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25화 (125/181)

24. 인간으로서, 사람으로서 (5)

나는 모래 밑에 있다.

올고호르휘의 뱃속이다.

「혈취자(血取子).」

「110.」

「인간과 비슷한 지능이 있는 이물들이야. 털, 타액, 혈액 등에 흑사병을 품고 있어. 그야말로 역병 덩어리지.」

강하진 않지만 상대하기 까다로운 이물들이다.

「떼 지어 다니면서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 습성은 쥐와 똑같아.」

「혈취자들은 비첸크로이 제국 폐허에서 발생하여 자기들만의 사회를 만들었어. 사람이든 이물이든 자기들과 다른 생명이라면 일단 포획하지. 그리고 우리에 가둬서 천천히 피를 뽑아먹고 더는 피가 나오지 않으면 그 살점을 취하는 거야.」

‘놈들 숫자는?’

「지상에 198마리.」

「지하에 411마리.」

지금은 멸망한 국가지만, 실재세계에서 황금기를 겪은 비첸크로이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진보한 수로를 갖추고 있었다. 건조한 국가지만 공중목욕탕이 있고, 우물도 없이 각 가정에서 식수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비첸크로이 제국의 수로가 얼마나 진보하였는지 증명하는 것이다.

그랬던 수로가 잿빛세계의 혈취자들에게 최고의 보금자리가 되어버렸다.

「지하 가장 깊숙한 곳에는 땅굴을 파 놨어. 그곳에는 어림잡아 500 이상의 악을 가진 존재가 있는데, 녀석이 혈취자들의 우두머리일 거야.」

‘우두머리는 마지막에 노린다.’

「적장부터 해치우는 게 승리의 공식 아니야?」

‘승리가 목적이라면 그렇겠지.’

나는 이 폐허에 있는 609마리의 혈취자들을 모조리 죽여 씨를 말릴 것이다. 모조리 죽일 것이기 때문에 놈들과 싸워서 항복을 받아내거나 포로를 잡는 일 따위는 불필요하다.

‘우두머리가 살아있는 한, 놈들은 웬만해선 도망치지 않을 거야. 우두머리는 자기들이 살아가기에 최적의 환경인 이 폐허를 절대 포기하지 않겠지.’

「끝까지 싸우도록 만들려는 거구나.」

「그럼 효율을 위해서 지하수로부터 칠 건가? 놈들이 우글대는 곳인데.」

‘아니. 지상부터.’

내가 지상부터 노리려는 건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올고호르휘를 타고서 단번에 지하까지 침투할 수 있기는 해. 하지만 놈들의 덩치를 고려해 보면 지하는 대체로 비좁을 거야. 거미 악귀나 흑기사가 활동하기엔 불편하지.’

「악귀가 없어도 충분하잖아.」

「차원침공은…. 조건이 안 되니까 제물방류로 되겠네.」

「지하수로와 땅굴 전체를 피로 범람시키면 깔끔할 것 같은데?」

‘놈들은 흑사병을 품고 있어. 그런 놈들의 피로 만든 제물방류는 자칫 인질을 해칠 위협이 있지. 그리고 이건 지상도 마찬가지야.’

「인질 때문에 일이 복잡해졌구나.」

「순서를 알려줘.」

‘…내가 전장에 나타나서 대놓고 인질들을 구하기 시작하면, 놈들은 내게 인질극이 통한다는 걸 깨달을 거야.’

따라서 놈들에게 보여줄 이쪽의 목적을 바꿔야 한다.

혈취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이물이라도 우리에 가둔다고 했다.

따라서 녀석들은 이물도 얼마든지 적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자신들과 다른 이물을 상대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단순하게, 처음엔 웬 거미들이 집단 사냥을 하러 온 것처럼 꾸미는 거지.’

그런 상황처럼 보이게 할 것이다.

* * *

팔이 네 개, 눈이 아주 큰 박쥐를 닮은 이물은 우리 속에서 외쳤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선생님들! 주술도 부리실 수 있던 겁니까?!”

