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44화 (144/181)

28. 전율 (4)

론을 쓰러뜨렸다.

중앙교회의 호수에 주저앉은 녀석은 등딱지 가운데에 움푹 파인 상처로부터 붉은 혈액과 푸른 혈액을 뿜어댔다.

「아직 안 죽었어.」

물을 빨아들이다가 산양의 내장으로 뱃속을 채우게 된 녀석이다. 그래서 나는 산양의 내장을 방혈하여 만든 혈액으로 녀석의 몸속을 헤집었다.

두드드드드!

밀폐된 등딱지 안에서 물보라라도 일어난 것처럼 혈액과 등딱지가 서로 충돌하는 소리가 울렸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야 해. 지금도 몸속을 수복하고 허물을 벗으려고 하니까.」

그래서 망설임 없이 녀석의 창자를 짓이겼다. 괴이하게 생긴 심장에 강제로 혈액을 밀어 넣어 터뜨렸다. 그러면서 혈관을 따라 퍼진 혈액이 녀석의 뇌까지 닿았다.

“꾸으으으! 꾸으으!”

론의 두 눈알이 충혈되어 새빨갛게 변했다. 갈라진 아가리에서 피를 뿜어대고 있다. 푸르게 물들었던 호수가 다시금 붉은색으로 색칠되었다.

나는 혈액으로 발판을 만들어서 호수 위를 이동했다. 그렇게 녀석의 머리 앞까지 다가갔다.

두 손으로 힘껏 움켜쥔 도끼를 치켜들었다.

「후회하고 있어.」

‘무슨 후회?’

「음…. 정확하진 않은데.」

「이렇게 패배해서 죽을 줄 알았다면, 샤가 말해준 차선책을 더 빨리 실행하는 게 좋았을 거라고.」

‘그 차선책이 뭔지는 모르겠고?’

「너의 약점이라는 개념인데…. 그 이상은 모르겠어. 크라켄의 머릿속이라.」

‘나중에 또 크라켄을 만나게 된다면 녀석들이 내 약점을 노릴 수도 있겠네.’

「그런데 네 약점이 뭐지? 샤가 차선책이라 말할 수 있는 약점.」

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녀석의 교활함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모르겠어. 계속 생각해 봐야지.’

나는 일단 도끼를 내려쳤다.

쩌저저적!!!

녀석의 커다란 머리가 세로로 갈라졌다. 양쪽으로 갈라진 단면에서 푸르뎅뎅한 뇌가 흘러떨어졌다.

그러자 론의 죽음을 증명하듯, 녀석이 갖고 있던 5104의 악이 내 영혼으로 흡수되었다.

「…이 충족감이 너무 좋아.」

“….”

내 안의 악령이 느끼는 것을 나도 느꼈다. 비워진 위장이 채워지고, 타들어간 목구멍을 물로 적시는 듯하고, 바로 이 순간만큼은 고향이나 소중한 사람이라는 개념보다 이렇게 악을 흡수하기 위해 싸웠다는 착각마저 든다.

정말이지 중독적이다.

또한 이렇게 거악을 흡수하고도 낙인의 효과 덕분에 몸은 망가지지 않는다. 오로지 강해지며, 다가오는 운명에 대항할 힘을 착실하게 키우는 듯 성취감마저 느껴진다.

「우리 이렇게만 가자고. 계속 이렇게.」

나는 잠시 론의 거대한 사체를 보고 있다가, 한숨을 돌리고서 호수를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론을 해치우셨다!”

“와아아아아!”

“역시 강령술사야!”

“이걸로 크라켄을 세 마리나 쓰러뜨린 거라고!”

“그뿐이냐? 용의 부활도 막았어! 황제도 이겼고! 타락한 승천자도 잡았어!”

“그가 우리의 영웅이다!”

주변에 모여든 왕국군이 나를 보며 환호하고 있었다. 환호하면서, 나의 연이은 활약을 떠올리며 신앙적인 수준의 믿음까지 가지게 된 것 같다.

