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42화 (142/181)

28. 전율 (2)

어둑어둑해진 저녁.

샤아아….

셰르카는 델펜토르가 죽은 해안으로부터 수십 차례 전이하여 세인트 왕국의 동쪽 성벽 위까지 도달한 것이다.

“퀴이익.”

“난장판이로구나.”

이쪽 성벽이 무너졌다. 그리고 무너진 성벽부터 시작하여 저 서쪽으로, 왕궁과 중앙교회가 있는 중심지까지 이어지는 거리와 건물들이 초토화되어있다.

그러다 시선의 끝에 닿는 것은 론이었다.

“봉인진으로 구속하였군.”

녀석의 기나긴 여덟 다리 아래쪽에서 새하얀 빛이 올라오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싸우는 소리도 들려온다.

승천자를 필두로 왕국군이 저 도심에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역시 성역은 성역이었다. 신화적인 괴물을 상대로 잘도 버티는구나.”

부우우웅!

셰르카의 곁에 불나방 한 마리가 착지했다.

철그럭!

불나방 위에서 내린 자는 아그니샤였다.

“불나방 위에서 편히 쉬었느냐.”

아그니샤는 셰르카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 승천자가 너에게 뭐라고 하더냐?”

“…론은 건들지도 못하고 있어요. 도심에서 날뛰는 조에들로부터 피난민을 지키는 것만 해도 벅차다고 해요.”

그러자 셰르카는 가짜 눈을 크게 뜨고서 도심을 노려보았다.

“조에 무리는 피난민을 먹이로 삼아서 더 강해지고 있다. 저들이 서쪽 관문으로 피난을 마치기 전에 수만, 혹은 수십만 명이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승천자님은 도심의 서쪽 구획을 맡고 계세요.”

“왜지? 교단이 끔찍이 아끼는 중앙교회를 지키지 않고서.”

“그깟 건물보다 백성들의 목숨이 더 중요해요.”

그녀의 칼 같은 대답에 셰르카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너도 승천자에게 합류해서 싸워라.”

“….”

“조에들로부터 백성들의 목숨을 하나라도 더 지키고 싶다면.”

“그쪽은요?”

“나는 페인과 함께 론을 공략하지.”

셰르카는 아그니샤의 대답을 은근히 유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그니샤는 무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십자가를 손에 들었다.

“알겠어요. 그럼.”

아그니샤는 성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성벽 위에 남겨진 셰르카는 이리를 어루만졌다.

“저년은 별 반응이 없구나.”

“퀴익.”

“페인보다는 대의와 선의가 우선이라는 거겠지. 상황도 상황이고.”

“퀴익퀴익.”

“좋다. 어차피 누군가는 조에 무리를 막아야만 했다. 녀석들이 저 많은 인구수를 먹어치우면 나중에 더 큰 재앙이 되어서 돌아올 테니까.”

셰르카는 이리를 활짝 폈다.

샤아아…

그대로 검은 연기를 흘리며 사라졌다.

* * *

베르자인은 황금달 본거지에 남기로 했다. 자객들도 없이 홀로 남아서 끝까지 그곳을 지키겠다는 베르자인을 도저히 설득할 수가 없었다.

- 기껏 되찾은 가문의 영지까지 버리고 왔어.

- 초창기 자객들을 다 잃었어. …칼테인까지.

- 이상한 집착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지만.

- 그래도 이것만큼은 포기 못 해.

「그깟 종이와 초상화 따위가 뭐라고.」

‘베르자인에겐 그게 전부야.’

성벽 바깥의 전투는 왕국군의 궤멸적인 피해와 후퇴로 끝났다. 도심의 동쪽 외곽에서는 몇 차례나 왕국군과 조에 무리의 혈투가 있었다. 그리고 그 또한 왕국군이 적잖은 피해를 입고서 도심까지 후퇴하게 되어 지금의 상황에 이른 것이다.

