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09화 (109/181)

21. 폭풍 (4)

바르드베쿠스의 북서쪽, 용이 죽은 땅.

겹겹이 늘어선 험준한 산맥을 넘어 높아지는 능선에 유난히 솟아오른 산꼭대기가 있다.

이곳이 용의 무덤이다.

팔팔 끓는 화산호수를 중심으로 목조주택이 둥글게 모여있으며, 언제나 높은 바람이 이곳을 훑고 지나가기 때문에 호수로부터 나온 수증기가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섬뜩한 안개처럼 보인다.

“그분께서 우리의 저주받은 육체를 해방시키시고 우리의 가여운 영혼을 친히 거두어 주실 것입니다.”

화산호수의 한가운데까지 이어진 난간 없는 다리.

그 끝에 서서 부정한 기도를 올리고 있는 노인.

“오로지 그분만이 진정한 광명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충성하십시오. 그분을 떠받들고 그분의 자애로운 하수인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노인은 허름한 가죽옷에 뼈로 된 장신구를 주렁주렁 걸치고 있다.

“필연의 지옥이 도래할 것입니다. 그분을 믿고 받아들인 자들은 광명으로 인도받을 것이며, 그분을 믿지 아니한 자들은 그분의 꺼지지 않는 분노에 영원히 타오를 것입니다.”

그때, 수면 위로 무수한 손이 튀어나와 허우적댔다.

“기기긱기기긱…!”

온몸의 살가죽이 녹아서 뼈만 남은 악령들이었다. 살갗에서 뜨거운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녀석들은 저마다 붉은 뼈로 된 육체를 움직이며 다리 위로 기어올랐다.

머리칼도 눈알도 살점도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붉은 뼈로 된 악령들이다.

그런 녀석들이 노인을 중심으로 모여든 것이다.

“기기기긱…. 기기긱.”

“이제… 계십니까…?”

노인은 초점 없는 눈으로 누군가를 애타게 찾았다.

“야샤둡이 전사했습니다. 만약 계신다면 부디 나아갈 길을 인도하여…”

“기기긱…! 갸아, 야히웬….”

악령 한 마리가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노인 앞에 섰다.

노인은 넙죽 무릎을 꿇었다.

“여기 있나? 야히웬.”

악령은 노인을 코앞에 두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노인이 답하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뚜둑!

눈알 없는 붉은 두개골이 노인을 응시했다.

“그곳에 있느냐?”

“예. 제가 당신의 영원한 종…. 야히웬입니다.”

“가라앉은 카프하니드가 죽임당했다. 그리고 잡아먹혔다.”

“그 또한 강령술사의 짓입니까?”

뚜둑! 뚜둑! 뚜둑!

이 악령은 무언가에 빙의된 것이었다.

어떤 존재가 육체에 들어온 것이었다.

“달콤한 향기…. 틀림없이 놈의 것이었다.”

“강령술사가 심복들을 이끌고 감히 이 땅에 더러운 발을 들였습니다.”

“놈은 용의 무덤을 노리는 것이다.”

“일전에 남쪽에서 느껴진 천상의 빛이 그것이었군요. 그 상위 천사의 축복을 받은 여자도 오고 있습니다.”

“네이트의 축복을 받은 아그니샤다. 둘이서 용의 무덤을 노리고 있다는 건, 상위 천사 네이트가 직접 강림하여 놈들에게 입김을 넣은 것이다. 용의 부활을 막아야 한다고.”

“전에 네이트 같은 상위 천사는 현계에 강림하기 어렵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영력을 소모해서라도 잠시나마 강림한 것이다. 그러니 한동안 네이트가 강림할 일은 없겠지. 그리고 지금은 모든 천계가 합심하여 공세를 취하고 있으니, 천계의 병력이 이 세계에 개입할 일은 당분간 없을 것이다.”

“제 입장에서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오나, 모든 천계가 합심하였다고 함은….”

“아마카라교의 만카라까지 세인트교의 천사들과 손을 잡았다. 세인트교와 척을 지내고 있던 아마카라교의 천사들에게, 변심할 계기가 있었다는 것이지.”

“그 또한 강령술사가 원인이 되었으리라 봅니다.”

“이젠 악마의 하수인을 내려봤자 강령술사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하지만 벨드샤 님께서 그리 당하신 건 워낙 어리기도 하셨고…. 발키리에게 치명상을 입은 탓이 컸습니다. 결코 강령술사가 강해서…”

“놈은 강하다.”

야히웬은 흠칫했다.

“더 강해졌다. 가라앉은 카프하니드를 먹어치우고 타락천사의 유물까지 흡수하게 되면서 더욱 완성에 가까운 육체가 되었다.”