‘또 내가 혼자서 해치운 것처럼 돼버렸네.’

내게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는 자기들도 사실은 목숨을 내던지며 싸워놓고는 말이다.

「아무렴 어때? 저런 반응이면 우리가 손해 볼 것 없지.」

나는 호수에서 빠져나와 땅을 밟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그러자 내 앞에 모여있던 자들이 나를 일으켜 세우려고 후다닥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셰르카가 앞서 나왔다.

“이번에도 이겨냈구나.”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이리는 한 번도 활약하지 않은 모양이다. 우산의 형태 그대로 그녀의 손에 쥐어져있다.

“조에들은?”

“악귀의 눈을 통해 알고 있지 않았나?”

“황금달에 둔 흑기사 열 마리가 전부야.”

그 열 마리를 제외한 다른 악귀들은 모두 다쳐서 잿빛세계에 갔거나, 전투 중에 죽거나, 지쳐서 쓰러졌다.

“그렇구나. 악귀 군단을 전부…. 크라켄 두 마리를 연달아 상대했으니 당연한 피해인가.”

“그래서 조에들이 어떻게 됐다고?”

“가루가 되어서 사라졌다.”

“뭐?”

“네가 론의 숨통을 끊은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도심에서 날뛰던 조에들이 전멸했다.”

「조에는 죽여도 얻을 수 있는 악이 없었지.」

「수고를 덜었어.」

그 말도 안 되게 단단한 육체를 가진 녀석들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서 사라졌다고 하니 실감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귀를 열고 도심의 소리를 들어보면 전투의 소리보다는 기뻐하는 소리와 환호성이 더 많이 들린다.

그러고 있으니 문득 생각이 났다.

나는 잽싸게 발걸음을 돌렸다.

좀 전에 빠져나온 호수에 붉은 발판을 다시 띄웠다.

“왜, 왜, 왜 그러느냐? 왜?”

셰르카가 빠르게 따라붙었다.

“설마 놈이 저렇게 보여도 살아있다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 론의 갑각이 곧 부서질 거야.”

나는 론의 등딱지 위에 올라섰다.

직감대로 론의 거대한 갑각 또한 조에들의 것처럼 가루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랜 세월 안치된 유골이 순풍에 맞아 가루가 되는 것처럼 아주 부드럽게, 또한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론은 조에들과 달리 덩치가 있어서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재결합.’

「오오! 그렇지! 이거 좋네!」

파스스스…

마법과 주술에 대항하는 강력한 저항 능력.

강철보다 가볍지만 그 어떤 강철보다도 단단한 재질.

이렇게 가루가 되어 사라진 후에는 세상 어디서도 찾을 수 없게 될 귀중한 소재다.

「이미 가루가 되어버린 부분은 잿더미처럼 변했어. 이걸 소재로 쓰려면 아직 멀쩡한 부분에서 직접 떼어다가 써야 할 거야.」

나는 수면 위에 떠오른 등딱지를 노렸다. 다리 부분을 덮고 있는 갑각은 이미 물에 잠겨서 가루가 되어 풀어지고 있다.

쩌적! 쩌적!

가루가 된 부분을 날려버리고 그 밑에 있던, 가루가 되기 직전이었던 부분을 재결합으로 분해하였다. 그렇게 직접 가루를 만들어서 내 앞으로 가져왔다.

「보관하려고 해봤자 금방 사라지겠지.」

「여기서 다 써버리자.」

나는 론의 갑각으로 만든 가루를 온몸에 뒤집어썼다. 내 방독면, 도끼, 단검, 손목쇠뇌에 가루를 섞었다.

그리고 걸치고 있는 의복과 부분 방어구에도 빠짐없이 가루를 섞었다. 흑기사의 사철을 발랐을 때처럼 집중력을 최대로 하여 갑각의 고운 입자를 하나씩 심었다.

