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17화 (117/181)

23. 선과 악 (2)

히샤웬, 올빼미, 우토는 영혼의 벽으로 둥글게 막힌 공간에서 싸우고 있다. 그리고 영혼의 벽 바깥에는 탈루윈, 매, 독수리가 남겨져 싸우게 되었다.

독수리는 탈루윈의 몸뚱이를 보면서 매에게 물었다.

“어떻게 사람이 머리를 잃고도 살아있지?”

“더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오.”

“퀘에에엑…! 퀘게게겍!”

머리 없이 목구멍만 드러내고 있는 탈루윈.

녀석은 목구멍으로부터 괴성과 피를 토해내며 바로 앞에 있는 독수리에게 달려들었다. 그 뒤틀린 몰골이 마치 자아가 없는 고깃덩이가 달려드는 것만 같다.

“이번에도 보조를 부탁하겠다.”

“알겠소.”

탈루윈은 달려오던 도중에 목구멍을 독수리에게 조준했다. 그러자 검붉은 혈액이 사출되었다.

푸화아아악!

날아드는 혈액이 매의 눈에는 아주 느리게 보였을 것이며, 독수리의 눈에는 아주 빠르게 보였으리라.

매는 알아서 몸을 피할 수 있지만 독수리는 그 정도로 민첩하지 않았다.

‘재결합.’

그래서 독수리는 자기 앞에 흙으로 된 벽을 올렸다.

치이이이익…!

검붉은 혈액은 흙벽을 따라 흘러내리면서 뜨거운 용암이라도 부은 것처럼 흙을 녹여버렸다. 그리고 녹아내린 흙벽의 틈새로 탈루윈이 두 팔을 뻗었다.

푸허억!

손가락의 뼈마디가 제각각인 손아귀는 흙벽의 틈새를 뚫으면서 독수리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독수리는 연이어 재결합을 발동하였고 탈루윈은 수복되는 흙벽에 두 팔이 묶이는가 싶었다.

“퀘에에에엑!”

치지지직…!

탈루윈은 다시 한번 검붉은 혈액을 토해냈다. 독수리가 재결합으로 흙벽을 고치는 속도보다 녀석의 혈액이 흙벽을 녹이는 속도가 더 빨랐다.

퍼석!

이윽고 탈루윈은 흙벽을 몸으로 부수면서 독수리를 덮치려고 했다. 그때 독수리는 몸을 비스듬히 틀면서 힘껏 몽둥이를 내리쳤고, 녀석이 앞으로 뻗은 두 팔의 관절이 가시에 짓이겨져 너덜너덜하게 떨어지고 말았다.

스걱! 스걱!

이어지는 매의 급습이었다. 순간적으로 두 팔을 못쓰게 된 탈루윈의 발목을 노려서 두 힘줄을 잘라버린 것이다.

…쿵!

탈루윈의 자세가 무너졌다. 매는 재빠르게 몸을 회전하며 오른손에 쥔 칼을 역수로 들었다. 그대로 녀석의 등을 사선으로 베어버리고 몸의 회전에 따라서 이어지는 왼손의 칼이 녀석의 등에서 드러난 심장을 깊숙이 베었다. 그리고 같은 순간에 독수리도 몽둥이를 역수로 들어 녀석의 가슴 정중앙을 때렸다. 두 역병 교수의 협공으로 탈루윈의 심장이 앞뒤로 터져버린 것이다.

푸화악! 푸화악!

심장이 터지면서 가슴의 앞뒤로 검붉은 혈액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독수리와 매는 재빠르게 거리를 벌렸고 흙바닥에 쏟아진 혈액은 흙 알갱이를 섬뜩하게 녹이면서 순식간에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때 매는 외쳤다.

“아직 죽지 않았소!”

독수리는 그 말을 듣자마자 다시 탈루윈에게 뛰어서 거리를 좁혔다.

“카아…! 키어어…!”

독수리는 빠르게 뛰다가 무언가에 부딪쳐 멈추고 말았다.

매가 쏜살같이 달려와서 등으로 그를 막아선 것이었다.

“왜 그러지?”

“저 형태….”

독수리는 녀석이 치명상을 입은 틈에 속공하여 몰아붙일 심산이었는데, 매는 말보다 몸을 먼저 움직여 독수리를 막아선 것이다.

“형태?”

