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극채색에서 무채색으로 (3)
그가 왔다.
“전원 퇴각하라!”
약 10만의 왕국군은 성벽까지 서둘러 물러나고 있다.
“꾸르르…!”
“키에에에엑!”
거미 악귀들이 론의 새끼들을 덮쳤다.
으드득!
순백의 새끼들은 거미 악귀들이 물어서 갑각을 부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번 이상 탈피한 녀석들은 갑각이 경이로울 정도로 단단했으며, 그것은 거미 악귀의 턱으로도 부술 수 없는 것이었다.
“키게겍…! 키에엑!”
거미 악귀들은 분했다. 덩치도 작은 녀석들이 자기들보다 더 단단한 갑각을 두르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이다.
하지만 화가 난다고 하여 섣불리 달려들진 않았다. 오히려 거미 악귀 무리는 일부 구성원들만 론의 새끼들에게 내던져 시간을 끌고서 무리 규모로 거리를 벌렸다.
쯔으으…!
거미줄이 사출되었다. 한 마리가 사출한 거미줄 한 줄기가 다른 것과 함께 허공을 가로지르며 하나의 거대한 그물망처럼 론의 새끼들 위에 던져졌다.
“꾸르륵!”
“꾸르르!”
녀석들의 집게발은 강철 방패를 찢어버릴 정도로 예리했지만, 반대로 방패보다 훨씬 부드럽고 질긴 거미줄은 쉽사리 찢지 못했다.
수천 마리가 그물망에 씌워져서 몸부림을 쳤다. 그중에 순백의 갑각을 가진 미성숙한 것들은 그물망 틈새로 빠져나오기도 했다.
콰콰콰아!
그런 녀석들은 흑기사 무리가 처리했다. 흑기사들이 날려보낸 검기는 그물망에서 탈출한 녀석들을 폭발적으로 찢어발겼다. 어차피 그물망에서 탈출할 정도로 덩치가 작은 것들의 갑각은 미성숙했기에 검기로 충분히 부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순간, 올고호르휘는 론의 한쪽 집게발을 물고서 아래로 잡아당기고 있다.
“키이이이이!”
“꾸르르르!”
올고호르휘의 덩치는 론의 한쪽 집게발보다 작았다. 하지만 올고호르휘의 몸길이는 론보다 길었고, 지상에 꺼내놓은 것보다 지하에 파묻혀 흙을 잡아당기고 있는 부분이 더 많았다.
“꾸르르르! 꾸르륵!”
론은 집게발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올고호르휘는 사막에 자리한 나무처럼 버텼다. 바깥에 드러난 부분은 작고 약해 보여도 그 뿌리는 길고 강했던 것이다.
끝내 론은 올고호르휘를 땅에서 뽑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후우우웅…!
다른 한쪽 집게발이 움직였다. 이대로 올고호르휘의 몸통을 치거나 베려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바람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집게발은 올고호르휘를 충분히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키이이이!”
끝내 올고호르휘는 론의 한쪽 집게발을 스스로 놓아버리고 말았다. 물고 있던 것을 놓으니 위쪽으로 길게 서있던 몸통이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올고호르휘가 지하로 숨기 전에 론의 집게발이 먼저 닥쳐왔으니.
후우웅…!
크기도 크기지만 속도가 위압적이다. 속도도 속도지만 그 예리함과 견고함이 압도적이다. 올고호르휘는 절대 피할 수 없는 집게발을 마주하게 되었다. 마주함과 동시에 죽을 위기에 놓였다. 론의 동작은 한 번 한 번이 파괴적이었다.
쩌어!
그때 올고호르휘는 입을 크게 벌렸다.
자신의 몸통, 목구멍의 지름보다 더 크게, 인간의 살갗에 붙은 거머리의 입처럼 기형적으로 크게 벌렸다.
“쿠훼에에에엑!!!!”
올고호르휘는 닥쳐오는 거대한 집게발을 향해 자갈을 토해냈다.
카가가가각…!
그것은 올고호르휘가 땅밑을 질주하면서 걸러내고 걸러낸 자갈들이었으며, 과거에 철을 다룰 줄 몰랐던 인류가 깎아서 사용하곤 했던 예리한 광석이기도 했다.
하지만 승천자의 마법으로도 웬만해선 깨지지 않는 갑각이, 강하게 토해낸 자갈 따위에 상처를 입을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설령 자갈이 폭풍의 속도로 집게발을 쳤다고 한들, 그 정도의 힘에 밀려날 집게발이 아니었다.
