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극채색에서 무채색으로 (2)
왕국군이 론과 충돌하기 전,
왕은 아무도 모르게 승천자를 불러냈다.
“사실, 짐은 죽음 앞에 두렵지 않은 인간이란 없다고 생각하네.”
아무도 없는 왕궁. 승천자는 무릎을 꿇지 않고 떳떳하게 두 다리로 서서 왕을 독대하고 있다.
“이것이 충언이 될지 과언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소인의 목을 걸고서 감히 말씀 올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짐은 승천자가 말 한마디를 잘못했다고 목을 베어내는 폭군이 아니네.”
“…세상에는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용맹한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도 기꺼이 싸울 것입니다.”
“어찌 그렇게 확신할 수가 있나?”
“다들 목숨을 던져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들이 자발적 징병에 응하여 10만 대군을 이루었겠습니까.”
“이런…. 렌달틀란크여.”
“예. 전하.”
“물론 지금의 저들은 깨부수는 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네. 그건 저들의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어.”
“지금이라….”
승천자는 그 뜻을 곱씹었다.
“우리는 저들에게 론을 상대로 버틸 수 있다고 하였네. 이곳은 세인트교의 성역이고, 곧 강령술사까지 돌아올 게 분명하기 때문이네.”
“예. 그렇기 때문에 승산이 있습니다.”
“또한 버텨야만 한다고 하였지. 깨부수는 론이 성벽을 넘게 된다면 이후의 상황은 진정한 공포에 치달을 테니.”
“지금은 용맹해 보여도 결국은 공포에 떨게 되리라는 말씀이신지요? 론이 성벽을 넘은 그 순간에….”
“꼭 그때가 아니더라도 저들은 공포에 떨게 될 것이네.”
“그 말씀은…?”
“믿는 것이 있어서 당장은 죽음이 두렵지 않을 것이네. 하지만 그 믿음이 조금이라도 흔들리게 된다면 저들은 의심할 것이고, 결국 걷잡을 수 없는 공포의 굴레에 빠지게 될 거라는 말이지.”
왕이 승천자에게만 전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었다.
“전장에 나가서, 저들에게 거짓을 말하여도 좋네.”
그때 승천자는 왕의 떨리는 눈빛을 보았다.
좀 전에는 힘 있는 목소리와 통솔력으로 모두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었던 왕이다.
그랬던 왕이 지금은 두려움을 감출 수 없는, 세상에 널리고 널린 평범한 남자처럼 보이는 것이다.
“짐은 자네가 그곳에서 어떤 거짓을 내뱉더라도 용서해 주겠네. 우리가 그토록 경멸하는 광신적인 면모를 보여주더라도 괜찮네. 이런 시국이라면 천사들도 눈을 감아줄 테니.”
“하오나 전하…. 소인은 세인트교의 충실한 신도이자 계율을 지키는 승천자가 된 몸입니다. 백성들에게 거짓을 내뱉을 수는 없…”
“필요악이라네.”
승천자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도리와 계율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지. 그러나 애당초 그걸 지킬 ‘사람’이 없게 된다면 전부 무의미한 게 아닌가.”
“……거짓된 희망을 노래해서라도…?”
왕은 죄책감에 괴로운 얼굴이 되었다.
“과인의 부족함 탓에 이런 명령을 하게 되어 미안하네.”
* * *
성벽 밖으로 나선 약 10만의 왕국군.
그들 중에 론을 두려워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것의 실체를 직접 마주하고서 본인들의 살갗이 찢겨나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콰아아아아!
콰아아아!
론이 집게발을 한번 휘두르면 수백 명이 나가떨어졌다. 녀석의 거대한 일격은 병사들의 방패로도 마법의 방진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의 몸은 땅과 함께 찢어졌다. 주인을 잃은 검과 창은 공중에 떠올랐다가 땅에 버려졌다. 혈흔이 흩뿌려지고 죽은 자들의 몸이 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꾸르르…”
“꾸르르르륵…”
론의 새끼들이 그들의 대열 속으로 파고들었다. 녀석들의 극도로 예리한 집게발은 어떤 방패라도 종이처럼 찢어버렸고 녀석들의 극도로 단단한 갑각은 창검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게다가 숫자도 많다.