“어찌 일이 그렇게나 빠르게…. 강령술사가 낙인의 돌을 손에 넣었을 때 급습할 수는 없던 겁니까?”

“놈이 숨을 참은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당시 놈의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런 방법도 알고 있었다니….”

“만카라의 축복을 받은 처녀가 그 유물을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처녀는 그걸 고스란히 강령술사에게 넘겨주었다. 현계에 있는 놈들은 모두 강령술사에게 우호적인 것이다.”

야히웬은 온몸으로 분함을 표출했다. 주름진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주먹을 부르르 떨었으며, 당장이라도 누구를 죽이고 싶은 듯한 살기를 눈에 담았다.

“바람술사 야샤둡까지 강령술사의 심복에게 당했습니다….”

“이제 강령술사를 이길 수 있는 현계의 존재란 거의 없다. 그나마 놈과 엇비슷한 힘을 가진 현계의 존재가 이 대륙에 있긴 한데, 그건 놈과 같은 편에 있는 아그니샤다.”

강령술사가 혼자서 들어와도 감당할 수 없다. 그런데 강령술사는 자신의 심복들을 이끌고 오는 중이며, 거기에 네이트의 축복을 받은 여전사 아그니샤까지 함께하고 있다.

도무지 승산이 보이질 않는다.

“저희가 어찌해야 그들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는 겁니까?”

미지의 존재는 단언했다.

“우리로선 승리할 수 없다.”

“그래도 용의 무덤은 지켜야만 합니다.”

“야히웬. 너와 너의 일족을 포함해 나까지. 오늘 우리는 이곳에서 지워질 것이다.”

뚜둑! 뚜둑!

빙의된 악령의 사지가 이상한 방향으로 꺾였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마치 전에 벨드샤가 온몸을 이리저리 점멸하듯 뒤틀었던 것처럼.

“대신, 강령술사도 지워질 것이다.”

야히웬은 그 숭고한 뜻에 감복했다.

“아아…. 이보다 영광스러운 동행이 없을 것입니다. 벨로움 님.”

* * *

「그동안 이곳에 대규모 군사를 파견할 수 없었던 건 지형과도 관련이 있던 거야?」

‘반드시 관련이 있겠지.’

우리는 모두 거미 악귀를 군마로 삼아서 산을 넘고 있다. 바르드베쿠스의 북서쪽 외부는 높고 험준한 산맥이 많기 때문에, 만약 거미 악귀가 아니라 평범한 군마였다면 운용할 수 없었으리라.

일단 산을 넘는 건 금방이었다. 가는 길에 적들은 출몰하지도 않았고 모종의 주술적인 방해도 경고도 없었다.

반나절에 걸쳐 산을 다섯 번이나 넘었다. 그러자 저 멀리 유난히 솟아오른 능선의 꼭대기에 화산 같은 분지가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저곳이 용의 무덤입니다.”

나는 매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지도 않고 알 수 있었다. 산맥을 넘기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사악한 기운이 더 뚜렷하게 느껴져.”

우토가 물었다.

“얼마나 사악한 기운이기에 그러십니까?”

짙다.

어둡고 깊다.

다른 차원에 있는 미지의 것 같기도 하다.

뭔가, 실재세계에 있어서는 안 될….

「그때랑 얼추 비슷한데?」

“벨드샤.”

“베, 벨드샤가 살아있는 겁니까? 하지만 녀석은 그때…”

“벨드샤에게서 느껴졌던 기운과 비슷해.”

벨드샤는 아니다. 그건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느낌은 벨드샤와 아주 비슷하다. 어둡고 깊으면서도, 이 세계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부터 도달한 듯한 미지의 기운이다.

때마침 머리 좋은 매가 추측해냈다.

“악마 강림까진 아니고, 벨드샤와 비슷한 악마의 하수인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것 같아.”

또 새로운 악마의 하수인이 실재세계에 나타났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녀석이 어떻게 실재세계에 나타나게 되었는가.

「벨드샤는 너의 업보에 이끌려서 나타났어. 지옥과의 연결성이 강해지면서, 너를 과녁으로 삼아 차원을 넘어왔다고 이해하면 되겠네.」

「벨드샤는 차원을 넘으면서 악으로 분해되었을 거야. 그랬다가 너를 중심으로 다시 뭉쳐서 벨드샤라는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거지. 원래 지옥에 있던 존재가 실재세계로 와서 다시 태어난 거야.」

「마치 악령처럼.」

벨드샤는 내 육체를 악마 강림의 그릇으로 삼으려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학습하고 흡수하여 점점 강해지다가 어느 순간에 날 집어삼켜 악마에게 넘기려고 했을 것이다.

