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40화 (140/181)

27. 극채색에서 무채색으로(5)

샤가 차원에 균열을 일으키고서 인과율이 망가진 혼돈의 시기가 도래했다.

우리가 태고라고 부르는 그 시대에 실재세계에서는 천사와 악마가 대전쟁을 벌였다. 강물이 바짝 메마르고 산맥이 바뀌었으며 대륙이 찢겨나갔다.

전쟁이 소강된 후 세인트 여신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집단을 이루었다. 그 작은 집단은 부락이 되었고, 마을이 되었고, 도시가 되었고, 국가가 되었다.

세인트 왕국은 세인트교의 성역으로서 세상에 선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악에 대항하기 위한 선한 문명의 교두보가 되었다.

그런 세인트 왕국의, 우리의 옛 선조들이 피땀을 흘리며 세운 성벽은 ‘외부’의 사악한 존재들로부터 성역을, 세인트교를, 인간의 선을 지키는 수단이자 상징적인 건축물이 되었다.

그래서 태고의 시대 이후로 저 성벽이 무너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옛 선조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는 저 성벽이 무너지는 참상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야 저것은 세인트 왕국의 성벽이니까.

나는 거대한 충격과 폭발에 휘말려 잠시 공중에 떴다. 잠시 기절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이다.

웬 길거리다.

쿠르르르르…

시야가 잿빛세계보다 더 뿌옇다. 흙먼지가 온 사방에 펼쳐져 있다. 론의 존재감이 아주 가까이에서 느껴진다. 녀석의 거대한 그림자가 내 주변을 뒤덮고 있다.

쿠웅!! 쿠웅!!

녀석의 여덟 다리가 거대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 다리가 대지를 밟기 전에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와 진동이 느껴졌다. 계속, 계속 움직이며 지나간 길을 초토화하고 있다.

론은 좀 전에 성벽을 깨부수고서 이대로 도심을 향하려는 것이다.

나를 무시하고.

「지금이라면 일대일로 싸울 수 있어.」

「조에들보다 훨씬 앞서 돌진해왔잖아.」

「지금은 론밖에 없어. 지금 당장은.」

론을 상대할 기회다. 조에들의 방해 없이 오로지 론만을 상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놓쳐선 안 된다.

‘광속.’

타앗!

나는 높게 뛰었다. 가로등을 밟고, 다 무너져가는 민가의 지붕을 밟고서 힘껏 뛰어올랐다.

자욱한 흙먼지 위로 몸이 빠르게 상승했다. 곧 나는 흙먼지보다 높은 곳까지, 론의 머리가 있는 곳까지 뛰어오를 수 있었다.

「론…!」

나는 느릿한 시간감각 속에서 론과 눈을 마주쳤다.

지금 론은 자신이 실패할 것을, 샤에게 실망감을 줄 것을, 샤에게 버림 당할 것을 아주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녀석이 날 두려워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영력 발산 7계.’

이렇게 가까운 거리감에서 나의 존재를 녀석에게 확실히 각인시킨 상태다. 바로 지금이 정신계 주술을 가장 효과적으로 발동할 수 있는 순간이다.

‘심정지.’

이것으로도 부족할 수 있다.

‘자살 충동.’

이것으로도 부족할 수 있다.

촤아아…

나는 녀석의 기다란 눈을 향해 도끼를 던졌다. 그때 내 도끼는 이빨과 촉수가 달린 괴물 같은 것이었고, 도끼의 손잡이로부터 촉수가 광속으로 다가와 내 팔을 휘감았다.

「광속을 발동하는 중이라 정신계 주술이 먹혔는지 어쨌는지 지금은 알 수 없어.」

‘그래서 안전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거야.’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생각을 문장으로 완성하지 않아도 악령은 내 의도를 알고 있다.

이빨 달린 도끼가 놈의 기다란 눈을 물었다.

지익……!

그리고 도끼의 손잡이로부터 이어져 내 팔에 휘감긴 촉수가 극적으로 수축했다. 나는 도끼에 끌려가다시피 론의 머리를 향해 돌진했다.

‘신체구조상 등딱지에 붙은 걸 스스로 떼어내진 못하겠지.’

론은 카프하니드나 델펜토르처럼 유연한 몸이 아니다.

탓…!

나는 론의 등딱지 위에 착지했다. 촉수로 연결된 도끼를 회수했다.

그리고 주술의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광속을 해제하였다.

“꾸르르르르…!!!!!”

