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용의 무덤 (1)
혈골군주가 아그니샤를 돌아본 직후, 그녀의 십자가가 녀석의 육체를 사선으로 베어버렸다.
퍼엉!
사선으로 베어진 상처의 균열을 따라 눈부신 섬광이 터졌다. 그와 동시에 울리는 폭음이 혈골군주의 비명을 덮었다.
파직! 파직!
혈골군주의 두개골 하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비명을 지르자 사방으로 번개가 터져나갔다. 번개에 맞은 나무는 순식간에 불태워졌고 바위는 빨갛게 가열되어 폭발하면서 살인적인 돌 파편을 흩뿌렸다.
그 눈부신 광란의 현장 속에서 아그니샤는 십자가를 방패로 삼았다.
키잉…!
그녀의 십자가가 성스러운 빛을 발하고 유지했다. 어지러이 터지던 번개는 십자가를 집중적으로 타격했고 파편 따위는 성스러운 빛에 닿자마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매 앞에 꽂힌 십자가도 그녀의 것과 똑같이 번개와 파편을 막아주었다.
하지만 매는 다급히 외쳤다.
“조심하시오! 아그니샤!”
완벽하게 막아내는 건 불가능했던 것이다.
“놈은 치명상을 입었소! 최후의 발악이오!”
“기기긱긱기기긱!!!”
혈골군주는 번개에 화염까지 섞었다. 번개에, 화염에, 바람까지 섞었다.
그것은 곧 광풍을 능가하는 불 바람이자, 빛의 속도로 터지는 폭발이었다.
폭발 직후에는 번개를 머금은 불 바람이 주변으로 몰아쳤다. 그것의 근원인 혈골군주는 불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는다.
“제길…! 괴물 같은 놈!”
툭…! 투두둑!!!
매 앞에 박힌 십자가가 조금씩 기울고 있다. 금방이라도 뽑혀나갈 것만 같다.
‘고속화 4계, 가속…!’
적어도 이 순간에 십자가의 뒤쪽은 안전하다. 사방을 집어삼킨 불 바람이라도 십자가에 닿은 방향으로부터는 양쪽으로 갈라져서 불의 벽이라도 만든 것처럼 되었다.
그래서 매는 십자가를 등지고 뛰었다. 뛰면서 위를 보았는데 하늘은 불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계속 뛰고 있으니 불로 된 천장이 점점 높아지는 감이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하늘이 열렸다.
매가 그렇게 뒤로 달려서 하늘로 뛰어오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5초였다.
투화아악!
그리고 6초가 지난 시점에서 십자가가 뽑혀버린 것이다. 6초 전까지 매가 있던 땅은 불 바람이 뒤덮어버렸다.
하늘로 뛰어오른 매는 재빠르게 눈을 움직이며 정보부터 긁어모았다.
‘벌써 산불이 번지고 있다….’
바람이 잘 부는 환경이라 불도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산불이 이 근방을 모조리 뒤덮기 전에는 다들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할 것이다.
‘망원.’
높아진 시야의 한쪽에서는 혈골귀 무리와 역병 의사들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그래도 좀 전부터 엎치락뒤치락했던 전황이 이쪽으로 기운 모양이었다. 방혈이 통하지 않던 혈골귀가 우세했다가, 거미 악귀들의 습격으로 이쪽이 우세했다가, 혈골귀가 전술을 펼치면서 다시 전황을 빼앗겼다가, 이제는 거미 악귀들의 시신으로부터 피를 뽑아낸 역병 의사들이 다시금 우세해진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싸우고 있는 독수리가 있다.
‘역시나 독수리였다.’
독수리가 있는 쪽에는 역병 의사의 시신보다 혈골귀의 사체가 훨씬 많이 쌓여있다.
힘껏 하늘로 떠오른 몸이 잠시 정지했다.
이렇게 높이 날아오르면 당연히 떨어지는 순간도 찾아오는 법이었다.
