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13화 (113/181)

22. 용의 무덤 (3)

팔팔 끓는 화산호수, 바람을 따라 한 방향으로 안개처럼 흘러가는 수증기, 둥글게 모여있는 목조주택들.

쿠당탕!

“그어어…!”

구울들이 목조주택에서 앞다투어 나오고 있다. 그리고 녀석들 사이에는 야히웬이 있었다.

“히샤웬, 탈루윈.”

야히웬의 부름에 두 광인이 다가와 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벨로움 님께서 빚어주신 혈골귀 무리를 보냈으나 놈들의 전력을 끌어낼 수는 없었다. 혈골군주와 골수의 존재감까지 금세 사라졌으니, 예상대로 강령술사와 아그니샤의 무력이 강대한 것이다.”

히샤웬.

그는 피부에 울긋불긋 혐오스럽게도 드러난 핏줄이 특징적이며, 썩어가는 구울의 머리를 달고 있는 장창을 장비하고 있다.

파직파직!

그의 장창에 번개가 흘렀다.

“카프하니드의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제가 강령술사를 상대하게 해주십시오. 놈의 핏물과 군단을 남김없이 태워버리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혈골군주가 쓰러졌으니 놈들에게는 번개에도 대항하는 수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 탈루윈이 의욕을 보였다.

“벨로움 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 놈들을 공격하여 최대한의 영력을 빼놓겠습니다.”

탈루윈은 누더기 바지만 입고 있다. 그의 노출된 상반신은 다른 인간의 유골과 합쳐지기라도 한 듯 살갗 바깥으로 기이한 뼈를 드러내고 있으며, 상반신의 이곳저곳에 눌어붙은 인간의 얼굴이 달려있었다.

“우리의 목표는 승리가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오늘 목숨을 바쳐 공멸하여, 강령술사를 이 세계에서 없애버리는 것이다.”

어림잡아 2천 마리의 구울 무리가 남동쪽으로 우르르 몰려가고 있다. 원한다면 한 국가라도 침공해 멸망시킬 수 있는 군대지만, 다가오는 적들을 상대로는 단 30분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성공적인 공멸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놈들의 힘을 더 빼놓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탈루윈이 물었다.

“아그니샤는 어쩝니까?”

“바로 그 여자를 너희 둘이 상대하는 것이다.”

“…구울들을 아그니샤에게 보내고 저희는 강령술사를 상대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지금의 강령술사는 기척을 감추고 있다. 그리고 착각하지 마라. 일단 너희는 강령술사를 상대로 10초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아그니샤라고 다를 건 없지 않습니까.”

“아니지.”

어느덧 주변이 조용해졌다. 약 2천 마리의 구울 무리가 모두 빠져나간 것이다.

“아그니샤는 ‘인간’을 죽일 수 없다.”

네이트의 축복을 받은 여전사는 사악한 존재를 집행할 수 있다. 그것이 네이트가 그녀에게 준 권능이자, 집행을 대리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인간은 선악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그 어떤 인간이라도 날 때부터 사악한 자는 없다.

따라서 사악한 자가 있다면 그자가 사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반드시 있는 것이기에 헤아려야 하며, 인간이기 때문에 다시금 선해질 수 있는 것이며, 그런 인간이라는 특수한 존재의 내일을 박탈하는 건 금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천계가 인간의 목숨을 빼앗는 아주 예외의 상황도 있기는 하지만, 인간을 집행해 목숨을 빼앗는 건 같은 인간인 아그니샤에게 허가된 일이 아니었다.

인간인 아그니샤는 사악한 인간을 보았을 때, 정말로 자신이 그 인간의 목숨을 빼앗아도 되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사로운 규율을 정하고 그것에 목매다는 것이 천계의 특징이다. 그 탓에 아그니샤는 너희를 상대로 적당히 힘을 조절하게 될 테니, 아무리 여전사가 상대라도 어느 정도는 싸움이 성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그니샤가 2천의 구울을 단번에 말살한다면 저희는 강령술사의 심복과 군단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것입니다.”

