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28화 (128/181)

25. 지옥으로 가는 길 (3)

110의 악을 갖고 있는 혈취자 609마리.

55의 악을 갖고 있는 박쥐를 닮은 이물 한 마리.

586의 악을 갖고 있는 예르쉬니아의 전파자. 혈취자의 우두머리 한 마리.

734의 악을 갖고 있는 병정개미 한 마리.

「총합 68365.」

「탐지를 5계에서 6계로 강화. 영안(靈眼)을 개방.」

영안은 영력의 흐름을 꿰뚫어볼 수 있는 눈으로, 밤눈처럼 항시 발동되는 것이다.

「재결합을 6계에서 7계로 강화. 실존하는 물질뿐만 아니라 가까운 영혼까지 일부 통제할 수 있는 감각을 습득.」

벨로움 같은 존재들은 내 존재감을 추적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 나는 벨로움으로부터 스스로를 숨기기 위해 내 몸을 핏물로 분해하고 광속을 발동해, 녀석이 냄새를 맡기 전에 자리를 빠르게 이탈하는 편법을 썼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런 편법이 없어도 내 영혼의 존재감을 숨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고속화를 3계에서 4계로 강화. 광속의 지속시간 연장.」

「영력 발산을 5계에서 7계로 강화. 공황을 포함해 공포(恐怖), 심정지(心停止)를 개방. 자살 충동을 강화.」

공황과 공포는 무조건 사방으로 발산되는 것이며, 심정지와 자살 충동은 공황과 공포가 걸린 대상에 한해서 발동할 수 있는 연계기다.

「목줄을 5계에서 6계로 강화. 악귀에 대한 지배력 상승.」

지상에서의 전투 중 식탐을 못 이겨 내 경고를 무시한 거미 악귀들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앞으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감각 증폭을 5계에서 6계로 강화. 모든 감각의 증폭 한계선을 확장.」

「방혈을 6계에서 7계로 강화. 영혼축출(靈魂逐出) 개방.」

영혼축출은 육체에 담긴 영혼에 방혈을 건다는 개념이다. 즉, 어떤 대상의 육체로부터 영혼을 뽑아버릴 수 있는 주술이다.

「발화를 3계에서 5계로 강화. 열폭풍(熱暴風) 개방.」

열폭풍은 제물방류와 위력이 비슷한 대규모 주술이다.

방혈에서 비롯된 제물방류는 상당한 혈액을 요구하는데, 발화의 열폭풍은 발동에 아무 조건이 필요 없다. 대신 열폭풍은 제물방류와 달리 화력의 범위와 정도를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지적 활동을 3계에서 5계로 강화. 같은 순간에 복수의 주술들을 더 잘 다룰 수 있도록 병렬적 사고가 가능.」

굳이 광속을 켜지 않은 상태라도 짧은 순간에 다양한 것들을 고려하고 더 섬세한 주술을 여러 개씩 동시에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저주 저항과 마법 저항 6계를 각각 7계로 강화.」

「영적 저항 3계를 4계로 강화.」

그렇게 나는 7만에 가까운 악을 모두 흡수하였다. 나는 그만큼 강해졌으며, 내 영혼은 그에 준하는 만큼의 악을 업보라는 형태로 쌓게 되었다.

「이제는 상대가 악마의 하수인이라고 해도 혼자서 이길 수 있을 거야.」

나는 혈취자들로 구성된 잿빛세계의 한 문명을, 사회를 없애버렸다. 악을 얼마든지 흡수하여도 악령화의 문제가 없는 몸이라 모조리 흡수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대가는 확실했다. 이전에 겪었던 싸움들보다 훨씬 큰 대가를 고스란히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크나큰 악을 흡수한 탓일까, 아니면 나라는 존재가 인간으로부터 더 멀어진 탓일까.

지옥과의 연결성이 너무도 뚜렷해졌다.

「실재세계에서 잿빛세계에 있는 악귀들의 존재를 느끼는 거랑 비슷한 것 같아.」

상당히 비슷하다.

나는 지금 잿빛세계의 황궁에 있지만, 핏빛세계에 있는 존재들이 그곳에서 황궁과 비슷한 위치에 도사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악한 존재들이 뭔가와 싸우고 있다는 걸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으며, 그중에 일부는 내게 미지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핏빛세계라는 종착지로 가는 길은 모르겠지만, 그 종착지가 어디에 있는지는 가리킬 수 있을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 * *

데이진타우 제국 폐허의 황궁에 있던 자들은 내가 가져온 소식에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마지막엔 가족과 재회한 자들, 가족과 재회하지 못한 자들의 반응이 나뉘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승리했지만 모두가 기뻐하는 결과는 되지 못한 것이다.

