후의 보루이기도 한 세인트 왕국에는 반드시 승천자가 상주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물의 마법사 파보크는 세인트 왕국을 떠나, 각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광인 무리의 습격을 앞장서 처단하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악순환을 늦추기 위해서다.

베르자인은 왕궁과 긴밀히 협력하여 불안에 떨고 있는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백성들의 신앙심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도록 성수를 베풀거나 기도를 장려하는 정책을 지원하게 되었다.

나는 우토, 독수리, 올빼미, 역병 의사들을 이끌고 북서쪽의 바르드베쿠스에 도착했다.

이곳은 광인들의 습격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이다. 그리고 전에는 흑사병에, 그전에는 역모의 실패를 겪은 국가다.

이렇게 걷고 있으면 성한 건물을 찾기가 힘들고 길거리에는 부상자와 사망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여기서 북서쪽 외부에 놈들의 본거지가 있다고.」

지금 각국을 습격하고 있는 광인들에겐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고 했다.

놈들은 모두 까무잡잡한 피부, 뼈를 갈아서 만든 무기를 쓴다는 것. 그리고 놈들 사이에는 종종 신체나 얼굴이 악령처럼 뒤틀리고 문드러진 놈들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신체나 얼굴이 비정상적인 형태를 하고 있는 놈들도 악령은 아니라고 했다. 전부 광인들이었다.

‘더 자세한 걸 들어보려면 매를 만나야 해.’

존재 추적을 해보니 매는 바르드베쿠스 수도 중심지에 있는 의원에 있었다. 역병 의사들은 잠시 밖에서 대기하도록 하고 나는 우토, 독수리, 올빼미와 함께 매의 병실로 들어왔다.

침상에 누워있는 매는 여전히 혼수상태였다.

“주술을 부리는 광인들에게 당했다고?”

독수리가 대답했다.

“역병 의사들이 소인에게 보고하기를, 매는 밤길을 순찰하던 2인조 병사들에게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의원으로 오는 길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열흘이 넘도록 깨어나질 않아서 혼수상태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우토는 매의 몸에 감긴 붕대를 세심히 살펴보았다.

“이건…. 바람술사에게 당한 게 아닌지 싶군요.”

“바람술사?”

“붕대가 감기지 않은 곳에는 얕은 상흔이 있습니다. 이 상흔들을 잘 보시면 예리한 날붙이가 아니라 파편 따위에 맞아서 찢어진 자국이라는 걸 알 수 있죠. 찢어진 방향도 난잡하고요.”

“지근거리에서 폭파술에 당했을 가능성은?”

“그렇다고 하기엔 열상(熱傷)의 흔적이 없습니다. 아마 혼수상태에 빠진 원인도 골에 강한 충격을 받은 탓이 아닌지….”

「북서쪽 외부에서 그렇게 당하고는 정신력으로 여기까지 살아돌아온 거구나.」

‘긴장이 풀리면서 뒤늦게 기절하는 경우가 있어.’

그때 독수리가 우려를 표했다.

“이런 상태라면 마땅히 혼수상태를 회복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언제 깨어날지도 알 수 없는데 무작정 깨어나기를 기다리기엔 시간이 촉박합니다.”

우토는 그의 우려를 반박했다.

“2주에서 3주 정도는 더 지켜볼 가치가 있다. 만약 그렇게 기다려도 깨어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나는 그렇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다.

“깨우면 되지.”

매는 혼수상태에 빠질 수 있는 중상을 입고도 정신력으로 이곳까지 돌아와 쓰러졌다.

따라서 뇌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은 건 아닐 것이다. 정말로 머릿속 어딘가가 부서져서 혼수상태에 빠진 거라면, 정신력으로 여기까지 돌아온다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까.

「골에 천천히 피가 찼나? 이럴 땐 정수리에 구멍을 뚫어서 어떻게 할 수 있다고 들었어. 그래봤자 열에 아홉은 죽는다고 했지만.」

나는 5계까지 강화된 탐지 능력으로 매의 두개골 안쪽을 느껴보았다. 그런다고 이게 정상적인 상태인지 뭔지 알 수 있는 지식이 내게 있는 건 아니지만, 바로 옆에 있는 우토와 독수리의 두개골 속이 좋은 대조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대조해 보니 매, 독수리, 우토의 두개골 속은 서로 다를 것이 없는 상태였다.

‘피가 차진 않았어. 깨지거나 찢어진 곳도 없고.’

「그럼 어떻게 깨우지?」

간혹 그런 경우가 있다.

악령화 직전의 사람에게 퇴마를 강행했는데, 그대로 기절해서 약 한 달 뒤에 깨어나는 자들이 있다.

그렇게 깨어난 자들은 끝없는 꿈속을 헤매다가 어느 순간 눈이 떠졌다고 주장하였다.

‘꿈에서 깨어날 수 있는 강한 자극이 필요해.’

「손가락이라도 잘랐다가 다시 붙여줄까?」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향한 자극이 필요하다.

이럴 때 제격인 인물이 바로 옆에 있다.

“올빼미.”

“…?”

“매한테 극심한 통증을 줘야 해.”

너무 아파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을 정도로, 제정신으로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멈춰버릴 정도로 끔찍한 고통.

그러나 실제로 육체에 가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오로지 정신만을 학대하는 고통.

올빼미라면 할 수 있다.

“…환상통(幻想痛)이요?”

“매는 자신의 꿈속에 갇혀있어. 그 꿈을 네 것으로 만들어서 통제하고, 깨어날 수 있도록 극심한 고통을 줘.”

“…고통을 단계적으로 올릴까요?”

“아니. 한순간에 집중해서 한꺼번에.”

“그러다 심장이 멈추면……. 죽을 텐데요….”

“심장이 멈추면 다시 뛰게 만들 거야.”

우토는 내 눈치를 살피며 매로부터 한걸음 물러섰다. 애써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만들어진 표정 너머로 긴장감이 엿보인다.

언제나 무덤덤하고 겁이 없는 독수리조차도 다소 두려움이 실린 발걸음으로 물러섰다.

다들 올빼미의 능력에 시험 삼아 한 번씩 당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녀의 능력이 얼마나 잔혹한 악몽인지 한 번 겪어봐서 알고 있다.

「우리도 물러서자. 괜히 올빼미 시야 안에 있다가 잘못 걸리면….」

나도 한걸음 물러섰다.

“…시작할게요.”

매한테는 미안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극약처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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