“이곳에서 악의 농도는 짙어지고 있다.”

야히웬은 팔팔 끓는 화산호수를 가리켰다.

“구울은 다시 태어나 무한하게 참전할 것이다. 구울이 전멸하리라는 걱정은 불필요하다.”

이어서 야히웬은 두 광인에게 명령했다.

“그러니 너희는 구울을 앞세우고 아그니샤의 빈틈을 노려라. 이곳에서 구울은 무한하지만, 여전사의 십자가는 무한하지 않으니까.”

* * *

부우우웅….

불나방이 하늘을 날고 있다.

‘악마의 하수인. 벨로움.’

아그니샤는 불나방의 머리와 가슴 사이의 오목한 부분에 앉아있다. 그녀는 불나방의 더듬이를 고삐처럼 쥔 채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북서쪽에 있는 화산호수 주변은 새하얀 수증기가 뒤덮고 있다. 그 습한 가림막 너머로 목조주택이 수백 채는 보이는데, 광인들이 모여서 저곳에 마을을 세웠다기엔 빠진 것이 많다.

‘농지, 마구간, 대장간, 우물, 간단한 도로조차 없어.’

그래서 광인들이 모여 생활을 하는 곳이라기보다는, 평소에 무언가를 단체로 수용하는 장소 같다.

그리고 그 ‘무언가’란 지금 남동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대규모 구울 무리를 뜻하는 것이리라.

스스슥….

그녀의 흩날리는 금발 사이로 혈액이 날아왔다. 혈액은 그녀를 앞질러가 불나방의 머리 위에서 글자가 되었다.

‘구울 2천에 광인이 두 명.’

곧 북서쪽으로 향하는 역병 의사와 악귀 군단이 구울 무리와 충돌하게 되었다. 혈골귀와는 달리 몸속에 피가 있는 구울들은 역병 의사들을 마주치자마자 순식간에 터져나갔다.

결국 혈관을 따라 핏물이 흐르고 있는 존재들은 대체로 역병 의사들의 적수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스슥스슥!

피로 된 글자는 다시 새로운 문장을 만들었다.

‘협곡에 떨어졌던 역병 교수들이 골수를 해치웠고, 벨로움은 이미 이동한 거구나….’

역병 의사는 구울을 상대로 상성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거기에 다수의 거미 악귀와 불나방까지 섞여있고 협곡에 내려간 역병 교수들까지 저곳에 합류하게 된다면 구울 무리에 승산은 없으리라.

저대로라면 적들이 구울 2천 마리가 아니라 1만 마리를 끌고 와도 질 것 같지가 않다.

‘저 구울들을 휩쓸어버리는 건 적잖은 영력이 필요해.’

이 순간에도 느껴지는 벨로움의 기운.

녀석의 사악한 기운은 아까 혈골군주를 상대하고 있을 때 근방의 협곡에서 강해졌다가, 다시금 약해진 채로 저곳 화산호수의 어딘가로 이동한 것이다.

‘영력을 아끼자.’

그렇게 결정하려던 찰나, 그녀는 구울 무리의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하였다.

화산호수 쪽에서 구울 무리가 추가로 나타나는 것이다. 새로운 녀석들은 목조주택이 아니라 화산호수에서 화상 흉터로 얼룩진 육체를 드러내며 남동쪽 전선으로 뛰어가고 있다.

‘죽은 머릿수만큼 더 나타나고 있어.’

저곳에서 악령을 만들고 있다.

인간을 통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게 아니라 저 화산호수에서 새로이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때마침 그녀 앞에 새로운 문장이 완성되었다.

‘악귀가 구울을 죽여도 악이 흡수되질 않는다고…?’

페인의 악귀가 사악한 존재를 죽이면 그 존재가 갖고 있던 악은 페인의 자의와는 별개로 고스란히 그의 영혼으로 흡수된다.

그것은 페인이 이토록 단기간에 강해질 수 있었던 핵심요소이며, 실재세계나 잿빛세계에 관계없이 적용되는 고유 능력이었다.

