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전율 (5)
왕궁에 모인 자들은 당혹스러웠다.
다른 건 몰라도 왕이 보는 앞에서 저런 식으로 말도 없이 뛰쳐나간다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당황한 사람은 왕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짐이 있는 자리에서 저리 설명도 없이 나가버렸다는 말인가?”
이 자리에서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아그니샤와 셰르카만이 알고 있다. 그리고 매 역병 교수 또한 짐작은 하고 있으리라.
이윽고 왕의 의문 섞인 눈초리에 아그니샤가 조심스레 대답하였다.
“그의 소중한 것을…. 노린 것 같사옵니다.”
“소중한 것?”
“무례를 용서하소서.”
설명할 시간도 없었다. 아그니샤는 서둘러 왕궁을 나가버렸다. 그러자 그 뒤를 셰르카가 말도 없이 따라갔다.
왕의 곁에 있던 신하들은 불쾌감을 드러냈다.
“멈추시오! 전하의 목전에서 이게 무슨 짓이오?!”
“아그니샤까지 저럴 줄은…!”
“그대들에겐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할 의무가 있소!”
이어서 셰르카를 따라 자리를 이탈하려던 매가 잠시 멈춰 섰다.
“방금 본 것이 강령술사님의 마지막 모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승천자까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왕은 그를 불러 세웠다.
“렌달틀란크여!”
“송구합니다. 전하.”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 강령술사의 마지막 모습이라니?!”
“1분 1초가 급박하여 설명을 줄이는 점, 용서하소서.”
그를 따르는 파보크와 신관들은 좌불안석이 되었다. 그리고 왕의 직속이 되는 신하들은 승천자에게까지 언성을 높이려고 했다.
그러나 신하들이 입술을 떼기 직전, 왕이 옥좌에서 일어섰다.
“짐의 앞에서 저들이 말도 없이 떠나갔다. 심지어 아그니샤까지….”
신하들은 입을 다물었다.
“내가 그들의 인품을 알고 있으니 이해할 수 있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 것 같으니 그대들의 행동을 헤아리겠다.”
승천자는 매 역병 교수에게 어서 가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매는 셰르카의 뒤를 따라서 왕궁을 빠져나갔다. 독수리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니 짐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보거라. 렌달틀란크.”
“…황금달의 머리이자 발렌잔타르 가문의 영주, 베르자인….”
이제 승천자가 왕에게, 신하들에게, 신관들에게 설명한다.
“그리고 음지의 해결사이자, 사형수이자, 추방자이자, 강령술사가 되어 돌아온 그가 있었습니다.”
왕의 이마로 한줄기 땀방울이 흘러떨어졌다,
“강령술사. 그가 해결사였을 시절부터, 그가 가장 낭떠러지에 있을 시절부터 의지하고 믿었던 인물이 바로 베르자인입니다. 왕국 전체가 그를 적대하고 있을 때도 베르자인은 그의 편이 되어 주었지요. 모두가 타락한 승천자를 맹신하고 있을 때조차 베르자인은 강령술사의 말을 믿어주었다고 합니다.”
만약 베르자인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강령술사도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베르자인 또한 강령술사와 함께 난관을 극복하며 오늘날의 위치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그 베르자인을 노려서 강령술사를….”
“예. 깨부수는 론과의 전투가 한창일 때도 강령술사는 베르자인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행히도 그녀는 살아남았지만, 살아남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게 된 것 같습니다.”
“….”
“만약 그녀가 잘못된다면 강령술사의 심정이 어떨지… 저희로서는 헤아릴 수 없을 것이옵니다.”
승천자는 파보크에게 눈짓했다.
“아. …예.”
파보크는 힘겹게 발걸음을 뗐다.
이제 이들의 무례를 책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왕은 다시 물었다.
“악령화로 인해 악마의 그릇이 되어버릴 거라는 뜻인가…?”
“낙인 받은 자의 육체가 크게 뒤틀린다고 하여도 악마의 그릇이 되기엔 부족함이 있을 것이옵니다. 악마도 인간도 아닌 어중간한 그릇으로는 부족하지요.”
