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21화 (121/181)

24. 인간으로서, 사람으로서 (1)

벨로움이 소멸하고서 15일이 지났다.

세인트 왕국의 교단에 우토, 매 역병 교수, 파보크, 신관들이 모였다.

우토는 페인을 대신하여 구체적인 것들을 설명하는 중이다.

“하여 소인이 면밀히 조사해 본 바, 용과 관련된 그림이나 장식품이 화산호수 밑에 묻혀있었고 대륙 각지에서 출몰한 광인들은 모두 비슷한 체형과 외모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곳에는 용을 수호신으로 여겨 추종하는 일족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승천자는 우토에게 질문했다.

“광인들은 벨로움의 피조물이 아니었다는 뜻인지요?”

“예. 벨로움이 악으로 창조한 것들이 아니라 형제, 자매, 가족끼리 자손을 낳아 숫자를 늘린 역겨운 족속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놈들 일족이라고 설명을 드린 겁니다.”

이어서 역병 교수의 머리가 된 매가 덧붙였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용을 추종하던 그 일족 앞에 벨로움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후 야히웬이라는 족장은 벨로움을 따라서 세계가 가진 악의 농도를 높이고, 이를 기반으로 용을 부활시킬 수 있는 계획까지 만들어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용과 악마를 추종하던 일족은 전멸하였고 용의 무덤을 가리고 있던 화산호수는 증발하였으며, 결정적으로 힘을 모아 용을 부활시킬 수 있었던 악마의 하수인까지 소멸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거기까지 이해한 승천자는 우토와 매에게 천계의 소식을 공유하였다.

“네이트 님께서는 우리의 아그니샤를 차원의 열쇠로 삼아 지옥을 찾아내셨지요. 아그니샤는 지옥에 떨어져서도 끝까지 신앙심을 잃지 않고 싸웠으며, 천계가 지옥의 위치를 특정하여 차원을 넘을 수 있는 시간까지 벌어주었다고 하더군요.”

페인을 대신하여 지옥에 떨어졌다는 아그니샤.

그녀의 희생은 우토와 매를 포함하여 모든 역병 교수, 역병 의사들이 아그니샤를 비롯해 그녀가 소속된 세인트 교단에 우호적으로 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지옥이라는 것을 경험하고서 신앙심을 잃었다면, 여전사로서의 기개가 무너지게 되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것이 그녀가 화신이 될 수 있는 조건이었으며, 그녀의 이름 끝에 ‘샤’가 붙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천계는 그녀가 갓난아이일 때부터 그녀의 고귀한 영혼을 주시했다고 한다.

그녀의 부모에게 계시를 내려 그녀의 이름이 ‘아그니샤’가 될 수 있도록 하였고,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된 아그니샤는 지옥과의 연결성이 전무했음에도 벨로움의 공격에 당하여 지옥에 떨어질 수 있었다.

아그니‘샤’.

그녀에겐 업보가 거의 없지만, 태생부터 그녀의 이름에는 지옥과의 연결성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아그니샤는 네이트의 화신이 되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일이리라.

지옥에 세워지고 있는 천계의 전초기지와 다차원 거울이 안정되면 그녀는 무사히 실재세계로 돌아올 것이라고 한다.

이제 지난 일에 대한 이야기는 끝났다.

내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다.

“천계가 본격적으로 지옥을 벌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당분간 지옥에서 현계로 거악의 존재가 넘어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라고 말하는 승천자의 얼굴은 다소 수심에 잠겨있었다.

벨로움까지 소멸하고, 선악의 전쟁이 현계를 벗어난 구도가 되었음에도 이 세계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현계를 위협할 수 있는 거악들은 여전히 잔존하고 있습니다. 현계에서 고대의 무기처럼 잠자고 있는 존재들은 언제든 악마의 손에 넘어가 태동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토가 물었다.

“카프하니드, 벨드샤, 벨로움까지 없는 마당에 또 무엇이 있다는 뜻입니까?”

그러자 승천자는 매와 눈을 마주쳤다.