“아아아아!”
“이걸 어떻게 막아?!”
“거기! 거기 뒤로 지나가잖아!”
“잡아…!”
“끄아악!”
승천자는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흙먼지 속에서 왕의 말을 떠올렸다.
- 눈이 가려졌을 때 빛이 보여야 하네.
- 모두가 세인트교의 신자들이라면 그것을 희망이라 느낄 테니.
- 생사와 존망이 걸린 상황에 진실은 중요치 않네.
승천자는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광명(光明)의 등불.’
본래 어두운 전장을 환하게 밝히기 위한 용도의 마법이었다.
…쩌엉!
섬광이 터졌다. 병사, 성기사, 퇴마술사, 신관, 지휘관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론과 론의 새끼들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꾸르르르!”
거대한 집게발이 만들어낸 흙먼지가 섬광과 함께 걷혔다. 대낮이지만 대낮보다 밝은, 구름 한 점도 찾을 수 없는 맑은 하늘이 찬란하게 빛나며 전장을 밝혔다.
그때 승천자는 마법으로 목소리를 증폭하여 힘껏 외쳤다.
“목도하라!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뒤틀린 피조물들을!”
‘그들은’ 잠시 눈을 감을 수 있었지만 ‘그것들은’ 눈꺼풀이 없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빛이 없는 곳에서 존재해왔을까.
- 어느 포드키엘이 있었네. 그는 천계를 침공한 비명의 편린과 사투를 벌였지. 홀몸으로 말일세.
- 그때 비명의 편린을 무찌르고서 살아남은 용맹한 포드키엘은, 세인트 여신으로부터 대천사로의 승격을 명받았네.
- 그러자 그와 같은 동료 포드키엘들이 그를 치켜세우며 말하였지.
- 그가 바로 ‘천계의 정복자’라고.
승천자는 지금도 진실과 거짓의 갈림길에 놓여 갈등하고 있다.
평생토록 추구하고 지켜온 올바름을 스스로 깨뜨려야 하는 상황이다.
- 대천사가 된 그는 후세의 포드키엘을 위해 격언을 남겼다네.
승천자는 갈등했다. 되뇌었다.
끝내 결단을 내렸다.
‘용맹한 포드키엘은 숨이 막힐 듯 위대한 여신 앞에서도 당돌하게 고하였다….’
- 공포에 떨고 있는 군중들에게 용기를 주는 방법은…
- 그 공포조차도 사실은 떨고 있다는 말을 해주는 것이네.
달려들던 론의 새끼들이 허공에 집게발을 휘적이며 우왕좌왕하고 있다.
순간적으로 시력을 상실한 탓이다.
하지만 승천자는 그것을 다르게 설명했다.
“저들이…! 우리의 빛을 두려워하고 있다!”
왕국군은 진실이 숨겨진 실물을 보았다.
희망이라는 환상을 보았다.
“우, 우와아아!”
“지금이다아아아!”
그러자 왕국군의 마음이 움직였다. 되살아난 사기는 충만했다. 저마다 쓸모없는 검, 창, 방패를 과감히 내던졌다.
그리고 각자가 손에 든 것은 둔기, 아주 뾰족한 창, 호신을 위한 단검 따위였다.
몸이 가벼워졌기에, 더 강해졌다.
푸욱! 투두두둑!
“꾸르륵…!!”
그들은 론의 새끼들에게 역으로 달려들었다. 뾰족한 창을 녀석들의 아가리 틈새에 찔러 넣었다. 여럿이서 한 마리에게 달려들어 움직임을 봉쇄하고, 각자 단검을 내질러 갑각의 틈새를 베었다.
콰직!
