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우리는 그것을 악마라고 부른다 (3)
바다에서 새로이 나타난 델펜토르의 커다란 몸체 셋은 연합군을 덮치고 있다.
그중에 하나는 독수리가 있는, 마법사가 적고 평범한 병사들이 많은 전장을 노리고 있었다.
으지직!
녀석은 이곳에 배치된 투석기와 작살 발사대를 몸으로 쳐서 부수고 점액으로 녹이며 전진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토출된 창자들이 제각기 몸을 부풀리며 더욱 위험한 집단으로 변모하고 있다.
“저희가 틈을 만들겠습니다!”
병사들은 창자가 들끓는 곳으로 기꺼이 파고들어 싸웠다. 창자는 점액으로 그들의 갑옷과 무기를 녹이면서 그들의 몸을 휘감고 목구멍으로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병사들은 물러서지 않고 창자를 하나씩 베어 가는 중이다.
적잖은 희생자가 눈앞에서 속출하고 있지만, 덕분에 독수리는 창자들의 방해 없이 전장을 가로지를 수 있었다.
푸화악…!
모래 위로 창자들이 튀어나와 그를 노렸다.
쐐액! 화르륵!
뒤에서 불화살이 날아들어 그 창자들을 저지했다.
“가십시오!”
“고맙소.”
독수리는 델펜토르의 커다란 몸체 앞까지 무사히 접근했다. 모래 위에서 점액과 창자를 흘리고 있는 녀석은 몸체를 일으켜 세우며 새하얀 촉수들을 뻗었다. 이에 독수리는 가시 박힌 몽둥이를 힘차게 휘둘렀다.
으직…!
그의 무지막지한 괴력을 이겨내지 못한 촉수들이 으깨졌다. 으깨지는 와중에도 점액을 쏟아내 독수리를 위협했다.
치지지지…!
하지만 독수리에게 ‘위협’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했다.
그는 끓는 점액을 뒤집어쓰면서도 싸우기 때문이다. 그가 몽둥이로 녀석의 몸체를 강타할 때마다 녀석은 몸체 전체가 흔들려서 조금씩 측면으로 밀려났다.
퍼억! 퍼억!
오목하게 들어간 상처로부터 창자들이 토출되어 독수리를 휘감았다. 그의 사지를 조이고 목을 조였다. 하지만 독수리의 행동은 조금도 저지되지 않았다.
퍼억! 퍼억! 퍼억!
몇 번이나 몽둥이질을 한 걸까. 상당한 크기를 자랑했던 몸체는 으깨진 살점처럼 변해서 점액과 창자를 잃어버린 채 몇 개의 몸체로 분열하였다.
독수리는 그쯤에서 외쳤다.
“불타는 작살을 쏘시오!”
그의 뒤에서 창자를 상대하던 자들은 주저했다.
“하지만 그랬다간…”
“나는 괜찮소! 어서!”
“…불타는 작살을 쏴라!”
“불타는 작살을 쏴라!”
- 쏴라!
병사들의 입을 타고서 후방까지 전해진 그의 뜻은 곧 작살 발사대에 있는 자들의 귀까지 닿았다.
그곳에 있던 지휘관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 쏴라아아아!
근방에 남아있는 작살 발사대들이 일제히 한 방향을 조준했다. 그 작살마다 붙어있는 부적은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뜨겁게 타오르는 것이었다.
쐐애애액!
독수리 앞에서 분열하고 있는 델펜토르의 몸체들은 점액을 뱉어내 방어할 틈도 없이 모든 작살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말았다.
화르르!
점액이 끓어서 사라지고 꿈틀대는 창자들이 고통스럽게 태워진다. 불에 노출된 녀석의 몸체가 점점 더 작게 분열한다.
쐐액!
또한 뒤에서 날아든 작살들은 독수리의 등에도 떨어졌다.
몇몇 작살은 그의 갑옷에 튕겨져 나갔고 또 몇몇 작살은 그의 갑옷을 뚫고서 그의 살갗까지 파고들었다.
독수리는 등에 꽂혀서 불타는 작살을 거칠게 뽑았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델펜토르의 몸체에 꽂아버렸다.
푸화아아악!
델펜토르의 몸체는 점액을 쏟아내 불을 꺼버렸다. 하지만 점액을 쏟아버렸다는 건 그만큼 녀석의 덩치가 줄어들었다는 걸 의미한다.
“죽을 때까지 으깨주마.”
퍼억!
그때 독수리를 마주한 델펜토르의 몸체는 최후의 발악을 하려고 했으리라. 머금고 있던 창자와 점액이 부족하니 으깨진 촉수라도 내질러서 그의 살벌한 몽둥이질을 멈추려고 했으리라. 몽둥이로 폭력을 휘두르는 자를 멈추기 위해,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상대방의 몽둥이를 잡듯이 말이다.
곧 촉수들은 독수리의 오른팔을 휘감았다.
푸푸푸푸푹!