이제는 이곳의 모두가 알고 있다.

매의 두뇌가 아주 비상하다는 것을. 그가 역병 교수의 머리가 될 수 있었던 건 무력이 아니라, 강령술사에 밀리지 않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매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델펜토르….”

온몸의 뼈를 검붉은 혈액으로 바꾸고서 점액질의 존재처럼 변했던, 자신의 내장을 토출하던 광인.

그 광인이 했던 말이 있었다.

- 흐흐흐! 나를 보아라! 델펜토르!

- 델펜토르?

- 히샤웬은 카프하니드의 뇌성을 빌렸잖소!

- 탈루윈의 능력도 크라켄과 관련된 것이오!

번개를 쏘던 히샤웬은 카프하니드를.

검붉은 혈액과 내장을 토출하던 탈루윈은 델펜토르를.

“다른 대륙에서는 크라켄을 이무기라고 불렀지요. 악을 먹고 업보를 쌓아서 훗날 용이 되고자 하는, 그러나 결코 용이 될 수 없는 저주를 가지고 태어난 괴물을 말입니다.”

이어서 승천자는 설명했다.

“반대로 이쪽에는 크라켄이 악마의 머리칼로부터 빚어진 피조물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태고의 시대에 탄생한 크라켄들은 대다수가 천사에게 당하여 죽었지만 그중 일부는 저 먼바다의 심연 아래에 가라앉아 태고의 꿈을 꾸며, 다시금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죠.”

“소인이 강령술사님께 듣기로는 실재세계에 크라켄이 여덟 마리나 있다고 하였는데….”

“가라앉은 카프하니드. 녀석을 제외하고서 오늘날 일곱 마리의 크라켄이 잔존하는 것입니다.”

그때 매가 나서서 주장했다.

“각국 해안선의 경계를 강화하고 남은 크라켄들을 토벌할 원정대를 꾸려야 하오.”

“문제는 남은 일곱 크라켄이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멀리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지요.”

“천사들도 모르고 있소? 남은 놈들의 위치를.”

“바다는 넓고 깊습니다. 태고의 꿈을 꾸며 잠든 크라켄들은 그 어떤 존재감도 내뿜지 아니하지요. 당시 격렬했던 전쟁 속에 수많은 크라켄들이 죽었을 터인데, 그중에 어느 크라켄이 죽지 않은 채 쓰러졌는지는 천계 측에서도 알 수가 없는 법입니다.”

“만약 악마들이 기회를 노리다가 일곱 마리를 동시에 깨우게 된다면….”

“대륙 하나를 초토화하는 용의 부활과는 비교가 되지 않겠지요. 일곱 크라켄이 동시에 깨어나게 된다면 그야말로 전 대륙, 현계에 존재하는 인류의 존속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일이 되기 전에 한 마리씩 처리하는 편이 현명하겠지요.”

나중에 일곱 마리가 동시에 깨어나면 안 되니까 지금부터 한 마리씩.

거기까지 들은 매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미끼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들리오. …가라앉은 카프하니드 때처럼.”

그러자 우토가 발끈했다.

“무슨…! 강령술사님을 또다시 사지로 내몰 작정이었습니까?!”

승천자는 두 손을 다 들며 손사래를 쳤다.

“오해입니다.”

“그, 그게 아니라면 뭐요…?”

“바다 위는 위험합니다. 사람에게 있어 최악의 전장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지요. 따라서 강령술사 님이 바다 위에서 크라켄을 상대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저희가 뒤에서 손놓고 지켜보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함은 해안선이오?”

“그렇죠. 강화된 해안선입니다.”

“해안선이 왜? 무슨 뜻이냐?”

“크라켄을 한 마리씩 해안선으로 끌고 와서, 모두가 힘을 합쳐 토벌하는 것이오.”

그 뜻에 우토는 콧방귀를 뀌었다.

“결국 강령술사님을 미끼로 쓴다는 건 변함이 없군!”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적극 수용하겠습니다.”

“….”