매가 엄청나게 경계하고 있다. 위협을 느끼고 있다. 독수리의 속공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독수리는 굳이 매에게 묻기보다는 직접 탈루윈을 관찰했다.

“키에에…!”

탈루윈은 금세 발목의 상처를 수복하고 일어섰다. 그것까진 예상했다. 녀석의 육체는 경이로운 회복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악령이 되면서 더욱 강해졌으니까.

그런데 탈루윈의 목구멍에서 웬 큼지막한 혓바닥 하나가 짧게 돌출된 것이다. 그리고 절단된 목의 둘레를 따라서 제멋대로 자라는 사랑니 같은 네모난 이빨들이 순식간에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 ‘형태’는 녀석이 무언가를 발음할 수 있게 해주었다.

“케르, 켈프흐으으흐으으…!!”

독수리는 매 앞으로 몇 걸음 앞서갔다.

“놈의 육체가 더 변이하기 전에 공격하는 편이 유리하다.”

“지금 공격하면 숨통이 끊어질 것이오.”

“그렇다면 더욱이 망설일 이유가 없겠군.”

“아니, 우리가 말이오.”

“…?”

“우리의 숨통이 끊어질 거란 말이었소. 지금 공격하면.”

매는 포착하고 있었다.

탈루윈의 살갗 밑에 자리했던 난잡한 뼈가 사라지고, 녀석의 피부 위에 보이는 핏줄을 통해 격동하는 혈류의 끈적한 움직임을 말이다.

“놈의 몸이 액화되고 있소. 위험한 피를 폭탄처럼 머금고 있는 것이오. 섣불리 다가갔다간 온몸이 녹아버릴 수도 있소.”

“아까부터 방혈을 걸었는데 전혀 통하지 않는다. 놈의 피가 특수하거나, 놈에게 3계 이상의 저주 저항 능력이 있는 것이다.”

거기까지 말을 주고받은 독수리와 매는 각자가 쥐고 있는 무기를 한 번씩 확인하였다.

매의 넓적한 칼은 검기로 칼날을 연장할 수 있지만 원거리에서 타격할 수 있는 수단이 되진 않는다.

독수리의 가시 박힌 몽둥이도 순수하게 근접전을 위한 무기였다.

들고 있는 무기를 던지자니 너무 불확실하고 뒤가 없다.

“흙벽으로 가둘 수는 없소.”

“스승님의 흑마법이라면 간단히 해치울 수 있다.”

“저 영혼의 벽 안에서 전투가 언제 끝날지는 모르는 일이오.”

그때 매와 독수리 사이에는 각자 다른 생각이 교차하였다.

독수리는 어서 탈루윈을 해치우고 싶었다.

‘매는 최대한 혈액을 피하고, 나는 거듭 흙벽을 세우면서 싸우면, 둘이서 부상을 입더라도 놈을 해치울 수는 있다. …우리가 여기서 놈을 해치워야 다른 전장을 도우며 아군 전체의 힘으로 벨로움을 압박할 수 있다.’

그런데 매는 결정을 미루고 싶었다.

‘…부상을 입어도 치료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 무엇보다 부상을 감수했는데 해치우지 못한다면 죽음뿐이다. 우리 둘이라는 전력이 빠지게 된다면 광인이나 특수한 악령이 또 출몰했을 때 아군 전체가 위험해질 거다.’

다른 생각을 품은 두 시선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리고 와중에 탈루윈의 육체는 변이를 거의 끝마친 것 같다. 목구멍의 둘레를 따라 자라난 이빨을 제외하고는 온몸의 뼈가 사라진 모양인지, 흐물흐물하게 쓰러져서 흙바닥에 바짝 붙은 것이다.

그래서 독수리는 제안한다.

“놈의 피는 내가 받아내겠다. 너는 기회를 노리다가 최대한 칼날을 연장시켜 결정타를 넣어라.”

“죽음을 각오하는 용맹함은 인정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오. 이런 전황에서 저런 적을 상대로 그대의 목숨을 허비할 수는 없소.”

“나는 전체의 전력을 허비할 수가 없다. 우리의 힘이 다른 전장에 영향력을 미쳐야 아군의 전선이 더욱 확장되는 것이다.”

“그것이 그대의 목숨을 교환하여 얻을 수 있는 수라면 성급하고 아까운 판단이오.”

“역병 의사, 악귀, 그리고 우리 모두가 강령술사님께서 싸우는 곳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대규모 마법으로 그분을 지원할 수 있게 된다.”

