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선과 악 (3)
끓는 화산호수를 중심으로 세워진 목조주택들.
그중에 남동쪽의 목조주택들은 구울 무리, 역병 의사와 악귀들의 치열한 전투로 인해 손상되고 있다.
반면에 북서쪽에 위치한 목조주택들은 굉장히 멀쩡한 것들이다. 화산호수에서 기어나가는 구울 무리는 대다수가 남동쪽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 북서쪽은 유령마을처럼 한적하고 음산하다.
“아그니샤. 건물 안에 숨은 놈들이 있어.”
“해치우면서 가죠. 벨로움과 싸우고 있을 때 등을 노려지면 곤란할 테니까요.”
페인과 아그니샤는 사악한 존재가 느껴지는 목조주택 하나를 골랐다. 벨로움을 마주하기 전에 후환을 배제하기 위함이다.
콰직!
페인은 허름한 문을 발길질로 부수고 어두운 실내에 진입했다. 아그니샤도 그를 따라 목조주택에 발을 들였다.
그녀의 십자가가 은은한 빛을 발산하여 어둠을 밝혔다.
“그르르….”
구울이었다.
지저분한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있는 구울이 구석에서 또 다른 구울을 감싸 안고 있었다.
그 모습은 한순간 페인과 아그니샤를 멈추게 하였다.
“그으으으…!”
아주 작은 구울을 감싸 안고 있는 녀석이 으르렁댔다. 그 울음소리가 묘하게 여성의 목소리 같았다.
「너와 아그니샤를 두려워하고 있어.」
잠시 멈칫했던 페인은 도끼를 치켜들었다.
“잠깐만요.”
아그니샤가 페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왜?”
“이것들 구울 맞아요?”
십자가에 의해 밝혀진 실내.
구석에 생긴 조그만 어둠 속에 잔뜩 웅크려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두 마리.
“악명. 구울이야.”
“아니….”
페인은 그녀의 뜻을 이해했지만, 공감하진 못했다.
“엄마와 아이처럼 생겼다고 살려둘 이유라도 있어?”
페인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 스스륵 풀렸다.
이윽고 페인은 저항하지 않는 두 구울을 도끼로 찍어서 죽였다. 아그니샤는 애써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 * *
페인과 아그니샤는 벨로움을 쫓는 길에 몇몇 목조주택에 숨은 구울들을 해치웠다. 페인이 건물에 들어가서 구울들을 죽이면 아그니샤가 바깥을 경계하고, 다시 이동을 반복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전장에 나오지 않고 목조주택에 숨어있는 구울들은 대체로 공격성이 없었으며, 신체가 왜소했다.
“놈들은 이곳에서 빚어진 구울이었어. 인간이었던 존재가 악령화를 일으켜 구울이 된 게 아니라, 처음부터 벨로움이 빚어낸 피조물이라는 거야. …왜소하고 공격성이 적은 놈들은 연습작이나 실패작 같은 것이었겠지.”
아그니샤는 고뇌에 빠진 듯했다.
“그 어린 것들이….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걸까요.”
페인은 즉답했다.
그에겐 별로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다.
“해충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겠냐.”
“태어나면서부터 죽여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거잖아요. 비좁은 어둠에 숨어서 떨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죄를 저지르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그냥 뒀으면 죄를 저지를 것들이었지.”
“그걸 어떻게 단언하세요?”
“그렇게 태어난 존재들이니까.”
아그니샤는 발걸음을 멈췄다.
페인도 덩달아 멈춰서 그녀를 쳐다봤다.
“당신의 안에 있는 악령도 사악한 존재잖아요.”
“통제하고 있는 거라서 괜찮아.”
“…그런 걸까요.”
“다들 마음속 한구석에는 악한 것이 있지만 잘 통제하며 살아가고 있잖아.”
페인은 지나온 길을 도끼로 가리켰다.
“반면에 그것들은 누군가를 해칠 수 있는 손톱과 이빨을 가지고 있었어.”
아그니샤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악하다는 걸 달리 말하면 선하지 않다는 것.
그렇다면 어떤 존재에게 있어 선이란 무엇이고 악이란 무엇인가.