어디선가 소환되어 광장의 서쪽으로 조용히 모여든 거미 악귀들.

“그렇게 무시무시한 거미들까지 소환하실 수 있다니요!”

박쥐를 닮은 이물에겐 거미 악귀들이 혈취자들의 사냥개처럼 보였던 것이다.

“저는 선생님들의 능력을 진심으로 경외합니다! 날개가 있는 제게 맡겨만 주신다면 앞으로도 이렇게 탈주자들을…”

그러나 다음에 벌어지는 극적인 상황이 녀석의 입을 다물게 하였다.

- 키게게게겍!

- 찍찍…! 찌이이익!

으적…! 으적…!

뚜두둑…!

거미 악귀들이 혈취자들을 산 채로 물어뜯기 시작한 것이었다. 강력한 턱으로 녀석들의 머리를 씹고 단단한 다리로 녀석들을 꿰뚫어 짓밟았다. 꽁무니에서 사출된 거미줄은 자아를 갖고 있는 것처럼 허공에서 춤을 추며 혈취자들을 묶고, 유리 파편이 발린 실처럼 놈들을 조여서 조각조각 분해해버렸다.

“오…! 오오…! 거미 선생님들!”

박쥐를 닮은 이물은 잽싸게 말을 바꿨다.

“저 극악무도한 쥐새끼들이 멋대로 이 폐허를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어서 혼쭐을 내주시옵소서…!”

“찍찍찍!!!”

주변에서 더 많은 혈취자들이 모여들어 광장의 서쪽으로 바글바글 뛰어갔다.

“거미 선생님들! 놈들이 뒤에서 접근합니다! 조심하세요!”

“키게게게겍…!”

거미 악귀 무리는 소수였으며 혈취자들은 절대다수였다.

혈취자 한 마리는 거미 악귀 한 마리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무장하여 집단으로 움직이는 혈취자들은 거미 악귀들을 상대로 충분히 싸울 수 있던 것이다.

파앙!

일부 혈취자들이 주변 건물의 벽을 타고 올라서 화살을 쏘아댔다. 그리고 대다수의 혈취자들은 뼈를 깎아 만든 꼬챙이, 쇠를 깎아 만든 꼬챙이, 각목을 깎아 만든 꼬챙이 등 대체로 뾰족하고 조잡한 무기를 들고서 거미 악귀들에게 달려들었다.

푸욱! 푸욱!

혈취자들은 거대한 포식자를 상대하는 개미군단처럼 그악스럽게 싸웠다. 거미 악귀의 신체 곳곳을 뾰족한 무기로 찌르고 도망치고 다시 와서 찌르기를 반복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면서 거미 악귀에게 많은 혈취자들이 죽임을 당하였지만, 결국 누적되는 상처에 거미 악귀들도 한 마리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박쥐를 닮은 이물은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다시 외쳤다.

“하하하! 멍청한 거미 녀석들! 쪽수도 안 맞추고 오니까 그렇게 당하지!”

이대로 간다면 거미 악귀들이 밀릴 것만 같았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렇게 무시무시한 거미들을 상대로 어쩜 그렇게 용맹한…”

“크그그그….”

“…거미 선생님.”

녀석의 우리 위에 거미 악귀 한 마리가 붙었다.

“……제게는 날개가 있습니다. 저를 이곳에서 꺼내주신다면 하늘로 올라가, 저 쥐새끼들의 동선을 빠짐없이 알려드리겠…”

스스슥!

거미줄이 우리 안으로 들어와서 녀석의 목을 휘감았다.

“…켁…! 거, 거미… 선생님…. 저는 하늘에서… 적들을 파악할 수 있는…”

더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목이 조여서 저절로 눈알이 뒤집혔다.

자연히 녀석의 시야가 하늘로 향했다.

“……끄으윽…”

탁한 하늘을 불나방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그때 거미 악귀는 16개의 붉은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실재세계에서 이거랑 비슷한 악령을 본 것 같았는데…」

「역시나. 쓸모없는 이물이야.」

두드득!!!