그런데 페인의 악귀들이 저 구울 무리를 죽여도 그의 영혼으로 악이 흡수되지 않는다는 건, 구울들이 갖고 있는 악이 다른 쪽으로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소리 내어 말했다. 그가 불나방의 귀를 통해 듣도록.

“죽으면 악이 되어 화산호수로 돌아가서…. 윤회(輪廻)하는 거예요.”

그러자 피로 된 문장은 빠른 결정을 알렸다.

‘맞아…. 전선을 화산호수까지 단숨에 밀어붙여야겠지.’

무한한 구울 무리를 단숨에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소모전이 될 것이다.

“알겠어요.”

그녀는 불나방에 몸을 바짝 붙었다.

부우웅!

불나방은 지상을 향해 거의 수직으로 비행했다.

구울, 역병 의사, 거미 악귀, 불나방들이 싸우고 있는 전장의 한복판으로 하강한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전장이 이쪽으로 돌진해오는 것처럼 보이리라.

그녀는 거센 바람 속에서도 눈을 떴다.

부웅…!!!

불나방은 지면에 떨어지기 직전, 급정지했다. 이어서 그녀는 구울 무리 사이에 착지하며 십자가를 지면에 꽂았다.

퍼어엉!!!

아그니샤를 중심으로 섬광이 터졌다. 같은 순간에 그녀를 노려 달려들고 있던 구울들은 너무도 찬란한 섬광에 눈이 타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주문을 외웠다.

‘지옥의 뒤틀린 존재들이 악을 추종하며 현계에 날뛰고 있으니, 단호하고도 정의로운 집행이 불가결한 상황입니다.’

아직 멀쩡한 구울들이 눈이 타버린 구울들을 밀쳐내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온 사방에서 달려드는 구울들은 벨로움의 명령이라도 받은 듯 전부가 발걸음을 돌려서 그녀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자비로운 대천사, 네이트시여.’

‘이들에게 무자비를 선사하소서.’

순간, 칙칙한 하늘을 밝히는 거대한 마법진이 전개되었다.

‘계율(戒律).’

그때부터 은색 십자가가 전장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아군과 적군을 정확하게 구분하여 수직으로 떨어지는 은색 십자가였다.

십자가에 맞은 구울은 예외 없이 쓰러졌다. 십자가에 맞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구울은 쓰러진 채로 새로운 십자가를 받아내게 되었다.

전선에서 싸우던 역병 의사들은 압도적인 마법의 힘에 취하여 넋을 잃었다. 거미 악귀와 불나방들은 신성한 힘이 두려워서 역병 의사들보다 뒤로 도망쳤다.

곧 구울들의 사체가 산에 쌓였다. 사체마다 꽂혀있는 십자가는 전쟁터 근방의 묘지를 방불케 했다.

- 강령술사님의 명령입니다.

- 우리는 화산호수. 용의 무덤이 있는 곳까지 진군합니다.

아그니샤는 구울들의 사체 밭을 무심하게 가로질러 걸었다. 뒤이어 불나방들이 그녀의 머리 위를 통과했고 거미 악귀들이 그녀의 곁을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리고 좀 전에 페인의 명령을 받은 역병 의사들이 그녀가 있는 곳까지 뛰어왔다.

“이곳의 구울들은 윤회하고 있어요.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죠.”

“전선을 밀어서 구울의 발생지를 제압하겠습니다.”

“네. 가세요.”

순식간에 쌓인 사체는 모두 역병 의사들의 무기가 되었다. 사체로부터 뽑아낸 혈액이 제각기 붉은 덩어리가 되어서 역병 의사들의 주변에 두둥실 떠오른 것이다.

그것이 이제는 페인의 제물방류에 준하는 규모가 되었다.

‘이만한 혈액을 만들어줬으면 수적 열세도 극복할 수 있을 거야.’

