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우리는 그것을 악마라고 부른다 (4)
일정하게 밀려오는 파도, 푸른 수평선, 바다 위에 부서져 빛의 가루처럼 흩어지는 햇빛.
‘발화 5계.’
저 바다부터 이 근처 전장까지 모조리 불태울 각오로 발동한다.
‘열폭풍.’
아주 잠깐 보였다. 바다 위에서 불덩이들이 춤을 추듯 회전하며 한 점을 중심으로 모이고, 그 중심으로부터 태양과도 같은 구체가 생겨나는 일순간을 말이다.
원래는 아주 먼 거리에 있는 적들을 상대로 발동해야 하는, 파괴적이고도 광범위한 주술이다.
“이쪽으로 와요!”
나는 아그니샤의 옆에 섰다. 그녀는 십자가로 보호막을 전개하였다.
이윽고 눈과 귀가 망가질 것만 같은 화염이 온 사방을 집어삼켰다.
그녀와 나는 보호막 속에서 침묵한 채 델펜토르의 움직임을 꿰뚫어 보았다. 어차피 이런 열폭풍 속에서는 말을 해도 서로에게 들리질 않으니.
「창자들은 모두 태워졌어.」
「좀 전에 으깨놨던 몸체 하나까지 완전히 타버렸어.」
그래도 녀석은 살아있다. 점액을 내뿜고 타버린 살갗을 버리고 분열하였다. 질긴 목숨을 연장하고 있다.
키이이….
열폭풍이 꺼지자 그녀의 보호막도 꺼졌다.
“무지막지한 화력이네요.”
“그걸 견딜 수 있는 보호막이 있어서 다행이지.”
모래사장의 표면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주변에서 들끓던 창자들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후방은…”
“괜찮아. 셰르카가 막았을 거야.”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할 틈도 없다.
녀석의 마지막 몸체 하나가 끓어오르는 살갗을 터뜨리며 격렬하게 분열하고 있다. 전보다 더 끈적해진 점액이 홍수처럼 모래를 뒤덮으며 닥쳐오고 있다. 그리고 홍수처럼 닥쳐오는 점액보다 더 빠르게 하얀 촉수들이 쇄도해왔다. 저것들도 원래는 창자였던 것들이다.
나는 검기를 날렸다.
콰콰콰아아!
촉수들이 터졌다. 그러자 공중에서 터진 촉수들이 여러 갈래로 분열하였다.
스억…!
아그니샤가 촉수들을 좌우로 갈랐다. 동시에 천노의 십자가들이 주변에 떨어지며 섬광을 터뜨렸다.
푸확! 푸확!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하로 접근해온 창자들이 모래를 뚫고 나와서 타오르는 몸으로 괴롭게 꿈틀댔다.
그리고 나는 아그니샤보다 앞서 뛰는 중이다.
「너를 보고도 별다른 정신적 반응이 없어.」
「마치 살아있지 않은 생물 같아.」
「아니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지능조차 없는 존재거나.」
‘공포라는 감정이 제거된 채 창조된 건가.’
델펜토르의 마지막 몸체 하나. 마지막 큰 덩어리는 재차 작은 크기의 몸체 16개로 분열하였다.
그래도 녀석을 처음 봤을 때보다는 확실히 몸집이 줄어들었다. 이렇게 녀석을 앞에 두고 뛰고 있는데도 시야 안에 녀석의 몸체가 다 들어온다. 녀석은 그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퍼퍼펑…!
16개의 몸체 위로 십자가들이 떨어져 밝게 폭발했다. 이어서 더 많은 십자가들이 내 옆을 지나갔다. 나를 지나친 십자가들은 내게 달려들던 창자들을 하나씩 찢어발겼다.
그 짧은 틈에 계율의 십자가만으로 몸체 16개 중에 8개 이상이 거의 무력화되었다.
푸화아아악!
녀석의 몸체 다섯 개가 도약했다. 동시에 녀석들이 있던 자리에 십자가들이 꽂혔다. 저 다섯 몸체는 십자가를 피하려고 도약한 걸까. 아니면 날 덮치려고 도약한 걸가. 그것도 아니라면 둘 다일까.
타앗!
나 또한 도약했다.
「내가 으깰 테니까 네가 마무리해!」
내 안의 악령은 지금 피부, 살점, 뼈, 촉수, 눈알을 달고 있는 도끼를 육체로 삼고 있다. 나는 도끼를 쥐고 있는 오른손에만 힘을 주고서 다른 일에 집중했다.
으직! 으직! 으직!
내 안의 악령은 스스로 도끼를 움직였다. 공중에서 델펜토르의 몸체 다섯 개를 더 작은 크기로 쪼깨버렸다. 그리고 나는 녀석의 몸체 다섯 개가 쪼개질 때마다 불을 붙여서 떨어뜨렸다.
