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48화 (148/181)

29. 핏빛세계 (3)

만타는 플라브의 피난민들을 학살했다.

“으으음.”

그들의 시신을 사뿐히 밟아서 눈 속에 파묻어버리고, 바로 근처에 있는 언덕에 올라 디아나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전보다. 커졌군. 이 나라.’

만타를 따라다니는 눈보라와 혹한의 추위가 디아나를 덮쳤다. 그래서 추위에 면역이 없는 남쪽 인간들이 혼비백산이 되어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다가, 자신을 향해 군대를 보내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만타의 예상보다 조용했다.

‘저건 뭐지?’

만타는 저 멀리 해안에 있는 커다란 구조물을 보았다. 바다 위에 지어진 듯한, 비슷비슷한 모양의 구조물에 디아나의 인간들이 모여있었다.

‘인간들, 내가 잠든 사이에. 허송세월을. 보낸 건. 아니었구나.’

‘바다 위에서. 움직이는 기지라.’

만타는 그것을 바다 위의 기지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만타가 보고 있는 것은 디아나가 자랑하는 ‘범선’이었다.

범선 서른 척에 디아나의 백성들 모두가 탑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항구에 남아 발만 동동 구르거나 자기들도 데려가라며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내가 올 걸. 어떻게 알고서’

만타는 의구심을 품으며 자신의 옆과 뒤까지 넓게 둘러보았다. 그러자 가장 멀리 보이는 산맥에서 웬 연기가 두 줄로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산불? …그렇다고 하기엔. 인위적이다.’

봉화였다.

‘이곳의 인간들. 머릿수가 적은데.’

물론 당장 눈에 보이는 인간들은 항구를 가득 채울 정도로 바글바글하지만, 저들이 피난민이라고 가정했을 때 디아나의 영토 크기를 생각해 보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다. 그리고 진작 국경에서 마주쳐야 했을 군대도 보이질 않는다.

만타는 항구에 모인 자들과 바다 위에 떠있는 범선들을 가만히 관찰했다. 절반 이상의 범선은 벌써 해안을 떠나서 바다로 나가고 있는 듯하다.

즉, 디아나는 자신이 이곳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저렇게 피난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엇이…. 디아나의 인간들을….’

그러다 만타는 범선 아래에 있는 수면의 색깔을 보았다.

범선들의 주변 바다가 주황색과 빨간색으로 얼룩져있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네가 선두를. 치고 있었군.’

* * *

연이은 범선들의 행렬 속에서 중간 즈음에 위치한 범선은 왕과 왕궁 관계자들이 승선한 지휘함이었다.

디아나의 젊은 왕은 신하들에게 보고를 받는 중이다.

“아마카라의 고서에 따르면 ‘바다의 적조(赤潮)’라고 불리는 태고의 괴물이옵니다. 일정한 형체도 없이 흘러 다니며, 바닷물을 부패하게 만들고 적조의 영역에 들어온 생물들을 모조리 죽이는 괴물이옵니다.”

디아나는 일주일 전부터 물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강, 우물, 바다가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 물에 접촉한 자들은 순식간에 온몸의 살갗이 붉게 변해서 죽고 말았다.

가축도 농작물도 더는 살아있을 수가 없었고 하늘에서는 붉은 비가 내리게 되었다. 나중엔 바다로 나가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고 산으로 나가도 사냥감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오염된 물과 접촉한 모든 것들이 죽어있었다. 모든 것들이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북쪽에서는 ‘소리 없는 부패귀(腐敗鬼)’라고 부르며……. 세인트교의 성서에서는 337번째 크라켄. ‘쏟아붓는 스퀴아’라고 기록된 바가 있다고 하옵니다.”

하지만 젊은 왕은 신하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왕이 되기엔 아직 어리다고도 할 수 있는 왕이었다. 그래서 그는 카프하니드와 도깨비의 위협이 사라진 탄탄대로를 힘차게 걷고 나이를 먹으면서 노련한 왕이 되기를 꿈꿨다.

하지만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나라가 좀 전에 멸망한 것이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부, 대모, 대장군 같은 뛰어난 인물도 공백인 상황이다.

“눈보라는 무엇이냐…? 내가…. 지, 짐은 항구를 뜨기 전에 봉화대가 있는 곳으로부터 다가오는 눈보라를 목도하였다. 설명할 수 있는 자가 있느냐?”