우토는 말문이 막혔다. 승천자의 말에 반박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이 순간에 매의 시선이 느껴져서다.

‘정말로 이게 맞냐…? 정말로?’

우토는 속으로 질문했다. 자신에게, 매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제 생각엔 이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스승님.”

“…쯧.”

우토는 교단의 출입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눈치를 살피던 매가 그의 뒤를 따랐다.

“우토 님?”

승천자의 부름에 우토는 멈칫했다.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에는 화가 억눌려있었다.

“교단의 뜻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허나 최종 결정은 강령술사님께서 내리실 테니 기다리고 계십시오.”

그렇게 대답하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우토였다. 그때 어느 신관이 지나가는 우토의 등에 대고 물었다.

“지금 강령술사 님은 어디에 계시죠?”

우토는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그분은 지금 잿빛세계에서 싸우고 계십니다.”

그리고 살짝 분노를 섞어 말했다.

“우리가 이러는 와중에도 그분은 싸우고 있다는 겁니다. 빌어먹을 단 한순간도,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서요. 그리고 더 강해져서 우리 앞에 나타나겠죠. 여러분이 늘 말씀하시는…. ‘근원이 사악한 힘’을 잔뜩 품고서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매가 덧붙였다.

“우리 모두가 그분께 갚지 못할 빚을 졌습니다. 천사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 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 *

벨드샤, 카프하니드에 이어서 벨로움까지 해치웠다.

벨드샤는 실체화되지 않은 육체로 끈질기게 날 찾아와 내 몸을 빼앗으려고 했으며, 내가 가진 능력들을 하나씩 흡수하였다.

가라앉은 카프하니드는 내게서 풍긴다는 업보의 향기를 맡고서 깨어났다. 업보와 악을 쌓아 용이 되고자 했던 카프하니드는 세이렌과 어인을 대동하여 날 먹어치우려고 했다.

그리고 벨로움이다. 녀석은 벨드샤와 달리 실체화를 완료하여 사악한 존재의 육체에 빙의할 수 있었고, 윤회할 때마다 스스로 육체를 빚어내 점점 더 강해졌다. 녀석에게 육체의 죽음이란 무의미한 개념이었기에 사악한 영혼까지 파괴할 수 있는 신성한 속성, 아그니샤의 힘이 필요했다.

「아그니샤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전멸했을 거야.」

매번 그것들을 상대할 때마다 뼈아프게 체감하는 것이 있다.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내가 너무 약해.’

내가 누군가의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면 상대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부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체감하고 있는 건 상대적인 약함이다.

강령술사라는 존재가 실재세계의 대륙에서 절대적으로 강할지는 몰라도, 진짜 지옥에서 넘어온 거악을 상대로는 턱없이 힘이 부족한 것이다. 나는 실제로 벨드샤, 카프하니드, 벨로움을 상대하면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추억 속의 리비카.」

「앞으로 부활할 수 있는 횟수는 두 번뿐이야.」

지옥과 악마를 상대로는 목숨이 몇 개가 있어도 부족할 거라는 셰르카의 뜻에 동감한다. 이제 내 목숨까지 합쳐서 앞으로 세 번 죽으면 끝인 상황이다.

결국 진짜 지옥과 악마를 상대하기 위해선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강해질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어김없이 이곳으로 돌아왔다.

이전 인생의 낭떠러지이자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 된 세계.

내가 이토록 빨리 강해질 수 있었던 계기이자 환경을 제공한 세계.

안개가 낀 것처럼 뿌연 공기와 스산한 적막이 감도는 잿빛세계다.

「존재 추적할게.」

낙원의 경비대장 후안. 그는 경비대의 인원을 차출하여 탐색조처럼 편성하여 낙원의 활동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바다와 맞닿아있는 데이진타우 제국이다. 또한 그들의 임무는 제국으로 가는 길에 생존자 무리를 발견하면 포용하고, 특수한 이물이 발견되면 악귀로 사로잡는 것이었다.

