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16화 (116/181)

23. 선과 악 (1)

하늘보다 조금 아래, 신성한 마법진으로부터 소환되어 벨로움의 머리 위에 떨어진 건물 크기의 십자가.

쩌어엉!!!

끓는 물을 증발시키고, 자갈과 돌을 빨갛게 가열하고, 페인에게 들러붙은 혈골귀들을 가루로 만들어버리며, 주변 공기까지 폭발적으로 밀어내는 섬광과 충격이 개미지옥의 구덩이를 하얗게 집어삼켰다.

그 폭력적인 찬란함 속에서 벨로움의 육체는 소멸하였고 아그니샤는 페인의 곁에 붙어 보호막을 전개하였다.

“정신 차려요. 강령술사.”

페인의 방독면이 천천히 아그니샤에게 돌아갔다. 검은 렌즈 너머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훑고 있는 것 같다.

그녀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걸까.

“아그니샤…?”

“벨로움의 사악한 기운이 더 짙어지고 있어요.”

페인은 그 말을 듣고서 정신을 차렸다.

“죽지 않았을 거예요. 도망쳐서 윤회할 영력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

“놈이 내 이름을 알아차렸어.”

“그걸로 저주를 걸던가요?”

“핏빛세계.”

페인은 땅에 떨어진 도끼를 주워들었다.

“놈은 지옥을 핏빛세계라고 불렀어. 날 그곳으로 보내버리려 했어.”

“당신, 상태가 안 좋아 보여요.”

천노로 떨어진 거대한 십자가가 은빛 가루가 되어 스르르 무너졌다.

“낙인의 돌을 흡수한 뒤로 좀 이상해졌어. 나도 내 안의 악령도 지옥과의 연결성이 강해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어서, 사악한 속삭임을 거부하기가 점점 어려워져.”

“벨로움이 당신의 약점을 잡은 거군요.”

“놈은 곧 윤회해서 새로운 육체를 가지고 돌아올 거야. …이번엔 ‘계율’이나 ‘천노’의 십자가도 통하지 않게 되겠지.”

“계율은 꺼졌어요. 다시 쓸 일이 없을 거예요.”

“네 영력은 얼마나 남았어?”

“벨로움을 소멸시킬 수 있을 정도는 남았어요. 당신은요?”

“마찬가지야.”

페인과 아그니샤는 개미지옥에서 빠져나왔다. 구울 무리와 역병 의사들이 싸우고 있는 전장의 소리가 제법 가까이에서 들려오고 있다.

둘은 목조주택 사이를 빠르게 뛰었다. 페인도 아그니샤도 악마의 하수인이 풍기고 다니는 사악한 기운은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무한히 윤회하는 구울 무리는 아군에게 맡긴다.

둘은 벨로움을 이 세계에서 지워버리고 용의 부활을 막아야만 한다.

“아그니샤. 전부터 궁금한 게 있어.”

“말씀하세요.”

“넌 언제쯤이면 화신이 될 수 있는 거야?”

그녀는 네이트의 축복을 받았지만 네이트가 직접 빙의할 수 있는 화신은 아니었다.

만약 아그니샤가 진짜로 네이트의 화신이었다면, 지금 이 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전투는 네이트가 그녀의 몸에 빙의하여 마법 한 번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쪽이 사력을 다하여 상대하고 있는 벨로움 또한 대천사 네이트 앞에서는 한낱 조무래기에 불과할 것이다.

“화신이 되기 위해선 조건이 필요해요.”

“그 조건이 뭔지는 내게 알려줄 수 없는 거고?”

“저도 모르거든요. 제가 화신이 되기 위해 무엇을 이뤄야 하고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지는 네이트 님께서도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어요.”

“아쉽네.”

“단지 때를 기다리라고 하셨죠.”

아군들은 목조주택이 있는 곳까지 들어와서 싸우고 있다. 사악한 기운과 함께 수증기를 퍼뜨리고 있는 화산호수로부터 구울들이 잇달아 전장에 합류하고 있다.

둘은 구울 무리의 동선을 피하여 더욱 북서쪽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저는 그분의 말씀을 따를 뿐이에요.”