‘조에 무리가 황금달을 또 공격할 가능성은 희박해.’

그래도 혹시 몰라서 상태가 제일 괜찮은 흑기사 다섯 마리를 그녀의 곁에 두고 왔다. 만약 그쪽에서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곧장 알 수 있을 것이다.

타앗!

이 주변의 모든 거리가 전쟁터다.

……으직!

나는 사람보다 덩치가 커진 조에의 머리를 두 갈래로 쪼갠 후 왕국군 사이에 착지했다.

“더는 발을 묶을 수 없습니다…!”

수십 신관과 퇴마술사들이 모두 이 거리에 있다. 그들이 영력을 합쳐서 전개하고 있는 봉인진의 빛이 바람 앞에 놓인 등불처럼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다.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도, 도저히 더는….”

신관과 퇴마술사들의 팔이 떨리고 있다.

“꾸르르르! 꾸르르!”

론의 거대한 머리가 날 내려다보고 있다. 녀석의 머리가 너무도 높은 곳에 있어서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는 듯하다.

「알지? 조금 쉬긴 했지만 영력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거.」

나도 안다.

도심의 동쪽 구획이 초토화되고 수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이 순간까지 영력을 회복하는 일에 전념했다.

여기서 또 물러나 영력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

‘이젠 끝장을 봐야 해.’

어느 신관이 절박하게 외쳤다.

“강령술사님…!”

쿠우웅!!!

론의 다리 한쪽이 움직였다. 그 거대한 움직임만으로 민가 여러 채가 폭삭 주저앉았다. 이어서 론의 집게발이 다가온다. 보이지 않는 힘에 저항하듯 부들거리면서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곧 빨라졌다.

“봉인진이 풀렸습니다!!”

“으아아!”

“히익!”

거대한 집게발이 이쪽 거리를 휩쓸기 직전, 나는 존재 추적을 통해 알고 있었다.

“셰르카!”

순간, 닥쳐오는 집게발 앞에 영혼의 벽이 전개되었다.

쿠우우웅!!!!

집게발은 영혼의 벽을 뚫지 못했다.

샤아아…

그녀가 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벼랑 끝에 내몰린 기분이었나?”

“언제는 안 그랬냐.”

쿠웅!! 쿠웅!!

론은 영혼의 벽을 뚫으려고 여러 차례 집게발을 휘둘렀다. 그래도 영혼의 벽은 뚫리지 않았다.

바다에서 광적인 속도로 돌진하던 카프하니드의 육탄도, 델펜토르의 퍼붓는 토출도, 샤의 공격까지도 막았던 영혼의 벽이다.

그런 영혼의 벽이 론의 집게발에 간단히 뚫릴 리가 없었다.

「다 꺼지라고 해!」

나는 거리에 있는 왕국군 모두에게 소리쳤다.

“전부 물러나세요!”

그들은 대열을 유지하면서 거리의 뒤쪽으로 우르르 빠졌다. 그렇게 나와 셰르카만이 론의 앞에 남게 되었다.

쿠웅! 쿠웅!

론은 영혼의 벽을 집게발로 치고, 다리로 긁고, 턱으로 물었다. 그 모습은 가히 병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집요하고 성급해 보였다.

“설마 나만 믿고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던 건 아니겠지?”

“계획이 있어.”

「올고호르휘!」

내 안의 악령이 올고호르휘를 부른 순간이다.

쿠와아아아!

영혼의 벽이 가로막고 있는 반대편 거리에 녀석이 출몰했다. 거대한 창자를 닮은 벌레가 지면을 깨부수며 솟구쳐 오른 것이다.

“키이이이잉!”

올고호르휘는 론의 배를 쳤다. 당연히 그 정도 위력으로는 론에게 상처조차 줄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단단한 갑옷을 두르고 있어도 몸속에 퍼지는 충격은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꾸르륵…!”

