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우리는 그것을 악마라고 부른다 (2)
핏빛세계에 들끓는 악마의 피조물들이 끝도 없이 몰려든다.
쿠웅! 쿠웅! 쿠웅!
무지막지한 크기의 황금 철퇴 수십 개가 전장을 강타하는 광경은 악마의 피조물뿐만 아니라 피로 물든 대지까지 파괴하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황금 철퇴를 휘두르며 포드키엘 군대를 이끄는 지휘관이자, 천계의 무력을 움직이는 대천사.
엑수스가 전장을 파괴하고 있다.
“흐아아압!!!”
그의 주먹질에 대지가 갈라지고 어둠의 산맥이 둥글게 뚫려나갔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힘을 휘두르는 전장에서는 천계의 군대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샤아아아아아!
하지만 이곳은 악마들의 본거지이자 악마들의 세계다. 정말로 엑수스가 이 전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 할지라도 핏빛세계 전체가 이들을 향해 모여들고 있으니.
끝없이 모여드는 적들의 숫자는 전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 것이다.
쩌저저적!
그의 주먹질에 갈려나간 대지로부터 거인들이 흙을 부수며 기어 나왔다. 녀석들의 덩치와 키는 좀 전에 엑수스가 뚫어버린 어둠의 산맥처럼 거대했다.
“꾸우우우…!”
거인들은 입에 빨판 달린 촉수를 물고 있었다. 그 촉수 하나하나의 크기가 카프하니드의 몸체를 방불케 하였다.
“비켜! 엑수스!”
네이트가 엑수스 앞으로 뛰어왔다. 그러자 그보다 앞에 있던 포드키엘들이 뒤로 빠지고, 전방의 하늘에서 싸우던 발키리들까지 비명 지르는 먹구름을 등졌다.
쿠우웅! 쿠우웅!
거인들과 비슷한 크기의 십자가 두 개가 전방에 떨어졌다.
키이이이잉!
두 십자가는 초월적인 빛줄기를 뿜어내 거인들의 다리를 잘랐다. 그렇게 다리가 잘린 거인들은 덩치가 너무도 큰 탓에 대지에 코를 처박기까지 10초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역겨운 폭풍이 몰아치고 땅이 울리는 지진이 퍼졌다.
“숱한 싸움을 겪어왔지만 저런 피조물은 본 적도 없다!”
“그렇겠지! 여긴 지옥이니까!”
거대한 십자가 두 개를 향해 지옥의 군대가 달려들고 있다. 그러자 십자가 두 개가 전방으로 쓰러졌다. 직후 눈부신 섬광이 터지며 주변에 모여든 지옥의 군대를 하얗게 태워버렸다.
“천계로 넘어오는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피조물들이라고!”
“내가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것들은 졸개에 불과했단 말이더냐…!”
엑수스는 주먹을 꾹 쥐며 전방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샤아아아아아…
하늘의 절반 이상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가 먹구름 사이를 헤엄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용과 고래를 닮은 듯한 그것은 수천 개의 눈알을 부라리며, 지상에 촉수를 내렸다.
퍼엉! 퍼엉!
폭력적이고도 위압적인 크기의 촉수들이 지상에 내리꽂힐 때마다 대지로부터 핏물이 터져 나왔다. 그 핏물 속에서 더 많은 피조물들이, 더 심하게 뒤틀린 거대한 피조물들이 출몰하였다.
“다차원 거울을 지켜야 해! 그러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죽게 될 거야!”
엑수스와 네이트의 뒤에 있는 다차원 거울.
천계의 군대가 둥글게 에워싸 지키고 있는, 전장의 중심에 있는 다차원 거울.
그것은 거대한 직육면체 모양의 거울이었다.
“다차원 거울이 어쩌다 제 기능을 잃게 된 것이냐?! 나와 나의 부하들은 분명 저 거울을 넘어서 이곳에 도달했을 터!”
“악의 농도가 너무 짙어진 탓이야!”
쐐애애애앵!
초월적인 크기의 촉수가 네이트를 노려서 돌진해왔다.
으지직…!
엑수스의 황금 철퇴가 그 촉수를 으깨버렸다.
“이 끔찍한 세계에서는 어딜 가나 악의 농도가 짙을 것이다!”
