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39화 (139/181)

27. 극채색에서 무채색으로 (4)

황금달의 머리이자 부활한 발렌잔타르 가문의 공식적인 영주.

매력적으로 기른 황금빛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눈알 모양의 귀걸이가 특징적인, 오늘날 다수의 자객 집단과 사병까지 거느리고 있는 자.

그녀가 가진 정보력은 단연코 이 나라에서 제일이며, 누구라도 그녀의 손길을 거치지 않고는 대업을 이루기가 어렵다고 하여 오늘날 사업을 벌이는 자들은 모두 그녀의 사교계에 들어가기를 꿈꾸고 있다.

베르자인.

오늘날 그녀는 이름이 아닌 직위로 불린다.

“영주님.”

“내 사병들은 전부 왕국군으로 차출됐어. 왕궁에서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는 자객들도 그렇고.”

“적어도 30 이상의 자객은 남겨두는 편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나라부터 지켜야지. 어쩌겠어.”

뒷골목이라 불리는 음지의 거리가 한산하다. 애국심이 없거나 겁이 많은 자들은 다들 외국으로 도망쳤고, 싸울 수 있는 자들은 왕국군이 되어서 성벽 밖 전선에 나갔거나 도심의 외곽에 배치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와 소수의 자객들이 지키고 있는 황금달 본거지는 도심의 거리와 뒷골목의 경계선 같은 곳에 있다.

또한 뒷골목이란 엄연히 따졌을 때 도시의 중심부라기보단 외곽에 가까운 곳이다. 이곳에서 왕궁이나 중앙교회로 가는 것보다는 성벽이 있는 관문으로 가는 길이 더 가깝다.

“여기 있는 서류와 금은보화를 지키는 건 스무 명으로도 충분해. 다른 자객들은 모두 나라를 지키러 빠지는 게 맞아. 어차피 군대가 밀리면 여기가 밀리는 것도 시간문제거든.”

언제나 그녀의 곁에 있는 험악한 인상의 자객은 서류나 가보보다 베르자인의 목숨을 우선시했다.

“왕국군이 밀렸을 때 여기가 밀리는 것도 시간문제라면, 중요한 것들을 지하실에 숨겨놓고 피신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교단이나 왕궁의 문은 영주님께 언제든 열려있을 겁니다.”

“그럴 거야.”

“그렇다면 지금 출발하시죠. 안전히 모시겠습니다.”

“지금 말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 론의 새끼들이 벌써 전선에 들이닥쳤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집계된 인구가 270만이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걸어갔다. 성벽을 향한 창문이다.

“성벽 밖 왕국군이 10만. 그리고 나머지 군사는 성벽의 안쪽을 지키고 있지. 상대적 외곽과 내곽, 동서남북을 다 합쳐서 30만은 될 거라고 했어. 지금도 징병 중이라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그녀는 창밖을 보았다.

완전히 비워진 거리.

거리의 양쪽으로 건물들이 이어지다가 성벽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낮아져서 더는 보이지 않게 된다. 그리고 시선의 끄트머리에 마지막으로 보이는 것은 성벽이다.

저 성벽 바깥에는 영지들이 있다. 작은 마을, 목장, 농지, 곡창, 백성들이 삶을 영위하고 왕국이 유지될 수 있게 해주는 다양한 시설들이 있다.

“발 디딜 틈도 없는 거리를 통과해서 교단이나 왕궁의 품에 숨고 싶지는 않아.”

“영주님답지 않은 판단입니다.”

“나만 바라보고 일에 뛰어든 자들이 있어. 밑바닥 계층부터 상류층의 영주, 중산층의 상인들까지…. 나는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자산과 가보들을 마차로 회수해서 여기까지 옮겼지.”

가장 안전한 중심지에는 발을 디딜 틈도 없다. 그러니 수십 대의 마차가 들어갈 길도 없을 것이다.