「어?」

심정지와 자살 충동.

녀석의 심장이라는 것은 내가 아는 심장과 다른 것인지, 심정지가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살 충동은 통했다.

「죽음을 원하고 있어!」

「네가 너무 무서워서 죽음으로 도피하고 싶은 거야!」

“꾸르르르! 꾸르르륵…!”

론은 거대한 두 집게발을 허공에 휘적였다. 그것만으로 공기가 밀려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강풍이 몰아쳤다. 지상에 자욱하게 깔린 흙먼지가 순식간에 걷혔다.

쿠웅! 쿠웅!

달궈진 불판 위에 올라간 사람처럼 여덟 다리를 미친 듯이 움직이고 있다. 수많은 건물이 파괴되고 흙먼지가 다시 일어나고 일어난 흙먼지가 집게발이 만들어낸 강풍에 떠밀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꾸르르으으으…!”

론이 그렇게 날뛰고 있으니 나도 등딱지에 서있기가 어렵다. 거대한 육체로부터 전해지는 충격과도 같은 진동이 온몸을 뒤흔드는 듯하다.

등딱지에는 뾰족한 가시가 자라나 있지만, 도끼를 걸거나 손으로 붙잡기엔 그 둘레가 너무나도 크다.

쿠웅! 쿠웅!

이 아래는 지옥이다.

나는 등딱지 위에서 납작하게 엎드렸다.

「죽고 싶은데 죽을 수가 없는 육체….」

주술은 통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공포에 사무쳐 죽음이라는 도피처를 바랐던 론이 제정신을 되찾고 말았다.

“꾸륵!”

회백색의 단단한 대지가,

등딱지가 기울고 있다.

‘고정해.’

손에 꼭 쥐고 있는 도끼로부터 두 갈래의 촉수가 뻗어갔다. 각각의 촉수는 커다란 원뿔 같은 가시를 두 차례에 걸쳐 휘감았다.

그러는 사이에 등딱지는 너무 기울어서 거의 수직이 되었다.

「이렇게 매달려서는 아무것도 못해!」

등딱지의 표면을 변형해서 상처의 틈을 만들까.

‘재결합.’

통하지 않는다.

재결합의 계가 너무 낮아서 그런 걸까. 더 강한 재결합으로 등딱지를 파내는 건 어떨까.

‘모래지옥.’

통하지 않는다.

방사와 증기폭발 같은 뜨거운 공격은 당연히 통하지 않는다. 직접 방혈시키자니 저항 능력이 있고 그 저항 능력을 넘어서는 수준의 방혈을 걸어도 녀석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혈액에 어느 정도의 내성이 있다. 그 내성을 능가하는 방혈을 건다고 하여도 녀석의 몸체가 너무 크다. 거대한 짐승이 모기 한 마리에게 피를 빨려서 쓰러지진 않는 법이다.

괴이한 심장을 갖고 있는 존재라 심정지도 통하지 않고, 자살 충동을 걸어도 자살을 할 수가 없는 육체다.

도끼로 베고 검기를 날려도 흠집 하나 생기지 않는 갑각이다.

그래도 녀석과 일대일로 싸울 수 있는 이 기회가 떠나가기 전에 가능한 건 전부 시도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앞서 정리한 모든 수단들을 배제하고서 또 시도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는가.

생각하니 아주 많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 이 순간에 시도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하나만 남았다.

혈액을 뽑아낼 수 없다면 영혼을 뽑아낸다.

기어가는 델펜토르를 해치우고서 얻은 악을 전부 영력 발산에 투입한다.

영력 발산 7계가 8계로 강화되진 않았지만, 엄연히 영력 발산으로부터 파생된 주술들의 위력은 증가한다.

‘영혼축출.’

…영혼축출을 발동하려고 했다.

하지만 발동하지 않았다.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다.

「영력이….」

다 떨어졌다.

도끼를 쥐고 있는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눈 뒤쪽이 어지럽고 속이 메스껍다.

론의 가시를 휘감고 있던 촉수가 형태를 잃고 핏물이 되어버렸다.

나는 끝내 떨어지고 말았다.

떨어지면서 후회했다.

아그니샤의 말을 떠올리며 후회했다.

- 델펜토르에 이어서 론까지 연달아 상대하는 건 미친 짓이에요.

- 나는 안 싸울 거라니까.

- 거짓말이잖아요. 가서 무리할 게 뻔해요.

- 내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아.

‘한심한 새끼….’