그 대목에서 왕은 떠올렸다.
매 역병 교수가 했던 발언을.
“마음은 곧 영혼입니다. 마음이 붕괴되면 영혼도 붕괴되는 것이고, 저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게의 악을 머금고 있는 그의 영혼이 무너지게 된다면……. 더는 지옥의 부름에 저항할 수 없게 될 것이옵니다.”
강령술사는 육체적으로 면역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과 영혼은 저항하고 있었다.
샤는 그것을 무너뜨리려는 것이다.
그가 더 성장하기 전에 짓밟으려는 것이다.
* * *
페인은 왕궁을 나오자마자 잿빛세계를 경유하여 발렌잔타르 가문의 영지까지 단숨에 도착했다.
피해 복구작업이 한창인 거리다. 상의를 탈의한 남자들이 무너진 건물에 못질과 망치질을 하고, 각종 자재를 여럿이서 힘차게 옮기고 있다.
“저기 저분, 강령술사 아니야?”
“어디?”
“오오오! 어서 오십시오!”
“봐! 내가 말했잖아! 우리 영주님이랑 친분이 깊다니까? 내가 뒷골목 출신인데 거기 술집에서…”
“이야, 이 새끼 뒷골목 출신이라는 거 허풍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네.”
등에 아이를 업은 아녀자들은 커다란 솥에 죽을 끓이고 있다가, 거리에 나타난 강령술사를 보며 방긋 웃었다.
“강령술사님! 어서 오세요!”
“여기까진 어쩐 일이시래요?”
주변에서 뛰놀던 아이들은 페인의 기괴한 차림새를 신기한 눈빛으로, 동경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중에 손재주가 좋은 아이는 나무를 깎아서 그의 방독면을 흉내 낸 것을 만들어 보이기도 했다.
“까마귀 방독면이다!”
“와아! 진짜 강령술사다!”
시체가 널린 전쟁터에서 출몰하는 까마귀.
언제부터인가 세인트 왕국에서 까마귀는 흉조가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페인의 기괴한 차림새를 보아도 두려워하는 이가 없다. 전과 달리 페인은 어디를 가든 환영과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깨부수는 론이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성벽 밖의 마을과 농지들을 파괴했지만, 거리의 분위기는 전보다 더 활기찼다.
그들에겐 영웅이 있었기 때문이다.
절망을 이겨내고서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강령술사님!”
“강령술사님이 우리 영지에 방문하셨어!”
페인은 대답도 없이 무작정 뛰었다.
그녀의 저택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일단 영지로 온 다음에 그녀의 저택까지 뛰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가는 길에 많은 이들이 그를 응원하고, 그에게 감사하며, 그를 우러러보았다.
그렇게 저택의 정문이 보일 때까지 뛰어왔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두 사병은 뛰어오는 그를 목격했다.
“강령술사님인데?”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가?”
“아, 오늘 아침에 영주님이 편찮으셨다고 했잖아. 그래서 왕궁도 못 가시고.”
“아이고. 걱정되셔서 저렇게….”
“저분도 인간미가 있으시다니까.”
두 사병은 그를 검문하지도 않고 문을 열어주었다.
“환영합니…”
타다닷!
페인은 활짝 열린 정문을 그대로 통과해버렸다.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졌다. 싱그러운 풀밭 위에서 빗자루를 든 하인들이 밝은 인사를 보내왔지만 전부 무시했다.
저택에 들어가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뛰어갔다.
그녀의 방이 있는 층에는 자객들이 있었다.
“진짜 오셨어!”
“이, 이쪽입니다…!”
분위기가 바깥과는 크게 대비되었다. 자객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서둘러 페인을 안내했다.
그렇게 자객들을 지나치며 뛰고 있으니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듯했다.
“안에 계십니다!”
끼익!
그는 자객이 열어준 문을 통과했다.
넓은 창, 황금달의 십자수가 박힌 커튼이 있는 공간.