론은 거품을 흘리고는 자신의 아래쪽을 보았다. 그리고 다리를 움직여 올고호르휘를 밟아 죽이려고 했다.

쿠콰아아아!

올고호르휘는 지면을 헤엄쳤다. 포장된 도로를 부수고 폭삭 주저앉은 민가를 완전히 파괴하며, 론의 측면을 향해 도망쳤다. 자연스레 론의 시선도 올고호르휘를 따라갔다.

“페인. 이게 무슨 계획이지?”

* * *

젊었던 시절에 데이진타우 제국의 어부였던 노인.

그는 내 팔을 붙잡고서 호소했다.

“물 밖으로 나온 게들은 숨을 못 쉬고 있는 겁니다! 아가리에 물고 있는 거품이 그 증거라고요!”

“물에서 숨을 쉬는 것들이 어떻게 지상에서 이토록 오래 버티고 있는 겁니까?”

“거품 덕분에 물 밖에서 버티고 있는 거죠!”

“목숨 걸고 거품을 떼어내도, 아가리를 가릴 정도의 거품 정도는 다시 토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아니요! 아니죠! 요점은 거품이 아닙니다! 거품은 녀석이 숨을 못 쉬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고…!”

“그럼…?”

호흡의 자유.

못 먹고, 못 자고, 못 마시는 것보다 더욱 큰 결핍을 느끼게 하는 것은 호흡이다.

먹지 않고 마시지 않는 건 며칠이라도 견딜 수 있고 수면을 취하지 않는 것 또한 며칠이라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호흡은 다르다.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극적이며, 결핍되었을 때 가장 절박하고 두려운 욕구다.

“물을 보여주면 좋다고 빨아들일 겁니다!”

하지만 세인트 왕국의 도심에는 호수가 없다. 강줄기가 흐르고 있긴 하지만 그건 도심으로부터 벗어난 외곽이며, 론의 동선에도 겹치지 않는다.

따라서 녀석이 올 동선을 예측하여 그 주변에 호수를 만들고, 녀석의 앞에 보여주어야 한다.

‘…물은 올고호르휘로 여러 번 옮기면 되겠네.’

「론의 눈길을 끌 정도로 많은 물을 어디다 담으려고?」

* * *

론은 올고호르휘를 알고 있다. 몇 시간 전에 자신의 집게발을 물었던, 자신의 거대한 육체를 휘청이게 만들었던 벌레다.

한시라도 빨리 샤가 내려준 임무를 끝마치고서 돌아가고 싶었는데 올고호르휘가 집게발을 붙잡았던 그 순간은 지금 떠올려도 화가 난다.

그때 올고호르휘를 집게발로 쳐서 죽이려고 했는데, 녀석이 잽싸게 도망치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죽이고 싶은 것이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또 이런 식으로 나타나서 시간을 끌 것이다.

지금도 숨을 참고 있는 것이 고통인데 말이다.

“꾸르르르!!”

그렇게 올고호르휘를 쫓던 론의 시선은 ‘우연히’ 어느 분지를 향하게 되었다.

그곳은 이전에 타락한 승천자가 만들어낸 구덩이이자, 중앙교회와 다수의 민가가 위치한 성역이었다.

그 낮은 지대에 물이 차있었다.

“꾸르르……!!!!”

그리운 물.

그리운 바다.

그곳의 심연.

자신의 기원.

오래도록 지하에 파묻혀서 호흡을 할 수 없었던 기나긴 세월.

언젠간 자신이 잠들었던 자리에 물이 다시 찰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으나 샤가 억지로 깨워버렸다. 깨어나고 보니 호흡을 할 수 없었고 머리라도 파묻어 숨을 쉴 수 있는 호수 따위는 주변에 없었다.

그저 참고 참으며 여기까지 전진해왔다.

이 일이 다 끝나면, 그리운 그곳으로 돌아가서 심연의 부드러운 땅을 밟으며 자유로이 호흡하는 꿈이 있었으니.