“축복은 언제 받은 건데?”

“저는 장신(長身)의 성기사 견습생이었어요. 큰 키와 체구 덕분에 금방 교단의 눈에 띌 수 있었죠. 그다음부터는…. 신관들이 제게 이것저것 시험하더라고요. 마법에 적성이 있는지, 인품이 어떤지, 기사로서 실력은 어떻고 신도로서 신앙심은 또 어떤지.”

“그 모든 시험을 통과하고서 축복을 받은 거야?”

“비슷해요. 교회에서 신앙심을 시험받고 있는데 예고도 없이 창문을 뚫고서 빛이 들어왔어요. 그날부터 네이트 님을 상징하는 십자가가 저를 따라다니기 시작했죠.”

페인은 아그니샤 옆에서 나란히 뛰다가 그녀의 표정을 곁눈질했다.

평소처럼 졸린 눈, 무덤덤한 표정이지만 눈썹과 미간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축복을 받은 뒤에 네이트 님의 목소리가 한 번도 들리지 않았어요. 한 번쯤은 들리기를 희망했는데 말이죠. 그래서 뭔가 사악한 것이…. 악의 농도를 높이는 무언가가 우리 교단이나 왕국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처음으로 의심했어요.”

타락한 승천자.

그녀가 타락한 승천자의 존재를 의심하게 된 시발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저는 그게 시작이었어요. 악령인지 인간인지 확신이 서질 않는 그 인간을, 의심스러운 그자를 상대로 제가 조금만 더 빠르게 움직일 수만 있었더라면…”

페인과 리인이 그런 일을 겪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그렇게 말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페인이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너도 똑같네.”

“네?”

“가만 보면 왕국에는 그 새끼와 관련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 같다고.”

“…네. 그렇겠죠.”

만약 페인이 잿빛세계에 떨어져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었다면, 훗날 아그니샤는 교단 내에 파벌을 만들어 새로운 승천자가 준비하고 그 시기에 타락한 승천자를 고발하고서 깔끔하게 교단을 정화했으리라.

승천자의 공백으로 인한 전쟁 발발도 없었을 것이고 그로 인하여 이 대륙에 악이 퍼지거나 흑사병이 퍼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벨드샤가 나타날 일도, 카프하니드가 깨어날 일도, 벨로움이 나타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카프하니드가 없었다면 디아나의 민생이 크게 망가질 일도 없었을 테니 디아나의 대부, 대장군, 대모 모두가 살아있었을 것이다.

「맞지.」

「네가 아니라 아그니샤가 했다면.」

그래서 페인은 듣기 싫은 것이다.

아그니샤의 미안한 감정을.

“벨로움은 더 북서쪽으로 이동했어요.”

“좀 전보다 존재감이 뚜렷해졌어.”

“더 강한 육체를 가지게 되었겠죠. 기습할까요?”

“우리 위치를 알고 있어. 기습은 통하지 않아.”

“단번에 퍼부을까요? 제 마법과 당신의 주술.”

“그랬다가 놈을 해치우지 못하면 다음 기회는 없게 될 거야. 우토가 와서 영혼의 벽을 쳐야 윤회도 막을 수 있을 테고.”

“영혼의 벽을 한번 경험했잖아요. 또 당하진 않겠죠.”

“…그랬어?”

“협곡 위로 영혼의 벽이 올라온 게 잠깐 보였거든요. 그때 역병 교수들이 벨로움을 잘 묶어놨는데 하필이면 제가 다른 악령을 상대하고 있느라….”

「이러면 변수로 준비해둔 올빼미도 안 통하잖아.」

“…역병 교수들은 벨로움과의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야.”

괜히 끼어들었다가 귀중한 인재들의 목숨만 잃게 될 수도 있다.

“어차피 지금 역병 교수들은 두 광인을 상대하느라 여유가 없어요. 벨로움을 저희 둘이서 상대해야 한다는 건 그대로죠.”

* * *

“너도 우리도…. 저쪽에 가선 안 돼.”

히샤웬의 창에는 구울의 썩어가는 머리 대신 올빼미의 머리가 달려있었다.