매는 공중에서 몸을 틀었다. 머리를 아래로 향했다. 안전하게 착지하지 않으면 온몸이 납작하게 부서져 죽을 속도로, 흐릿흐릿 탄 연기가 뒤섞인 공기에 몸을 맡겨 지상으로 활강한다.
그러면서 혈골군주가 있는 곳을 재빠르게 훑어보았다.
‘아그니샤는 강력한 마법 발동을 자제하고 있다.’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단 한 번의 마법만 써서도 혈골군주를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렇게 몸을 움직이며 십자가를 휘두르고 있는 건 이 사악한 존재들의 배후에 있는 악마의 하수인에게 이쪽의 수단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서다.
또한 영력을 최대한 온전하게 보존한 상태에서 그 교활한 존재를 상대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번 일을 마친 후에 역병 교수의 머리가 정해진다고…’
촤아아아!
순간, 측면에서 물방울이 날아와 그를 가둬버렸다.
“…우읍…!”
그를 가둔 물방울은 공중에서 정지했다.
츄우우욱!
그러더니 왔던 방향으로 빠르게 되돌아가는 것이다.
매는 물방울에 갇힌 채로 시선을 옮겼다. 혈골귀 무리와 역병 의사들이 싸우고 있는 전장을 뒤로하고, 아그니샤와 혈골군주가 싸우고 있는 곳을 뒤로하고,
돌진해오듯 가까워지는 가파른 산맥 사이,
그 산맥 사이에 만들어진 협곡,
협곡을 가르고 있는 강줄기가 있었다.
“…끄읍…!”
망원 능력으로 확실하게 보인다.
강 위에 바위를 놓아 만든 징검다리가 있다. 그 징검다리 위에 올라서서 이쪽으로 뼈로 된 지팡이를 겨누고 있는 붉은 해골이 있었다.
당장 매는 모르겠지만, 녀석의 악명은 골수(骨髓)였다.
겉모습은 영락없이 혈골귀를 닮았다. 그러나 몇 개의 두개골이 포도처럼 뭉쳐서 척추를 대신하고 있으며, 휘어진 뿔이 달린 산양의 두개골 하나가 공허한 눈에서 피눈물을 폭포처럼 쏟고 있었다.
그래서 골수가 서있는 곳의 하류는 강물이 붉게 물든 채다.
‘물을 다루는 악령이다…!’
물방울 속에 갇힌 매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일단 발버둥부터 멈췄다. 안 그래도 호흡이 부족한데 쓸데없는 발버둥까지 치다간 이대로 익사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익사하지 않더라도 결국엔 저 바위와 자갈로 된 강변에 떨어져 추락사하게 되리라.
“…….”
매는 양팔을 벌렸다. 그의 양손에 들린 넓적하게 휘어진 칼 두 자루가 새까만 검기를 뽑아냈다. 이 와중에도 강변이 가까워지고 있다. 물방울에 갇힌 채 추락하고 있다.
쿠르르륵…
숨이 부족하지만 이성을 잃어선 안 된다. 검기를 써 침착하게 칼날을 연장시킨다. 물방울의 반지름보다 더 길게 연장시킨다.
“후읍…!”
촤아아아!
매는 추락사하기 직전에 가까스로 물방울을 가를 수 있었다.
* * *
아그니샤는 힘차게 십자가를 휘둘렀다. 그러자 십자가를 휘두른 방향 그대로 검기와도 같은 빛이 뻗어나갔다.
키이이잉!!
빛은 빼곡한 불 바람을 밀쳐내면서 혈골군주의 두개골까지 닿았다. 그러나 그 순간에 혈골군주는 자세를 숙여서 모든 두개골이 빛의 범위에 닿지 않도록 회피하였다.
투욱!
그래도 연신 화염을 내뿜던 두개골 하나는 까맣게 타버린 흙바닥에 떨어져서 가루가 되었다.