결국 집게발은 올고호르휘를 강타하고 말았다.
“키이이!”
거대한 충격이었다. 집게발에 맞은 부분은 살갗이 빨갛게 터지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방향 저 방향에서 미친 듯이 몰아친 자갈들이 한순간 올고호르휘를 숨겨주었다. 론은 집게발을 몇 차례 오므렸다 펴면서, 몰아치는 자갈 사이를 잽싸게 누비는 올고호르휘를 붙잡으려고 했다.
쿠드드드드!
그때 올고호르휘는 끝을 알 수 없는 구멍만 남긴 채 땅속 어딘가로 사라지고 말았다.
깨부수는 론과 올고호르휘가 짧은 겨루기를 하던 사이, 낮은 곳에서는 론의 새끼들과 악귀 군단의 혈투가 한창이었다.
론의 새끼들은 거품을 뿜어냈다. 그 혐오스러운 거품이 거미줄의 점성과 탄성을 공략해버렸다. 이내 새끼 거미들의 자그만 집게발들은 거미줄을 끊어냈고, 그물망에서 우르르 빠져나와 퍼지는 그것들은 대지로 퍼져나가는 재앙과도 같았다.
“키익!”
“그그극…!”
거미 악귀들은 론의 새끼들보다 민첩했다. 하지만 이대로 거미 악귀들이 전장에서 빠져버리면 흑기사 무리가 고립되어 녀석들에게 덮쳐질 것이 뻔했다.
그래서일까. 거미 악귀들은 탈피한 론의 새끼들과 육탄전을 벌였다. 아무리 기를 쓰고 씹어도 결코 부서지는 일이 없는 녀석들을 물고, 다리로 찌르고, 거미줄을 뽑아내 묶기도 하였다.
카앙!
흑기사들은 각자 들고 있는 장검 두 자루를 힘차게 휘둘렀다. 그런다고 론의 새끼들이 쉽게 죽는 건 아니었지만 장검이 만들어낸 충격은 녀석들을 수십 마리씩 멀찍이 나가떨어지게 하였다.
그래도 론의 새끼들이 악귀들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녀석들은 형제의 등딱지를 밟고 오르거나 짧은 거리를 도약하면서 앞다투어 거미 악귀에게 달라붙었다.
“케게겍!!! 케에엑!”
론의 새끼들은 예리한 집게발로 거미 악귀의 배를 갈랐다. 다리를 자르고 눈알을 후벼팠다. 그렇게 만들어낸 상처 속으로 몸을 비집고 넣어서 살점을 뜯어냈다. 그리고 몸속으로 더욱 깊게 파고들어 끝내 거미 악귀가 쓰러지게 만들었다.
곧 론의 새끼들이 흘린 거품보다 거미 악귀의 몸으로부터 흘러나온 피거품이 더 많이 흐르게 되었다. 더는 피를 흡수할 수 없게 된 대지에 피가 고이고 강처럼 흐르며 그 위로 살점과 내장과 절단된 부위가 떠다니기 시작했다.
“꾸르르… 꾸르르…”
론의 새끼들은 피를 뒤집어쓰고서 또 허물을 벗었다. 싸우는 와중에 허물을 벗고서 성장했다.
싸움이 길어지자 론의 새끼들 중에는 더 강하고 덩치가 큰 녀석들이 나타났다.
“크르르!”
“꾸륵.”
이윽고 흑기사보다도 큰 녀석들이 나타났다. 녀석들은 양쪽 집게발에 거미 악귀의 사체를 들고서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었다.
흑기사들은 검기를 사출했다.
작은 녀석들은 어김없이 나가떨어졌지만, 제법 덩치가 커진 녀석들은 흑기사의 검기를 정면으로 맞고도 그 자리에서 버틸 수 있었다.
“크르르르르!”
흑기사들은 끝까지 저항했다. 녀석들과 거리가 너무 좁혀진 탓에 검기를 사출해도 의미가 없어지게 되자 장검을 교묘하게 휘둘렀다. 단순히 녀석들의 다리나 등딱지를 노리는 게 아닌, 갑각 틈새에 있는 연약한 부분을 노리는 것이다.
쩌어엉!
그렇게 싸우고 있으니 몇 마리는 흑기사들에게 당하여 다리나 집게발을 잃기도 했다.