나는 그렇게 론의 경이로운 갑각까지 흡수할 수 있었다.

「신화 속 괴물의 갑각이라….」

「튼튼한 중장갑이라도 걸친 것 같네.」

「무게의 차이는 거의 없지만.」

호수에 비친 내 모습은 그다지 바뀐 부분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보여도 론의 갑각을 섞기 전과 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으리라.

‘그리고 베르자인.’

그녀의 곁에 흑기사 열 마리를 두었다.

녀석들의 눈을 통해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멀쩡하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흑기사들은 잿빛세계로 돌려보낼게.」

지금껏 내가 경험해온 승리들을 떠올려보았다.

이번 건 만족스럽다.

뒤탈도 없이 깔끔하고 매우 만족스러운 승리다.

* * *

푸스스스….

거리에 있는 아그니샤와 승천자는 경계를 풀었다.

“론이 쓰러졌다고 하는군.”

그러자 아그니샤는 되물었다.

“쓰러졌다고요? 아니면 죽었다고요?”

승천자는 표현을 다시 선택했다.

“죽었네. 확실하게 죽었어.”

“그래서 조에들도 소멸하는 거네요.”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임에도 존재라고 할 수 없는 괴이한 것들이었지. 결국 조에 무리는 론의 꼭두각시로 움직이는 살덩이들이었다는 뜻이네.”

승전보는 왕국 전체에 퍼져나갔다. 도심에 들어온 피난민들은 거리에 돌아온 병사들을 보면서 꽃을 던지고, 성수를 뿌리고, 환호성을 내지르고, 박수갈채를 보냈다.

죽은 자들은 모두 영웅이 되었다. 그들의 시신은 교단에서 직접 관리하는 명예로운 묘지에 안치되었고 시신이 없는 자들은 무덤 없는 비석으로 그 숭고한 이름을 남겼다.

각 교회에서는 전사자를 애도하고, 미래를 위해 기도하고, 오늘날에 감사했다.

왕궁은 국고를 개방했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피해 복구작업이라는 새로운 일거리를 지원하고 가장을 잃어버린 가정에 막대한 위로금을 내려주었다.

그렇게 왕궁과 교단이 힘을 합쳐서 전쟁 후 발생하는 악령화까지 최대한 억제할 수 있었다.

길었던 하루가 지나고 어김없이 새로운 아침해가 떠올랐다.

위기가 사라지고, 모든 일들이 정리가 되어가는 듯했다.

대다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 * *

론이 쓰러지고 이틀이 지났다.

페인은 불나방들을 더 만들어서 중요한 인물들을 서둘러 세인트 왕국으로 데려왔다.

덕분에 왕궁에는 진실을 아는 이들이 빠르게 모일 수 있었다.

세인트 왕국의 왕과 신하들, 교단의 승천자와 신관들, 물의 마법사 파보크, 네이트의 화신 아그니샤, 강령술사 페인, 흑마법사 셰르카, 그리고 역병 교수들이다.

이들 모두가 알고 있다.

론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샤에 의해 실재세계의 크라켄이 모두 깨어나서, 이 순간에도 인류를 공격하고 있다는 거대하고도 두려운 진실을.

왕은 페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때 샤가 뭐라고 속삭였느냐?”

“전하의 목전에서는 무례한 발언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짐은 신경 쓰지 말고 그대로 읊어보거라.”

페인은 그 광기의 순간을 떠올렸다.

“내가 크라켄을 한 마리씩 너에게 성장의 재료로 던져주며, 친절하게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나? ……라고 하였습니다.”

“짐이 생각하기엔 바로 그것이 의문점이다.”

왕은 모두에게 말했다.

“정말로 모든 크라켄을 깨워서 강령술사를 죽일 심산이었다면, 어째서 깨부수는 론만을 앞서 보냈다는 말인가?”