등딱지가 어찌나 높이 있었는지 떨어지는 데 한참이 걸린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지면에 등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공중에서 균형을 잡는 것조차 힘들어서.

퍼어억!!!!

척추가 부러졌다. 몸속의 내장 몇 군데가 터졌다. 갈비뼈도 부러졌고 다리와 손바닥뼈가 분쇄된 것 같다.

미치도록 아픈 통증이지만 이보다 더 심한 통증도 겪어본 정신이라, 신음도 비명도 내지르지 않았다.

쿠웅! 쿠웅!

상공을 뒤덮고 있는 회백색의 배가 움직인다.

이렇게 날 떨어뜨리고서 도심을 향해 진격하는 론을, 한심하게 누워서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세계는 내가 잠시나마 이렇게 누워있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빨리….’

나는 서둘러 몸을 수복했다. 부러진 뼈를 붙이고 분쇄된 뼈는 완전히 녹여서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다. 그 고통스러운 작업에 내 안의 악령도 전력으로 동참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누워있다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 다가오는 저것들에게.

“꾸르, 꾸르르….”

“꾸르르르….”

론을 따라서 조에 수백 마리가 거리에 들이닥쳤다.

뚜둑뚜둑!

나는 일어서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대다수 조에들은 성벽 바깥에서 왕국군과 악귀 군단을 상대하고 있으리라. 그리고 또 수많은 조에들이 론을 따라서 도심에 들어와 성벽 안쪽의 왕국군을 공격하고 있으리라.

지금 내게 달려드는 수백 마리는 결코 나를 노린 것이 아니다. 그냥 어미를 따라가다가 우연히 내가 보여서 달려드는 것이다.

녀석들의 갑각은 도끼로 깨부술 수 없다. 주술로 죽여야 한다.

「영력이 없다고!」

「내 몸을 유지하는 것도 벅차!」

“꾸르르!”

나는 앞서 달려든 조에의 집게발을 도끼로 쳤다. 그러자 도끼에 붙었던 살점, 이빨, 촉수 따위가 부서졌다.

그리고 녀석의 갑각은 멀쩡하다. 나는 앞다투어 집게발을 내지르는 조에들에게 팔다리를 베이고 말았다.

잠시라도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 나는 녀석들에게 등을 보인 채 뛰었다.

“꾸르르!”

“꾸르…! 꾸르…!”

어느 골목을 돌아서 온 걸까. 내가 도망치려던 방향에서도 조에들이 튀어나왔다. 거리의 앞뒤가 녀석들에게 막혀버렸다. 그래서 다리에 힘을 줬다. 건물을 뛰어넘어서라도 도망칠 것이다.

그런데 건물 위에도 조에들이 있었다. 녀석들이 저곳에서 새까만 눈알들을 슬쩍 내민 채 날 내려다보고 있다.

내 주변에 너무 많은 조에들이 있었다. 녀석들은 건물의 벽을 타고서 저 위까지 오른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제법 덩치가 큰 녀석이 내게 도약해왔다.

나는 도끼를 거꾸로 들었다.

녀석의 아가리에 도끼의 손잡이 부분을 처박았다.

으지지직!!!

그리고 영력을 쥐어짜냈다. 녀석의 혈액에 있는 내성을 넘어서기 위해서다.

‘방혈.’

퍼어어…!

이 주변에서 가장 커 보이는 녀석을 쓰러뜨렸다.

그래도 다른 조에들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시시각각 나와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

「그냥 죽자!」

「성벽 밖 왕국군이 있는 곳에서 부활하게 될 거야! 거기서부터 조에들을 무찌르고 론을 따라잡으면 돼!」

‘아니야.’

만약 지금 죽어서 부활해서, 영력을 완벽하게 회복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죽을 것이다. 하지만 추억 속의 리비카라는 주술은 죽음의 문턱에서 아홉 번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죽었을 때, 죽게 되었다는 그 상황을 선택하기 전 위치로 돌아오게 된다.

‘내가 지금 죽는다면…. 내가 죽게 된 건 론이 성벽을 부수면서 나를 이 거리까지 떨어뜨렸다는 게 이유가 될 거야.’

따라서 론이 성벽을 부수기 전에 내가 위치했던 곳은 약 10만의 왕국군이 있는 곳.

그리고 그때 당시에 나 또한 영력이 부족한 상태였다. 대규모 주술을 발동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지금 죽어봤자 영력은 부족한 그대로일 거야.’