그러자 어느 신하들이 민머리의 병사를 데리고 나와서 왕의 앞에 세웠다.

병사는 넙죽 무릎부터 꿇었다.

“너는 무엇이냐?”

“소인은 어릴 적 디아나의 국경에 인접한 아마카라 수도원에서 잠시나마 수행을 하였던 수도승이었습니다. 무인이란 자고로 전투의 경험을 쌓으며 실력을 기르고, 수행의 경험을 쌓아 정신을 단련하는 것이…”

“분명 그 눈보라는 플라브가 있는 북쪽으로부터 산맥을 넘어오고 있었지.”

왕은 그를 재촉했다.

“그 눈보라의 정체가 무엇인지 안다면 당장 말하거라.”

“…만타입니다. 혹한의 추위와 잔혹한 눈보라를 몰고 다니는, 갓난아이의 얼굴 가죽을 붙이고 있는 소름 끼치는 거북입니다.”

“만타…. 만타…. 낯익은 울림인데.”

“먼 과거에 만카라의 화신인 불타를 살해한 괴물입니다.”

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그랬었지…. 기억이 났다. 만카라의 화신을 살해할 정도로 위험한 거북…. 그게 만타였구나.”

“놈이 북쪽에서 왔으니 플라브는 이미 얼어붙었을 것입니다.”

“이를 어쩐다는 말이냐. 나라를 잃고…. 항구에 버려둔 백성들까지 잃게 되었으니…. 망조를 읽지 못한 내 책임이 너무도 무겁구나….”

젊은 왕은 도서관에서 읽었던 끔찍한 신화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신하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한 신하가 모두를 대표하여 주장했다.

“서른 척의 범선에 6천의 백성이 살아있습니다. 그들이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한, 디아나는 결코 멸망한 것이 아니옵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스퀴아와 만타에 대항할 수 있는 국력, 태고의 괴물을 무찌를 수 있는 힘. …그것은 최초의 성역이 안착한 대륙에 있습니다.”

“…세인트 왕국과 강령술사.”

“저희는 데이진타우 제국과 수교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제국은 왕국과 수교를 맺었으니, 저희는 그곳에 자리하여 스퀴아와 만타의 위협을 알리고 함께 맞서 싸우면 되는 것입니다.”

* * *

“꺄아아아!”

“아아악…!”

“안 돼…! 안 돼…!”

“으아아아아아아아!”

만타는 항구를 쳐부수고 있다. 목을 길게 늘여서 머리로 항구를 부수고 사람들을 부패한 바다에 빠뜨렸다.

부패한 바다에 빠진 자들은 스퀴아에게 당해서 온몸이 빨갛게 변하였다. 그들은 끓는 물에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치다가 숨통이 끊어졌다. 그 집단적인 죽음에는 남녀노소도 병사와 민간인의 구분도 없었다.

콰지지직!

만타는 사람들이 잡히는 대로 몸을 씹어버리고, 으깨고, 날려버렸다. 가까스로 달아난 무리를 향해서는 눈사태를 일으키거나 살인적인 우박을 보냈다. 그런 것으로부터 또 기적적으로 살아남는 자들은 머지않아 혹한의 추위를 견디지 못해 전멸했다.

츠즈즈즈즈…!

가장 마지막 범선은 이제 막 항구에서 떠나려다가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범선 아래에 스퀴아가 모여서 목재를 썩게 하고 철갑을 녹슬게 하였다. 구멍이 뚫린 범선은 천천히 침몰하였고,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려고 했던 범선 안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밟거나 밀어서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다.

범선의 아래쪽부터 서서히 차오르는 오염된 물은 그들에게 공포였다. 살짝 닿기만 해도 극심한 고통 속에서 절명한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을 테니.

“으아아아!”

“아아아아아악…!”

갑판 위에 사람들이 빼곡했다. 밀쳐진 사람이 바다에 떨어져서 죽고, 조금이라도 더 살려고 갑판에서 버티고 있던 자들은 범선이 침몰하고서 가장 마지막에 죽었다.

그렇게 핏빛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눈보라에 의해 하얗게 변한 항구.

입가가 피로 범벅이 된 만타는 바다를 보며 외쳤다.