주륵…!
일정한 크기 이상으로 성장한 론의 새끼들은 피를 흘렸다.
그 피의 색깔이 먼바다와도 같이 푸르렀다.
쩌어억!
그리고 계속 싸우고 있으니 흑기사들은 사지를 잃었다. 성장한 녀석들은 흑기사의 장검에 맞고도 달려들어서 집게발을 내질렀다. 잿빛세계의 사철로 된 갑옷을 찢어버리고 흑기사의 살점과 창자를 조각조각 해체하여 끄집어냈다.
그렇게 죽은 악귀들은 먹이가 되었다.
아니, 악귀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그 전장에서 죽은 것들을 론의 새끼들을 성장하게 만드는 먹이가 되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악순환이었다.
악귀들이 버티고 있던 전장은 끝내 밀리고 말았다.
론은 자신의 새끼들이 압도적 우위를 점하는 걸 확인하고서 움직였다.
“꾸르르르.”
론은 아가리에 거품을 문 채, 가까워지는 세인트 왕국을 새까만 두 눈에 담았다.
* * *
해가 떨어지고 있다. 늦은 오후가 되면서 성벽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고 있다.
나의 악귀 군단은 깨부수는 론을 상대로 2시간 이상을 버텨냈다. 그리고 2시간 이상을 ‘버텨냈다’는 건, 결국 론을 쓰러뜨리진 못했다는 뜻이다.
성벽 안쪽은 도심이다. 대규모 병력이 집결하여 방진을 짜기엔 공간이 협소하다.
그래서 약 10만의 왕국군은 모두 성벽 바깥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중에 지휘권을 가진 자들은 성벽 위에 올라서 궁수들과 함께 먼 곳을 주시하는 중이다.
지금 나는 승천자와 나란히 성벽 위에 서있다.
“천명의 창으로도 완전히 부서지진 않았습니다. 그렇게 상처를 입힌 다리 한쪽마저도 허물을 벗더니 멀쩡하게 나았지요.”
“탈피한 새끼들의 갑각은 흑기사의 사철보다도 견고합니다. 일반 병사들은 물론이고 성기사나 악귀들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겁니다.”
“입과 목구멍을 노려야지요.”
녀석들이 그걸 모를까.
“아가리를 닫으면 그마저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대가 오기 전에 우리 병사들이 유의미한 타격을 입힌 순간이 있었습니다.”
“어떻게요?”
“못과 망치 같은 원리였습니다. 한 점에 집중된 힘이지요.”
승천자는 다가오는 거대한 그림자를 향해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분명히 보았습니다. 입이나 관절 틈새에 창검을 찔러 넣고서 둔기로 때리니 통했습니다.”
「다들 싸우는 방법을 바꿔야겠네.」
무기도 바꿔야 할 것이다.
“병사들을 재무장해야겠네요.”
“지금도 그러고 있지만 10만에 육박하는 자들의 무기를 전부 교체할 물량이 있질 않습니다. …뾰족한 쇠막대라도 만든다면 좋겠지만 그러기 전에 론이 도착하겠지요.”
“창병과 창기병 숫자를 최대한 늘리세요.”
“그런 상성은 우리 지휘관이 진작 파악하여 진행하고 있답니다.”
“각 가정이나 일터에 있는 망치들도 전부 모아서 병사들에게 지급하시고요.”
「이건 몰랐나?」
승천자는 조금 놀란 눈을 하였다.
“백성들의 물건을….”
“물건을 지키려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물론입니다.”
고민도 없이 긍정했다. 아무래도 백성들의 물건까지 이용하자는 내 발상이 신선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놀란 눈을 했던 것 같다.
“내키지는 않지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겠군요.”
그리고 나는 승천자에게서 론의 특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단은 론의 방어 수준이다.
승천자가 온 힘을 다하여 내지른 천명의 창으로 저 거대한 다리 한쪽도 떨어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철로 무장한 흑기사들이 저 앞에서 어떤 최후를 맞이하였는지 떠올려보면, 론의 갑각은 이제껏 내가 본 그 어떤 철보다도 단단한 것이리라.
그리고 론은 연이은 백색포격, 발키리의 낙뢰를 고스란히 받아내고도 달리 부상을 입지 않았다. 카누스 마법단의 지역소거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이는 론과 론의 새끼들이 상당한 저항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걸 뜻한다. 흑기사들의 검기까지 막아냈으니 단순한 마법 저항뿐만 아니라 저주 저항까지 고루 갖춘 육체들이다.
