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용의 무덤 (5)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계율의 십자가가 주변의 구울 무리를 학살하고 있다.
‘영력을 이렇게까지 더 써도 된다는 건가?!’
그런 전장의 중심에 놓인 히샤웬과 탈루윈이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탈루윈!”
“그아아아아아!”
상반신 전체에서 새로운 팔들이 자라난 탈루윈은 야수처럼 포효하며 그녀에게 돌진했다.
콰콰쾅!
탈루윈의 앞에 십자가가 연달아 떨어졌다. 하지만 탈루윈은 조금도 멈칫하지 않았다.
방금 떨어진 십자가들이 머리를 노려 제대로 떨어지기만 했어도 자신은 즉사할 수 있었는데, 아그니샤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시 인간은 못 죽이는군!”
탈루윈은 발치에 박힌 작은 십자가들을 뛰어넘어 단숨에 아그니샤의 코앞까지 달려들었다. 이어서 기이하게 뒤틀린 팔들을 그녀에게 뻗었다.
스엉!
그녀는 들고 있던 십자가로 탈루윈의 팔들을 베어냈다. 하지만 탈루윈의 육체는 손상을 입음과 동시에 수복되는 것이었다. 십자가에 베여서 절단된 팔의 일부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새로운 팔이 자라나 그녀를 노렸다.
스억…!
아그니샤는 측면으로 발을 놀리며 그의 새로운 팔들을 연이어 베어냈다. 팔이 자라나면 베어내고 베어지면 또 새로운 팔이 자라났다.
“진심을 다하란 말이다!”
“난 언제나 진심이야.”
그녀는 무표정이다. 제법 격한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는데 호흡에 흐트러짐이 없다.
“네놈들 상대로는 아끼고 있을 뿐이지.”
탈루윈의 상반신에서 날카로운 뼈가 돌출되었다. 하마터면 그 뼈가 아그니샤의 복부를 찌를 뻔했다.
“네년의 얼굴 가죽부터 도려내주마!”
그렇게 자라나고 베어내기를 짧게 반복하던 어느 순간에, 그녀가 팔을 베어내는 속도보다 탈루윈의 새로운 팔이 자라나 그녀를 덮치는 속도가 더 빨라진 것이다. 측면으로 움직이며 팔을 베던 그녀는 종종 뒷걸음질을 치며 탈루윈과 거리를 벌리려고 했고 탈루윈은 끈질기게 달려들어 자신이 얼마나 큰 상처를 입든 그녀를 해치려고 했다.
툭!
아그니샤의 등이 목조주택의 벽에 닿았다. 그녀가 한순간에 뒤로 물러날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탈루윈의 야수 같은 손아귀가 그녀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그녀는 유연하게 목을 꺾으며 회피했다. 그녀의 머리칼에 닿을 듯 말 듯 위로 지나간 손아귀가 목조주택의 벽을 찢어버렸다.
콰지직!
피하는 것까진 좋았지만 뒤가 막힌 상황. 정면으로 탈루윈을 베어내며 돌파하자니, 인간인 탈루윈을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
그래서 그녀가 측면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
“흐흐흐!”
그녀의 움직임을 예측한 탈루윈이 기어코 그녀의 목을 붙잡기 직전이었다.
카가가각…!
탈루윈은 투명한 보호막을 긁었다. 손톱이 들려서 나온 핏물이 투명한 보호막을 따라 주르륵 흘렀다.
“잡았다!”
뚜드드득뚜득뚜득!
탈루윈은 모든 팔을 동원해 그녀의 보호막을 껴안았다. 그녀는 보호막이 전개되는 동안에 십자가를 휘두를 수 없는 모양이었다.
“히샤웬!”
뒤에 있던 히샤웬은 이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히샤웬은 구울의 머리가 달린 장창을 그녀에게 조준했다.
“그 잘난 영력부터 깎아주겠다!”
짧은 순간, 끔찍한 번개가 바닥을 기어갔다.
파지지지지직!