퍼허억!
쪼개지고 불이 붙은 채 떨어진 살덩이들은 곧장 분열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그니샤가 달려들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녀석에게 분열할 시간을 주지 않을 것이다.
「이제 셋만 남았어!」
아주 큰 마차보다 여섯 배는 큰 덩치를 자랑하는 몸체 셋.
저 셋을 해치우면 남은 것들은 잔당에 불과하다.
나는 모래사장에 착지했다. 푹신하지만 발밑에서 유리 파편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재결합.’
나는 근처에 널린 유리 파편들을 허공에 띄워서 칼날처럼 빚어냈다. 그 날카로운 것들을 내 앞에 띄우고서 함께 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투두두두두두두…
델펜토르의 몸체 세 개가 경련을 일으켰다. 마치 소리 없는 포효라도 내지르고 있는 것만 같다.
…아니.
내가 지금 녀석을 보고서 ‘소리 없는’ 포효라고 생각하는 건,
애당초 내가 녀석의 울부짖음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투두두두두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로선 알 수 없었다. 나는 단지, 녀석이 경련하는 모습을 이번에 처음 보았을 뿐.
‘지금껏 저런 극적인 반응은 없던 새끼가 왜…’
비명일까. 신음일까. 포효일까.
고통스러워하는 걸까. 화를 내고 있는 걸까.
목적도 원인도 알 수 없는 경련이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인 전투의 경험들은 녀석의 새로운 반응이 곧 새로운 변수를 창출하게 될 것이라 경고했다.
촤아!
나는 뛰다가 멈춰 섰다.
나는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몸체 셋을 향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녀석이 어떤 짓이라도 벌일 수 있다는 생각과 상상을 하며 경계했다. 무엇이라도 대응할 머리의 준비를, 마음의 준비를 했다. 침착하게, 평정심을 유지하고서.
- …안녕?
그 좆같은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나의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온몸의 털끝이 곤두서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평정심이 무너졌다.
- 소름이라도 돋았나?
「벨드샤?!」
- 안심하거라. 나는 그 녀석이 남긴 악을 잠시 빌려서 강림하고 있을 뿐이다.
델펜토르가 저토록 극적인 경련을 일으킨 건 비명도 신음도 포효도 고통도 분노도 아니었다.
희열이었다.
황홀감이었다.
수 세기 만에 제주인을 만난 개새끼처럼.
- 나는 지옥의 일부다.
- 또한 핏빛세계의 일부지.
- 잠시나마 이렇게 강림하고 있으니 옛 추억들이 떠오르는구나.
지옥 그 자체이자 만악의 근원인 악마.
모든 악과 악마들의 머리가 되는 존재.
“샤….”
- 페인.
- 벨드샤와 벨로움의 눈을 통해 잘 보았다.
- 내게 너의 육체가 있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인류를 자유롭게 만들어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
- 우리의 엇갈린 운명이 아쉬울 따름이구나.
우리.
녀석이 내뱉는 ‘우리’라는 단어를 죽여버리고 싶다.
- 그래도 너라면 알고 있겠지. 점점 변하고 있는 너의 상태를.
“내가 인간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 거냐?”
- 멀어지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 너는 오히려 가까워지고 있지.
- 진정한 인간(人間)의 모습에.
샤의 목소리는 델펜토르가 있는 방향으로부터 들려오고 있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어쩌면 녀석은 내가 풍기고 있는 두려움의 냄새까지도 맡고 있을 것이다. 두려움에 뛰고 있는 내 심장의 고동까지도 듣고 있을 것이다.
- 천사 놈들의 세뇌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건 좋은 징조다.
하지만 나는 전부터 이것을 직면하기로 했다.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렇게 몇 마디를 주고받고 있는 것만으로도 뭔가 무너질 것 같지만 절대 그렇게 되지 않겠다.
“틀려.”
- 내가 틀린 말을 했나?
- 그렇게까지 피를 뒤집어쓰고도, 천사들이 만들어낸 위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겠다는 뜻인가?
휘둘리지 않겠다.
나는 벨드샤에게도 휘둘렸고 벨로움에게도 휘둘렸다. 지옥에서 찾아온 절대악의 존재들에게 지겹도록 휘둘렸다. 그런데 또 휘둘릴 수는 없다.
여기서 또 휘둘린다면 병신이다. 공포를 학습하지 못하는 병신이다. 비슷한 것에 계속 당하는 병신이다.
“천사도 악마도…. 인간을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나를 어느 한쪽으로 끌어들이지 마.”
나는. 우리는.
“인간은 적당히 나쁘고 적당히 착해.”
- ……흥미롭군.
“천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두에게 선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네가 말하는 것처럼 모두가 사악한 것도 아니야.”
- 라고 말하면서 용기를 내고 있구나.
-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군.