둔기로 등딱지를 내리쳤다. 그래도 통하지 않자 지면을 발로 차서 흙을 뿌렸다. 그러는 사이에 옆에 있던 자가 뛰어와 녀석의 아가리에 단검을 찔러 넣고 물러섰다. 그러자 둔기는 망치가 되었고 단검은 못이 되었다.
콰지직…!
“신관들이여! 다시 방진을 전개하시오!”
“믿음의 방진으로는 녀석들의 집게발을 막을 수 없습니다!”
“나를 믿고 전개하시오!”
키잉! 키잉! 키잉!
승천자는 신관들이 전개한 마법의 방패를 하나씩 움직였다. 그러면서 바로 곁에 있는 지휘관과 눈을 마주쳤다.
“아…! 알겠습니다!”
지휘관은 우렁차게 외쳤다.
“전열을 포격하라!!!”
명령이 후방까지 이어졌다.
“전열을 포격하라!”
- 전열을 포격해!
세인트 왕국의 작은 투석기들이 고개를 들었다. 타국에서 흔히 쓰이는 투석기보다는 작지만 기동에 있어 유리하고, 마치 거대한 석궁을 달아놓은 것처럼 탄성력 좋은 끈으로 전장을 타격하는 병기들이었다.
타타타탕!!
그렇게 후방에서 쏘아 올린 것은 작살도 바위도 아니었다.
사람 머리 크기의 유리구슬이었다.
그것들이 밝은 하늘을 유연하게 가로지르며 전방에 우박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승천자는 통제하고 있던 마법의 방패들로 아군의 머리 위를 지켰다.
…쨍그랑!
유리구슬은 론의 새끼들에게 떨어져서 성수를 흩뿌렸다.
“꾸륵…!”
“꾸르르!”
론의 새끼들은 앞이 보이지도 않는 마당에 성수를 뒤집어쓰고서 날뛰었다.
그와 동시에 승천자의 뒤쪽에 있던 어느 신관이 외쳤다.
“카누스 마법단이여!”
그들은 카누스가 남긴 교본을 보면서 불의 마법을 연마한 자들이었다.
각 개인의 영력은 작았지만, 같은 속성의 마법이란 위력을 합칠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한때 살아있었던 불의 마법사 카누스가 직접 만들어낸, 악을 향해 타오르는 그의 분노를 형상화한 마법이었다.
“지역소거!!!”
이윽고 그들의 손아귀로부터 뿜어진 화염의 줄기들이 왕국군 사이를 가로질렀다.
키기깅!
그 순간에도 승천자는 마법의 방패를 움직여서 그들의 화염이 아군을 덮치는 일이 없도록 궤도를 조정하였다.
곧 지역소거의 맹렬한 화염이 론의 새끼들을 집어삼켰다. 녀석들의 거품 끓는 신음은 화염의 소리에 묻혀서 들리지도 않았다.
대신, 그보다 훨씬 위에 있는 어미가 격하게 반응하였다.
“꾸르르르….”
코앞에서 거대한 산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깨부수는 론이 여덟 다리를 한껏 굽혀서 자세를 낮춘 것이다.
상대적으로 전방에 있던 자들은 뭐라고 외치며 후퇴를 감행했다.
그리고 자세를 낮춘 론은 뿜어냈다.
그것은 재앙과도 같은 거품이었다.
쿠와아아아아아…!!!!!
속에 품고 있던 거품을 모조리 토해낸 걸까. 어쩌면 항구를 초토화할 법한 규모의 파도라도 보는 것 같았다.
“뛰어서 피하기란 무립니다!”
“그대들은 내 뒤로 피하시오!”
다들 뒤로 후퇴하는 가운데 승천자와 신관들이 앞으로 나섰다. 모두가 영력을 합쳐서 마법의 방패를 일렬로 세웠다. 그 즉시 거품이 닥쳐왔다.
쿠르르르르!!
그런데 그 거품은 살아있는 것이었다.
거품 안에 살아있는 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쿠르르! 쿠르르!
마법의 방패는 거품을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알을 품고 있는 거품은 살아있는 파도처럼 방패들을 타고 올랐다. 그야말로 담장을 넘어오는 괴물들 같았다.