아그니샤는 혈골군주를 응시하며 아무 감정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를 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너의 생명을 거두는 게 올바른 집행인지 고민하고 있었어.”
“기긱…. 기기기긱….”
“아주 작은 의구심이 있었거든. 용이 인간으로부터 북서쪽의 ‘자연’을 지키려고 그런 걸지도 모른다는….”
뚜둑! 뚜둑! 뚜둑!
혈골군주는 엎드렸다. 갑자기 몸체가 길어지더니 18개의 팔을 다리처럼 삼아 몸을 지탱했다. 그 모습이 붉은 뼈로 엮어낸 벌레 같다.
“그런데 이렇게 산을 불태우는 꼴을 보니까 그건 또 아니었나 봐. ……결국 의심할 여지없이 사악한 피조물이었다는 거지.”
그녀의 배후에 빛으로 된 구체 세 개가 떠올랐다. 각 구체는 그녀가 들고 있는 것보다 작은 십자가를 천천히 뽑아내듯 소환했다.
“네놈들은 죽어야만 해.”
작은 십자가 세 개가 일제히 혈골군주를 조준했다. 그리고 본래의 은색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을 머금었다.
‘극형집행(極刑執行).’
…쐐애액!
혈골군주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성스럽게 빛나는 무언가의 발사체가 자신에게 온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에 피격당했기 때문이다.
퍼퍼퍼퍼퍽!
붉은 뼈로 엮어진 육체에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다. 불과 몇 초 전에 생긴 구멍이 경이로운 회복력으로 다시금 붉은 뼈로 채워지고 작은 십자가에 뚫리길 반복한다.
위기감을 느낀 혈골군주는 길어진 몸통과 18개의 팔로 벌레처럼 움직여 뭔가를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녀석이 뭔가를 해보기도 전에 무자비한 집행이 떨어졌다.
“기기기기기기긱!!!!”
혈골군주는 십자가에 수십 번을 관통당하면서도 죽지 않고서 악착같이 포효했다.
그와 반대로 아그니샤의 호흡은 일정했다.
“나는 네놈의 생명을 거두는 극형을 집행했어.”
사실 극형집행은 작은 십자가 세 개를 날리는 것으로도 끝날 수 있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혈골군주의 온몸을 관통하고 있는 십자가의 개수는 이미 수백 개를 넘어서고 있다.
“집행은 끝나지 않는다는 뜻이야. 네놈의 부정한 생명이 꺼질 때까지.”
혈골군주는 새까만 흙바닥에 쓰러져서 괴롭게 몸부림치고 있다. 사악한 육체를 관통하는 신성한 공격에 녀석은 연신 포효하면서 피눈물을 쏟아냈다.
“기긱…! 기카가가아아아악…!!!!”
그래도 극형집행은 끝나지 않았다.
녀석이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투콰콰콰콱…!
이제는 녀석의 육체 위로 붉은 뼛조각이 아니라 흙 알갱이가 튀어 오른다. 끊임없이 쇄도하는 십자가가 녀석의 몸에 뚫린 구멍을 지나서 흙바닥을 치고 있는 것이다.
‘영력과 마법을 아끼라고 했는데….’
아그니샤는 괴롭게 발버둥 치는 혈골군주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때 혈골군주는 아그니샤에게 뻗을 팔이 하나도 남지 않았으며, 지나친 고통의 늪에 빠져서 주술을 발동할 여력도 없는 상태였다.
‘그래도 혈골귀 무리를 통솔하는 존재는 해치우는 게 맞겠지.’
이제 혈골군주는 죽지 못해서 살아있는 듯하다. 어쩌면 지나친 고통에 사로잡혀서 차라리 죽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신성함이라는 것은 사악한 존재에게 작열통 그 이상의 격통일 테니.
“악마의 하수인. 보고 있어?”
그녀는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혈골군주의 텅 빈 눈을 가까이서 마주했다.