「저항 능력이 뛰어나면 그만큼 이쪽 주술의 위력도 반감될 텐데….」
물리적으로도 마법적으로도 주술적으로도 상처를 입히기가 쉽지 않은 존재다. 물, 불, 바람, 신성, 어두운 힘, 그 어떤 속성도 녀석들에게 약점이 되진 않는다.
「기어가는 델펜토르는 쉽게 죽질 않았어.」
「그럼 깨부수는 론은 쉽게 상처를 입지 않도록 설계된 크라켄이라는 건가?」
‘…육체를 연장한다.’
「육체?」
‘델펜토르는 목숨을 연장했어.’
그렇다면 깨부수는 론은 육체다.
웬만해선 약점이 없고 다치는 일이 없는, 크라켄 중에서도 철인 같은 육체를 갖춘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델펜토르가 죽지 않고서 끈질기게 기어가는 공포를 선사했다면,
론은 쓰러지는 일 없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깨부수는 전차 같은 것이다.
“어중간한 화력으로는 힘들다고 다들 입을 모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 번의 결정타로 숨통을 끊지 못하면 허물을 벗고서 또 움직이겠지요.”
“약점이 없는 놈한테 한 번의 결정타가 먹히려면, 놈의 방어 수준을 능가하는 화력이 필요합니다.”
“혹시 그런 주술을 보유하고 계신지요…?”
“저한테는 없습니다만.”
“….”
「저걸 무슨 수로 한 방에 죽여? 엑수스가 강림해서 존나 큰 철퇴라도 휘두르면 모르겠다.」
“아!”
그러던 중에 승천자가 번뜩 떠올렸다.
“한 점에 집중된 힘! 화신이 된 아그니샤의 십자가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논할 것은 아닌지요?”
“예. 아그니샤가 오기 전에 론은 성벽을 넘게 될 테니까요.”
나도 알고 있어서 말을 안 한 것이다. 아그니샤가 와서 최대한 큰 십자가를 떨어뜨리고 나와 왕국군 모두가 그녀의 결정타를 지원한다면, 론의 등딱지라도 깨부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그니샤는 먼 곳에서 오고 있다. 내가 도중에 불나방을 보내어 그녀를 데리고 오라 명령해도, 불나방이 심장이 터지도록 날아와도 5일은 걸릴 것이다.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를 희생할까.
「교대로 비행하게?」
「지친 녀석들이라 꽤 많이 죽게 될 텐데.」
하늘을 날 수 있는 군단은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요소가 매우 많다. 그래서 나는 기어가는 델펜토르를 해치운 후 불나방들이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한 것이다.
깨부수는 론을 상대하다가 불나방 군단이 필요한 순간은 분명 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지만 불나방을 교대로 희생해서 아그니샤의 도착 시기를 앞당긴다면….’
「오늘 밤? 아니면 해가 저물 때 도착할 수도 있겠지. 대신 불나방들은 포기해야 할 거야. 녀석들은 지금 광인의 숲에 있는데 거기서부터 쉼 없이 아그니샤를 옮기려면 미리 일렬로 배치를 해야 해.」
「배치를 하는 도중에 지쳐서 죽는 녀석들도 있을 거야. 아그니샤를 옮기다가 떨어지면 안 되니까 최소한 두 마리씩 함께 비행할 거고.」
「사실상, 불나방 전부를 희생한다고 보면 돼. 지금 숫자로는.」
론은 앞으로 30분 내에 성벽 앞까지 도달하게 될 것이다.
「셰르카도 몇 시간은 걸리잖아. 영력을 회복하고서 몇 번이고 전이하고 다시 영력을 회복하고…. 내가 마지막에 본 이리는 지쳐서 잠든 것 같던데.」
전투가 오늘 밤까지 이어진다면 도중에 셰르카도 합류할 것이다.
아쉬운 점은 30분 후에 론이 이 성벽까지 도달했을 때, 그 순간에 셰르카와 아그니샤는 없을 거라는 사실이다.
영혼의 벽도 화신의 힘도 없다. 내 영력도 충분치 않고 악귀 군단의 상태도 말이 아니다. 론은 결국 성벽을 넘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도심에서 싸우게 될 것이다.
‘불나방들을 희생할게.’