그러자 몽둥이의 예리한 가시들이 길게 돌출되었다.
뚜드득!
독수리는 오른팔을 움직였다. 촉수들은 몽둥이의 가시에 갈려서 찢어지고 떨어졌다.
“후우우….”
그의 방독면에서 뜨거운 입김이 흘러나왔다.
‘이렇게까지 으깨놨으면 곧 죽을 때가 된 것이다.’
독수리는 두 손으로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위협을 느낀 촉수들이 그의 몽둥이를 쫓아갔다.
그리고 촉수들이 느낀 위협이란 영력이었다. 독수리의 영력이 몽둥이에 모이고 있는 것이었다.
몽둥이에는 길이와 너비가 있다. 그래서 몽둥이를 이렇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쳤을 때 타격할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한껏 영력을 머금은 그 일격은 몽둥이라는 수단을, 실체를 초월하였다.
콰아아앙!!!
그가 몽둥이를 내리친 모양 그대로 델펜토르의 몸체들이 납작하게 짓눌렸다. 그 몸체들 밑의 모래사장까지 오목하게 파여버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몽둥이를 내려친 것과 같았다. 그것은 일종의 검기 같은 것이었다.
푸화악! 푸화악!
그래도 모래 밑에 숨은 창자들이 있었다. 창자들은 모래를 뚫으며 독수리를 덮치려고 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뒤에서 창자를 다 정리한 병사들이 그의 앞으로 우르르 뛰어나가 남은 창자들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독수리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 죽여라.
“…?”
- 죽여라.
“….”
- 그들의 몸에 기생충이 있을지어다.
독수리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자신보다 앞서가 남은 창자들을 해치우고 있는 병사들.
그들의 갑옷의 틈새에서 새하얀 창자들이 튀어나와 혐오스럽게 춤을 추는 것이었다.
뚜둑!
그러다 어느 병사의 머리가 뒤로 꺾였다.
“히이…!”
머리가 뒤로 꺾인 병사는 투구에서도 창자들을 돌출시키고 있었다.
“히이이…! 히이이이!”
“다들 정신 차리시오!”
병사들이 하나둘씩 몸을 틀고 있다. 앞에서 싸우던 병사들이 창자들을 내버려 두고서 전부 독수리를 향해 뛰어오고 있다.
“그대들은 조종당하고 있소!”
그 순간이었다.
“조종당하고 있는 건 너야.”
독수리의 코앞에 올빼미가 나타났다.
그녀의 손바닥이 독수리의 시야를 가렸다.
잠시 그의 세상이 까맣게 변했다.
“악마가 지나갔어.”
눈을 뜬 독수리는 천으로 된 벽과 천장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올빼미와 역병 의사들이 양옆에 서있는 것이다.
“무슨….”
그의 몸은 침상에 눕혀져 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방금…. 악마라고?”
“말하지 마.”
“쿨럭…!”
독수리는 방독면 아래로 검은 피를 토해냈다.
“조금만 늦었으면 너도 스승님처럼 당할 뻔했어.”
“스승님이 당했다니?”
“돌아가셨어. 악마한테 당해서.”
덜컹!
독수리는 침상에서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안 된다!”
“안 돼. 우리는 당분간 쉬어야 해.”
“우리?”
독수리는 상반신을 일으키고서 엄청난 두통과 복통을 느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와중에 깨달았다.
자신의 양팔이 없다는 걸.
* * *
세인트 왕국의 병사들 중에 극소수를 차지하는 성기사들은 파보크의 곁에서 함께 싸우는 정예 집단이었다.
그들은 델펜토르의 커다란 몸체와 그로부터 토출된 창자들을 상대로 혈투를 벌이고 있다.
‘도대체 저런 괴물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세상.
실재세계에는 있어선 안 될 악마의 피조물이다.
“파보크 님! 남쪽입니다!”
“놈의 창자들이 또 성장하고 있습니다!”
성기사들의 외침을 들은 파보크는 남쪽으로 몸을 틀었다. 저곳의 모래사장에 엎질러진 점액과 그 위에 들끓는 새하얀 창자들이 점점 혐오스러운 색깔로 변화하며 덩치를 부풀리고 있었다.
‘저런 것들이 우리와 같은 세계에 있었다니.’
그의 발밑에 잔잔한 호수처럼 깔린 수면이 둥근 파장을 일으켰다.
‘정말로 이 세계가…. 인간의 것이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파앗!
이윽고 지면에서 물줄기가 올라와 그가 손을 뻗은 방향 그대로, 직각으로 꺾였다. 그대로 압출된 물줄기는 이 순간에도 숫자를 늘리며 덩치를 키우고 있는 델펜토르의 일부들을 조각조각 찢어버렸다.
“아아악…!”
“성검의 빛으로 태워라!”
“북쪽! 이번엔 북쪽입니다!”
파보크는 다시 마법을 조준했다. 곧이어 물줄기가 올라와 북쪽에서 기어 오는 창자들을 갈라버렸다.