몇 사람들은 시신이라도 수습하고 싶다며 내게 비첸크로이 제국 폐허까지 데려다 달라고 요청했지만 난 거절했다.

그곳에는 수습할 수 있는 상태의 시신이 더는 없기 때문이고, 죽은 몸들이 전부 썩어서 백골이 될 때까지는 흑사병의 위협이 도사리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내가 털어놓자 사람들은 끝내 납득하였다. 체념하였다.

이후에는 모두가 악귀들과 함께 낙원으로 출발한 것이다.

‘한 마리도 빠져나가선 안 돼. 들어가서도 안 되고.’

나는 비첸크로이 제국 폐허에 불나방들을 배치하여 흑사병의 위협이 사라질 때까지 감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전투를 하면서 흑사병에 노출된 악귀들은 한 마리도 빠짐없이 죽여서 새로 만들었다.

수백 마리를 그렇게 죽이고 다시 만들었지만 영력에는 여유가 있었다. 내가 가진 영력이라는 영혼의 그릇이 더 커진 덕분이었다.

나는 사람들을 모두 낙원으로 보낸 후, 데이진타우 제국 폐허의 해안에 남았다.

지금은 올고호르휘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이건 작별이 아니야.”

“키이이…”

“어차피 그곳에서 너를 부르게 될 거야.”

“….”

“내가 상대하게 될 거악은 아주 강해. 그런 거악들과 싸우다 보면 악귀가 죽는 일도 다반사야. 너도 예외는 아니지.”

“키이이이… 키이…”

올고호르휘는 내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한다.

“너처럼 지능이 있는 악귀가 있었어.”

“….”

“아라나크… 라고 하는 악귀였지.”

올고호르휘는 잿빛세계의 바다에 몸을 반쯤 담갔다. 녀석은 내가 목줄로 소환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바다를 조금씩 탐색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녀석의 임무다.

“네가 나를 보는 시선이 뭔지는 알겠는데, 나는 너한테 정을 붙이지 않을 거야. 또 그런 일을 겪고 싶진 않거든.”

“키이이.”

그러자 올고호르휘는 내 뜻을 받아들였다.

자신이 일방적으로 이용당하다 죽는다고 하여도 죽기 전까지는 기꺼이 헌신하겠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녀석이 어째서 이렇게 스스로 손해를 보는 선택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일단 서로의 뜻은 일치했다.

“그래. 나는 너의 능력을 이용할 거야. 너는 성불하기 전까지 나를 따라다니고….”

“키이이이이.”

“그렇게 서로 원하는 것만 얻고서 끝내자. 우리 사이에서 그것 외에 다른 가치는 불필요하니까.”

올고호르휘는 내 말을 듣고서 바다로 사라졌다. 나를 떠나는 녀석에게서 미련이 느껴지는데, 지금 이렇게 녀석을 보내봤자 조만간에 보게 될 것이다.

‘우리도 슬슬 가봐야지.’

「어디로?」

* * *

이 대륙에서 가장 강한 흑마법사로 알려진 셰르카.

그녀는 자신의 을씨년스러운 저택 지하에서 새로운 주물을 연구하고 있었다.

“넌 이 안에서 무엇이 보이느냐?”

“퀴익.”

“나랑 들판에서 뛰어놀고 있다고?”

“퀴이익.”

셰르카가 연구하고 있던 주물은 ‘거울’이었다. 다만 보는 자에 따라서 비치는 것이 다른 거울이었다.

이리의 눈에는 거울 너머에 아름다운 들판과, 그 들판에서 뛰어노는 셰르카와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셰르카의 눈에는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거울에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엄마가 보이는데.”

“…퀴익?”

“각자가 들어가고 싶은 장면을 보여주는 거울인가 보다.”

“퀴이이…”

“그건 허락할 수 없다. 들어갔다가 빠져나올 수 없게 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셰르카는 거울로 유리구슬을 던졌다.

지잉.

그러자 유리구슬이 거울 안으로 쏙 들어가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난해하구나. 이 주물이 정말로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환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 …광인의 숲에 버려져있던 것이라 누군가에게 설명을 들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퀴익. 퀴익.”

“같은 생각이다. 직접 들어가지 않고선 모르겠지.”

거기까지 결론을 내린 그녀는 등을 돌려 지하의 한구석으로 걸어갔다. 이리는 거울의 테두리를 촉수로 만져보며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비켜라.”

그녀는 망치를 들고 왔다.

“퀴익!”

“이 거울을 보고 있으면 계속 들어가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

거울 속에 있는 어릴 적 자신의 모습.