병사들은 뒤로 뛰고 있다. 군마를 타고 있는 자들도 서둘러 뒤로 빠지는 중이다. 승천자와 신관들만이 남아서 마법의 방패를 유지하고 각자 빛줄기를 쏘아대며 알을 하나씩 터뜨리고 있다.
하지만 거품은 너무나 거대했고 그 안에 있는 알은 너무도 많았다.
“승천자님…!”
“우리는 버틸 수 있습니다!”
“안 됩니다! 승천자님! 활공하십시오!”
승천자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나는 절대 신관들을 버리고 도망치지 않을 거요!”
승천자는 마법의 방패를 유지하는 와중에 또 마법을 발동하였다.
‘천명의 창!’
그는 거대한 거품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가 손을 뻗은 방향으로 마법진이 전개되며 창의 형태를 한 빛이 사출되었다.
콰콰콰콰콰…
천명의 창은 지나간 자리의 땅까지 둥글게 깎아내며 거품을 꿰뚫었다. 그렇게 천명의 창이 지나간 자리는 거품이나 알 하나도 없이 휑하게, 둥글게 비어버렸다.
쩌엉!
그리고 천명의 창은 깨부수는 론의 다리 한쪽까지 강타했다.
“꾸륵…!”
자세를 낮췄던 론이 한순간 균형을 잃었다. 그제야 거품을 뿜어대던 혐오스러운 아가리가 닫혔다.
“끄아악!!”
그러나 거품 속에서 알들이 뛰쳐나왔다. 천명의 창이 꿰뚫고 지나간 자리를 새로운 거품이 채웠다. 마법의 방패가 점점 희미해졌다. 희망 또한 조금씩 희미해졌다.
“승천자님!”
“이제는 가셔야 합니다!”
승천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승천자요! 승천자는 결코 신도들을…!”
“버리라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승천자님이 쓰러지시면 뒤가 없습니다!”
“간곡히 요청하겠습니다! 당장 활공하십시오!”
알에 당한 신관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고 있다. 알에서 순백의 집게발을 내민 생명체들이 신관의 살가죽을 뜯어내고 새빨간 내장을 뽑아내고 있다. 산 채로.
“승천자님!!!”
끝내 승천자는 활공을 발동하고 말았다. 거품과 알 무더기를 막아내는 열 명 남짓의 신관들을 남겨둔 채 하늘로 몸을 띄웠다.
그리고 후방으로 비행하였다.
- 아아아아아아!!!!!
신관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교회에서 함께 기도를 나누었던 자들이다.
“나를 용서하시오…. 나를…. 나의 힘이 부족한 탓이니….”
그러는 사이에 후퇴를 마친 전열의 병사들이 새로운 대열을 완성해두었다. 승천자는 새하얀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서, 강건한 얼굴로 그들 사이에 착지했다.
“바, 방금 신관님들이….”
승천자는 병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 덕분에 론의 거품을 빼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시지요.”
론의 여덟 다리.
그중에 다리 하나가 반쯤 부서진 채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희생으로, 론의 신체 하나를 무력화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린 10만 대군입니다.”
“아….”
“이대로면 충분합니다. 다리를 세 개만 더 떨어뜨리면 론은 저 무거운 몸을 지탱할 수 없겠지요. 그렇게 저지할 수 있습니다.”
“저기…. 저거….”
승천자는 입을 다물었다.
앞에 있는 자들이 무언가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았다.
쩌어어어어…
“말씀하신 다리라는 게…. 저것입니까?”
론이 허물을 벗었다. 좀 전에 천명의 창으로 망가뜨린 다리에서만 허물을 벗었다.
그러니 여덟 다리가 다 멀쩡한 채, 태산과도 같은 육체를 움직여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신관들이 희생이 이어진 후 다리를 다친 론이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를 회복하고서 다가오는 상황.
하필이면 이 상황에 하늘을 밝히던 광명의 등불마저 꺼져버리고 만 것이다.
