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10화 (110/181)

21. 폭풍 (5)

험준한 산맥이 겹겹이 늘어선 지형이라 대열을 갖추기엔 무리가 있다. 울퉁불퉁한 언덕과 빼곡한 나무들이 자유로운 동선을 차단하고 시야를 가로막는다.

만약 이곳이 탁 트인 전장이었다면 역병 의사들도 대열을 갖추어 싸웠으리라.

“나는 역병 교수가 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놈들이 옵니다.”

역병 의사들은 가로로 넓게 포진했다.

이들은 모두 세뇌되었기 때문에 맹신적으로 강령술사를 섬기며,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을 느끼는 법이 없다.

스스슥….

역병 의사들 앞에 피로 된 글자가 떠올랐다.

모두가 방혈을 다룰 줄 알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명령을 하달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군대처럼 누군가 크게 외칠 필요도, 북을 치거나 호각을 불 필요도 없다. 피로 된 글자는 조용하고도 신속하게 전달된다.

“싸워라. 입니다.”

“독수리님의 명령입니다.”

역병 의사들은 예외 없이 방혈을 주력으로 연마한 자들이다. 대신 방혈을 제외하고선 그들이 제각기 갖고 있는 조잡한 능력이나 무기 따위는 통일성이 없다.

어떤 이는 녹슨 검을 뽑아들었고 어떤 이는 짧은 단검을 꺼내들었다. 또 어떤 이는 방패를, 부두인형을, 손거울을, 부패한 심장 등을 꺼내들었다.

“기기기긱…!”

이윽고 역병 의사들 앞에 혈골귀 무리가 출몰했다. 숲을 비집고 나오며 달려드는 녀석들의 생김새는 이곳의 누구라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살가죽도 살점도 없이 붉은 뼈로만 이루어진 육체다. 그리고 녀석들 모두가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그건 무언가의 뼈를 부러뜨리고 갈아서 만든 창이나 몽둥이 같은 것이었다.

“333마리라고 했습니다.”

“갈 길이 멉니다. 최대한 숫자를 줄입시다.”

역병 의사들은 닥쳐오는 혈골귀 무리를 향해 손아귀를 뻗었다.

“….”

혈골귀 무리는 상대가 주술을 부리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달려온다.

물론 지금 역병 의사들은 주술을 발동한 참이다.

“방혈이 통하지 않…”

그리고 혈골귀 무리와 역병 의사들이 충돌했다.

푸우욱…!

퍼억!

혈골귀는 들고 있던 무기로 역병 의사들을 찌르고 때려죽였다. 이에 대항하는 역병 의사들 중 반사 신경이 좋은 자들은 가까스로 공격을 피했지만, 그마저도 잇달아 달려드는 혈골귀 무리의 숫자에 압도당하여 쓰러졌다.

같은 순간, 역병 의사들의 맨 앞에서는 독수리가 먼저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기기긱…!”

콰직!

독수리는 가시 박힌 몽둥이로 혈골귀를 여러 마리씩 때려 부수고 있다. 그가 몽둥이를 한번 크게 휘두르면 혈골귀 두세 마리의 갈비뼈가 부러지고 두개골이 으깨졌다.

‘몸속에 혈액이 없는 악령들이다.’

모두가 혈골귀 무리와 뒤엉켜 싸우고 있다. 싸우면서 조금만 발을 놀려도 빼곡한 나무와 험준한 지형 탓에 시야 속 아군을 놓치기 십상이다.

그래도 이렇게 두 진영이 뒤엉켜 싸우고 있으니, 독수리가 매 순간 상대해야 하는 혈골귀의 숫자는 적당한 것 같다. 만약 수십 마리가 사방에서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독수리도 후방으로 몸을 내빼야 할 것이다.

“기익…!”

콰직!

혈골귀의 창이 독수리의 등을 찔렀다. 그의 등판을 가린 갑옷이 일그러지고 선혈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독수리는 오늘을 대비하여 철인을 3계까지 강화한, 역병 교수들 중에서도 순수한 무력이 가장 뛰어난 자다.

‘방혈이 통하지 않는다면 물리력으로 상대해야 하는 법.’

그는 자신의 등에 박힌 창을 손으로 뽑았다. 그리고 큰 신장과 괴력을 이용하여 혈골귀의 정수리에 창을 일직선으로 내리꽂아버렸다.

“기이이이…!”

딱! 딱딱!

창이 흙바닥에 꽂혀서 고정되어버린 혈골귀는 사납게 턱관절을 움직여댔다.

그는 녀석의 가슴뼈를 발길질로 부숴버렸다.

‘나는 괜찮지만 다른 이들은 상성이 불리하다.’

혈골귀가 쉼 없이 달려든다. 독수리도 쉼 없이 몸을 움직였다. 몽둥이로 녀석들을 때려 부수고 발길질로 쓰러뜨리고 급하면 주먹이라도 내질렀다.

그러다 너무 많은 혈골귀가 달려든다 싶으면 놈들 앞에 나무를 쓰러뜨려서 순간적으로 수적 열세를 극복해냈다.