번개는 아그니샤를 보호막째로 붙잡고 있는 탈루윈까지 감전시켰다.
“끄으으으으…! 으흐흐흐…!”
탈루윈은 산 채로 번개에 태워지는 고통 속에서도 뒤틀린 희열을 느꼈다. 그리고 번개는 탈루윈의 몸과 함께 아그니샤의 보호막까지 뜨겁게 지졌다.
파직! 파직!
그녀가 보호막을 해제하면 번개에 맞을 수밖에 없는 구도가 강제된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계속 보호막을 전개한 채 영력을 소모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이대로 끊임없이 번개에 노출된 탈루윈이 죽는다고 하여도 상관없었다. 애당초 두 광인의 목적은 조금이라도 아그니샤가 전력을 다하게 만들어, 그녀의 영력을 최대한으로 깎아내는 것이었으니.
와중에도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는 구울 무리에게 계율의 십자가가 떨어지고 있다.
그녀는 아까부터 분명 적잖은 영력을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히샤웬은 그녀를 도발했다.
“여전사! 뭔가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하지 않겠나?!”
아그니샤가 가진 마법을 하나라도 더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찬가(讚歌).’
퍼엉!
그녀는 보호막 안에서 십자가를 휘둘러 강렬한 섬광을 터뜨렸다. 코앞에서 섬광을 마주친 탈루윈은 실명하였고 그 뒤에 있는 히샤웬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히샤웬은 섬광이 꺼진 직후에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크하아아악!”
탈루윈이 한쪽 다리를 잃고 쓰러졌다. 물론 그는 한쪽 다리를 잃고 실명하였어도 금방 수복할 테니 문제가 없다. 그런데 아그니샤가 탈루윈을 등 진 채 이쪽으로 돌진해오고 있는 것이다.
그때 히샤웬은 희열감을 표출했다.
“그래…! 와라…!”
파지직! 파지직!
히샤웬은 도망치지 않고 그녀를 향해 정면으로 내달렸다. 그녀 사이에 몇 걸음을 남겨둔 채 도약하여 번개를 머금은 창을 앞으로 내질렀다.
그때 아그니샤도 십자가를 내질렀다.
퍼엉!
다시 한번 섬광이 터졌다. 눈이 타버린 히샤웬은 어둠 속에서 창을 내질렀고, 아그니샤는 눈부신 섬광 속에서 십자가를 내질렀다.
카각…
그녀는 내지른 십자가를 측면으로 움직여 그의 창을 쳐냈다.
“하아악…!”
퍼어억!
그러자 히샤웬의 상반신이 빨갛게 터졌다.
그의 울긋불긋한 핏줄이 모두 터지면서 더러운 혈액이 그녀를 덮쳤다.
“…!”
타앗!
그녀는 내지르던 십자가를 빼내고 다시 보호막을 전개하였다. 그렇게 공중에서 한 합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지면에 착지한 순간이었다.
“탈루위이이이인!!!”
“끄아아아아아아아!!!”
쿵쿵쿵쿵!
탈루윈이 뛰어오고 있다. 그의 이마, 코, 턱, 목, 가슴, 복부까지 좌우로 갈라졌다. 좌우로 갈라진 살점 사이에 폭포처럼 흐르는 혈액, 그리고 혈액을 뚫고서 돌출된 하얀 뼈다귀들이 가시처럼 정면을 향하고서 촉수인지 혀인지 모를 것을 날름대고 있다.
퍼퍼퍽!
하늘에서 계율의 십자가가 떨어져 탈루윈의 앞길을 막으려고 했지만 역시나 발치에 떨어질 뿐이었다.
푸욱! 푸욱!
탈루윈은 마름쇠처럼 떨어진 작은 십자가들을 대놓고 짓밟으며 뛰었다. 십자가가 발바닥 가죽을 뚫고 들어와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파지직!
히샤웬은 질끈 감은 눈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아그니샤에게 번개를 입히고 있다. 이에 대응하는 그녀의 보호막은 결코 깨지지 않을 것처럼 단단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래서 아그니샤는 갈등했다.