죽은 머릿수만큼 되돌아오는 구울 무리를 잡겠다고 영력을 다 쓸 수는 없다. 일단은 계율의 십자가로 전선을 밀어놓고, 나머지는 역병 의사들과 뒤이어 합류할 역병 교수들에게 맡겨야 한다.

“불나방.”

부우우웅!

불나방 한 마리가 아그니샤의 곁에 착지했다.

그녀는 능숙하게 도약하여 불나방에 올랐다.

“나를 적진 한복판에 내려줘.”

* * *

어느 을씨년스러운 목조주택의 내부.

천장에 쌓인 거미줄, 가구 하나도 없이 바닥에 쌓인 먼지 위에 발자국만 듬성듬성 찍혀있다.

야히웬은 어둠 속 혈골귀에게 말했다.

“하늘에서 십자가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강령술사는 혈골귀 무리를 내보낸 뒤부터 향기가 옅어지더니, 이제는 무취가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벨로움은 이곳의 혈골귀에 빙의하고 있는 것이다.

“강령술사는 필시 벨로움 님을 노리고 있을 겁니다. 놈이 먼저 나타나기 전까지는 바깥으로 나서지 않음이 유리하실 듯합니다.”

“강령술사의 심복들은 뒤늦게 합류하도록 만들어놨다. 너는 히샤웬과 탈루윈이 아그니샤의 영력을 빼놓을 수 있도록 각별히 신경 써라.”

“원하신다면 두 심복의 육체를 거두셔도 좋습니다. 그 둘은 정신의 절반이 악령이라 언제라도 악령화를 일으킬 수 있으니, 벨로움 님께서는 아그니샤 앞에 다시 윤회하시어 그녀가 더 많은 영력을 쓰도록 직접 유도하실 수 있습니다.”

벨로움에 빙의된 혈골귀는 턱을 좌우로 두어 차례 틀었다.

“기긱…! 기기긱….”

혈골귀의 육체로는 벨로움을 온전하게 담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십자가에 맞아 영혼이 부서지기 전에 윤회하면 또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

“그런데 어찌 이렇게 망설이고 계십니까?”

“영혼의 벽이었다.”

야휘엔은 그 말을 듣고 떠올렸다.

한때 비첸크로이 제국의 편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흑마법사로 악명이 높았던 우토.

그런 우토보다도 강한 흑마법사, 셰르카라는 여자가 벨드샤를 가두었다는 이야기다.

그녀가 전개하는 영혼의 벽은 지금껏 세계 곳곳의 흑마법사들이 보여주었던 것과 격이 달랐다고 하였다. 그게 어찌나 정교한 흑마법이었으면 가라앉은 카프하니드의 육탄공세까지 막아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셰르카가 온 겁니까…? 분명 그 여자의 기척은 없었는데….”

“그게 아니다. 우토가 슈탈룬헤르토툼을 배워서 내게 발동한 것이다. 나를 가두고 아그니샤를 부를 속셈이었겠지.”

영혼의 벽으로 벨로움을 가둔다.

영혼의 벽에 갇힌 벨로움은 육체를 포기하고 악이 되어서도 빠져나갈 수가 없다.

그렇게 갇힌 채로 아그니샤의 마법에 당하게 된다면, 벨로움은 마치 천사에게 공격당한 것처럼 존재 자체가 영구히 소멸하게 되리라.

수십, 수백, 수천 년 뒤에 부활할 가능성이 있는 벨드샤와는 전혀 다른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으리라.

“다행히도 우토 녀석은 주문을 외우는 속도가 느렸다. 나는 그 흑마법의 낌새를 눈치채고 탈출할 수 있었다.”

“…강령술사는 우토와 아그니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군요. 벨로움 님을 가두기 위해.”

“그리하면 나를 확실하게 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이 이곳에 모이게 두어선 안 되겠습니다. 일단 아그니샤는 두 제자에게 맡겨두었으니…”

“그렇다. 야히웬.”

뚜둑.

혈골귀는 문을 턱짓했다.

“너는 가서 우토를 죽여라.”

“예.”

- 안 되지.