“당신이 오기 전보다 더 짙어졌다고!”
“악마의 피조물이 모여들고 있는 탓인가?!”
“그럴 수도 있고! 어쩌면 그보다 더…”
- 네이트.
- 엑수스.
“웬 놈이냐!”
저주받은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였다.
- 네놈들은 나를 멸하러 온 것이겠지.
네이트는 작게 말했다.
“…샤.”
지옥 그 자체이자 만악의 근원인 악마.
인간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악과 악마들의 머리가 되는 존재다.
- 그로부터 얼마나 세월이 지났는지 모르겠군.
- 세인트는 아직도 앓아눕고 있나? 인간들을 지키겠다고 어리석은 희생을 자처한 탓에 승리를 포기한, 네놈들의 여신 말이다.
“천벌을 받을 놈…! 당장 튀어나와라! 이 몸이 상대해 주마!”
- 그때 네놈들은 그리 말했지. …내가 차원의 틈을 열어 혼돈을 불러일으킨 탓에 세계의 인과율이 망가졌다고.
- 그런데 네놈들이 이대로 지옥을 정복하고 나를 멸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세계의 인과율을 해치는 일이 아닌가?
네이트는 황금빛 동공에서 조용한 살기를 뿜어댔다.
엑수스는 하늘의 절반을 뒤덮는 크기의 황금 철퇴를 소환하였다. 그리고 지금 다른 하늘의 절반을 뒤덮고 있는 고래와 용을 닮은 피조물에게 그 거대한 황금 철퇴를 내던졌다.
쿠우우웅…!
지상에 촉수를 내리던 거대한 존재가 뇌성과도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샤! 네놈과 네놈이 빚어낸 존재들이 더러운 혀를 놀린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 대답을 회피하는군.
-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듯 우리가 있기에 네놈들도 있는 것이다.
- 인간의 세계에는 공평하게 절반의 악과 절반의 선이 존재하고 있지.
“그렇다! 바로 그 인과율을 깨버린 게 네놈이란 말이다! 현계에 혼돈을 불러일으키고 천계에 끊임없이 사악한 존재들을 침투시켜온 네놈이! 모든 문제의 시초란 말이다!”
-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네이트는 눈을 부릅떴다.
“저 쓰레기가 말같지도 않는 소리를….”
- 천사들도 종종 현계에 강림하지 않는가.
“네놈들이 현계로 필요악 이상의 악을 보내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현계에 발키리를 보내며 개입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엑수스는 타오르는 불구덩이 같은 소환진을 하늘에 펼쳤다. 그러자 각각의 소환진으로부터 철퇴가 쏟아져 지상의 피조물들을 대지와 함께 으깨버렸다.
“네놈들이 악마의 하수인을 보내지만 않았어도! 네놈들이 현계에 끔찍한 피조물들을 남겨두지만 않았어도! 선과 악의 절대적 존재들이 현계에서 싸울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곳은 인간의 세계야! 우리도 너희도 손을 뻗어선 안 되는 세계라고!”
- 그럼 네놈들이라도 현계에 개입하는 걸 멈추는 게 어떤가? 본래 마법이란 인간들이 휘둘러선 안 되는 힘이지 않나.
“네놈이 악령과 주술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네놈이 그러지만 않았다면 우리도 인간들에게 마법이라는 수단을 내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현계에서 생을 다해 윤회하고 성불해야 할 가여운 영혼들이 있어! 그런데 그들이 뒤틀린 잿빛세계에 갇혀 떠도는 오늘날을 보라고! 이러니까 당신이 끔찍하다는 거야! 당신이 일으킨 그날의 혼돈이 인과율을…!”
- 그러니까…. 천계가 그렇게나 중요시하는 인과율 말이지.
- 이렇게 나의 세계를 정복하고 나를 멸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과율을 해치는 일이 아닌가.
- 악이 없는 세계에서는 선이라는 개념도 없게 될 테니.
그러자 엑수스는 천둥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네놈은 착각하고 있다!”
- 내가? 네놈들이 아니라?
“우리는 핏빛세계를 없애지 않을 것이다!”
- 그것 참 자비롭군.