세인트교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인간이 선해야 하는 이유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재미로 사람을 죽이고 숲을 불태우고 짐승을 학대해도, 그렇게 날뛰어도 평생을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면 굳이 선하지 않아도 된다는 극단적인 예시가 있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선이란 인간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 그리고 아그니샤는 인간과 인간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선을 지키기 위해, 인간이 아닌 사악한 존재들을 죽여왔다. 하늘의 집행을 대리한다는 뜻으로.
“그래. 나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어. 네가 왜 그러는지.”
페인은 재차 발걸음을 옮겼다.
“이쯤 되면 선악이라는 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 아군과 적군을 편가르기 할 수 있는 기준처럼 보이겠지.”
“…뭔가, 선악이라는 개념을 편리한 수단으로 쓰는 것 같아서요. 그 어리고 저항하지 않는 구울들의 생명을 빼앗았던 게 정말로 올바른 선택이었을까요?”
“올바르지 않을 수도 있겠지. 진짜 천사처럼 어떻게든 헤아린다면.”
전장의 소리가 남동쪽에서 들려오고 있다.
“하지만 장담하는데, 나는 오늘 구울 새끼들 죽인 걸 후회하지 않을 거야.”
“….”
그 간단명료한 뜻에 아그니샤는 수긍했다. 인간으로서.
* * *
전장의 소리가 남동쪽에서 들려온다.
그리고 페인과 아그니샤는 벨로움을 발견해냈다.
“우토의 흑마법을 피해서 여기로 온 거냐? 벨로움.”
“천만에. 이제 놈의 조잡한 슈탈룬헤르토툼으로는 내 영혼을 가둘 수 없다.”
“이제는?”
“그렇게 되었지.”
윤회하여 다시 태어난 벨로움은 새로운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녀석의 선홍색과 붉은빛을 띠고 있는 살갗은 시체로부터 뽑아낸 살점으로 만든 것처럼 혐오스럽다. 살갗이 다 덮지 못하는 부분은 쩍쩍 갈라진 빨간 근육이나 뼈를 드러내고 있다. 머리에는 짤막한 악마의 뿔이 두 개 달려 있고 녀석이 말할 때마다 기괴하게 벌어지는 턱이나 돌출된 잇몸에 박힌 생선뼈 같은 이빨들이 그야말로 흉포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양손에는 근육으로부터 갈라진 듯한 촉수가 달려 있었다.
츠즈즉….
페인은 도끼에 피와 살을 덧입히며 물었다.
“눈은 왜 만들다 말았냐?”
벨로움의 얼굴에는 코가 없다. 하지만 미간 같은 것은 있는데, 그 미간 양쪽의 푹 꺼진 부분에 각각 있어야 할 눈알이 없는 것이다.
“저년의 마법에 실명하는 것도 지긋지긋해서 말이지. 그런데 날 때부터 눈이 없는 육체란 참으로 신비롭구나.”
“뭐가 신비로워?”
“앞이 보이지 않으니,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벨로움의 턱이 위아래로 다섯 뼘은 벌어졌다. 과도하게 돌출된 잇몸과 뾰족한 이빨 사이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이를테면 지금 내게 떨어지고 있는 십자가…”
키이이이이잉!!!
벨로움의 배후, 하늘보다 조금 낮은 곳에서 성스러운 마법진이 빛나는 육망성을 전개하며 건물 크기의 십자가를 소환해낸 것이다.
뚜두둑!
벨로움은 자신의 뒤통수를 열었다. 아니, 스스로 뒤통수의 살갗을 갈라서 입처럼 만들었다고 표한함이 더 정확할 것이다.
“흐어어어어!!!”
녀석은 마치 신화 속의 용처럼, 이전 전장에서 혈골군주의 두개골 하나가 그랬던 것처럼 불을 뿜어냈다. 그런데 그 불의 색깔이 심히 어두웠다.
사악한 힘을 근원으로 삼아 주변의 빛까지 집어삼키며 극도의 열을 내는, 기존의 불꽃보다 뜨거우면서도 그것이 담고 있는 빛은 불과 달리 차갑게 역전되었기에 부정한 불꽃.
뜨겁게 태우는 것임에도 어두운 것.
그것은 흑마법사들이 흑염이라고 부르는 불이었다.