“그중에는 발렌잔타르 가문의 몇 없는 가보들도 있어. 황금달의 서류, 금은보화, 나와 손을 잡은 자들이 선물해 준 관계의 증표들도 있지. …그것들이 전부 이곳에 있는데 어떻게 내 몸 하나 살리자고 도망치겠어?”

지금 이곳으로 옮겨둔 물건들은 단순히 물건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간 그녀가 이룩해낸 오늘의 결과물이자, 자신을 믿는 사람들의 소중한 증표이자, 인생의 모든 것이다.

“만약 놈들이 성벽을 넘어서 이 거리까지 들어온다면 싸우실 생각이십니까…?”

“싸울 거야.”

그녀의 하얀 얼굴에 기울어진 햇빛이 담겼다.

“병사가 아니어도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싸울 수는 있는 거잖아.”

“….”

“너는 어쩔 거야? 칼테인.”

“곤란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낭만도 없고 의리도 없는 놈이라는 거.”

“그래서 하는 말이야. 너도 나만큼이나 돈 좋아하잖아?”

잠시지만 그의 험악한 인상이 다소 부드럽게 펴졌던 것 같다.

“일이 끝나면 초과로 근무한 보수랑 위험을 감수한 보수까지 다 챙겨주셔야 합니다.”

“그럼, 너랑 남은 부하들 몫까지 두둑하게 챙겨줘야지.”

“좋습니다.”

“가서 성수 좀 가져와.”

“예.”

칼테인은 그렇게 대답하고서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 도중에 멈춰 섰다.

“그런데 영주님. 성수는 왜 찾으십니까?”

“페인이 올 것 같아서. 그리고 왠지 필요할 것 같아서. …직감이야.”

“그렇군요. 넉넉하게 상자째로 가져오겠습니다.”

칼테인은 문고리를 잡고서 슬쩍 베르자인을 돌아보았다.

보는 눈도 없고 여차하면 곧 전투에 임해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베르자인은 손거울을 들여다보며 앞머리를 만지고 있다.

“참, 아까 전령한테 얘기 들어보니까 론의 새끼들은 입이나 관절에 뾰족한 걸 찔러 넣는 게 통한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너희가 쓸 단검도 충분하게 준비해서…”

“베르자인 님.”

칼테인이 그녀를 이름으로 불렀다.

“…왜?”

“저는 그냥 돈만 보고 남는 게 아닙니다.”

손거울에 고정되었던 그녀의 시선이 칼테인을 향했다.

그는 표정을 통제하려고 했지만, 상대가 베르자인이라 들켰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그녀라면 알 것이며, 대답을 할 것이다.

“아…. 돈보다 중요한 게 있어서 남는 거라고?”

“예.”

“너한테 돈보다 중요한 거라…. 혹시 그게 황금달 그 자체인가?”

칼테인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답했다.

그녀를 보면서.

“예. 제겐 ‘황금달 그 자체’가 더 중요합니다.”

“고마워.”

베르자인은 진심을 전했다.

“항상 내 옆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줘서 고맙다고.”

그때였다.

- 대로에 방벽을 세우고 각 건물의 창가를 확보하라!

- 머지않아 ‘조에’ 무리가 난전 속에서 왕국군을 무시하고 관문을 넘어올 것이다!

왕국군의 발걸음 소리다.

성벽 안쪽에 있던 그들이라고 놀고 있는 게 아니었다. 바깥의 왕국군이 저쪽에서 론의 새끼들과 싸우는 사이, 이쪽에서는 도심을 구획으로 나누고 겹겹이 방어선선을 만들어 전장을 효율적으로 나누려는 것이다.

그러자 칼테인의 분위기가 평소의 것으로 돌아왔다. 험악한 인상에 차가운 표정이다.

“분명 ‘조에’라고 하였습니다.”

“론의 새끼들…. 그걸 조에라고 부르는 거야.”

“조에들이 도심까지 들어오는 게 기정사실화된 것 같습니다.”