“꾸르르르르르!!!!!”

론은 미친 듯이 뛰었다. 건물 수십 채를 다리로 쓸어버리고 거리에서 싸우던 왕국군을 짓이겨버리고 기껏 먹여서 키워낸 조에들조차 스스로 짓밟아 죽여버렸다.

끝내 론은 침수된 중앙교회에 머리를 처박고 말았다.

쿠드드드!

중앙교회의 십자가가 부러진 채 물속에 빠졌다. 아름다운 그림과 조명이 있던 천장이 무너졌다. 시야의 양쪽에서 필요악으로 스스로를 희생한 신관들의 조각상이 무너졌다.

물론 론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방금 자신이 세인트교의 상징적인 건축물을 부쉈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다.

오로지 호흡이 중요하다.

“꾸륵, 꾸륵, 꾸륵, 꾸륵…!”

담수였지만 상관없었다.

바닷물이 아니어도 물이었다. 수 세기 동안 참았던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또한 가장 끔찍한 결핍이 해소되는 순간은 곧 중독적인 행복과 충족감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꾸륵, 꾸륵, 꾸륵!”

그렇게 잔뜩 빨아들이고, 내쉬고, 빨아들였다.

* * *

나는 셰르카와 나란히 서서 론을 바라보고 있다.

“어부의 지혜라…. 난 틀림없이 이번 난관도 너만의 통찰력으로 극복하리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그리고 나는 셰르카가 도착하기 직전에 미리 전언을 보내두었다.

- 강령술사님. 곧입니다.

승천자와 아그니샤를 필두로 한 그들은 조에 무리로부터 서쪽의 피난민들을 지켜야 한다. 서쪽에서 두 사람이 빠졌을 때 생기는 전력 공백은 조에 무리를 진짜 재앙으로 키워버릴 수도 있을 테니.

따라서 그 두 사람이 여기까지 올 수는 없다.

- …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원거리로 마법 지원을 요청해둔 것이다.

키이이잉!!!

하늘에 거대한 마법진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마법진 아래에 또 거대한 마법진이 전개되었다.

“놈의 정신이 흔들리고 있어. 셰르카.”

“확실히. 금단의 쾌락이라도 즐기는 것처럼 영혼의 신음을 토해내고 있구나.”

“준비해.”

비첸크로이 제국의 황제를 죽였던 흑마법.

나 또한 죽일 뻔했던 흑마법.

그녀는 그 흑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기형.”

제일 먼저 전개된 거대한 마법진에서 발키리의 낙뢰가 론의 회백색 등껍질에 일직선으로 내리꽂혔다. 곧이어 천노의 십자가들이 론의 회백색 등껍질에 생긴 아주 작은 균열을 무자비하게 폭격하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호수로부터 피어오른 검은 연기가 찬란한 섬광에 닿아 흩어지면서도 다시 모여들어 론의 등딱지로 영혼의 폭풍처럼 흘러들어갔다.

론은 화들짝 놀라서 굽혔던 여덟 다리를 폈다. 그렇게 머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꾸으으으으!!!!!!”

녀석의 아가리에는 산양의 꿈틀대는 내장이 구더기처럼 득실득실했다.

퍼어어!

산양의 내장들이 일제히 터져버리고, 론은 붉은 피와 푸른 피를 섞어서 토해냈다.

그리고 그때 론의 눈앞에 페인이 달려들고 있었다.

그때 론은 페인을 눈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섬광에 눈이 멀어버린 탓일까, 두려운 악몽에 빠져서일까.

「이대로 헤집어버려!」

페인은 촉수가 달린 도끼를 들고 있었다.

그는 도끼를 내질렀다.

쐐애액…!

도끼의 촉수들이 론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갔다.

퍼어어!!!!

직후, 론의 등딱지 정중앙에서 고래가 숨을 토해내는 것처럼 붉은 혈액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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