키기기기깅!!!
일전에 우토와 셰르카가 흑마법을 연계해 쏘아냈던 드라쉬르의 흑염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때 그 흑염보다는 훨씬 어두운 것이라 얼핏 보면 흑염이 아니라 그림자처럼 보일 지경이다.
파스스…!
벨로움의 뒤를 노리던 거대한 십자가는 흑염에 집어삼켜져 은빛 가루가 되고 말았다.
쩌적!
그리고 벨로움이 뒤통수를 닫았을 때 페인과 아그니샤는 말없이 뛰고 있었다.
「탐지 5계.」
「…벨로움은 저주와 마법에 각각 6계의 저항 능력을 갖추고 있어. 그리고 영적 저항까지 2계야.」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높은 주술은 방혈 6계와 재결합 6계.」
「역시나 우리 손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진 못하는 거야.」
‘그 부분은 아그니샤의 신성한 속성에 맡기는 수밖에 없어.’
「그래도 놈의 육체를 최대한 썰어보자.」
‘틈이 보이겠지.’
페인은 오른손에 도끼를 쥐고 왼손에 붉은 덩어리를 쥐었다.
‘타점을 분산시켜.’
「강타하는 혈전(血栓).」
피와 혈관으로 만들어진 덩어리가 세 구체로 나뉘었다. 각 구체는 페인의 왼손과 실 같은 것으로 연결되어 그의 주변에 떠올랐다.
그리고 페인의 열 걸음 뒤에서 뛰고 있는 아그니샤는 몇 가지 마법을 연이어 발동했다.
‘천노. 극형집행.’
아그니샤의 머리 위쪽 허공에서 마법진이 그려지며 거대한 십자가를 소환했다. 동시에 그녀의 배후에서 두 개의 밝은 구체가 생겨나고, 그녀의 앞쪽에도 밝은 구체 하나가 생겨났다.
각 구체는 자그마한 십자가를 소환했다. 곧이어 그녀는 앞쪽에 생겨난 빛의 구체를 십자가로 때렸다.
카앙…!
소환되어 사출되려던 극형집행의 십자가 하나가 더욱 가속되어 벨로움에게 돌진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페인이 짧게 도약하였다.
「광속.」
그의 안에 있는 악령은 도끼를 자신의 육체로 삼아 회전시켰다. 페인이 굳이 철인의 힘으로 도끼를 휘두르지 않아도 이미 경이로운 속도로 회전하고 있는 도끼는 벨로움에게 닿는 즉시 녀석의 살을 뼈째로 갈라버릴 것이다.
벨로움은 포효했다.
“나는 불멸의 존재다!”
쐐애액!
벨로움은 페인에게 촉수를 날렸다. 페인은 회전하는 도끼로 촉수를 모조리 베어버렸다. 동시에 아그니샤가 앞서 사출한 극형집행의 십자가 하나가 벨로움의 심장을 노렸다.
푸욱!
벨로움은 쓰러지지 않았다. 몸속에서 심장의 위치를 옮긴 것이다.
“크흐아아!”
페인은 붉은 구체 세 개를 날려서 벨로움의 안면을 강타했다.
푸화악!
벨로움의 안면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건 벨로움의 피가 아니었다.
“잘 익힌 구울의 맛이구나…!”
벨로움은 자신의 안면을 찢어서 붉은 구체 세 개를 씹어삼킨 것이다.
‘교수척장분지형.’
벨로움의 입에서 역으로 혈액이 분출되었다. 당연히 벨로움은 그 정도 주술로는 쓰러지지 않았다.
퍼퍼퍽!
극형집행의 십자가가 벨로움의 온몸에 꽂히기 시작했다. 페인은 도끼로 벨로움의 온몸을 베기 시작했다.
촤아아…!
벨로움은 자신의 상처로부터 검붉은 혈액을 분출했다. 극형집행의 십자가가 순식간에 녹아버리고 검붉은 혈액이 페인을 정면으로 덮쳤다.
페인은 재빠르게 측면으로 회피했다. 그런 직후 천노의 거대한 십자가가 대각선으로 활강하듯 돌진해왔다.
“흐어어어어!!!”