거미줄이 거칠게 끊어졌다. 녀석도 숨통이 끊어지고 말았다.

같은 순간, 거미 악귀들과 혈취자들 사이에 놓인 세 남자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새로운 괴물들이 이곳을 침공하고 있어요…!”

“다행이다!”

“다행은 뭐가 다행이야?! 쥐나 거미나 우리의 적이라는 건 똑같아!”

“지금이 기회잖아! 놈들이 혼란한 틈에 골목으로 잘 빠져나가면 살 수 있을지도 몰라!”

“근데 이건 뭐야?”

“…뭐가?”

어느샌가 그들 앞에 핏방울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 핏방울들은 허공에서 새로운 형태로 재조합되었다.

그것은 글자였다.

“여러분을 구하러 왔습니다….”

“나방이 여러분을 탈출시켜줄 겁니다…?”

일단 피로 된 글자를 읽긴 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들이 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하늘로부터 불나방 세 마리가 쏜살같이 내려왔다.

“찍찍! 찍찍찍!”

혈취자들은 불나방들을 보며 뭐라고 소리쳤다.

부우웅!

불나방들은 지면에 내려앉지도 않았다. 친절하게 내려앉아서 그들에게 등을 내어주지도 않았다.

“으앗!”

“으아아아아…!”

하늘을 비행하다가 단번에 활강하여 먹이를 낚아채는 새처럼, 불나방 세 마리가 휙 지나가며 세 남자를 물고 가버린 것이다.

아마 혈취자들은 그 장면을 보면서 말했을 것이다.

“찌이익!”

저것들이 우리의 살점과 가축을 노리고 있다고.

- 크그그…!

- 키에에엑!

이윽고 더 많은 거미 악귀들이 비첸크로이 제국의 폐허를 침공하였다. 그러자 지하수로와 연결된 구멍으로부터 더 많은 혈취자들이 뛰어나와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지키고자 사투를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 * *

지하의 우리에 갇힌 자들은 희망을 품게 되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바깥에서 웬 소란이…”

다들 벌떡 일어서서 철창 앞에 모여들었다.

흙으로 된 천장에 머리가 쓸리지만 그런 건 관심도 없다.

지상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설마 저희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찾아온 걸까요?”

“아니야…. 그건 몰라…. 쥐들은 같은 괴물들이 상대라고 해도 싸운다고.”

캉캉캉!

우리를 지키고 있던 혈취자가 뼈로 된 꼬챙이로 철창을 두들겼다.

“찌이익! 찍찍!”

“조용히 하라는 것 같은데요.”

“조용히 하기는 염병할, 야 이 쥐새끼들아. 네놈들은 이제 끝났다고.”

캉캉!

“찌익!”

“더 쳐봐. 더 쳐보라고 이 자식아.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새끼가.”

“키이…!”

혈취자는 같은 통로를 따라서 우르르 몰려가는 동료들을 잠시 쳐다보더니, 근처 벽에 걸려있던 긴 쇠꼬챙이를 들고 왔다.

“이런 미친, 그러게 왜 자극해?!”

“뭐, 자기가 혼자서 뭘 어쩔 건데?”

“찍!”

혈취자는 긴 쇠꼬챙이를 철창 틈새로 내질렀다.

“지금이야! 잡아!”

그들은 힘을 합쳐 쇠꼬챙이를 붙들었다. 그리고 혈취자가 당황한 순간에 휙 잡아당겼다.

“찌익…!”

“좆같은 새끼…!”

혈취자는 철창 앞까지 끌려와서 그들의 손아귀에 온몸을 붙잡히고 말았다. 누군가는 녀석의 목을 조였고 누군가는 녀석의 팔을, 다리를 힘껏 붙잡았다.

“너도 한번 당해봐라!”

“더러운 쥐새끼야…!”

“야, 야, 꽉 잡고 있어!”

한 명은 혈취자의 바지를 더듬거렸다. 그렇게 열쇠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됐어! 이제 놔도 돼!”

“놔주긴 뭘 놔줘?!”

“이대로 죽여!”