‘놈의 거체에서 분열한 살덩이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이런 존재들이 세계에 여섯이나 더 있다고…?’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이후로 지금껏 얼마나 많은 창자들을 해치웠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지금껏 해치운 놈들의 숫자보다 앞으로 다가올 놈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으리라는 확신에 가까운 두려움이다.
천사들은 지옥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따라서 그 신성한 존재들이 이곳에 강림할 일은 없으며, 당장 그들에게 기도한다고 하여도 그들의 기적이 이곳에 닿진 않을 것이다.
타아앗!
순간, 그의 곁에서 모래알이 튀었다. 때늦은 바람이 그의 신도복을 밀쳤다.
“매….”
매 역병 교수는 곧장 정보부터 전달했다.
“악마가 왔소.”
파보크는 되물었다.
“…진짜 악마입니까?”
“우리의 스승이 놈에게 당하여 전사했소.”
“말도 안 되는…”
“독수리는 기절한 채 양팔을 잃고서 후방으로 실려갔고 올빼미는 놈을 붙잡으려다 영력을 소진하고 말았소.”
우토, 독수리, 올빼미.
그렇게 셋이 순식간에 당했다는 소식은 듣고도 믿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셋을 그렇게 만든 존재가 진짜 악마라면 믿고 말고도 없다.
악마라면 가능한 일이다. 말이 되는 일이다.
“그럼…. 천사가 현계에 개입하지 못하는 이 시기를 노린 것이군요….”
“놈은 아직 육체로 삼을 그릇이 없어 실체화되진 않았소.”
“강령술사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강령술사님의 곁에는 네이트의 화신이 있잖소. 지금 놈에게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는 건 그분들이 아니라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들이오.”
평범하다고 하자니 어감이 이상하지만, 페인이나 아그니샤에 비하면 지극히 평범한 수준의 인간들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지금 악마는 어디에 있습니까?”
“사라졌소.”
왠지 악마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만 계속되는 것 같다.
“놈의 움직임을 알 수 있는 자는 올빼미와 셰르카 님뿐이오. 나는 그 둘에게서 소식을 듣고 오는 길이오. 나타났던 놈이 불현듯 사라졌다고.”
“아그니샤 님은 악마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분의 곁에 있는 강령술사님도, 악마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지금 두 분에게 접근하는 건 자살행위와 같소.”
“최전방에서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두 분은 미쳐날뛰는 델펜토르의 육체를 부수기 위해 대규모 마법과 주술을 부리고 있소. 그 전장의 바로 뒤에 계신 셰르카 님의 적절한 방호가 없었다면, 가까운 연합군 병사들은 두 분의 힘에 휘말려 떼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오.”
악마가 강림했다. 그러나 완전한 강림은 아니다. 육체도 없이 그저 영혼이라는 형태로 차원을 넘어온 것이다.
만약 악마가 실체화하고 완전한 육체까지 갖추게 되었다면, 지금 델펜토르는 가만히 놀고만 있어도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악마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자는 영적인 능력이 있는 올빼미다. 그녀가 아니라면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셰르카다.
둘은 악마가 사라졌다고 했다.
“물론 아그니샤 님이나 강령술사 님께 직접 묻는다면 놈에 대한 더 자세한 움직임을 들을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소.”
그 둘은 지금 격렬한 싸움을 하고 있다. 둘이 전장에서 이탈한다면 연합군이 순식간에 밀릴 수 있을 정도로, 그 정도로 강력한 괴물을 둘이서 상대하고 있다. 그렇게 압도적인 괴물의 힘을 둘이서 부담하고 있다. 둘이서 부담하지 못해 흘린, 괴물의 일부를 연합군이 받아내고 있다.
그런 상황이다.
“처음엔 셰르카 님을 노렸다고 들었소. 그것이 영혼의 벽에 막혀서 우리의 스승을 노린 것이오.”
“다음은 누구였습니까?”
“독수리였소.”
“독수리 역병 교수님도 제법 전방을 도맡지 않았습니까.”
파보크의 질문은 제법 의미가 있었다.
매는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잃어버린 추론의 조각들을 하나씩 찾아내기 시작했다.
“…셰르카 님의 후방에는 스승님이. 스승님의 후방에는 독수리가…. 독수리보다 뒤에는 올빼미….”
“마치 바람처럼 불어온 게 아닙니까. 그렇다면 순서상 다음은 최후방에 있는 막사, 각국의 높은 지휘관, 부상자들입니다.”
“…틀렸소.”
다음 순간, 매의 목소리가 떨렸다.
“말했잖소. 나는 좀 전에도 최후방에 다녀온 참이오. 독수리의 상태를 살피고 올빼미에게 보고를 받으러….”
깨달아버린 절망에 사고가 얼어붙는 감각이었다.
부정하고 싶은 뇌가 토악질을 하는 감각이었다.
“따라서 놈은 이미….”
“지나갔다는…?”
매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신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