“1분 1초의 움직임으로 전황이 뒤바뀔 수 있다는 전제는 이해하오. 하지만 불확실한 1분 1초의 가능성을 위해 그대의 목숨을 높은 확률로 교환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이오.”

“내 목숨 하나를 버려서 강령술사님의 승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렇게 우리의 세계를 벨로움으로부터 지켜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당장 영혼의 벽이 해제되고 스승님께서 나오신다면 저런 악령 따위 문제가 되지 않소. 목숨을 버릴 가치가 있는 상대도 아니고, 지금 당장 그래야만 하는 급박한 상황도 아니라는 말이오.”

“나는 분명히 말했다. 1분 1초가 아깝다고.”

독수리는 매의 만류를 무시하고 탈루윈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케… 케켁코오륵…! 쿠르륵….”

육체가 흐물흐물하게 무너진 탈루윈은 검붉은 혈액을 토해내서 자신의 피부에 두르고 있었다. 그 혈액이 앞서 사출되었던 것과 달리 굉장히 끈적해 보인다.

“저런 육체를 어떻게 때리고 찢어서 죽일 심산이오?!”

“….”

독수리는 멈칫했다.

“뼈와 살이 있었을 때도 순식간에 상처를 수복하던 놈이었는데 지금은 어떻겠소?! 간신히 상처를 낸다고 한들 금방 수복될 것이오! 그러면서 독수리 그대에게 튄 혈액이 목숨을 위협하겠지!”

매는 너무 신중하다. 모든 것을 미리 관찰하고 계획해서 행동에 옮기지만 그것이 그의 뜻대로 진행되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향을 선택하는 매가, 어째서 역병 교수들 중에 죽음의 위기를 가장 많이 겪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내 판단이 잘못된 것인가.’

반면에 독수리 자신은 어떤가.

- 매는 알아서 잘 하겠지만…. 전체적으로 상황을 살피면서 모두를 보조해. 우리가 희생을 최소화하면서도 적들의 함정에 당하지 않도록.

매는 경계심이 많다. 신중하다. 관찰력이 좋고 정보를 빠르게 모으며 무언가를 결정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걸 강령술사에게도 인정받고 있다.

반면에, 반면에 독수리 자신은 어떤가.

무력과 영력. 모든 것을 배제하고서 오로지 판단하는 능력 하나만 두고서 돌이켜본다면 어떤가.

- 허나 살갗까지 갖춘 악마의 하수인이 벨드샤처럼 호락호락 당하리라 기대하긴 어렵다. 이번엔 발키리가 입혀둔 상처도 없으니 말이다.

- 그렇습니까.

- 너는 머리를 더 써야 한다. 독수리.

스승의 말. 가장 최근의 기억.

그것 말고도 더 떠올려보면 자신이 잘못된 판단을 했다고 생각해 반성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런 순간들이 결코 적지 않았다.

‘단지 매가 더 위험한 상황에서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경험이 많았을…. 뿐인가.’

결국 독수리는 매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케에엑! 크하하하하하!”

탈루윈은 검붉은 혈액을 점액처럼 흘리면서 자신의 살갗을 부풀렸다. 그때 녀석의 혀와 이빨이 있는 목구멍은 심연 속 괴물의 아가리처럼 어둡고 공허했다.

그것은 이미 인간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는 기괴한 육체였다.

“흐흐흐! 나를 보아라! 델펜토르!”

녀석은 무언가에 광적으로 심취한 악령이 되었다. 그 흐물흐물하고도 거대한 몸체를 일으켜 세우자 검붉은 혈액에 범벅이 된 수많은 구멍들이 정면으로 진득한 피를 울컥울컥 토해냈다.

“델펜토르?”

“히샤웬은 카프하니드의 뇌성을 빌렸잖소! 탈루윈의 능력도 크라켄과 관련된 것이오!”

매는 독수리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는 즉시 독수리가 서있던 자리에 검붉은 혈액이 쏟아져 흙바닥을 살벌하게 녹여버렸다.

“내 창자를 맛보아라!!!”

탈루윈은 일으킨 몸체의 구멍들로부터 검붉은 촉수들을 무수히 뱉어냈다.

“토출(吐出)…!”

앞서 튀어나온 창자들이 식물의 뿌리처럼 여러 갈래로 나뉘면서 독수리와 매에게 휘몰아쳤다.