커다란 침대. 그 주변에 모인 자객들과 손수건을 들고 있는 하인. 그리고 저택에서 상주하는 그녀만을 위한 의원.
“베르자인!”
페인은 그녀의 옆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야!!!”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그녀는 대답이 없다.
“왜 이러는 거야? 왜?!”
그러자 의원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30년째 병을 치료하고 있지만 이렇게 하룻밤 만에 악화되는 건…”
페인은 의원의 멱살을 쥐었다.
“이게 무슨 병인데?!”
“이, 일단, 일단 병명은 모르겠으나…. 병이 침투할 수 있는 겨, 경로는 양팔과 허벅지에 있었던 상처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이런 생채기로 생기는 병은 각혈을 하거나 고열의 증세를 동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런 것도 없이… 졸음만을 호소하셔서….”
“계속 잠이 온다고?”
“예, 그, 그렇습니다….”
페인의 안에 있는 악령도 그처럼 다급했다.
「죽진 않았어! 어떻게든 해보자!」
페인은 베르자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몸에서 흐르고 있는 혈류가 약하다. 심장의 고동 소리도 죽어가는 사람의 것처럼 약해지고 있다.
‘이러다가 심장이 멈출 거야…!’
「알아! 혈류의 속도를 높일게!」
베르자인의 몸속에 흐르는 혈액을 조종했다. 심장에 충분한 혈액을 밀어 넣고 그만큼 충분한 혈액을 빼내어 온몸의 혈관으로 보냈다. 그렇게 심장이 정상적인 속도로 뛰게 만들었다.
하지만 모세혈관에 흐르는 혈액까지는 세밀하게 조종하지 못했다. 그 탓인지 그녀의 새하얀 피부에서 푸른 혈관들이 멍이라도 든 것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거 좀 이상해!」
「혈액을 조종하는 게 어려워!」
그 모습을 관찰하던 의원이 작은 침을 꺼냈다.
“살갗 밑에 추, 출혈이 퍼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선 출혈의 방향을 바깥에서 정해줘야 합니다….”
“뭐든 괜찮으니까 빨리…!”
의원은 페인의 반대편으로 갔다. 그녀의 한쪽 손을 들었다.
다섯 손가락에 침 다섯 개를 꽂았다.
「아, 진짜 왜 이러는 거야?!」
“왜?!”
「혈액이 저항하는 것 같아….」
「이건…. 조에랑 비슷한 느낌이라고….」
이윽고 그녀의 다섯 손가락에서 핏물이 맺혀 나왔다.
그 피의 색깔을 본 의원과 자객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의 피가 푸른색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안 돼….”
그녀의 몸속에 흐르는 혈액이 점점 통제를 벗어난다. 자꾸만 느려지는 심장과 자꾸만 느려지는 혈류의 속도를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리려는 노력이 점점 허무해진다.
그때, 페인이 잡고 있던 손아귀에 힘이 들어왔다.
“영주님…!”
“영주님!”
“베르자인!”
그녀가 가늘게 눈을 뜨고 있었다.
“너야……?”
눈에 초점이 없다.
깨끗한 흰자위에 푸른 충혈이 있다.
페인은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그래, 나야! 내가 살려줄게! 잠들지 마, 제발!”
“너구나…. 내 마지막…”
“지랄하지 마!!!”
페인은 화를 냈다.
“네가 이딴 식으로 죽을 사람이냐?! 어제도 그렇게 다 이겨내고서 끝난 일이잖아! 왜 이제 와서 지랄인데?! 그냥…! 그냥 어제처럼 좋게 끝나고 마무리하면 되는 거잖아! 갑자기 왜!!!”
“……아쉽다.”
순간, 의원은 무언가를 직감했는지 그녀의 한쪽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자유가 된 그녀의 한쪽 손이 페인의 얼굴을 향했다.
자객들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나…. 간절했던 목표를 달성하니까 공허해지더라고….”
눈에 초점이 없는 그녀는 페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사실 만지고 있는 것은 그의 그리운 얼굴이 아니라 차가운 방독면이었지만.