“기기기긱!”

이번엔 독수리의 머리 위로 혈골귀들이 떨어졌다. 주변에서 몰래 나무를 타고 오른 것이다.

독수리는 즉각 반응했다. 공중으로 몽둥이를 크게 휘둘렀다.

부웅!

그 순간에 몽둥이가 가장 왼쪽에 있는 녀석의 골반을 때리면서 오른쪽으로 밀어냈다. 그 녀석의 오른쪽에 있던 녀석이 왼쪽 녀석과 충돌하였고, 다른 녀석들도 연달아 서로의 몸에 충돌하였다.

콰지지지직!

녀석들은 공중에서 일제히 하반신을 잃어버리고 부서진 뼛조각과 함께 멀찍이 나가떨어졌다.

“키에에에엑!”

사사사삿!

거미 악귀들이 독수리 주변에서 모여들어 혈골귀 무리를 덮쳤다. 나무 위를 종횡무진 누비는 거미 악귀는 혈골귀보다 뛰어난 기동력으로 빠르게 치고 빠지는 싸움을 할 수 있었다.

혈골귀의 붉은 뼈는 단단했지만 거미 악귀의 턱에 씹히거나 다리에 치이면 금방 부러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거미줄의 공세는 혈골귀를 휘감아 자빠뜨리거나 그물처럼 포획하여 공중에 매달아버렸다.

때마침 독수리 앞에 피로 된 글자가 떠올랐다.

그는 글자를 읽었다.

‘…독수리는 후방으로 물러나 역병 의사들을 도와라.’

그는 달려드는 혈골귀들을 거미 악귀들에게 맡긴 채 뒤로 뛰어갔다.

* * *

역병 의사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다. 그들의 주된 능력인 방혈이 통하지 않는 혈골귀를 상대로는 각자가 가진 특성을 살려서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기를 든 자들은 혈골귀와 직접 육탄전을 벌였고 무기가 없는 자들은 뒤로 물러나서 불, 물, 바람, 재결합 따위의 주술을 발동했다.

“우리들 개인의 조잡한 주술은 통하지 않습니다.”

전사자가 속출하고 있다. 역병 의사들의 방혈은 일반적인 주술보다 계가 높은 것이었지만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각자가 갖고 있는 계가 낮은 주술로 혈골귀들을 상대하자니 녀석들의 저항 능력이 그보다 높아서 무용지물인 것이다.

혈골귀는 불을 뒤집어쓰면 까맣게 탄 육체가 되어서도 달려들었다. 물은 녀석들의 단단한 뼈를 부수지 못하였고 물방울은 녀석들을 익사시키지 못했다. 강풍을 쏘아내면 녀석들의 뼈로 된 육체 사이로 바람이 통과해버렸다.

“힘을 합칩시다.”

“단체 재결합으로 전선을 확보해야 합니다.”

역병 의사들은 임기응변으로 영력을 합쳤다. 옆에 있는 자들과 동시에 같은 주술을 발동하여, 개인이 발동한 것보다 더 큰 위력을 내려는 것이다.

드드드득!

그들이 재결합으로 만들어낸 흙벽이 혈골귀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잇달아 흙벽에서 돌로 된 손이 수십 개씩 튀어나와 혈골귀들을 붙잡아 비틀었다.

“기기기기긱!!!!”

그러나 혈골귀들에겐 기본적으로 괴력이 있었다. 흙으로 만들어낸 장애물로는 녀석들을 죽일 수도, 속박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도 시간은 벌었다.

“키에에엑!”

거미 악귀들이 잇달아 전장에 뛰어들었다. 녀석들은 역병 의사들이 재결합으로 몰아놓은 혈골귀들을 거미줄로 묶고 사방에서 잡아당겼다.

뚜두두둑!

서로 뒤엉킨 혈골귀들은 질긴 거미줄에 당겨져서 사방팔방 부서졌다.

“우리는 이 전장에서 주력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동의합니다.”

그때쯤 거미 악귀들과 협동하게 된 역병 의사들은 모두 깨달았으리라.

“거미 악귀들이 주력입니다. 우리는 주술을 써 거미 악귀를 보조합시다.”

하지만 혈골귀 측에서도 무언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쐐애액!

퍼억!

“케엑!”

뼈로 된 창이 날아와 거미 악귀의 머리를 꿰뚫어버렸다.

구울과 비슷한 방식으로 싸우던 혈골귀.

지금까지 구울처럼 달려들어서 수적 우위로 육탄전을 강제했던 혈골귀.

그랬던 녀석들의 원거리에서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놈들이 투창을 터득했습니다.”

뼈로 된 창이 날아든다. 이제 혈골귀들은 달려들지 않고 거리를 유지한 채 창을 내던지고 있다.

“키에엑…!”

녀석들의 괴력으로 던져진 창은 거미 악귀의 몸체를 충분히 꿰뚫고도 남을 위력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거미 악귀들이 녀석들에게 득달같이 달려드는 구도가 되었다.