‘계율의 십자가를…’
T3T
지금 하늘에 전개된 거대한 마법진으로부터 쏟아지는 십자가의 폭격.
그것을 앞뒤의 두 광인에게 떨어뜨리면 큰 영력의 소모도 없이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다.
하지만 이 힘으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네이트에게서 받은 고결한 권리로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
죽이고 싶지만.
‘아니야. 차라리…’
천노(天怒).
손에 들고 있는 십자가를 휘두르거나 조준한다는 ‘주문’의 행위 없이 보호막의 영역 바깥에서, 하늘보다 조금 낮은 곳에서 직격타로 내리 꽂히는 강력한 마법이 있다.
존재가 아닌 위치를 특정하여 발동하는 마법이기 때문에, 적당한 곳에 떨어뜨리면 두 광인을 죽이지 않고 기절시키거나 불구로 만드는 일까지 가능할 것이다. 단 한 번의 발동으로, 직접 상대방을 맞추지 않고도 말이다.
물론 그만큼 강력한 마법이기에 상당한 영력을 소모하게 되겠지만, 이제는 영력의 가치보다 시간의 가치가 더 높을 것이다.
이 순간에도 페인과 벨로움은 싸우고 있으니. 여기서 더는 영력과 시간을 빼앗길 수 없다.
치직! 치직!
점차 힘을 잃어가는 보호막, 그녀의 뒤로 흉악한 뼈를 돌출시킨 탈루윈이 달려들었다.
‘천…’
그때였다.
스어억!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아그니샤와 탈루윈 사이를 빠르게 지나갔다. 그런 직후에 탈루윈의 머리가 핑그르르 돌며 공중에 떠버렸다.
샤아아!
점차 힘을 잃어가는 보호막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두운 힘으로 이루어진 벽이 마치 새로운 보호막처럼 그녀를 감싼 것이다.
쿠웅!
머리를 잃은 탈루윈의 육체가 까만 보호막에 충돌하고는 튕겨져 나갔다.
“아그니샤 님!”
“우토 씨?”
좀 전의 까만 보호막은 영혼의 벽이었던 것이다.
“더는 십자가를 떨어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까지 끊임없이 떨어진 계율의 십자가 덕분에 역병 의사들의 전선이 이곳까지 도달한 것이다.
이제 아군들은 큰 무리 없이 구울 무리를 뚫고서 이곳, 적진의 한복판까지 합류하였다.
“대규모 마법은 벨로움에게 써주십시오.”
어느새 매가 아그니샤의 곁에 서있었다.
“광인들은 맡겨주십시오. 아그니샤, 그대는 어서 저 앞으로 가야만 합니다.”
“벨로움의 직속으로 키워진 주술사들이에요. 생각보다 훨씬 강한 상대라고요.”
그녀의 뒤로 독수리까지 합류했다.
“우리도 강합니다.”
눈이 먼 히샤웬은 타액을 늘어뜨리며 분노했다. 아그니샤의 영력을 크게 깎으며 그녀가 아껴둔 마법까지 볼 수 있던 참이었는데 말이다.
“이런 새대가리 새끼들이…!”
어차피 실명한 탓에 앞은 보이지도 않는다. 탈루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증오스러운 적들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최대한의 주술을 발동할 뿐이다.
쿠르릉…! 쿠구궁…!
하늘에 펼쳐진 계율의 마법진이 먹구름에 뒤덮였다. 흉포한 바람이 몰아치고 빗방울 하나도 없이 두려운 뇌성이 울린다.
마법진을 가린 먹구름이 무언가를 형상화한 듯 꿈틀거리는 거대한 촉수 같았다. 그리고 그런 하늘의 날씨를 조종하고 있는 히샤웬은 분노와 광기에 집어삼켜져 인간의 것이 아닌 목소리를 냈다.
“울려 퍼져라!!”
그때 독수리가 말했다.