“단지 핏빛세계에서 군림하며 인과율을 해치려는 거악의 존재! 언제나 모든 문제의 시초가 되는 네놈을 멸하고 모든 것을 원래대로 고치려는 것이다!”
“현계에 있는 악도 처음처럼 50대 50으로 나눌 거야! 인간들의 세계에서 선과 악이 공존하게 할 거라고!”
엑수스의 황금 철퇴가 떨어진 후엔 네이트의 은빛 십자가가 거꾸로 솟아올랐다. 비명을 지르는 먹구름들을 빛으로 꿰뚫고서 포물선 궤도를 그리며 전방의 대지에 떨어지는 십자가들은 다시금 대지를 폭격했다.
앞서 황금 철퇴에 맞아 거의 으깨졌던 피조물들은 뒤틀린 육체를 더욱 괴이하게 바꾸며 부활하려고 하다가, 쏟아지는 십자가에 맞아 저지당했다.
“지금처럼 천사와 악마들이 개입하는 세계가 아니라! 인간들의 진정한 세계로 바꿀 거라고!”
- 아쉽게 되었군.
-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들은 50 대 50의 선과 악을 가진 존재들이 아니라서 말이지. 네놈들이 ‘고치겠다고 하는 정상적인 현계’의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현계의 모습과 결이 다르구나.
“뭐야?!”
“….”
- 인간은 100의 악을 갖고 태어난다.
- 본래 사악한 존재다.
- 그렇게 사악하게 태어난 존재들이, 원치도 않는 선을 억지로 세뇌당하며 자란 탓에 50 대 50의 선과 악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 그러니까…
- 나는 모든 인간들의 영혼을 자유롭게 만들어주겠다는 대의를 갖고 있다.
- 그들이 본래 갖고 있는, 네놈들의 가치에 오염되지 않은, 가장 순수하고 원초적인 모습 그대로 말이지.
- 그런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나?
- 네놈들의 뜻에 세뇌 당하여 얼어붙은 인간들보다, 나의 속삭임에 흔들리는 인간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고.
엑수스는 단언했다.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 그렇지 않다면, 그런 인간들과 그렇지 않은 인간들끼리 어디선가 편을 갈라 싸울 수도 있겠지.
-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짓거리처럼 말이다.
* * *
우토는 허공에 매달려서 검은 피와 새빨간 내장을 토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우토의 상태를 빠르게 알아차린 매 역병 교수가 달려왔다.
“스승님!”
퍼억!
매는 우토를 밀쳐서 지면에 눕혔다.
“허어윽…. 허윽…….”
“조금만 버티십시오! 제가 강령술사님을 모셔오겠습니다!”
매는 그렇게 말하면서 셰르카를 보았다.
“스승님을 지켜주십시오!”
“…아니야.”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죽여야 해.”
“셰르카 님!”
“우토를 죽여야 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순간, 우토가 매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죽어가는 사람의 힘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강한 완력이었다.
그리고 셰르카는 우토에게 손아귀를 뻗었다.
그때 우토가 죽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악마다….”
셰르카는 멈칫했다.
“악마가 개입하고 있다….”
“스승님…!”
“나 하나를 살리겠다고… 강령술사님께서 돌아오실 여유는… 없다…. 악마가 있으니….”
우토의 눈이 천천히 뒤집혀서 흰자위만 드러났다.
“그리고… 속삭임이 들려…”
“포기해선 안 됩니다! 강령술사님이 오실 수 없다면 누구라도 찾아서 어떻게든 데려오겠습니다!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나의 신념이… 흔들리고 있다.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그분을 향한 신념이….”
우토는 섬찟했다.
악마가 개입했다는 말보다, 강령술사를 향한 우토의 신념이 흔들렸다는 말에 더 놀란 것이다.
스으으!
셰르카가 전이해왔다.
“비켜.”
그녀는 매를 밀쳐냈다.
“우토. 내가 너 죽이는 거 괜찮지?”
“악령이… 될 것 같습니다…. 어서 소인을….”
매는 의미 없이 손을 뻗었다. 허공에 놓인 그의 손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의 속삭임이… 눈 뒤쪽에서…”
“너는 훌륭했다. 같은 흑마법사로서 인정하지.”
“아늑한 심연의 품에서… 잠들고 싶습니다….”