론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다른 어딘가에 있는, 론보다 더 강력한 크라켄들이 합류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여럿이서 협공할 수도 있었다.

더욱 확실한 수단이 있음에도 왜 그렇게 무모한 공격을 감행한 걸까.

“악마의 하수인보다도 교활하다는 지옥의 머리가, 이렇게 각개격파를 당할 것을 고려하지 못했을 리가 없지 않으냐. 남은 크라켄을 모두 동시에 깨웠다고 한들 결국 이번에 상대한 것은 한 마리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강령술사는 이번 시련을 극복하면서 또 강해졌다지?”

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 저는 전보다 더 강해졌습니다.”

왕은 샤의 진의를 알아내려고 고뇌하고 고뇌하다가, 승천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렌달틀란크여. 그대가 보기엔…. 아니지.”

왕은 모두를 눈에 담았다.

“이 자리에 모두가 모였으니, 짐보다 경험 많은 그대들의 생각이 듣고 싶구나. 누구라도 좋으니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유로이 발언하도록 하라.”

그러자 매 역병 교수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세인트 왕국. 세인트교의 성역은 천계가 가르친 선의 근간입니다. 바로 이 나라를 멸망하게 하여 이 대륙에 있는 선의 영향력을 낮추고, 동시에 강령술사까지 흔들려고 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로 보입니다.”

거기까진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매는 이어서 발언했다.

“그리고 샤는 현재 강령술사님을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깨부수는 론이 왕국을 멸망시키고 강령술사님을 해치우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샤는 론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세인트 왕국을 침공하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앞서 말했듯 ‘표면적인 이유’를 떠올렸습니다.”

그러자 아그니샤가 물었다.

“샤가 우리의 생각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통제했다는 건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생각을 통제하려고 했다는 건, 달리 노리는 것이 또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무엇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몇 가지 숨겨진 노림수가 있는 건 확실하고, 저는 이 자리에서 그 숨겨진 노림수들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모두가 매의 말에 집중했다.

“우선, 샤는 강령술사님이 성장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따라서 조만간에 강령술사님이 실재세계에서 무언가에 의해 살해를 당하거나, 실재세계에서 강령술사님을 살해할 수단이 없다면 지옥으로 보내버리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을 듯합니다.”

파보크는 속으로 생각했다.

‘크라켄이 동시에 출몰해서 일제히 강령술사를 노린다고 하여도, 저 남자는 언제든지 잿빛세계로 도망칠 수 있다.’

아그니샤도 속으로 생각했다.

‘악마의 하수인 여럿을 보내려나? …하지만 강령술사 주변에는 악마의 하수인에 대항하는 수단이 너무 많은데. 괜히 성장의 재료가 될 수도 있잖아.’

독수리는 속으로 확신했다.

‘실재세계에서 강령술사님을 죽일 수 있는 수단 따위는 없다.’

그리고 모두의 생각을 정리하듯 셰르카가 말했다.

“이 세계에서 강령술사를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다.

“그 무엇이 온다고 하여도 강령술사는 도망칠 수 있고, 어떻게든 죽인다고 하여도 부활할 것이다.”

지금 세인트교의 성역에 있는 강령술사를 완전하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아마 없을 거라고.

이곳에는 왕국군, 마법사, 퇴마술사들이 있다. 승천자와 파보크와 아그니샤가 있고 셰르카와 역병 교수들까지 있다.

이런 상황에 도대체 그 무엇이 강령술사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그는 언제든 잿빛세계로 도망칠 수 있고, 그가 도망치기 전에 달려들어 죽인다고 하여도 부활할 것이다. 살짝 과장까지 보태자면, 당장 인류가 멸망한다고 하여도 강령술사는 홀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강령술사 개인의 힘은 가히 신화의 영역에 도달한 채다. 깨부수는 론의 모든 것을 흡수하여 더욱 강해진 채다.

그래서 페인은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내 약점….’

샤가 론에게 말했을 차선책.