구름 한 점도 없이 맑고 밝았던 하늘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 꾸르르르르!!!!!
이어지는 론의 역겨운 포효가 다시금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이길 수도, 저지할 수도 없다는 의심이 싹튼다.
승천자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저들은 무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말인가….’
이 순간에 한해선 모두가 같은 입장이었다.
결국 그들 모두가 사람이었으니.
‘여신이시여…. 어째서 현계에 저런 시련을 두고서 떠나셨단 말씀이옵니까….’
쿵! 쿵! 쿵! 쿵!
지진과도 같은 땅울림이 가까워진다. 발바닥을 타고서 전신에 흐르는 울림이 심장을 옥죈다. 비현실적인 크기의 괴물을 담고 있는 모두의 눈동자가 두려움에 떨리고 있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태양의 밝기가 약해지고 있다.
구름이 생겨나고 있다.
희망이라는 게 꺼지는 하늘 같았다.
승천자의 곁에 있던 퇴마술사가 중얼댔다.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왔습니다….”
- 꾸르르르르르!
론이 재차 포효했다.
- 꾸르르르! 꾸르르르…!
태고의 존재가 저곳에서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포효하고 있다. 곧 이쪽으로 다가와서 벌레를 짓밟아 죽이듯 왕국군을 밟을 것이다. 그러다가 성벽까지 넘을 것이다. 약 270만의 인구가 녀석과 녀석의 새끼들에게 만찬이 되어줄 것이다.
“꾸르르…!”
론의 거대한 집게발이 다가오고 있다. 날아들고 있다.
그 집게발을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는 걸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다. 저것에 어떻게 대처할지 생각할 시간이 없다. 대처할 방법을 떠올린다고 하여도 그걸 전파하고 단체로 실행할 시간이 없다.
저 거대한 집게발이 이곳에 도착해 대지를 갈라버리기까지 단 5초도 걸리지 않을 테니.
후우우우웅…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면…!’
승천자는 론의 집게발, 그 단단한 갑각의 틈새에 시선을 고정했다.
‘활공…!’
그는 몸을 두둥실 띄웠다. 오른쪽 손바닥에서 마법진을 전개하였다. 그 마법진으로부터 빛의 형태로 된 커다란 성검을 뽑아내 두 손으로 들었다. 그러니 집게발이 코앞에 있다.
‘기적을 내려주소서…!’
승천자는 마법의 성검으로 녀석의 집게발에 있는 갑각 틈새를 노렸다.
그 순간이었다.
“키이이이이잉!!!!!!”
굉음과도 같은 괴성. 지하에서 폭발하듯 흙더미와 돌을 밀쳐내며 뛰쳐나온 거대한 벌레.
그것이 녀석의 집게발을 물었다.
그리고 아래로 잡아당겼다.
“꾸르르르!!!”
“키이이이이잉!!!!”
그때 승천자는 깨달았다.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드리운 이유도.
론이 계속해서 포효하던 이유도.
- 승천자님.
- 저는 영력이 부족해서 지금은 싸울 수가 없습니다.
전부, 전부, 전부.
- 일단은 악귀들만 보내어 최대한 시간을 끌 테니, 다들 성벽까지 물러나서 결전에 대비하게 해주십시오. 그땐 저도 함께 싸우겠습니다.
전부.
‘이쪽’에 드리운 어둠이 아니라.
‘저쪽’에 드리운 어둠이었다는 것을.
“꾸르르르르!!!”
흑기사들이 나타나 론의 여덟 다리에 검기를 사출해댔다. 거미 악귀들이 떼 지어 나타나 론의 새끼들을 덮쳤다.
올고호르휘는 론의 한쪽 집게발을 물고서 놔주지 않고 있다.
- 공포에 떨고 있는 군중들에게 용기를 주는 방법은…
- 그 공포조차도 사실은 떨고 있다는 말을 해주는 것이네.
론은 두려움에 울부짖고 있던 것이다.
“꾸르르르르!!!”
바로 지금, 심연의 괴물조차도 두려워하는 어둠이 찾아오고 말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