‘빙의.’

빙의란 천사나 악마가 인간의 육체에 들어오는 것. 그런 빙의를 위해선 해당 인간이 ‘화신’이 되어야만 한다.

비첸크로이 제국의 황제는 엑수스의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화신은 아니었다. 네이트의 축복을 받은 아그니샤도 화신은 아니다.

화신이 되기 위해선 어떤 조건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그 조건이 무엇인지 인간인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벨드샤는 날 화신으로 만들려고 했어.’

악마 강림의 그릇.

다시 말해, 악마의 화신.

「악마의 화신이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네가 가지고 있었다는 거네.」

아마도 그 조건이란 충분한 업보와 정신적인 타락이리라.

그리고 인간은 업보를 쌓았을 때, 정신적인 타락을 겪었을 때 쉽게 악에 노출된다. 그러다 육체가 악령화를 일으키면서 정신까지 악령을 닮게 되고, 마지막엔 악령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일단 저곳에는 광인 일족과 구울 무리를 통솔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거야.”

그러자 아그니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녀는 인간을 죽일 수 없다.

“악마의 하수인이 있는 게 아니고요?”

“악마의 하수인이 붙은 인간이 있다는 거야. 그 인간이 구울과 광인들을 움직여 저지른 업보는 결코 작지 않을 거야.”

“…그자가 악마의 하수인에게 몸을 내어주고, 제대로 실체화된 악마의 하수인이 다시 악마를 강림시키고….”

“마지막엔 악마가 용을 부활시킨다.”

“그런 순서였군요.”

“만약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몸을 그릇으로 삼는다면 말이지.”

가만히 듣고 있던 매가 경고했다.

“놈들은 저희가 이곳에 들어왔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만약 도망칠 생각이 없다면, 바람술사 야샤둡이 그랬던 것처럼 목숨까지 내던지며 싸울 겁니다.”

우토는 다가오는 싸움을 걱정했다.

“벨드샤 같은 존재가 있다면 셰르카 님도 계시는 편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이번엔 아그니샤가 있잖아.”

“아, 아그니샤 님이 셰르카 님보다 강하십니까?”

“아그니샤의 전력은 나랑 비슷할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아그니샤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내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토는 그녀가 영 못 미더운 모양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악마의 하수인이 상대라면 이쪽 전력이 조금이라도 더 있는 편이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진짜 겁쟁이네.」

“이번엔 악마의 하수인뿐만 아니라 다른 미지의 존재들도 저희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셰르카 님과 함께 오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아까 말했잖아. 셰르카는 데이진타우 제국을 지킬 거라고.”

“무, 물론 강령술사님이 놈들에게 당하리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단지 강령술사님만큼 강하지 않은 소인이나 다른 이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틀린 말은 아닌데, 그러기엔 늦은 것 같아.”

후우우우우웅!

빼곡한 숲을 비집고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에는 사악한 기운이 뒤섞여있었다.

- 기이이이익!!!

- 기기기기기기긱!

나는 탐지 5계를 써 다가오는 적들의 존재를 내다보았다.

「혈골귀(血骨鬼).」

「333.」

곧이어 매가 알렸다.

“정확히 600마리입니다. 그런데 생김새가 괴이하고 뜀박질이 매우 빠릅니다. 단체로 움직이지만 구울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혈골귀야. 다들 싸움에 대비해.”

모두가 거미 악귀에서 내렸다.

거미 악귀들은 곧 생길 전장을 급습하기 위해 양쪽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우토. 놈들은 목숨을 걸고 있어.”

나는 우토를 내 뒤로 잡아끌면서 말했다.

“우리도 목숨 걸고 왔잖아.”

“아, 예…!”

“전투라는 건 항상 완벽한 조건에서 시작하기 어려운 거야.”

때마침 독수리가 앞으로 나섰다.

“잔챙이들은 맡겨주십시오.”

독수리를 선두로 하여 역병 의사 80명이 앞으로 우르르 걸어나갔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매도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올빼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제 우토와 아그니샤만이 내 곁에 있다.

“혈골귀라는 악령은 얼마나 강하죠?”

“일반적인 구울보다는 강한데 그건 우리에게 문제가 되지 않아. 내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건 다른 거야.”

“뭐죠?”

“놈들이 우리를 상대로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떤 전략을 준비했는지 모른다는 것.”

혈골귀라는 악령도 처음이다. 일반적인 구울보다 강한 악령이 저 앞에 600마리나 있는데, 지금껏 대륙 어디에서도 혈골귀의 목격담은 없었다.

“강령술사님과 아그니샤 님은 영력을 아끼셔야 하지 않습니까.”