그들은 혈취자의 목을 졸랐고 열쇠를 든 자는 철창 밖으로 손을 뻗어 자물쇠를 풀려고 했다.

“찌이이이이…!”

혈취자는 살려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무기도 없이 등을 보인 채, 왜소한 체구로 성인 남성 다섯 명에게 잡혀서는 도무지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끼이…….”

풀썩!

혈취자는 쓰러지고 말았다. 기절한 건지 죽은 건지는 알 수 없다.

또 수많은 혈취자들의 뜀박질 소리가 통로 저편에서 들려온다.

“뭐야, 안쪽에 더 있었어?!”

“다른 놈들이 또 오기 전에 나가야…”

푸스스스스…!

그들의 뒤에 있던 흙벽이 무너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웬 괴물의 커다란 목구멍이 있었다.

“으아앗!”

“누, 누구세요…?”

그 어둡고 깊은 목구멍 안쪽에서 페인이 걸어 나온 것이다.

그는 우리에 갇힌 자들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벤도르 씨, 달카나 씨, 베니우스 씨. …그리고 다른 분들은 모르겠네요.”

“뭐라고요?!”

“저희 이름을 어떻게…?”

“여러분의 가족들이 북동쪽 도시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

“제 아내는 무사하던가요?! 어, 어머니도 같이 갔었는데요…!”

“선생님! 제 딸아이는 못 보셨습니까?! 키는 요만하고 머리가 짧은 편인데…”

“하나씩 대답할 시간이 없습니다.”

- 찍찍찍찍찍!

혈취자 무리가 더 가까워지고 있다. 곧 이쪽 통로를 지나게 될 것이다. 마주치게 될 것이다.

“이 녀석의 뱃속에 탑승하시죠.”

“이건 괴물…”

“5초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들어가세요.”

그 말에는 행동을 강제하는 힘이 있었다. 설득은 되지 않았지만 이미 마음이 움직였다.

깊게 생각할 시간도 없다. 5초 안에 결정해야 한다. 5초가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곳에 남아봤자 희망은 없다는 깨달음과 이 기회를 놓치면 죽을 거라는 생각. 그리고 가족을 보고 싶다는 간절함이, 생전 처음 보는 괴인과 괴물의 말을 믿어야 한다는 의심스러운 상황 자체를 덮어버리고 만 것이다.

페인은 그렇게 인질들을 올고호르휘에 태웠다.

타다다닷!

그와 동시에 혈취자들이 철창 너머에서 통로를 따라 뛰다가 제각각 뜀박질을 멈추었다.

“찌익! 찌익!”

인질들이 올고호르휘의 뱃속에 탑승하는 걸 그대로 목격하고 만 것이다.

그때 페인은 말했다.

“네놈들이 보존한 식량은 나의 사냥개가 다 먹어치웠다.”

스스스!

올고호르휘는 입을 오므렸다. 그러자 혈취자들은 눈을 새빨갛게 뜨면서 분노했다.

“찌이이이!”

「지상의 인질들은 혼란을 틈타 불나방으로 전부 낚아챘어.」

「하지만 지하에는 여전히 인질들이 많이 있어.」

「지하에 있는 자들도 전부 구하고 싶으면, 지금 보여준 태도를 유지해야 할 거야.」

‘웬일이냐. 네가 타인 걱정도 하고.’

「타인을 걱정하는 널 걱정하는 거다.」

‘그럼 그렇겠지….’

페인은 도끼를 휘둘러 검기를 날렸고, 검기는 철창을 대각선으로 갈랐다.

쩌저정!!!!!

그러자 철장 앞에 모여있던 혈취자들도 대각선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이대로 609마리를 다 죽이면 얻을 수 있는 악이 얼마야?」

이번 싸움은 이전에 있었던 싸움들과 달리 죽은 상대들의 악을 고스란히 흡수하게 될 것이다. 하나도 놓치는 일 없이 말이다.

페인은 시시각각 모여드는 혈취자들을 찢어발기며 어림잡아 계산했다.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은 몰랐네.’

「얼만데?」

‘대략 6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