척! 척! 척!

비워졌던 거리를 병사들이 채웠다.

“이 거리에서 싸우는 것도 나쁘지 않지. 저들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잘 됐습니다. 이러면 저들과 함께 싸울 수 있겠습니다.”

“영력이 부족한 탓에 성벽 밖에서 쓰러뜨리는 건 실패한 모양이네…. 하긴, 좀 전까지도 델펜토르를 상대했을 테니까.”

이어서 그녀는 칼테인에게 지시했다.

“곧 시작될 거야. 준비해.”

* * *

4천 마리 이상의 조에 무리가 성벽 앞 전선을 덮쳤다. 아니, 덮친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깊게 파고들었다.

입에 거품을 문 그것들은 병사의 다리 사이로 지나갔다. 조금 덩치가 큰 것들은 병사들을 뛰어넘거나 짓밟으며 전선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타그닥! 타그닥!

군마의 속력을 빌린 창기병들은 덩치가 큰 조에들의 갈라진 아가리를 힘차게 찔렀다.

“꾸르륵!!”

“이 괴물 새끼들!”

콰직!

덩치가 큰 조에들은 저마다 턱을 움직여서 창을 분쇄해버렸다. 그리고 푸른 피거품을 흘리면서도 쉼 없이 집게발을 휘둘렀다.

“히히이잉!”

훈련된 군마들은 앞다리를 들어서 말발굽으로 그것들의 집게발을 받아내려고 했다. 말의 발길질은 적군의 투구와 갑옷이라도 일그러뜨리고 그 밑의 내장까지 충격을 주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쩌어억!

하지만 말발굽의 충격이 조에에게 먹힐 리가 없었다. 이윽고 조에를 친 군마들은 집게발에 앞다리를 잘리거나 목을 감싸고 있는 마갑까지 베여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으앗…!”

“이런 멍청이들아! 기동하면서 싸우라고!”

아무리 훈련된 군마라도 결국 탑승자의 명령을 따르기 마련이었다. 잘못된 선택을 한 창기병들은 낙마해서 산 채로 해체당하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한 번의 창질 이후 재빠르게 물러난다는 선택을 한 창기병들은 다시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타그닥! 타그닥!

그들은 여분의 창을 다시 장비하고서 재차 돌진했다. 창기병들의 역할은 덩치가 큰 조에들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이야아아압!”

“꾸르르! 꾸르르!”

그들의 창이 덩치 큰 조에들의 아가리에 닿기 직전이었다.

“엇…!”

녀석들이 아가리를 닫았다. 갈라진 채 비좁은 목구멍을 드러내고 있는 턱이 깔끔하게 닫힌 것이다.

그러자 창끝에 달린 칼날이 턱에 충돌하고는 부러졌다.

그 순간 창을 놓친 자들은 군마와 함께 죽음으로 돌진하는 꼴이 되었다. 그 순간 창을 끝까지 붙잡고 있던 자들은 군마만 앞으로 내보내고 그 자리에 붕 떠서 낙마하게 되었다.

덩치 큰 조에들이 집게발을 내질렀다.

“꾸르르르르!”

쩌어억!

돌진하던 군마가 부드러운 고기처럼 베였다. 군마의 등에 타고 있던 창기병도 깔끔하게 썰려버렸다.

그런데 차라리 저렇게 썰려서 즉사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끄아아아아!”

“꺼져! 꺼지라고! 괴물 새끼들아!!”

“이것들 좀 떼어줘…!”

“아아아아악!!!”

낙마한 자들은 비교적 작은 조에들. 아직 탈피하지 못한 순백의 조에들에게 산 채로 해체당하였으니 말이다. 그들의 고통스러운 살점과 내장은 어린 조에들의 먹이가 되었다.

한편,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자들은 전선의 상대적 후방에 있었다.

“불결한 것들…!”