죽어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론은 이 순간에도 도심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저러다 녀석이 도심에 있는 인구수를 먹이로 삼으면 조에들은 더 강해질 것이다. 그 사실을 녀석도 알고 있을 것이다.

「오잖아…!」

내 앞뒤를 막은 조에들이 우글대며 달려들고 있다. 건물의 지붕이나 벽에 있는 녀석들은 내 머리 위로 뛰어내리고 있다.

그 순간, 나는 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도박수가 번뜩 떠올랐다.

‘재결합.’

나는 앞에 죽은, 덩치 큰 녀석의 갑각을 해체했다. 완벽하게 해체하지 못해도 좋다. 아주 미량이라도 좋으니까 조에의 갑각, 그 갑각의 아주 작은 조각을 미량의 가루 수준으로 해체할 것이다.

“꾸르르르르르!”

조에의 갑각은 흑기사의 사철보다 단단하고 가벼웠다. 거의 바닥을 드러낸 영력을 또 소모해서 강도 높은 재결합을 발동했다.

이제는 영력이 없다. 말 그대로 없다.

대규모 주술은 물론이고 다차원 능력으로 악귀를 소환하거나 잿빛세계로 도망치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가장 간단한 주술인 탐지조차도 쓸 수 없게 되었다. 항시 발동하고 있는 철인, 밤눈, 각종 저항 능력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영력을 소모해서 손에 넣은 것은,

고품질의 은과 흑기사의 사철과 조에의 갑각을 합친 도끼였다.

「그래도 이 많은 놈들을 주술 하나도 없이 잡기엔….」

이 많은 조에들을 다 죽일 생각은 없다.

‘돌파할 길이 보이면 돌파할 거야.’

검기도 쓸 수 없다. 오로지 물리적인 힘만으로 이 주변 녀석들을 죽여야 한다.

쩌엉!!

성공이었다.

새로운 도끼는 조에의 갑각을 깨부술 수 있었다. 깔끔하게 베진 못해도 철인의 힘으로 충분히 깨부술 수 있다.

‘기어가는 델펜토르를 잡고서 얻은 악 있지?’

「3275.」

‘전부 철인 강화에 써버려.’

「철인 5계에 투입했어.」

「6계까지 강화하기엔 살짝 부족해.」

그래도 철인이라는 능력 자체는 그만큼 강해졌으리라.

“꾸르르르….”

“꾸륵…!”

굶주린 괴물처럼 달려들던 조에들이 한순간 주춤댔다. 이 순간을 놓쳐선 안 된다. 나는 기세를 몰아서 녀석들을 더 빠르게 죽여나갔다. 점차 내 발을 디딜 틈이 많아지고 길이 열리는 듯하다.

거리가 푸른 혈액으로 더럽혀졌다. 학대당한 도끼날이 모루 위의 주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꾸르르!”

녀석들의 혐오스러운 울음을 들을 때마다 치가 떨린다.

으직! 으직!

온몸의 근육이 녹아내릴 것만 같다. 머릿속에 피가 빠져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다. 하지만 쓰러질 때 쓰러지더라도 지금은 안 된다. 최소한 내 주변에 모여든 것들을 다 죽이고서 쓰러져야 한다.

아니, 내 주변에 모여든 것들을 다 죽일 수는 없겠다. 그러기 전에 내가 지쳐서 쓰러질 것이다. 그러니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이 거리를 벗어나 안전한 곳에 몸을 눕혀야겠다. 그게 맞겠다.

…으직!

나는 돌파구를 찾았다. 성벽이 아니라 도심이 있는 방향으로 조에들을 죽이면서 몸을 움직인 결과, 마침내 앞으로 뛸 수 있는 길이 보였다.

어디로든 달려가서 몸을 숨기자.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꾸르르륵…! 꾸륵…!”

내가 가려던 방향에서 녀석들이 골목을 돌아 또 튀어나왔다.

또다시 앞뒤를 막혔다. 꼼짝없이 이곳에서 싸울 수밖에 없다.

내가 죽음을 선택하지 않아도 어차피 죽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여전히 싸우고 있다.

‘한 마리라도 더 죽이고….’

으직!

론이 낳은 조에들은 머릿수가 유한한 존재다.

으지…!

한 마리라도 더 줄여야 나중에 승기를 잡을 수 있다. 내가 지금 죽이는 한 마리 한 마리가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크나큰 적수니까.

으지직…!