벨로움은 이번에도 흑염을 뿜어내 십자가를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극형집행의 발동에 의해 연속적으로 날아드는 작은 십자가들도 흑염으로 태워버렸다.
그때 페인이 벨로움의 측면에서 검기를 날렸다.
샤아아아!
벨로움의 촉수들이 수복되어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을 머금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만연하는 악을 모아, 그림자 형태의 악령으로 만든 방패였다.
“끼에에…!”
“끼에에에엑…!”
벨로움의 촉수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촉수에 자리한 악령들이 벨로움의 영혼을 대신하여 강제로 검기를 받아낸 것이었다.
“내 악귀들도 그딴 식으로 희생시키지는 않아.”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건 같지 않은가!”
스어억!
어느새 바짝 붙은 아그니샤가 벨로움의 촉수를 단칼에 베어버렸다. 촉수라는 육체에 갇혀 고통에 울부짖던 악령들은 죽음으로써 침묵했다.
“미련한 년! 내 심장을 노렸어야지!”
벨로움은 왼쪽 발로 땅을 힘차게 밟았다. 그러자 벨로움의 발자국이 찍힌 곳으로부터 부채꼴 형태로 폭발이 퍼져나가 아그니샤를 공중에 띄워버렸다. 만약 그녀에게 보호막이 없었다면 땅과 함께 폭사했으리라.
화르륵!
페인이 발화 능력으로 만들어낸 화염이 벨로움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벨로움의 살갗은 사소한 화상조차 입지 않았다.
“불꽃으로 내 시야를 가릴 속셈이라면 관둬라! 어차피…”
벨로움은 하려던 말을 멈췄다.
화르르르르…!
강렬하게 불타는 소리.
그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는다. 페인의 옷깃이 스치는 소리, 호흡하는 소리, 땅을 밟는 소리, 도끼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 따위가 말이다.
그것은 명백한 소음이었다.
“흐으읍…!”
벨로움은 온몸에 혐오스러운 구멍을 만들어 공기를 빨아들였다. 그렇게 화염을 흡수하고 화염에 담긴 페인의 영력까지 흡수하였다.
그렇게 화염이 걷히자마자 코앞까지 닥쳐온 은빛의 벽.
사실 그것은 벽이 아니라 십자가였다.
퍼어억!!!
벨로움은 천노의 십자가에 안면을 맞아서 쓰러지고 말았다. 페인이 화염을 써 벨로움의 귀를 막은 틈에 아그니샤가 수평으로 천노의 십자가를 쏘아낸 것이었다.
벨로움의 안면을 치고 지나간 십자가는 목조주택 대여섯 채를 관통하며 지나간 자리를 초토화하였다. 그리고 벨로움이 쓰러지자마자 페인이 녀석의 심장을 추적하여 도끼로 찍어버렸고, 아그니샤는 녀석의 함몰된 안면을 십자가로 꿰뚫어버렸다.
“…흐흐하하하하하!”
벨로움의 안면과 가슴팍이 야수의 입처럼 벌어졌다. 그 안에 있는 것은 내장이 아니라 흉악한 가시 뼈와 송곳니의 향연이었다.
「탐식이야.」
「파리처럼.」
푸화아악!
녀석은 검붉은 혈액을 터뜨렸다. 페인은 붉은 덩어리를 끌어와 방패처럼 쓰고는 벨로움으로부터 떨어졌다. 동시에 아그니샤는 벨로움의 안면에 꽂아둔 십자가를 버리고 새로운 십자가를 소환했다. 그렇게 보호막을 전개하며 재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투두두두두두….
벨로움은 다시 일어섰다.
한껏 벌렸던 안면과 가슴팍을 닫고, 자신의 안면에 박힌 성스러운 십자가를 으적으적 씹었다.
“…이건 위선자의 맛이구나.”
그때, 줄곧 무표정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 없던 아그니샤의 눈매가 강하게 일그러졌다.
벨로움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혓바닥을 놀렸다.
“네이트의 여전사여. 자신이 아직까지도 화신이 되지 못한 이유를 정말 모르겠는가?”
페인은 아그니샤의 표정 변화를 보며 깨달았다.
벨로움은 육체보다 ‘말’이 무서운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