이 두 눈을 채우고 있는 핏물과 어둠 너머에서 사악한 존재의 시선이 느껴진다.
“아직 거기 있지?”
“기기긱…!”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직접 들고 있는 십자가를 수직으로 휘둘렀다.
쐐액!
흙바닥에 순간적인 균열이 생겼다. 조금의 흙 알갱이가 위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혈골군주의 몸이 빛에 감싸졌다.
쩌적!
동시에 녀석의 사악한 육체가 단번에 좌우로 갈라졌다.
“…기긱…. 샤아…. 그니샤….”
“맞아.”
“….”
“기다리고 있어. 다음은 네놈 차례니까.”
혈골군주는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 * *
촤아아아!
매는 추락사하기 직전에 가까스로 물방울을 갈라내 탈출했다.
“커헉…!”
투콰콱!
자갈과 바위로 된 강변을 몇 바퀴 구르자 등을 따라 묵직한 통증이 퍼져나간다. 그래도 애써 통증을 억누르고 두 다리로 일어섰다.
일어서자마자 눈앞으로 물줄기가 닥쳐왔다.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사선을 교차하며 검기처럼 닥쳐온 물줄기다.
‘압출?!’
매는 낮게 뛰어서 공중에 몸을 눕혔다.
투콱…!
그의 뒤로 지나간 물줄기가 강변의 바위들을 사선으로 깔끔하게 갈라버렸다.
‘아니다…. 우리가 아는 물의 마법과는 다르다.’
무엇보다 저 존재가 ‘마법’을 쓸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방금 지나간 검기 같은 물줄기는 녀석의 주술이나 고유 능력에 관련된 것이리라.
방금 그것은 실재세계에 흔히 알려진 물의 마법보다는 훨씬 거칠고 투박했다. 그리고 빨랐다.
‘기본적으로 빠르다. 그러면서도 물방울 따위로 내 움직임을 제한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매가 그렇게 생각하던 도중이었다.
촤아아!
골수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자 다시금 엄청난 속도로 물줄기가 쇄도해왔다. 이번에도 사선으로 교차된 것이다. 그때 매는 회피를 위해 뒤꿈치를 들면서 의심했다.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사지가 잘려나갈 수도 있는 상대다.
‘만약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피하려 한다면…’
타앗!
매는 이번에도 살짝 뛰었다.
그러자 사선으로 교차된 물줄기가 풍차처럼 회전한 것이다. 동시에 골수가 뒤틀린 웃음소리를 냈다.
“기힉…! 기히힉…! 그흐흐!”
키잉!
그때 매의 칼이 새까만 검기를 머금어 칼날을 연장했다. 사선으로 교차된 물줄기가 회전하며 닥쳐오는 순간에 매는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굴렸다.
“기히익……?”
만약 그가 이번에도 몸을 눕혀 피하려 했다면 머리부터 시작해 허리, 다리, 발목까지 고기처럼 토막이 났으리라.
스억!
그는 풍차처럼 회전하던 물줄기를 검기로 베어버렸다. 이어서 잽싸게 착지하여 한 번의 발돋움으로 골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거리가 좁혀지는 건 순식간이었으며, 좁혀진 거리에서 매의 팔이 움직이는 건 더욱 순식간이었고, 그렇게 몸이 움직이고 팔이 움직이는 것보다 검기에 의해 칼날이 연장되는 속도는 더욱이 빨랐다.
총 세 번에 걸쳐서 연달아 가속된 위협은 골수가 절대 반응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령술샤… 의… 심복…”
입술도 혀도 없는 붉은 턱관절이 움직였다.
“…매…?”
쩌저저!!!
벌어진 턱관절 안쪽에서 피로 물든 손, 팔, 어깨가 순서대로 튀어나와 매의 목을 움켜쥐었다.
“끄으윽…!”
“…여기가 아니었군.”
그것은 살갗이 있는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