「진짜로?」
‘그러는 편이 더 쉬울 거야.’
불나방이라는 변수는 포기한다. 대신 아그니샤의 도착 시기를 최대한 앞당긴다. 이러면 아그니샤는 셰르카와 비슷한 순간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어가는 델펜토르를 죽이고서 얻은 4500 이상의 악을 가지고 있다. 당장은 이런 것을 전투 도중에 변수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승천자님.”
“예.”
“해가 떨어지기 전까진 저희 둘이 주축이 되어서 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해가 떨어지기 전까진.
명확한 조건이 생겼다.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라는 말은 이쪽에서의 승산이자 희망이다.
승천자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론이 그대를 두려워했습니다.”
“…지금도 두려워하고 있죠. 그 부분도 이용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무한하게 거품과 알을 쏟을 수 있는 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지금 저곳에서 농지와 마을을 짓밟으며 다가오고 있는 론은 거품을 물고만 있다.
더는 토해내지 않고 있다.
“그렇죠.”
“론이 먼저 올까요? 아니면 론의 새끼들이 먼저 올까요?”
“저를 두려워하고 있으니 새끼들부터 보낼 겁니다. 아까 악귀들과 싸울 때도 론은 잠시 멈춰 섰습니다.”
“새끼들부터 해치우고 볼 일이겠군요. 천운이 돕는다면 그대를 두려워한 론이 스스로 도망칠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나는 단언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론에게 명령을 내린 존재는 다른 무엇도 아닌 ‘샤’입니다.”
크라켄이 샤의 명령을 거부하고서 도망칠 리가 없다.
또한 론의 목표는 내가 아니다.
론의 목표는 세인트교의 성역, 세인트 왕국의 멸망이다.
만약 내가 목표였다면 전장이 달랐을 것이다.
왕국군도 승천자도 성벽도 없는 곳에서 싸우고자 했을 것이다.
“결국 양쪽 모두 물러설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때였다.
- 론의 새끼들이다!
- 전투에 대비하라!
농지의 농작물이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건 줄 알았는데 그 밑에서 새끼들이 득실대고 있던 것이다.
「조에.」
「론의 새끼들이 가진 악명이야.」
녀석들에겐 악도 존재감도 없었다.
마치 생명으로서 정체성이라는 게 없는 것처럼.
생명과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 꾸르르!
- 꾸르륵!
조에들이 왕국군의 전선에 들이닥치고 있다.
당장 내 시야 안에 보이는 조에들의 숫자만 해도 어림잡아 4천 마리다.
「잘 죽지도 않고. 먹으면 더 성장하고.」
「졸개라고 보기엔 한 마리 한 마리가 너무 까다롭잖아….」
머리가 강하니 그만큼 졸개들도 강한 건 당연한 일이다.
666번째 크라켄, 카프하니드와 어인들.
470번째 크라켄, 델펜토르와 창자들.
391번째 크라켄, 론과 조에들.
일찍 만들어져서 더 오래 살아온 크라켄일수록 강하다. 끔찍하게 강하다.
「그런데 샤가 크라켄을 다 깨웠잖아.」
「론이 이 정도인데 다른 곳에서 깨어났을 나머지 크라켄들은….」
다른 대륙. 다른 어딘가에 있는 국가들. 먼 곳의 어딘가에서 깨어나 인류를 공격하고 있을 크라켄들.
‘그쪽 생각은 미루자.’
지금 여기서 론을 상대하며 그것까지 생각하자니, 너무 가혹하다.
우리의 세계가 얼마나 큰 절망을 상대하고 있는지 생각하고 있으면,
어쩌면 인류가 지금 종말을 맞닥뜨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이 대륙을 제외한 다른 모든 타국들이 멸망을 앞두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이곳에 남은 우리가 마지막 인류일지도 모른다고, 론보다 먼저 빚어진 다른 크라켄들은 더 강할 테니까. 더 끔찍할 테니까.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생각하면 스스로 만든 생각의 늪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다 등에서 빌어먹을 촉수라도 자라나면 낭패다.
「고향의 멸망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인류를 생각하는 건 또 다르네.」
「하긴, 진짜로 실재세계의 인간들이 다 죽어버리면 우리한테도 좋을 건 없겠지.」
그만.
‘론을 어떻게 이길지가 중요해.’
저 앞에서 다가오고 있는 거대한 괴물.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건 ‘론’이다.
일단은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