침을 꿀꺽 삼키고 싶지만 목구멍에 걸고서 삼키지 않았다. 녀석이라면 내가 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들을 것이다.
- 네가 공포에 떨면서 비는 꼴을 보고 싶었는데.
- 그럼 이건 어떤가?
- 델펜토르여.
콰아아앙…!
뒤쪽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아그니샤가 싸우고 있었다.
그녀는 새빨간 선혈을 입가에서 흘리고 있었다.
그녀가 입가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그녀가 다쳤다.
대천사 네이트의 축복을 받은,
이제는 네이트의 화신이 된,
나중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나보다도 강한 그녀가 다쳤다.
델펜토르의 분열한 몸체들이 그녀를 저렇게 만든 것 같지는 않은데.
와중에 그녀는 피를 흘리면서 내게 소리쳤다. 아니, 계속 소리치고 있었다.
“그쪽에…! 악마가 있다고요…!”
그런데 그녀의 절박한 외침을 사악한 목소리가 덮어버렸다. 덮은 것이다.
- 견뎌내라. 델펜토르여.
- 너의 형제들이 너의 복수를 대신할지어다.
형제들이라니.
“…무슨 짓이야.”
- 흐…. 흐흐.
형제들이라니. 형제들이라니. 형제들이라니. 형제들이라니. 형제들이라니. 형제들이라니. 형제들이라니. 형제들이라니. 형제들이라니. 형제들이라니. 형제들이라니. 형제들이라니.
- 내가 크라켄을 ‘한 마리씩’ 너에게 ‘성장의 재료’로 던져주며 ‘친절하게’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나?
악마다. 진짜 악마. 진정한 악마. 악마. 악마.
- 벨드샤와 벨로움이 교활하다고 감탄하던 놈들이, 어째서 나의 교활함은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거지?
죽을 것이다.
- …태고의 잠을 자고 있던 머리카락들을 모두 깨웠다.
모두.
모두. 모두. 모두. 모두가.
- 이걸로 나는 저 멀리 흩어지게 되겠지만.
- 만약 네가 끝까지 살아남는다면 우린 낭떠러지에서 재회하게 되겠지.
- 하지만 그때 내 앞에 다시 나타난 너는 아마….
- 이미 미쳐버린 상태로, 스스로 무릎을 꿇고서, 눈물을 쏟아내며 제발 그만하라고 애원하겠지.
- 그때 너의 영혼을 거두어 영원한 안식을 주마.
그때 나는 뭐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델펜토르의 몸체를 전력을 다해 으깨고 있었다.
- 기세등등한 척 그럴싸한 말이나 내뱉더니.
- 결국 감추고 있던 나약함이 다 드러나는구나.
* * *
페인은 델펜토르의 남은 몸체들을 으깨고 있다. 검기를 사출하고 불을 붙이고 터뜨리고 모래로 된 벽이나 가시를 세우고 눈에 잡히지도 않는 속도로 몸을 놀리며 점액과 창자와 촉수를 상대하고 있다.
그때 아그니샤의 귀에는 그의 괴성이 들렸다.
그리고 그건 사람의 목청으로 내지를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악마의 속삭임을 들은 건가…?’
그녀는 일단 페인을 따라서 움직였다. 그가 쳐부수고도 죽지 않아서 꿈틀대는 델펜토르의 일부들을 십자가로 다시 가르고 섬광으로 불태웠다.
그러면서 페인과의 거리를 좁혔다.
“왜 그래요?!”
이제 페인은 말없이 델펜토르를 으깨고 있다. 분명 협공을 하자고 계획했는데 아그니샤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치지직…!
뭐가 그렇게 급한 걸까. 점액을 뒤집어쓰고도 자신의 몸을 수복하는 것보단 당장 델펜토르를 으깨는 일에 정신이 팔린 것 같다.
“강령술사님!”
그녀는 그녀대로 달려드는 창자들을 베어내며 외쳤다.
“너무 위험하게 싸우고 있잖아요!”
순간, 바다에서 밝은 빛이 보였다.
마치 태양과도 같은 뜨거운 구체였다.
‘또 열폭풍을…!’
좀 전에 열폭풍으로 주변을 휩쓸고서 다시 열폭풍을 발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근처에서 날뛰는 델펜토르의 일부와 창자들은 알아서 태워질 터.
저 열폭풍에 휩쓸릴 페인부터 구함이 옳다.
“이봐요! 강령술사!”
아그니샤는 짧은 거리를 내달렸다. 발밑에 들끓는 창자와 점액들을 뛰어넘어서 페인의 뒤에 착지했다.
그의 호흡이 이상했다. 야수처럼 거칠었다.
그의 등이 이상했다. 꿈틀대고 있다. 델펜토르의 창자가 로브 속으로 파고든 것 같다.
이윽고 열폭풍이 몰아쳤다.