“누군가 지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뼈로 된 칼이나 몽둥이를 들고 있는 녀석들은 창을 든 녀석들을 지켰다. 날아드는 창에 맞을 것을 각오하고 달려든 거미 악귀들은 창을 든 녀석보다 칼이나 몽둥이를 든 녀석들을 먼저 상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잠시라도 멈춰서 싸우고 있으면 다시금 창이 날아들어 거미 악귀를 죽이는 것이다.

“누군가 이 순간에도 전장을 살피며 지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강령술사님께 보고해야 합니다.”

“불필요합니다. 강령술사님이라면 알고 계실 것입니다.”

역병 의사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극단적인 이성을 유지하며 상황을 살피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행동에 옮겼다.

“많은 동료들이 죽었습니다. 많은 거미 악귀들이 죽고 있습니다.”

“피가 많습니다.”

전장에 시체와 사체가 많이 쌓였다.

이제 역병 의사들이 자랑하는 방혈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쏴아아아!

때마침 인근에서도 비슷한 판단이 내려진 모양이었다. 전장 곳곳에서 붉은 덩어리가 요동치며 거미 악귀들을 앞질러가 혈골귀들을 공격했다.

* * *

붉은 뼈.

붉은 두개골 여섯 개.

혈골귀 여섯 마리의 뼈로 하나의 육체를 이루고 있는 악령이 시끄러운 전장을 내다보고 있다.

이 녀석의 악명은 혈골군주(血骨君主)다.

- 샤아아.

바람을 타고 온 사악한 목소리가 녀석에게 속삭였다.

- 샤아아아아.

“기긱. 기기기기긱.”

혈골군주는 18개의 팔을 각각 다르게 움직였다. 어떤 손은 어딘가를 손가락질하고 어떤 손은 주먹을 쥐고 어떤 손은 손바닥을 내보이는 것이다.

각각의 손이 움직이는 것은 혈골귀 무리의 지휘와 관련된 것이었다.

“기기기긱…!”

그때 무언가가 혈골군주의 곁을 휙 지나갔다.

카가각!

뼈가 부러지는 거친 소리가 뒤따르며, 혈골군주의 팔 한쪽이 떨어졌다.

혈골군주의 두개골 여섯 개가 동시에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네놈이었구나. 지금 혈골귀 무리에게 지령을 내리고 있는 녀석이.”

혈골군주 앞에 나타난 자는 매 역병 교수였다.

“기기긱! 기기긱!”

“사람 말을 할 줄 모르나?”

“기기기긱!”

“그렇다면 탐색전도 필요 없다.”

타앗!

순간, 매가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낮게 튀어 오른 흙 알갱이와 풀잎만이 잔재했다.

“기이…!”

혈골군주의 여섯 두개골이 온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혈골군주에겐 사각이라는 게 없는데 어째선지 매가 보이질 않는다.

“이쪽이다.”

사실, 혈골군주에겐 매가 보였다. 하지만 매가 너무 빨라서 반응하지 못한 것이다.

카가가각!

매의 넓적한 칼이 검은 연기로 칼날을 연장하여 혈골군주의 목 하나를 베어버렸다.

“기기기기긱!”

그러자 혈골군주의 다른 두개골 하나가 턱을 벌렸다. 비어버린 턱 속에서 화염이 사출되었다.

화르르!

하지만 이번에도 매는 사라졌다.

“이쪽이다.”

화염을 사출한 두개골을 제외하고 다른 네 두개골이 매를 향했다. 그리고 네 두개골이 매를 향한 순간, 매의 칼은 이미 혈골군주의 목뼈에 닿은 채였다.

그때였다.

파지지지직!!!

혈골군주의 두개골 하나가 매에게 번개를 쏘아낸 것이다.

“뭣…!”

매가 아무리 빨라봤자 번개의 속도보다 빠를 수는 없는 것이었다.

파지직! 파지직!

“끄으으윽!”

매는 지면에 떨어져서 경직된 몸을 괴롭게 뒤틀었다. 그의 온몸에서 탄내와 함께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기긱! 기기긱!”

좀 전에 화염을 내뿜었던 두개골이 매를 향하여 턱을 벌렸다.

매는 코앞에 닥쳐오는 화염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몰랐네.”

화르륵!!!

다음 순간, 화염이 매를 덮쳤다.

“…하지만 네놈도 몰랐겠지.”

키잉!

은색 십자가가 매 앞에 떨어져서 성스러운 빛을 발했다.

화염은 성스러운 빛에 삼켜져 사라지고 말았다.

“내가 괜히 네놈의 주의를 끈 게 아니다.”

혈골군주가 매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사각이 없는 혈골군주의 모든 시선이 매에게 집중된 순간.

바로 이때를 노린 것이다. 매가 직접 계획한 것이다.

“기기긱!”

혈골군주는 몰랐다.

자신의 뒤에, 강령술사 다음으로 위험한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긱…”

돌아봐도 늦었다.

기다란 은색 십자가를 성검처럼 들고 있는 아그니샤.

스어어엉!

그녀가 무표정으로 달려들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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