그리고 그런 자신을 품에 안고서 책을 읽어주고 있는 모친의 다정한 얼굴. 눈빛. 목소리.

절대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보여주고 있는 거울이 거슬렸다.

“퀴이익…!”

이리는 그녀의 발치로 쪼르르 기어 와서 촉수를 한껏 펼쳐 그녀를 가로막았다.

“내 말을 잘 듣기로 하지 않았느냐.”

“퀴잉….”

“나도 전부 포기하고서 이 속에 들어가고 싶단 말이다.”

“….”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이해해야만 한다. 우리 함께 저주받은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하지 않았느냐.”

틱틱틱.

이리는 맥빠진 촉수를 늘어뜨린 채 그녀의 사선으로 물러섰다.

“달콤한 환상이다. 이런 행복은.”

쨍그랑!

셰르카는 망치로 거울을 깨버렸다. 한번 깨는 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연달아 망치를 휘둘렀다. 그런 모습이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거부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거울은 주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 난잡하게 깨져 흩어진 유리조각이 되었다.

“퀴이잉…….”

이리는 흩어진 유리조각을 괜스레 촉수로 건드렸다.

그런 이리를 셰르카가 주워서 품에 안았다.

“널 죽이고 싶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네가 원망스럽다.”

“퀴이….”

“하지만 이리. 네가 없다면 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리는 침묵했다.

“너까지 없어진다면 그 상실감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걸 깨달았으니…. 우리는 새로운 마음으로 전진하면 되는 것이다.”

비교적 밝았던 과거.

비교적 어두운 미래.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로선 과거를 뒤로하고 미래를 직면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원히 달콤한 꿈에 빠질 게 아니라면.

“……그래도 전보다는 상황이 나아졌다.”

이리는 셰르카의 품에 더 바짝 다가들어 안기듯, 그녀의 목과 상반신을 촉수로 천천히 휘감았다.

“본래 우리의 끝은 절대적 절망이었지만, 페인이 우리 앞에 나타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퀴익….”

“그로 인해서 천사들까지 움직이고 있다. 어쩌면, 어쩌면 정말…. 지옥을 이겨낼 수 있을지도….”

지금까지 쌓아온 업보가 있다. 그 업보 탓에 죽으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죽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이 순간에도 소음이 되고 있는 영혼들의 울부짖음이 지옥에 오라며 손짓하고 있으니.

“페인도 같다.”

페인도 쌓아온 업보가 있다. 천사들이 그의 편을 들어준다고 하여도 인과율을 어길 수는 없다. 그는 영혼에 쌓인 업보로 인하여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죽어서든 살아서든 말이다.

따라서 살아있을 때 더 강해져서 지옥에 가려는 것이고, 업보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강해진 끝에 지옥의 악마까지 이겨내려는 것이다.

“그곳에 떨어져서 영원히 고문을 받을 바엔 싸우다가 전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지.”

싸우다가 전사하리라 생각했다. 최소한 그곳의 끔찍한 존재들과 ‘전투’ 정도는 성립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려고 했다.

그래서 절대적 절망이었다. 아무리 강해져도 최선의 결과가 죽음이었으니.

하지만 페인이 등장하면서 정말로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와 함께라면.

“게다가 천사들까지 지옥을 공격하고 있다고 하니까….”

만약 승리하게 된다면 이 세계가 어떻게 바뀔지는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나 페인이 어떤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인지도 모른다. 최후라는 것이 있을지 없을지도 아직은 모른다.

지금으로선 그저 이기는 것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지옥으로 가는 길을 따라서 걷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셰르카.”

지하실의 계단 위쪽에서 페인이 내려왔다.

“언제부터 있던 것이냐?”

“방금 온 거야.”

“너….”

셰르카는 그에게서 막대한 영력을 느꼈다. 또한 사악한 영혼의 목소리들이 그를 부르고 있으며, 그에게 달라붙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용의 무덤에서 벨로움은 아그니샤가 해치웠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 네가 뿜어대고 있는 그만한 악을 어디서 얻었느냐?”

“잿빛세계에서 아주 많은 것들을 흡수했지.”

“악령화는?”

“문제없었어.”

“희소식…. 이구나.”

이리는 우산 모양으로 돌아갔다.

셰르카는 이리의 손잡이를 쥐고서 지팡이처럼 짚었다.

페인은 바닥에 흩어진 유리조각을 잠시 지켜보다가, 말을 꺼냈다.

“방금 승천자에게서 전언으로 들었어.”

“무엇을?”

“지옥. …핏빛세계에 끌려갔던 아그니샤가 돌아왔다고.”

“그곳에서 돌아올 수 있던 것이냐? 아니, 아그니샤는 또 어떻게 그곳까지 끌려갔다는 말이더냐?”