「네가 그렇게 명령을 내려놨지.」

「바다의 이물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니까, 비첸크로이 제국의 수도보다는 데이진타우 제국을 먼저 탐험하게 될 거야.」

나는 불나방에 올라서 하늘을 비행했다. 높은 곳에서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음에도 잿빛세계의 뿌연 공기 탓에 갑갑하다. 극단적으로 짧은 가시거리 탓에 아래쪽 땅에 무엇이 있는지, 위쪽 더 높은 하늘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이지도 않는다.

「괜찮아. 탐지 5계가 있으니까.」

이후 나는 세인트 왕국 폐허에 자리한 낙원을 벗어나고, 종종 뾰족한 바위산이 옆에서 스쳐가는 절벽길을 통과하였다. 이전에 아라나크가 정리했던 광인의 숲 위를 지나고 있으니 아래쪽에서부터 소수의 거미 악귀들이 내게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저번에 흑기사를 제외하곤 광인의 숲에서 더는 묶을 이물이 없었나 봐.」

「역시 미지의 영역을 개척해야 새로운 이물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같아.」

드넓은 광인의 숲을 단 세 시간 만에 통과하였다.

불나방에게 명령하여 고도를 낮추자 듬성듬성 자리한 숲과 건조한 초원지대가 펼쳐졌다. 그리고 곧 사막에 진입할 수 있었다.

모래 위에 발자국이 찍혀있다. 흑기사와 거미 악귀들의 발자국이다.

「후안과 사람들은 저 언덕 뒤에 있어.」

사막을 건너는 중에 별다른 무력충돌은 없었던 모양이다. 다수의 거미 악귀와 소수의 흑기사가 있으니 웬만한 이물들은 상대가 안 되는 것이었다.

‘역시.’

한때 세인트 왕국 폐허에서 가장 강력했던 이물인 역병 마녀조차도 흑기사를 상대론 안 될 것이다. 거미 악귀도 숱하게 널린 이물들에 비하면 결코 약한 편이 아니고.

「…그런데 아까부터 후안을 뒤쫓는 이물이 있었네.」

신중하고 교활하다.

후안과 무장한 사람들을 노리면서, 거미 악귀와 흑기사를 경계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이물이 이곳에 있었다.

「탐지 5계.」

「투시(透視).」

녀석은 모래 밑에서 조용히 헤엄치며 후안을 뒤쫓고 있었다.

아주 긴 창자 같은 몸통과 수천 개의 짤막한 다리. 모래색의 피부.

목도 눈도 귀도 없는 머리는 거머리나 구더기의 것처럼 동그란 입을 달고 있다.

「올고호르휘.」

「1680.」

‘가지고 있는 악이 1680이라고?’

「응. ……뭔가 좀 이상한데.」

저 정도 덩치에 그 정도의 악을 영혼에 담고 있는 이물이라면 언제든 홀른을 급습해도 되는 게 아닌가.

저 녀석이라면 약 스무 마리의 거미 악귀들과 세 마리의 흑기사 정도는 가뿐히 해치울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악귀들 근처의 무장한 인간들은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왜 뒤쫓았던 거지? 저들을 사냥하지 않고.’

「…호기심.」

호기심을 느끼는 이물이라.

당장에 충분히 사냥할 수 있는 존재들이, 자신의 존재도 모른 채 저렇게 사막을 건너고 있는데 덮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호기심을 느끼고 있다.

교활한 포식자라고 하기엔, 녀석이 갖고 있는 호기심이라는 단어에 이질감이 있다.

「갑자기 멈췄어.」

나는 불나방에게 명령하여 녀석의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렇게 녀석의 다음 행동을 관찰하기로 했다.

그러자 녀석은, 올고호르휘라는 악명을 가진 이물은 긴 몸통의 앞쪽을 슬쩍 틀었다.

푸스스슥….

그러더니 모래 위로 머리만 빼꼼 내밀고서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는 것이다.

「호기심.」

거대한 창자 벌레처럼 생긴 이물.

올고호르휘의 시선에는 적의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