강령술사의 약점.

론이 죽기 직전에 후회했던 바로 그 차선책.

「그게 뭐지?」

「이렇게 론을 내던지고 끝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 상대방의 약점을 알고 있다면 진작 노렸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때 악령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셰르카가 눈을 번뜩였다.

“잠깐.”

그녀의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왜 이런 중요한 자리에 베르자인이 없지?”

오직 그녀의 목소리만이 침묵을 깨고 있다.

“이 자리가 시작되고서 벌써 20분이나 지났단 말이다. 황금달의 머리가 지각이라는 걸 하는 인물인가?”

순간, 온종일 무표정이었던 아그니샤의 눈이 커졌다.

- 베르자인이 그곳에 있어.

- 흑사병에 고통받던 사람들을 구하던 모습은 어디로 간 거예요?

- 뭐?

- 정말 베르자인 씨만을 생각해서 이렇게 서두르는 거예요?

아그니샤는 승천자에게 물었다. 다소 목소리를 높이면서 재촉하듯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승천자는 의문 섞인 눈을 했다.

“동쪽에서는 피해 복구작업이 한창이라 길이 막히면 조금 늦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를 들었다만….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늦을 것 같으면 일찍 나오는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20분째 안 오는 건 너무 늦었어요. 늦어도 이렇게까지 늦을 사람이 아니에요.”

아그니샤와 셰르카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둘만이 페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자 모두가 둘의 시선을 따라서 페인을 보았다.

‘존재 추적해.’

「살아있어.」

「그런데 발렌잔타르 영지의 저택에 있어. 출발조차 하지 않은 거야.」

페인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사건과 상황과 대화들을 전부 떠올려 하나의 결론으로 조립한다.

‘조에들의 움직임….’

조에들은 먹이를 원했다. 시종일관 사람이 많은 곳을 향했다. 그런데 황금달 본거지에는 베르자인을 포함해 스무 남짓의 자객들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조에들은 황금달 본거지를 집요하게 노렸다.

황금달 본거지를, 그곳에 있었던 베르자인을 집요하게 노렸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계속 생각하고 있던 의문이 점차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론의 후회…. 차선책…. 내 약점….’

그리고 앞서 매가 했던 발언.

- 우선, 샤는 강령술사님이 성장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 따라서 조만간에 강령술사님이 실재세계에서 무언가에 의해 살해를 당하거나…

실재세계에서 강령술사를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수단 따위는 없을 거라고 모두가 생각한다.

페인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따라서,

- 실재세계에서 강령술사님을 살해할 수단이 없다면 지옥으로 보내버리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을 듯합니다.

지옥으로 보내버린다.

낙인의 효과 덕분에 아무리 많은 악을 흡수하여도 육체는 결코 악령화가 되는 일이 없는 페인.

그런 페인을 지옥으로 보내버릴 수 있는 방법이라면 육체가 아닌 정신을 무너뜨리는 것.

한때 벨로움이 그랬던 것처럼.

악이 쌓이면 쌓일수록 지옥과의 연결성은 강해졌다. 동시에 악이 쌓이면 쌓일수록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일이 점점 힘들어졌다.

그래도 미치지 않고서 유지하고 있던 정신이다. 정말로 미쳐버리면, 핏빛세계에서 느껴지는 것이 더욱 강하게 와닿을 것 같았기 때문에.

그래서 충분히 강해진 다음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당당하게 지옥을 마주하려고 했다. 맨정신으로.

그런 페인의 정신을 당장 공략한다. 성장하기 전에.

그런 페인의 정신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정신적인 약점을 파고들어야만 한다.

인간으로서의 윤리의식도, 도덕심도, 선의도, 대의도 점차 희미해져가는 페인.

그에게 여전히 인간적이고 정신적인 약점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였다.

“베르자인…!”

그는 단말마처럼 짧고 절박한 외침과 함께 왕궁을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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