“스퀴아!”

그러자 부서진 항구의 목재를 따라 부패가 번졌다. 부패는 만타의 앞까지 다가오면서 하얀 눈을 빨갛게 물들였다.

츠즈즈즈…

수많은 생물의 뼈가 뒤엉킨 붉은 덩어리가 무수한 눈알들을 만타에게 들이밀었다.

“마흐타…. 너허으… 도… 크훈으부르헤…”

“그렇다. 나도. 그분의 부름에. 깨어났다.”

스퀴아의 어눌한 말을 만타는 또박또박 알아들었다.

“모저…?”

“목적은. 알려주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론이 있던 대륙. 그곳에서. 사라지셨다. 그곳에서. 우리를. 깨우고. 사라지셨다.”

“혼느에… 마퀴라느…”

“그래서 너는. 본능에. 맡겨. 무엇을. 하려는 거지?”

“힌간… 으…”

“종말을. 원한다면. 나도 같다.”

“크휘코… 카뤼어슈샤…”

스퀴아는 그 말을 내뱉으며 흥분하고 있었다. 얼룩진 덩어리에 박힌 뼈들이 부르르 떨렸다.

“강령술사는. 내 사냥감이다.”

“….”

“너에게. 줄 수 없다.”

“어헤서…?”

“속삭이는 이비. 를. 뛰어넘고 싶다.”

“히이이이…!”

스퀴아는 만타에게 적개심을 표출했다. 덩치를 부풀려서 만타를 내려다보았다.

“카뤼어슈샤느…! 나흐커시타…! 나느…! 호랫통한…! 쿰추렸타…!”

츠즈즈즈!

순간, 만타의 발치까지 눈밭이 빨갛게 물들며 부패가 번졌다.

“알겠다.”

콰아아!!!

만타는 부패하던 눈을 앞발로 쳐냈다. 스퀴아는 눈을 뒤집어쓰고서 기괴한 울음을 내질렀다.

“히이이이이이…!!!”

“서열에. 도전하고. 싶다면.”

만타는 눈을 뒤집어쓴 스퀴아를 머리로 강타했다. 그러자 스퀴아의 덩어리 같은 육체가 잘게 깨졌다. 그 짧은 순간에 얼어붙은 탓이다.

조각조각 깨져버린 스퀴아의 잔해물이 눈밭에 떨어졌다.

“가뿐히. 밟아주마.”

만타는 짧은 거리를 도약하여 스퀴아의 잔해물이 흩어진 곳으로 거칠게 떨어졌다. 그러자 주변 땅이 부서지고 뒤집혀서 공중에 붕 떴다.

그리고 공중에 뜬 것들이 지면에 떨어지기도 전에 바다로부터 스퀴아의 잔해물이 거대한 파도처럼 일어나 붉게 해안을 덮쳤다.

주변에 쌓인 눈은 물론이며 항구와 민가들까지 부서져서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 중심에 홀연히 남은 등딱지는 멀쩡했다.

츄우욱!

등딱지에 숨었던 만타는 네 다리와 머리를 꺼냈다. 그러자 온 사방에서 핏빛의 덩어리들이 살아있는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꽈드드드득…!

만타를 덮치려던 잔해물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눈보라가 더욱 거세졌고 강풍 속에 섞인 우박이 얼어붙은 핏빛의 잔해물을 유리처럼 깨버렸다.

그러자 이번엔 바다에서 잔해물이 일어나 거인을 닮은 듯한 육체를 형성하였다. 다만 얼굴 부분이 무언가를 뿜어내기 위한 주름진 관처럼 생겼다.

“마흐타아아!”

스퀴아는 머리로 만타를 조준하여 잔해물을 사출했다. 허공을 일직선으로 가로지른 잔해물은 바위라도 가를 수 있을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하지만 만타는 위기감보다 즐거움을 느꼈다.

“흐흐흐흐…!”

만타는 또 등딱지 속에 숨어버렸다. 직후 사출된 잔해물이 만타의 등딱지를 쳤다.

츠즈즈즈즈즈즈!!

만타의 등딱지에는 조그만 흠집조차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만타의 등딱지와 주변에 흩뿌려진 잔해물이 스스로 움직이는 물처럼 만타를 향해 모였고, 곧 만타를 등딱지 그대로 감싸버렸다.