집게발에 베이고 뾰족한 다리에 찔려서 상처를 입어도 그냥 싸웠다. 어차피 상처를 수복할 영력도 없고 도망칠 길도 없다.

그때였다.

“찾았다!”

“강령술사가 여기에 있다!”

전신에 갑옷을 두르고 있는 자들이 도심 방향에서 나타났다.

「성기사!」

그러나 저들은 성검이 아니라 창을 들고 있다.

이어서 승천자의 전언이 들렸다.

- 교단에 알려서 그쪽으로 성기사들을 투입했습니다!

그들은 조에들의 아가리를 노려서 창을 내질렀다. 그러자 조에들은 형제의 사체를 밟고서 그들을 덮치려고 했다.

“등불이여!”

퍼엉!

섬광이 터져서 조에들의 눈을 멀게 하였다.

성기사들 사이에 퇴마술사도 한 명 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죽지 않고서 성기사들과 함께 거리의 조에들을 무찌를 수 있었다.

으직!

이 거리의 마지막 조에를 도끼로 갈랐다.

나는 푸른 혈액과 내장을 짓밟고서 저 먼 곳을 보았다.

론이다.

「론이 멈췄어….」

때마침 어느 성기사가 내게 설명하였다.

“교단 절반의 신관과 퇴마술사들이 모두 대규모 봉인진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론이 멈춘 겁니까?”

“그분들의 영력이 다 떨어지기 전까지는 론의 발을 묶어둘 계획입니다.”

「저기서 더 깊은 도심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할 테니까. 사상자는 전부 조에 무리의 먹이가 될 테고.」

“도심은 피난한 백성들로 인하여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서쪽의 관문을 개방하고 백성들을 모두 왕국 바깥으로 보내고자 합니다. 이제 론과 조에들의 동선은 확실하게 파악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론은 동쪽에서 왔다.

그리고 이제는 서쪽으로 백성들을 전부 내보내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물론 충분한 병사들도 없이 치안이 유지되지 않는 외부에서 그 많은 인원들이 피난길에 오른다면 외부의 위협, 내부의 악령화나 범죄 등으로 인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적어도 론과 조에들이 있는 곳에 비하면 저 바깥이 안전하다는 판단입니다.”

성기사들은 그러면서 나를 부축하려고 했다.

“호위가 되어 드릴 테니 쉴 수 있는 곳을 찾아봅시다. 저희가 받은 명령은 강령술사님의 영력을…”

“영력은 금방 찹니다.”

나는 그들이 부축을 거부했다.

“그보다 교단에서는 승천자의 천리안으로 조에들의 동선을 전부 파악한 겁니까?”

“…아, 예. 그렇습니다.”

“조에들은 동쪽의 무너진 성벽을 통해서 전부 도심을 향하고 있겠네요.”

서쪽은 안전하다고 했으니까.

“예. 바깥에서 승천자님과 왕국군을 상대하고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 3천 마리 이상이 도심에서 진군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각 거리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도심에 진입하면서 조에 무리가 분산된 덕에 전투에서 승리한 곳들이 있습니다.”

“승리한 자들은 잃어버린 구획을 되찾기 위해 역으로 진군 중입니다.”

“여러분은 승리한 쪽에서 되찾은 구획을 통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네요.”

그게 아니라면 이들이 이토록 멀쩡한 상태로 이 외곽까지 도달했을 리가 없다.

“그렇습니다만….”

“여러분은 원래 있던 곳에 합류하시죠.”

“저희에겐 강령술사님이 영력을 회복하기 전까지 곁을 지킬 책무가 있습니다.”

“조에들을 상대할 성기사들이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곳이 많습니다.”

나는 서둘러 도심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기사들 사이를 지나치며 말했다.

“죽을 위기에 도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도움은 딱 여기까지만 받겠습니다. 여러분의 힘은 제가 아니라 다른 분들에게 더 절실할 겁니다.”

그러자 성기사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강령술사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그들은 어느 골목을 향해 사라졌다.

나도 내가 갈 길을 가는 중이다.

「3천 마리 이상이 도심에서 진군.」

「전부 동쪽에서 서쪽으로.」

「조에들의 그런 동선을 본다면…」

방금 성기사들과 대화하면서 존재 추적을 썼다. 그걸로 베르자인의 위치를 확인했다.

‘황금달.’

그녀도 싸우고 있다.

나를 기준으로 뒷골목은 서쪽에 있다.

재촉하던 걸음이 점점 빨라지다가, 이내 뜀박질이 되었다.

‘제발.’

늦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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