전방에도 후방에도 조에 무리가 있었다. 조에들은 작고, 많고, 빠르고, 단단하고, 어떻게든 도심에 들어가고자 하는 의지로 충만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전방이 밀리면 후방에서 적들을 상대한다는 상식이 통하질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사실들을 진작 깨달은 왕국군이었다.

극소수 물의 마법사들은 성수를 조종하여 조에의 갑각 틈새나 아가리 속을 노렸다.

불의 마법사들은 뜨거운 화염으로 벽을 세워서 조에 무리의 동선을 최대한 예측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재결합을 다룰 줄 아는 자들은 평지에서 바위를 굴려 조에들을 저지했다.

유리구슬을 전부 소모한 투석기들은 움직일 수 있는 방벽이 되었다. 성벽 위에 늘어선 궁수들은 승천자의 마법 지원을 받아,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일부 녀석들에게 정확히 화살을 명중시켰다.

그리고 승천자는 복수의 마법을 동시에 연계하고 있었다.

“허억…. 허억….”

쩌저저정!

그가 쏘아낸 빛줄기가 전장에 떨어질 때마다 수많은 조에들이 공중에 떠오르고 뒤로 밀려났다. 그런다고 조에들을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빼곡하게 밀집한 녀석들의 움직임을 분산시키고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선 필요한 마법이었다.

이렇게 강력한 마법의 지원이라도 해줘야 전장의 균형을 맞추어 일방적인 학살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허억…. 허억…. 더는 무리입니다…. 강령술사님….”

승천자는 다시 영력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면 전장에 생긴 마법 지원의 공백을 페인은 메꾸는 것이다.

「아무한테도 말은 안 했지만….」

「저 사람들이 충분히 죽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거지?」

성벽 위의 페인은 말없이 손을 뻗었다.

‘제물방류.’

그러자 전장에 널린 인간 시체와 군마의 사체들이 순식간에 방혈되었다. 핏물이 전부 빠진 그것들은 살가죽만 남은 기괴한 유골처럼 변하였다.

수천 명과 수백 마리의 피로 빚어진 붉은 덩어리들이 전장에 맺힌 열매들처럼 떠올랐다.

‘강타하는 혈전.’

촤아아아아아…!

각각의 붉은 덩어리들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철퇴처럼 뭉친 더 작은 덩어리들을 핏줄기로 만들어 휘둘렀다.

철퍽…!

그것에 맞은 조에들은 죽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덩어리 속에 갇혔다.

“꾸르르르르륵……!”

“꾸르르르……!”

본체가 되는 커다란 붉은 덩어리. 그리고 커다란 덩어리로부터 핏줄기로 이어지는 작은 덩어리들.

각각의 작은 덩어리에 갇힌 조에들은 핏줄기를 따라서 커다란 붉은 덩어리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붉은 덩어리들이 조에들을 붙잡아서 가두는 광경은 마치 개미군단을 빨아들이는 기괴한 문어라도 보는 것 같았다.

핏물 속에 갇힌 조에들은 다리와 집게발을 움직이며 애처롭게 허우적댔다.

「익사하질 않아.」

「호흡할 필요가 없는 것들인가?」

‘익사하지 않는다면….’

핏물 속에 갇힌 조에들이 고통을 호소했다.

“꾸륵…!”

그리고 녀석들은 곧 푸른 혈액과 함께 실타래 같은 내장을 토해내며 죽어갔다.

전장에 떠오른 붉은 덩어리들이 점차 푸른색으로 물들어갔다.

병사들은 그렇게 학살당하는 조에들을 보며 전율했다. 전율하고, 싸울 의지를 북돋았다.

‘예상대로 방혈은 잘 안 먹혀. 저것들의 혈액은 조종하기도 힘들고.’

「혈취자나 델펜토르 때와 같아.」

혈취자들의 오염된 혈액.

델펜토르의 진득한 체액.

그리고 녀석들의 푸른 혈액.