…쩌정!!

하지만 만타는 자신을 감싼 잔해물을 순식간에 얼리고 부숴버렸다. 그러나 그 순간에 거인의 형상을 한 스퀴아가 만타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머리에 달린 길쭉한 관을 더욱 길게 돌출시켜 모기의 주둥이처럼 바꾼 것이다.

‘등딱지에. 숨었다간. 찔린다.’

바위 같은 우박이 몰아쳤다. 뛰고 있는 스퀴아의 육체가 잘게 부서지기 시작했다. 우박에 맞은 부위에 동그란 구멍이 생겼다.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히이이이이! 히이이이!”

처벅! 처벅!

스퀴아는 지면을 빠르게 기었다. 옆구리에서 새로운 팔들을 만들어내 여섯 개의 다리처럼 써서 기었다. 주변에 쌓인 잔해물들을 다시 움직여 만타를 온 사방에서 덮치도록 하고, 동시에 길게 돌출시킨 주둥이를 어떻게든 만타에게 꽂으려고 했다.

“이만하면. 됐다.”

만타는 눈꺼풀을 떴다.

그 눈꺼풀 뒤에 갇혀있던 희생자들의 눈알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스퀴아가 그 눈알들을 마주한 순간, 만타의 등딱지 뒤쪽에서 붉은빛을 내는 일곱 개의 팔이 튀어나왔다.

쩌저정!!!

이윽고 붉은빛으로 이루어진 일곱 손바닥이 스퀴아의 온몸을 붙잡았다.

으드드득!!!!!

손바닥은 손아귀가 되어서 스퀴아의 육체를 짓이겼다. 빨래의 물을 짜는 것처럼 비틀고 고기를 찢는 것처럼 사방으로 잡아당겼다. 또한 이 순간에도 온 사방에서 만타를 향해 돌진하던 핏빛의 파도가 있었는데,

“으음.”

푸스슥…!

만타의 주변으로 흙으로 된 벽이 올라와서 그 모든 파도를 막아버린 것이다.

“주술은. 오랜만이라. 적응할. 필요가 있겠다.”

“히이이이…….”

스퀴아의 잔해물이 만타 앞에 널브러졌다. 데굴데굴 굴러다니던 눈알들이 잔해물에 걸려서 멈췄다. 그리고 조금씩 덩어리가 되더니 이번엔 소인 같은 형체가 되었다.

이제 스퀴아가 만타를 올려다보고 있다.

“강령술사. 내가. 그의 능력을. 몇 개라도. 쓸 수 있게. 된다면. 어떨 것 같나?”

“히이이…!”

“속삭이는 이비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호옥종… 하니타…”

“잘 생각했다. 졌으면. 복종해야지. 바다까지. 얼려서. 빙산에 가두려다가. 봐줬다.”

만타는 스퀴아를 지나쳐서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그러자 스퀴아의 잔해물이 만타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분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 하나다.”

“히이이….”

“강령술사의 존재. 그의 위치. 다른 것은. 언급이. 없었다. 어떠한 명령도. 목적도.”

스퀴아가 만타의 주변에서 뭉쳤다.

꽈드드드득!

만타의 주변에서 뭉친 스퀴아는 스스로 떠다니는 붉은 빙산이 되었다.

“그분은. 그 대륙에서. 사라지셨으니. 그 대륙에 있는. 형제에게. 물을 것이다.”

“로호오온…….”

“그렇지. 론이다. 론이라면. 그분에게. 한마디라도. 더 들었을 테지.”

붉은 빙산은 더욱 성장했다. 주변에 있는 스퀴아의 잔해물이 모두 모여서 만타의 힘에 의해 빙산이 되는 것이다.

“가증스러운. 세인트교. 그리고. 먹음직스러운. 강령술사. 그리고. 우리의 형제. 론.”

만타는 가장 큰 빙산의 꼭대기에 올라서 수평선을 내다보았다.

“그 모든 것이. 저 대륙에. 있다.”

붉은 빙산들이 일제히 항해를 시작했다.

그것은 범선보다 빠른 속도였다.

그러고 있으니 수평선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다.

“너는. 저것들이라도. 먹어서. 굶주림을. 참아라.”

이후 디아나는 바다 위에서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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