“맞아. 악마의 하수인, 놈들의 본진에 있을 적들까지 고려하면 우리 둘은 영력을 아껴야 해.”

그러자 아그니샤가 내게 손바닥을 보였다.

“두 분 모두 저에 대해 뭔가 착각하고 계시나 본데, 저는 대규모 마법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싸울 수 있어요.”

지이잉!

아그니샤의 등 뒤에 있는 은색 십자가가 변화했다. 길이는 그대로지만 두께가 더 얇게 변한 것이다.

터업!

그녀는 십자가의 위쪽을 손잡이로 삼았다. 이렇게 보고 있으면 아주 긴 칼날이라도 들고 서있는 것 같다.

“휩쓰는 건 아니더라도 전장에 진입은 하시죠? 저랑 강령술사님이랑.”

영력을 아끼면서 싸우자는 뜻이다. 이쪽의 최대 전력 두 명이 ‘조금만’ 개입하는 것만으로도 아군의 피해는 크게 줄일 수 있을 테니까.

나도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선뜻 내키질 않는다.

괜히 역병 의사들과 역병 교수들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게 아니다.

“아그니샤. 너나 내가 싸우는 방법을 적에게 보여서 좋을 게 없어.”

“저 혈골귀라는 것들의 존재감이 느껴져요. 저희가 나서지 않으면 아군이 많이 당할 텐데요.”

나는 벨드샤에게 수없이 당한 경험이 있다.

성수를 뿌리면 성수에 면역이 되었고, 주물로 함정을 파려고 하면 다음부턴 주물을 파괴하기도 했다. 힘으로 이길 수 없게 되면 주변 사람을 건드려서 마음을 무너뜨리려고도 했다.

“악마의 하수인은 아주 교활해. 상대의 능력에 대항하는 수단을 반드시 준비하는 놈들이야.”

만약 여기서 아그니샤가 전장에 들어가 싸우는 모습을 악마의 하수인에게 보여준다면.

악마의 하수인은 자신의 혈골귀들이 그녀의 십자가에 당하는 것을 보며 뭔가를 준비할 것이 뻔하다.

물론 악마의 하수인도 그녀가 여기까지 왔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구체적으로 어떤 권능을 휘두르는지 아는 존재는 극히 드물다. 애당초 그녀가 대규모 마법을 발동한 것도 저번에 비첸크로이 제국 수도에서 썼던 것이 처음이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강령술사님….”

곰곰이 생각하던 우토가 요점을 짚었다.

“악마의 하수인이 상대 능력에 대항하는 수단을 반드시 준비하는 놈이라면, 지금 몰려오고 있는 혈골귀 무리도 뭔가 저희 입장에서 불리한 상성을 가진 놈들이 아니겠습니까?”

혈골귀.

마치 이 순간에 내보내려고 준비한 듯한 새로운 악령들.

「너와 아그니샤가 전혀 돕지 않는다면 아군의 피해가 클 것 같아.」

「악마의 하수인을 보기도 전에 아군이 너무 많이 뒈지면 어떡해? 다 뒈졌을 때 뒤늦게 싸우면 그게 더 손해잖아.」

“…그러네.”

내 욕심이었다.

나와 그녀의 영력을 아끼고 적에게 우리의 능력을 철저하게 숨기겠다는 건 욕심이었다.

전투라는 건 항상 완벽한 조건에서 시작하기 어려운 것이다. 나는 좀 전에 우토한테 그렇게 말해놓고 지나치게 완벽한 조건을 갖추려 했다. 모순적이게도.

「디아나에서 있었던 실수들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싸움에서 아무도 피 흘리지 않는 완벽한 승리 따위는 없었잖아.」

승천자, 전쟁 명분.

승전, 흑사병.

성장, 업보.

카프하니드 토벌, 내분.

「나도…. 너를 물들이지 않도록 조심할 테니까.」

「우리 이대로만 가자고. 잘 해왔으니까.」

과정이 완벽하다고 결과가 완벽하리란 법이 없으며, 결과가 완벽하다고 과정이 완벽하리란 법도 없다.

상실을 감내하자. 출혈을 감안하자.

마음을 차갑게 비우고 머리를 차갑게 채우자.

“내가 판단을 잘못했네.”

우토의 얼굴에 옅은 화색이 돌았다.

“알겠어. 적당히 아끼면서 싸우자.”

“네.”

“대신 아그니샤. 지금 혈골귀들에게 너무 많은 걸 보여주진 말자고.”

“그럴게요. 다른 커다란 그림은 강령술사님께 맡길 테니까요.”

일단 악마의 하수인이 내게 대항하여 준비한 게 있다는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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