기이하게 변조된 목소리가 어두운 공간을 간질인 순간, 야히웬이 뒤로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손이 그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읍…?!!”

투드드드득!!

손, 손목, 팔꿈치, 어깨, 상반신, 하반신, 까마귀를 닮은 방독면까지. 혈관과 혈액으로 된 덩어리가 일어서서 한 사람과 한 사람의 장비를 순식간에 빚어낸 것이다.

“강령술사….”

페인의 왼손.

그 손아귀에 얼굴을 붙잡힌 야히웬은 온몸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벨로움 님…! 어서… 우으으으그그극!!!!”

야히웬의 뒤집힌 안구에 핏대가 섰다. 핏줄이 터져서 흰자위가 새빨갛게 물들더니 피눈물이 되었다. 무지막지한 손아귀에 붙잡혀 강제로 벌어진 턱은 야히웬의 핏물과 내장을 산 채로 뽑아내는 구멍으로 전락하였다.

철퍽…!

철퍼덕…!

“꺼어거거거거걱커어억!!!”

방혈 6계.

저항하기 위해선 6계 이상의 저주 저항 능력이 필요하다.

쿵!

그래서 야히웬은 뭘 해보기도 전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야히웬…. 우토와 대등한 영력을 갖춘 심복이었는데….”

페인의 오른손에 들린 도끼의 문자에서 붉은빛이 났다.

쿠드드드드…!

야히웬의 피와 살이 스스로 움직여 도끼날에 붙었다. 이윽고 피와 살은 붉은 덩어리가 되었으며, 도끼날과 기다란 손잡이를 덩굴처럼 휘감으며 가시와 촉수 따위로 형태를 바꾸었다.

키잉!

붉은빛을 발하는 문자가 있던 자리에서는 까만 눈알들이 자라나, 붉은 동공으로 안광을 발하는 것이다.

곧 목조주택의 어둠이 붉게 밝혀졌다.

벨로움은 물었다.

“……네놈의 안에 있는 ‘배신자’에게 육체를 만들어준 것이냐?”

“그래.”

“네놈의 영혼에 빈자리를 만들고 내 육체의 그릇이 되어준다면, 훗날 실재세계의 전인류를 지배할 수 있는 대리인으로 삼아주마.”

페인은 잠시 침묵했다.

방금 제안에 고민을 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의 안에 공존하는 악령과 짧은 대화를 나눴던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인간도 악령도 아닌 존재가 된 탓에, 인간이었던 시절에 남긴 자신의 의지와 싸우고 있는 걸까.

“웃기지도 않나? 천사라는 것들이 너에게 이런 일을 맡기고 있다는 현실이 말이다. …너는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다. 더러워질 대로 더럽혀져서 못쓰게 된다면 결국 버려질 도구에 불과하지.”

어쨌든 벨로움은 페인의 침묵을 모종의 가능성으로 여겨 다시 한번 그를 구슬리려고 했다.

“반면에 우리는 널 환영한다. 네가 목숨 걸고 싸우게 만들지도 않겠다. 너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종자다.”

어쨌든 페인은 더욱 악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너는 정말로 편해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갈등하는 탓에 괴로웠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봐라. 지금까지 널 괴롭게 만든 사건들이 ‘어느 축’의 존재들에 의해서 벌어진 일들인지.”

어쨌든 페인의 정신이 조금이라도 더 흔들리고 갈등할 수만 있다면 정신의 타락까지 노릴 수도 있기 때문에.

“업보 탓에 지옥으로 떨어질 운명이 걱정이라면 문제없다. 우리 쪽에서 업보는 ‘공적(功績)’이다. 그러니 너는 악마를 이길 정도로 강해지지 않아도 된다.”

“….”

“악마와 ‘친구’가 되면 그만이다.”

“맞아. 그랬었어. 나는…….”

“…?”

“나는 널 죽이러 왔다. 벨로움.”

“이런 개…”

페인은 피와 살점을 머금은 도끼를 휘둘렀다.

그때 바깥에서는 목조주택의 한쪽 벽면이 폭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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