“모두 숙이십시오.”
콰르릉!!!
아그니샤와 역병 교수들이 있는 위치로 번개가 떨어졌다.
모두가 자세를 낮춘 순간, 오로지 독수리만이 하늘 높이 몽둥이를 들고 서있었다.
‘무장한 철인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는 법.’
철인을 3계까지 강화했을 때 개방할 수 있는 주술.
‘철의 심장.’
아군 없이 홀로 싸우는 철인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지만, 최전선에서 아군들에게 등을 보이며 싸우는 자에겐 강인함과 희생정신의 상징이었다.
상대의 강력한 마법이나 주술을 강제로 자신에게 유도하는 것이었으니.
파지지지지직!!!
직후, 아그니샤와 주변 전체를 노리던 거대한 번개가 독수리의 몽둥이에 빨려가듯 떨어졌다.
귓가가 먹먹해지는 폭음, 거대한 번개의 파괴 아래에 오로지 독수리만이 놓였다. 그의 전신으로 살인적인 번개가 흐르고 주변의 흙과 자갈 따위가 압도적인 영력을 견뎌내지 못해 사방팔방으로 뛰쳐나가거나 두둥실 떠올랐다.
계속되는 번개 속에 독수리의 몽둥이, 방독면, 갑옷이 새빨갛게 가열되었고 그의 갑옷 틈새에서 핏물이 흘러나와 까맣게 타버렸다.
치이이……
그리고 번개가 멈췄을 때, 독수리는 서있었다.
그는 머리를 한번 흔들더니 변함없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제.”
먹구름이 드리운 하늘에 계율의 마법진은 없다. 히샤웬은 빨갛게 터져버린 눈을 부릅뜬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 그아아아아!
더는 계율의 십자가가 떨어지지 않으니 구울 무리가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다.
물론 역병 의사와 거미 악귀들도 뒤에서 몰려오고 있다.
매는 아그니샤를 재촉했다.
“어서 가십시오!”
아그니샤는 들고 있던 십자가를 조금은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침을 한번 삼킨 뒤 역병 교수들을 돌아보았다.
“미안해요.”
그녀는 복잡한 심경을 그 한마디로 내려놓고 뛰기 시작한 것이다.
“그그가각…!”
구울 무리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샤아아!
우토의 그림자가 구울 무리 사이에서 솟아났다.
“드라쉬르가 닿는 곳까지는 붙여드리겠습니다!”
우토의 그림자는 구울 무리의 몸을 산산조각 냈다. 그렇게 아그니샤를 위한 길이 열렸다.
하지만 이 전장을 지나쳐 벨로움을 향해 뛰어가는 여전사를 그냥 내버려 둘 히샤웬이 아니었다.
“탈루윈! 처자빠져있지 말고 일어나라!!”
“퀘에에에엑!!!!”
머리 없이 목구멍만 드러내고 있는 탈루윈이 거칠게 일어서며 팔들을 휘둘렀다. 그 뒤틀린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괴력은 독수리의 것과 맞먹었다.
퍼억!
독수리는 잠시 나가떨어졌고 매는 재빠르게 회피했다.
독기가 잔뜩 오른 히샤웬은 바락바락 소리쳤다.
“놈들을 잡아놔라!!!”
그러면서 히샤웬은 서둘러 몸을 틀었다. 역병 교수들은 탈루윈에게 맡기고 자신은 아그니샤의 뒤를 쫓으려는 것이다.
“빌어먹을 년!”
아그니샤는 아직 이 전장을 빠져나가는 중이다.
따라서 히샤웬은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주술을 다시 한번 발동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의 등에 창을 조준했다.
“…?”
앞이 보이지 않지만 창에서 느껴지는 묘한 무게감과 알 수 없는 시선.
그의 창에 달려있던 구울의 머리가 다른 것으로 바뀌어있던 것이다.
“너도 우리도…. 저쪽에 가선 안 돼.”
언제부터였을까.