「제일 자신 있는 기술이 방혈인데…. 상대들이 세 번 연속으로 이러네.」

‘우연이 아닐 거야.’

붉은 덩어리들은 약 천 마리의 조에들을 학살하고서 영력이 다하여 무너졌다.

그렇게 쏟아진 녀석들의 사체가 이곳저곳에서 작은 언덕을 이루었다.

승천자는 감탄했다.

“대, 대단한 주술이군요….”

“근원이 사악한 힘이죠.”

그 어두운 말을 들은 승천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저곳에서 떼죽음을 당한 조에 무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가, 페인의 옆모습을 보았다.

“부끄럽지만 그대를 보고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뭐를요?”

“마법이라고 무조건 선한 것도 아니며…. 주술이라고 무조건 사악한 것도 아니라고 말이지요.”

승천자는 호흡을 정돈하고서 다시금 전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전방의 하늘에 마법진을 전개하여 빛줄기들을 떨어뜨렸다.

동족의 사체를 뜯어먹으려던 순백의 어린 조에들은 폭발적인 빛에 휩싸여 떼죽음을 당했다.

와중에 론은 거품만 물고 있다.

역시나 조에들을 무한하게 낳을 수는 없던 것이다.

따라서 당장 전장에 보이는 조에들만 다 무찌르면, 다음에 론을 상대하기 수월해질 것이다.

“힘의 선악이, 그 힘을 쥐고 있는 주체의 선악을 결정하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습니까.”

“그래서 부끄럽다고 한 것이지요…. 저의 부족함이….”

이제 페인은 영력이 부족해서 당분간 대규모 주술을 발동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승천자도 페인처럼 영력을 쥐어짜내고 있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간절한 눈빛으로,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마법을 발동하고 있다.

“부족하지 않습니다.”

“…?”

“충분히 훌륭한 승천자라고 생각합니다.”

승천자는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승천자로서의 후회, 자신을 향한 원망, 페인을 향한 죄책감, 고마움, 그리고 안도감이었을 것이다.

“…다행입니다.”

“예.”

“정말로, 그대 같은 자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어 다행입니다.”

그 순간,

페인은 론의 시선을 느꼈다.

“….”

녀석의 새까만 두 눈알이 정확히 페인을 응시하고 있다.

「두려움.」

론은 아까부터 페인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더는 다가오지 않고 저곳에 멈춰서 조에들만 싸우게 하고 있다.

「이건…….」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갔다간, 론은 조에들을 모두 잃고서 혼자 싸워야 할 판이다.

이 순간, 그 두려운 사실을 깨닫게 된 론이다.

「샤….」

론은 페인이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 페인보다 두려운 것이 생겼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페인이 덜 두렵게 되었다.

「패배해서 죽는 것보다…」

「주인을 실망시키게 될까 봐…」

론이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인에게 버려질까 봐…」

이제는 그게 더 두려워져서.

쿵쿵쿵쿵쿵쿵!!!

엄청난 속도였다.

애당초 론은 지금껏 저 정도의 속도를 보여준 적이 없다. 그 집게발을 휘두를 때조차도 거대한 산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빨랐지만 거대해서 녀석의 모든 행동이 느리게 보였다. 그래서 그게 녀석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이제 카프하니드 때처럼 거구와 속도가 합쳐진 파괴의 충돌이 엄습해온다. 단 몇 걸음만으로 저 넓은 전장을 가로질러서 성벽까지 돌진해온다. 저지한다는 게 불가능한 크기다. 도망친다는 게 불가능한 속도다.

- 사실, 짐은 죽음 앞에 두렵지 않은 인간이란 없다고 생각하네.

그 순간 승천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보았다.

그것은 공포였다.

“저, 저게 저렇게나 빨리 움직일 수 있…!”

「광속…!」

“피하세요!”

론의 재앙적인 육탄을 막을 수 있는 ‘영혼의 벽’은 없었다.

그리고 태고의 시대 이후 단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던 성벽이 격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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