그녀는 페인의 얼굴을 분명히 보고 있었다.
“영주가 되어서… 늙어서… 주름이 생기기 전에…. 아이를 낳고…. 후계자를 만들고….”
유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다음 목표가 생겼어…. 아니…. 어쩌면 영주가 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목표였을지도…. 공허하지 않게 되었어….”
죽음을 부정하고 싶어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나의 꿈은 추상적이지만… 목표는 직관적이었지….”
페인은 눈물을 흘렸다.
한참 전에 메마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추억으로 감싸진 그녀와의 기억이 아껴둔 눈물처럼 차올랐다.
그러나 이제 그의 방독면 안에 갇힌 눈물을 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게 될 것이다.
“페인…. 어디서 뭘 하든 네 생각이 나더라.”
쿵쿵쿵!
셰르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그니샤도 함께 들어왔다.
끼이익!
매와 독수리가 들어오고, 승천자와 파보크가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의 소리는 페인에게 들리지 않았다. 혹여나 그녀의 마지막 한 마디를 놓치게 될까 봐. 그녀의 목소리를 놓치게 될까 봐.
페인이 그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건지, 베르자인은 사랑에 물든 미소를 지었다.
“결혼……. 너를….”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
공기까지 숨을 거둔 듯 침묵했다.
「하…!」
페인은 정지했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숨조차 내쉬지 않았다.
그러다가,
「씨발….」
“씨발….”
무너졌다.
승천자와 아그니샤와 파보크는 살갗으로 느꼈다.
“안 돼…!”
“강령술사님!”
“이게 도대체…”
그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차원 너머의 사악한 기운을.
그리고 셰르카는 소리로 들었다.
-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울부짖고 있는 페인과 함께 괴성을 내지르고 있는 영혼의 절규를. 지옥의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를.
그리고 오로지 페인에게만 보이는 주변의 세계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현실 위에 악몽이 덧칠되는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뒤틀렸다.
-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온 사방의 벽지가 사포에 문질러진 누군가의 살갗처럼 고통스럽게 벗겨졌다. 커튼이 새까만 불에 타올라 순식간에 흩날렸다.
드드드드드드!
무언가 많은 것들이 창문을 두드렸다. 피로 된 손바닥 자국이 창문에 빼곡히 붙었다. 바닥에 균열이 퍼지고 침대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다가 창문을 깨고서 나가버렸다. 눈을 감은 베르자인이 유골이 되어버리고 그 유골조차 가루가 되어서 사라지고 햇빛이 꺼지며 주변을 어둠이 잠식했다.
투두두두둑!
그의 등에서 검붉은 촉수들이 튀어나와 광기의 춤을 추었고 그의 두 눈에서 먹물 같은 피가 뿜어져 렌즈를 깨고서 방독면의 부리를 따라 흘렀다.
“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 샤아아아아…!
지옥의 메아리가 들렸다.
공간이 무너지고 건물이 사라졌다. 피와 살점으로 물들여진 축축한 대지가 발밑에 펼쳐졌다. 검은 배경 같은 광기의 산맥들이 저 멀리서 솟아났다. 영혼의 얼굴이 붙은 먹구름이 상공에서 초월적인 폭풍처럼 몰아치면서 페인을 내려다보며 깔깔댔다. 새빨간 혈액으로 된 파도가 대지에서 넘실대다가 페인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웃었다.
“씨발새끼들아!!!!!!!!”
페인은 하늘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그를 비웃던 먹구름들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그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며 웃던 혈액의 파도가 대지 밑으로 꺼져버렸다.
- 샤아아아아!
그의 등에서 자라난 촉수를 거대한 그림자의 손아귀가 잡아끌고 있었다. 언제부터 붙잡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샤아아! 샤아아아아아!
페인의 발치에서 촉수와 가시가 뒤엉킨 물체가 돌출되어 그림자의 손아귀를 찔러버렸다.
그리고 홀로 남았다.
지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