스으으!!
셰르카는 우토의 심장에 검은 연기를 흘려 넣었다.
“아… 그녀가 보입니다…. 어릴 적 그녀가…”
우토의 피투성이 입가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렇게 우토는 행복한 잠에 빠지듯 숨통이 끊어지고 말았다.
“스승님….”
매는 우토에게 한 손을 뻗은 채, 망연자실하게 바닥을 짚고 있다.
셰르카는 매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뭘 하고 싶은 거냐?”
“스승님이….”
“주저앉아서 슬퍼하고 싶다면 역병 교수의 머리 자리를 다른 씩씩한 놈에게 넘겨라.”
“스승님의 주검이라도…”
“이 싸움에서 도망쳐 우토의 시신을 매장하고 애도라도 표하고 싶다면 그리하거라.”
“….”
그러자 매는 칼 두 자루를 뽑아냈다.
“퀴익!”
이리가 그를 경계했다.
좀 전부터 싸늘한 바람이 불고 있다.
“……악마가 이 전장의 어딘가에 있다면, 다른 자들도 위험에 처할 것입니다.”
“그래서?”
“가보겠습니다.”
매는 우토의 시신을 그 자리에 두고서 사라졌다.
“퀴이이익!”
바로 그때 셰르카를 노려서 기어 온 창자들을 이리가 해치웠다.
“퀴이이!”
“악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좀 전에는 나를 노렸던 것 같은데.”
셰르카는 앞뒤의 전장을 확인하였다.
앞에서는 페인과 아그니샤가 델펜토르의 몸체 세 개를 상대하고 있다.
뒤에서는 연합군 병사들이 각 전장마다 델펜토르의 세 몸체를 하나씩, 그리고 전선을 이루어 창자들을 상대하고 있다.
“놈은 목표를 바꾼 것이다.”
앞쪽 전장. 다시 말해 페인과 아그니샤가 있는 쪽에서는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둘은 강력한 주술과 마법을 부리며 델펜토르의 세 몸체를 잘게 조각내고 있다.
“앞이 아니라면.”
연합군 병사들의 전장이 위태로워 보인다.
“뒤를 도와야…”
쿠적쿠적쿠적!
창자들이 온 사방에서 모래를 뚫고서 튀어나왔다. 그녀를 중심으로 온 사방에서 모여들고 있다. 그리고 그중에는 색감과 질감이 델펜토르의 커다란 몸체와 비슷하게 변하여 덩치를 부풀리고 있는 창자들도 있었다.
뒤로 가서 연합군 병사들을 도우려고 했는데.
“나를 여기에 묶어두겠다는 뜻이구나.”
“퀴익!”
“물론 전이할 수는 있지.”
셰르카는 우토의 시신에 손아귀를 향했다.
“그러나 이것들을 해치우지 않으면 우리 뒤에 있는 연합군의 부담이 더 커지거나, 앞에 있는 여전사와 그의 등이 노려질 수도 있다.”
그녀의 손아귀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와 우토의 시신에 스며들었다.
“네크드라쉬아. 유토.”
“흐으어어어…!”
우토의 시신 위로 그림자가 일어섰다.
“튤리아. 가하쉬안. 라토움. 반다토움. 데우샤.”
주인을 잃은 그림자는 주인의 육신으로부터 빠져나온 피와 내장을 몸속에 머금었다.
“드라쉬르. 너는 시한부다.”
“흐으으으! 흐으으!”
“죽은 혈액과 내장은 썩어갈 것이다. 그전에 주인의 투지를 이어받아 싸우거라. …그것이 우토가 네게 원하는 것이다.”
“흐으어어어어!”
그림자는 우토의 시신으로부터 벗어나 촉수를 휘두르고, 손톱을 휘두르고, 흑염을 뿜어댔다.
“퀴익! 퀴익!”
이리가 우산의 형태로 돌아갔다. 그녀는 이리를 다시 손에 쥐었다.
타닷!
이윽고 그녀는 시한부 그림자를 따라 뛰어다니고 전이하며, 재차 창자들을 상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흐으어! 흐으어어어어!!!”
그때 시한부 그림자는 울고 있었고,
- 히이이이이이!!
델펜토르는 황홀경에 빠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