“으아아아아아!!!”

히샤웬은 온 사방으로 번개를 방출했다. 자기 자신조차 감전시키는 번개의 폭발적인 타격이었다. 그때 그의 창에 달려있던 올빼미의 머리가 사라지고 본래 있었던 구울의 머리로 돌아왔다.

시끄러운 뇌성 속에서 우토는 긴장한 얼굴로 주문을 외웠다.

“슈탈룬헤르토툼, 드라쉬아.”

어디서부터 좁혀왔는지 모를 영혼의 벽이 히샤웬, 올빼미, 우토, 우토의 그림자를 한 공간에 가뒀다. 히샤웬이 온 사방으로 방출하던 번개는 영혼의 벽을 통과하지 못했다.

올빼미는 땅을 헤엄치듯 이리저리 빠르게 움직였다.

파직파직파직!

히샤웬의 번개가 올빼미를 노려서 여러 차례 떨어졌지만 그녀는 위험할 때마다 땅밑으로 숨었다가 다시 빠져나오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히샤웬의 번개가 올빼미를 노리는 사이에 우토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흐어어어…!!”

녀석은 영혼의 벽으로부터 어두운 무언가를 끌어왔다. 연기보다는 그림자, 그림자보다는 허공에 그려지는 음영처럼 보이는 것이 녀석의 오른팔을 비대하게 만들었다.

그때 우토가 앞으로 뛰었다. 그의 몸으로부터 분리된 그림자도 함께 뛰었다.

‘히샤웬. 저놈의 육체는 강인하지 않다.’

‘드라쉬르로 한 번만 할퀼 수 있으면 된다.’

우토가 오른팔을 크게 휘두르자 그의 그림자도 비대한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스어어!

그림자의 오른팔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지나갔다.

쯔저저저적!

녀석의 오른팔을 따라서 허공에 음영이 새겨졌다. 올빼미를 감전시켜 어떻게든 멈추려고 했던 히샤웬은 엄습해오는 서늘함을 살갗으로 느꼈다.

“씨발!!”

히샤웬은 앞이 보이지 않아도 반응할 수 있었다. 번개는 그의 창끝을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에, 재빨리 창을 돌려서 올빼미에게 쏘아대던 번개를 우토의 그림자에게 끌어가듯 날리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의 히샤웬도, 탈루윈도, 벨로움도 모르고 있는 올빼미의 능력이 있었으니.

“환상통이야.”

우토의 눈에는 히샤웬이 한순간 움직임을 멈춘 것처럼 보였다. 분명 올빼미의 능력에 걸려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학대를 당했으리라.

하지만 그건 정말로 한순간의 멈춤에 그치고 말았다.

히샤웬이 다시 움직인 것이다.

“육체의 고통은…!”

파지직!

그를 으깨 죽이려던 우토의 그림자는 번개에 맞아서 경직되고 말았다. 같은 순간에 히샤웬 역시도 심하게 감전되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희열이다…!”

그는 올빼미의 능력에 잠식당하기 전, 현실의 몸에 고통을 가하여 악몽으로부터 탈출한 것이다.

뚜득! 뚜득!

그리고 히샤웬의 피투성이 상반신에서 번개에 감전된 혈관들이 촉수처럼 꿈틀댔다.

우토는 외쳤다.

“뒤로 빠져라! 놈이 악령화를 일으키고 있다!”

히샤웬은 창을 높이 들어 올렸다.

영혼의 벽으로 둘러싸인 하늘을 보면서 춤을 추듯 몸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면서 입가가 찢어지도록 웃어댔다.

“흐흐흐흐흐흐흐흐!!!”

히샤웬의 앞에 서있던 올빼미는 다시 땅밑으로 숨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이었다.

콰르릉…!!!

…퍼억!

우토의 앞에 올빼미가 떨어졌다.

뜨거운 번개에 직격이라도 당한 듯, 흙바닥에 쓰러진 채 온몸에서 탄내 가득한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다.

우토는 허둥지둥 무릎을 굽혀서 그녀를 흔들었다.

“올빼미! 이, 어떻게 이런 일이…!”

“아파….”