“악마의 하수인 벨로움이 주술을 부렸어. 천사들은 아그니샤가 갓난아이였던 시절부터 그녀를 핏빛세계로 가는 열쇠로 삼고 있었고. 복잡한 사연이 있더라고.”

“아그니샤…. 샤…. 그 이름이 우연은 아니었구나.”

페인은 이어서 이야기했다.

“천사들은 그곳에 다차원 거울과 전초기지를 세웠어. 우리가 이러고 있는 순간에도 불리한 전쟁을 치르고 있지. 정말 수많은 천사들이 그 세계에서 전사하고 있어.”

“그곳에서 돌아올 방법이 있다면, 넘어갈 방법도 있다는 뜻인가?”

“그건 처음과 같아. 지옥과의 연결성이 짙어지면 길이 보이게 될 거야.”

“지금도 상당히 짙어 보이는데…. 너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말이다. 낙인이 없었다면 진작 끔찍한 악령이 되었을 것만 같은 깊이다.”

“맞아. 그곳에서 느껴지는 것들이 강렬해지고 있어. 머지않아 정말로 지옥에 갈 수 있게 될 거야.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가게 되거나.”

셰르카는 거기까지 듣고서 나지막이 말했다.

“결국 더 사악한 존재들을 해치워야 하는 운명임은 변함이 없나.”

지옥의 존재들이 천사들의 침공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면, 그곳에서 실재세계로 거악을 보낼 여유는 없을 것이다. 악마의 하수인 벨드샤나 벨로움 같은 존재가 또 나타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페인이 실재세계에서 거악을 해치우고 힘을 키울 수 있는 적합한 상대가 있다면 뻔하다.

“악마의 하수인도 더는 없고…. 카프하니드는 죽었고 용의 부활은 막았고…. 역시 남은 건 태고의 괴물들인가.”

“크라켄들이지.”

“…다음은 기어가는 델펜토르인가?”

“그 녀석을 포함해 일곱 마리가 남아있어. 그리고 우리는 크라켄을 한 마리씩 깨워서 사냥하게 될 거야.”

이것은 상위 천사 네이트가 직접 알려준 정보다.

“태고의 피조물들을 하나씩 사냥하다 보면 지옥으로 가는 길이 열릴 거야.”

가라앉은 카프하니드가 죽고도 일곱 마리가 남았다.

470번째 크라켄. 기어가는 델펜토르.

391번째 크라켄. 깨부수는 론.

337번째 크라켄. 쏟아붓는 스퀴아.

207번째 크라켄. 몰아치는 만타.

163번째 크라켄. 속삭이는 이비.

83번째 크라켄. 먹어치우는 헤이거스.

3번째 크라켄. 노래하는 누샤니움토.

“너무 많다.”

“많지.”

“그 많은 크라켄들을 어느 세월에 다 찾아서 해치운다는 말이더냐?”

“남은 일곱 마리를 다 해치우기 전에 일이 터지겠지.”

“뭐?”

“그곳으로 가는 길을 찾게 되거나, 그곳으로 끌려가게 되거나, 그곳에서 우리를 막겠다고 무언가를 보내올 거야.”

“전 인류가 힘을 합쳐도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200번째 이전에 빚어진 초창기 크라켄들은 가히 신화의 영역이다. 어쩌면 용보다도 강할 수 있다.”

「우리도 신화의 영역에 있어.」

「그리고 점점 더, 비약적으로 강해질 거야.」

「이제는 싸울 때마다 버리는 악이 없거든.」

“원리는 이해가 되지만…. 정말 괜찮은 것이냐?”

그녀의 물음에도 페인은 담담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고 있었다.

죄는 덜어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어떤 방향으로든 눈덩이처럼 굴러가는 것이었다.

그러다 결국 부서진다는 결말을 극복하기 위해, 눈덩이에 돌을 섞기 시작한 것이다.

“페인?”

“그러다 괜찮지 않게 되었을 때 핏빛세계의 땅을 밟게 되겠지.”

결국 걷게 될 길.

누군가는 천국에 가기 위해 선행을 쌓으며 살아가지만, 그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전혀 아름답지도 밝지도 않았으니.

오로지 지독한 어둠 속에서 희망이 아닌,

절망을 피하기 위한 길을 처절하게 찾아가고 있을 뿐이니.

“할 거야, 말 거야?”

그녀는 픽 웃었다. 대수롭지도 않은 질문이라는 듯이.

“오늘도 자신의 내일을 결정할 수 있는 자들이 부럽구나.”

“…그래서 하겠다고?”

“하겠다.”

그렇게 지옥으로 가는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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