“이건 내가 맡겠소! 그대는 측면과 등을 노리시오!”

“그대의 뜻에 따라 싸우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나.”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시오!”

동시다발적으로 몰아치는 창자의 숫자는 많았지만 매는 짧은 순간에 쉼 없이 몸을 놀리며 창자들을 베어냈다. 그 사이에 독수리는 창자를 피해서 탈루윈의 측면으로 뛰어갔다. 가시 박힌 몽둥이로 녀석의 흐물흐물한 몸을 때렸다.

퍼억!

몽둥이로 때린 부분의 살갗이 찢어졌다. 그리고 찢어진 살갗의 밑에서부터 검붉은 혈액이 튀자, 독수리는 재결합으로 흙더미를 끌어올려서 일시적인 방패로 삼았다.

치지직!

흙으로 빚어낸 방패는 순식간에 형태를 잃고 부서졌다. 녀석의 살갗을 때렸던 몽둥이는 흑기사의 사철로 만든 것임에도 오래된 철처럼 군데군데가 부식되었다.

탈루윈의 목구멍이 독수리를 향해 휙 돌아갔다.

“많이…! 많이 먹어라…!”

공허한 목구멍의 깊숙한 안쪽으로부터 실낱같은 촉수와 혈액이 쏟아져 나왔다. 독수리는 다시 흙벽을 올리면서 촉수와 혈액의 공격을 막아냈다. 동시에 흙벽 뒤에서 자신의 몸을 숨겼다.

탈루윈의 목구멍은 조금 더 길어진 채로 독수리를 찾아 흙벽의 뒤로 움직였다.

퍼억!

독수리가 녀석의 등을 때렸다. 흙벽에 시선을 집중시키고는 녀석의 등으로 우회한 것이다.

“흐윽…! 흐흐흐흐흐!”

탈루윈은 등으로부터 혈액을 쏟아냈다. 목구멍을 움직여서 자신의 뒤에 있는 독수리를 노리려고 했다.

스걱스걱스걱!

하지만 매는 탈루윈의 창자를 거의 다 베어 가고 있었다. 창자의 방해가 없다면 발이 풀린 매가 또 어떤 공격을 해올지 탈루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매! 네놈부터다!”

등 뒤의 독수리를 노리려던 목구멍은 방향을 돌려서 매에게 돌진했다. 위협적인 혈액을 토해내면서 추가로 촉수를 뻗어 매를 공격했다. 그것에 매가 당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피로감은 쌓일 것이다. 결국 매는 지치고 말 것이다.

퍼억!

독수리가 등을 또 때렸다.

“흐으으…!”

퍼억! 퍼억! 퍼억!

연이은 몽둥이질이었다. 독수리가 등을 때릴 때마다 분명 혈액이 터지고 있을 텐데 말이다.

“흐아아아아아아!!!”

매에게 집중하던 목구멍은 결국 다시 방향을 돌려서 등 뒤의 독수리를 노렸다.

그때 독수리는 온몸에 검붉은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퍼억!

부상을 입으면서도 계속 몽둥이질을 하고 있던 것이다. 그 탓에 탈루윈의 등은 완전히 분쇄된 고기처럼 되어있었다. 혈액을 너무 많이 쏟아낸 탓에 독수리에게 흩뿌려지는 혈액의 양 또한 줄고 있었다.

“끄아아! 흐으으으아아!”

탈루윈은 몸속에 있던 창자를 독수리에게 토출했다. 창자는 허하게 벌어진 등의 상처를 비집고서 곧장 독수리의 몽둥이를, 다리를, 팔을, 목을 휘감았다.

퍼억!

“허어어…?”

그래도 몽둥이질이 멈추질 않는다.

투둑! 투둑!

독수리가 창자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독수리…! 이 정도의 철인이 있다는 말은 없었는데…!”

다리를 휘감은 창자는 그냥 내버려 두고, 팔을 휘감은 창자는 그가 몽둥이를 휘두를 때마다 괴력에 못 이겨 끊어졌다. 와중에 그의 목을 조르고 있는 창자도 별 효과가 없는 것 같다.

“이 괴력은…! 네놈, 설마 엑수스의 축복을 받은 것이냐?!”

“그 상위 천사의 축복을 받은 몸이라면 이렇게 부상을 입지도 않았다.”