올빼미는 땅밑으로 숨으려 했다.

그런데 사실, 올빼미는 땅밑으로 숨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보는 이들에게 그렇게 보이도록 인식을 조작하는 것이었다.

“이 고립된 공간에서 번개로 지지지 않은 땅이 없다! 그런데도 저 괴이한 년은 멀쩡했지!”

히샤웬은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올빼미! 저년은 땅에 서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하늘을 부양하고 있던 것이다!”

땅밑을 헤엄치는 척.

이리저리 번개를 피하는 척.

그렇게 히샤웬의 영력과 집중력만 빼앗아갔다. 그러다 결정적인 순간에 환상통이라는 능력을 걸어왔다. 그 순간까지도 히샤웬의 앞에 있는 척하면서 말이다.

전부 보는 이들의 머릿속에서 조작된 ‘환상’이었다.

그녀의 진짜 몸은 하늘에 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온 땅을 지져도 멀쩡했던 것이지!”

파직…!

영혼의 벽으로 사방이 막혀있는 공간.

히샤웬은 번개로 인해 손상된 몸을 이끌고서 우토와 올빼미를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이 순간에도 그의 창에서 방출되는 번개가 우토의 그림자를 경직시키고 있다.

우토는 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놈들은 저희가 이곳에 들어왔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겁니다.

- 그리고 만약 도망칠 생각이 없다면, 바람술사 야샤둡이 그랬던 것처럼 목숨까지 내던지며 싸울 겁니다.

‘저렇게까지….’

우토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때 올빼미의 힘없는 목소리가 아래에서 들려왔다.

“스승님…. 고작 광인 하나죠.”

올빼미는 비척대며 일어섰다.

“고작, 고작 광인 하나만 잡고 당분간 쉴게요.”

그 순간에 우토는 올빼미에 대한 편견을 버리게 되었다.

줄곧 조그맣게 보였던 그녀의 작은 등이 지금은 커다랗게 느껴지는 것이다. 저 작은 등으로부터 독수리나 매에게서 느꼈던 용맹함과 비장함까지도 보이는 듯하다.

“셰르카 님께서 가르쳐주셨어요….”

“뭘 하려고?!”

“제가 가진 소중한 기억을 바쳐서…. 상대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타다다다닷!

히샤웬이 무서운 속도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번개로 인하여 손상된 육체를 기어코 악령화로 극복한 것이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강령술사의 심복을 죽이겠다는 의지였다.

“흐흐흐하하하아아아!! 벨로움 님! 벨로움 님! 당신의 충실한 종을 봐주십시오!!! 내가 드디어 악령이 되었습니다…!”

곧이어 히샤웬이 창을 내질렀다. 번개를 두르고 있는 창끝이 올빼미의 코앞으로 닥쳐왔다.

스스스스스스!

그때 히샤웬의 양옆에서 올빼미의 방독면을 쓰고 있는, 인간처럼 사지가 달린 존재 둘이 흙바닥으로부터 솟아났다.

터억! 터억!

두 존재가 히샤웬의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올빼미는 주문을 외웠다.

‘…효시경중(梟示警衆).’

솟아난 두 존재. 그중에 하나는 사신이 들고 다닐 법한 커다란 낫을 휘둘러 히샤웬의 목을 베어버렸다. 몸으로부터 분리된 머리가 핑그르르 돌며 허공에 띄워지자, 쇠꼬챙이를 들고 있는 다른 한 존재가 녀석의 머리를 붙잡았다.

촤아아아악!

달리던 방향 그대로 처절하게 쓰러진 몸.

푸욱!

그 위에는 히샤웬의 머리가 쇠꼬챙이에 끼워진 채 전시되고 만 것이다.

“…! …!”

몸을 잃어버린 히샤웬은 고통에 찬 비명을, 혹은 희열에 찬 포효를, 혹은 분노에 찬 저주를 소리 없이 외쳤을지도 모른다.

히샤웬은 그렇게 입만 뻐끔거리다가 차가운 쇠꼬챙이 아래로 뜨거운 피를 쏟아냈다.

그러다가 이내 카프하니드의 뇌성이 그치듯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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