히샤웬의 창에는 구울의 썩어가는 머리 대신 올빼미의 머리가 달려있었다.
* * *
개미지옥이라는 주술로써 형성된 저지대. 혹은 구덩이.
그 속에서 피와 살을 가지게 된 어린 혈골귀들이 형언하기 어렵게 뒤틀린 육체로 페인에게 들러붙어있다. 지면에 듬성듬성 뚫린 구멍으로부터 팔팔 끓는 물이 분출되어 페인에게 쏟아지고 있다.
페인은 도끼를 놓쳤다. 무릎이 무너져서 두 손을 땅에 짚고 있다.
벨로움은 그의 목을 촉수로 휘감았다.
“그리고 네놈이 지금 내게 저항하지 않고 있다는 건…. 아까부터 흔들렸다는 말이지. 그렇지 않나?”
콰드득…!
벨로움은 전력을 다하여 그의 목을 조르고 있지만 역시나 단순한 힘으로는 부러뜨릴 수가 없는 육체였다. 그에게 달라붙은 어린 혈골귀들이 그를 할퀴고 깨물고 조이고 있지만 어림도 없다.
그리고 지금도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십자가의 폭격 탓에 역병 의사들의 전선은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어이, 배신자.”
“….”
“그 영혼에 빌붙은 네놈 말이다.”
쩌저억!
눈만 있고 안면은 없는, 달걀 같은 머리에서 악마의 뿔이 자라났다. 이 전장에 몰아치는 악을, 페인에게서 느껴지는 악의 기운을 흡수하여 한층 더 완벽한 육체를 빚어낸 것이다.
그리고서 벨로움은 녀석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닥쳐, 닥쳐, 닥쳐, 닥쳐, 닥쳐, 닥쳐….」
“네놈도 흔들리고 있었군.”
「이건 내가 아니, 우리가 아니야. 우리는…. 그런데 악마랑 친구가…. 아니, 아니야. 미안해. 그러지 않겠다고 했는데. 너를 물들이지 않겠다고 했는데….」
“지금이라면 할 수 있다. 그 강력한 육체를 네 손에 넣고 진짜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진짜? 흐흐흐…! 그러면 내가…. 안 돼…! 페인이랑 약속했다고…. 나는 그럴 수 없어…. 우린…. 우리 사이는…. 미안해. 내가 또 너를…. 하지만 저번에 낙인의 돌을 쓴 뒤부터 자꾸 이상해져서…. 그래도 나는 어쩔 수 없는 악령인걸. 아니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페인.」
순간, 그의 목을 옥죄던 촉수가 멈칫했다.
“…페인이었군. 네놈의 이름이.”
벨로움의 등에서 더 많은 촉수가 뻗어 나왔다. 그리고 허공에서 생성된 검은 연기가 각 촉수를 빙글빙글 휘감듯 돌고 있다.
“고맙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의 마지막에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어주었구나.”
「싫어, 싫어, 싫어, 돌아가기 싫어….」
하늘에 전개되었던 성스러운 마법진이 먹구름에 가려졌다. 사악한 구울들에게 떨어지던 계율의 십자가가 사라지고, 카프하니드의 뇌성처럼 두려운 소리가 세상을 울렸다.
“아무리 네놈이라도 ‘핏빛세계’에 떨어져서 살아남을 수는 없을 것이다.”
「도와줘…. 여기 좀 도와줘….」
악을 두른 촉수들이 스멀스멀 페인에게 뻗어갔다.
“우리의 세계가 네놈을 집어삼킬 것이다.”
「제발…! 벗어나게 해줘…!」
절대적으로 사악한 존재. 악령.
그와 대비되는 절대선의 존재가 녀석의 간절한 외침에 답한 걸까.
아니면 다른 이들의 간절함과 희생으로 완성된 극적인 순간일까.
벨로움은 한탄했다.
“어째서 선이 악을 돕는 것이냐. 아그니샤….”
직후, 건물 크기의 십자가가 벨로움의 머리 위에 천벌처럼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