“읏…!”
동시에 아그니샤와 페인을 감싸는 보호막이 전개되었다.
키이이이잉!
몰아치는 열폭풍 속, 보호막 속, 아그니샤는 십자가를 짧게 휘둘러 그의 등을 감싼 로브를 갈라냈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그의 로브 속에서 꿈틀대는 역겨운 창자를 직접 자신의 손으로 꺼내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건……?”
그의 로브 속에 델펜토르의 창자가 파고든 게 아니었다. 그건 하얀색이 아니었다.
쿠적…! 쿠적…!
검붉은 촉수들이었다.
페인의 등 가죽을 뚫고서 튀어나온 것이다.
“이게 뭐예요?!”
“아그니샤….”
그녀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흠칫했다. 열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와중에 둘의 목숨을 지켜주는 건 하나의 보호막뿐이다.
즉, 그녀는 아주 협소하고 밀폐된 공간에서 그와 단둘이 있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괴이했으며, 그의 등에서 자라난 촉수들이 괴이했다.
“괘, 괜찮아요?”
“악마가 지나갔어….”
다행히도 그녀의 앞에 있는 ‘그것’은 페인이 맞았다.
“그러니까 제가 말했잖아요! 이 근처에서 악마의 기운이 느껴지니까 가까이 가지 말라고요!”
“…안 들렸어.”
“네?!”
“소음이 너무 심해서…. 놈의 목소리가….”
“잠깐만요!”
아그니샤는 페인의 어깨를 잡아서 억지로 몸을 틀게 했다. 그녀에겐 페인의 몸을 억지로 틀게 할 수 있는 괴력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렇게 그의 얼굴을, 표정을, 눈빛을 살펴보려고 했다.
방독면이다.
생각해 보니 그는 얼굴을 잃었다.
벽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건 방독면이라는 가림막뿐이었다.
“…!”
그런 페인의 모습을 비좁은 보호막 속에서 마주한 그녀는, 스스로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울분이 차올랐다.
“악마는 지나갔어요! 저희를 지나쳤다고요! 그리고 사라졌어요!”
“….”
“악마가 뭐라고 속삭였어요?! 당신이라면 어떠한 정보도 놓치지 않았을 거잖아!”
“나는 그 녀석이 남긴 악을 빌려서… 잠시 이렇게 강림하고 있으니… 이걸로 나는 저 멀리 흩어지게 되겠지만….”
“미쳤어요? 뭘 혼자 중얼대는…”
“놈은 ‘샤’의 일부였어.”
그냥 악마도 아니고 악마들의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존재가 왔다고 한다. 천계로 비유하자면 세인트 여신이 직접 현계에 강림한 것이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아그니샤는 두렵지 않았다.
실감조차 나질 않아서다.
그만한 존재가 이 세계에 강림했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다.
“지금은 어디로 갔는데요?”
“사라졌어.”
금방 사라졌다고 하니까 말이 된다.
그래서 그녀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잘 수긍했다. 여전히 두렵지 않다.
정말로 ‘샤’가 강림했다면 그것만으로 이 세계는 초토화되었을 것이다. ‘샤’는 그 정도의 존재다. 그 존재는 이 해안에 있는 연합군 정도는 전부 없애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방에서 들려오는 전장의 소리는 아직 그치지 않았다.
따라서 ‘샤’는 아직 이 세계에 제대로 강림할 수 없다. 이 세계는 ‘샤’를 품을 정도로 타락하지 않았으니.
제대로 강림할 수 없기 때문에 육체도 없이 일부만 강림한 것이고, 이곳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지 못하여,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한 채 사라진 것이다. 선악의 농도라는 인과율에 따라서.
“강령술사님과 조금이라도 대화를 하고 싶었나 보네요. 아니면 강령술사님을 흔들고 싶었다거나.”
그러나 ‘샤’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한 채 사라졌다고 여기는 건 아그니샤만의 착각이었으니.
이제 그녀는 진실을 듣게 된다.
“…크라켄 6마리를 전부 깨우고서 사라졌어.”
같은 순간에 페인, 아그니샤, 파보크에게 마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그니샤! 파보크! 그리고 강령술사님…!
승천자의 다급한 전언이었다.
- 론…!
- 깨부수는 론이 왕국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열폭풍이 사그라들었다.
「와중에 또 이런 소식을 전해서 미안한데….」
까맣게 물든 모래사장 위로 죽음의 연기가 피어올라 하늘을 가렸다.
「우토가 죽었어….」
페인은 발길을 돌렸다.
그녀의 눈에 비친 그의 뒷모습은 어딘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는 것만 같았다.
“저…”
그녀는 그를 다시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다가, 허공에서 갈 길을 잃은 손을 십자가로 옮겼다.
“어디로 가려고요?”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부서진 얼음 같았다.
“마무리는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