어느덧 독수리의 팔을 감싸는 갑옷과 쇠사슬이 녹고 말았다. 탈루윈의 검붉은 혈액이 아니라 독수리 본인의 붉은 피를 녹아버린 피부 위로 흘려대고 있다.

“그런데 네놈은 어떻게 그런 몸으로 계속 싸우고 있다는 말이냐!”

“내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투두두둑…!

독수리는 탈루윈의 창자를 쥐어서 머리칼을 뜯어내듯 잡아당겼다.

탈루윈은 혈액과 창자를 많이 잃었다.

이제 결단의 시간이다.

“아그니샤를 대신해 네놈이라도 죽여야겠다!”

“그분에 비하면 나는 한참 모자란 놈이다. …대신이라는 말을 붙이는 건 네놈의 부족한 실력을 변명하는 게 아닌가?”

“크아아아아!!!”

탈루윈은 스스로 살갗을 개방했다. 목구멍과 목을 제외하고서 몸체의 살갗 전체를 뒤집어, 살갗 밑에 숨어있던 창자와 남겨둔 혈액을 단번에 토출하는 것이다. 그 탓에 자신은 죽게 되겠지만 오로지 독수리를 죽일 각오로 강행한 최후의 발악이었다.

매만큼 빠르지 않은 독수리는 닥쳐오는 창자와 혈액을 절대 피할 수 없기에 몸으로 받아내는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혈액이 독수리의 갑옷과 피부를 녹인 뒤 그 속으로 창자가 침투하여 맹독을 주입할 것이다. 독수리의 몸속에 있는 혈액보다 더 많은 맹독을 주입할 것이다.

독수리는 자신의 결말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무의미한 죽음은 아닐 터.’

‘내 그릇에 걸맞은 최후다.’

그 순간, 매가 독수리 앞에 나타났다.

“광속(光速).”

독수리도 탈루윈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인지하지 못했다. 눈으로 매의 움직임을 쫓기는커녕, 한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진 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이해조차 할 수가 없었다.

잠깐 사라졌던 매는 단지 독수리 앞에 서있다.

탈루윈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의문부터 표했다.

“…방금……?”

후드드드드득…!

탈루윈의 창자, 살갗, 목, 목구멍, 이빨 등 온 육체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무너졌다. 그때 탈루윈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죽고 만 것이다.

잘게 부서진 고기, 그 이하의 단위로 조각난 살점은 접시 위에 올라간 알 수 없는 음식처럼 흙바닥에 퍼져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올렸다.

“전력의…. 손실이오…….”

매의 몸이 탈루윈의 사체 쪽으로 기울었다. 가만히 뒀다간 끓는 사체에 얼굴을 처박을 기세다.

터업!

독수리는 매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탈진했나?”

“더는…. 영력이 없소….”

“방금 그것은 그대의 육체적 한계를 능가하는 속도였다.”

매는 지친 고개를 떨궜다.

“……벨로움과 동귀어진이라도 하려고 남겨둔 것이었는데…….”

광속.

그 능력이 정말로 필요한 순간이 나중에 있을지도 모른다. 벌써 몇 번인가 죽을 고비를 넘겨왔으면서도, 그렇게까지 아껴둔 능력을 지금 쓴 것이다.

“그대가 내 목숨을 구했다.”

독수리의 목소리에는 미안한 감정이 섞여있었다.

“반면에 나는 그대와의 어리석은 의견 충돌만 빚어내 위기를 키우고 말았다.”

하지만 매는 대답이 없었다.

호흡의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죽지는 않은 것 같다.

독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기절한 매를 지면에 눕혀주었다.

“매 역병 교수. 나는 지금부터 당신을 존경하겠습니다.”

샤아아아아…

때마침 히샤웬, 우토, 올빼미를 가뒀던 영혼의 벽이 해제되었다.

올빼미를 두 손에 안고 있는 우토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다가왔다.

“뭐냐! 무슨 일이냐! 저 녀석은 왜 매번 볼 때마다 쓰러져있어?!”

올빼미와 우토의 상태를 보니 저쪽에서도 광인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한 모양이었다.

악마의 하수인 벨로움.

녀석의 직속이 되는 광인과 피조물들은 이 세계를 위협할 수 있는 강력한 적수였던 것이다.

다행히도 이쪽은 그런 적수들을 처단해냈다.

이제 독수리는 담담하게 고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스승님.”

“왜?!”

“저는 역병 교수의 머리가 되기를 포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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