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50화 (150/181)

29. 핏빛세계 (5)

엑수스가 황금 사슬로 페인을 속박하고 있을 때 네이트는 손에 든 자그마한 십자가를 페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키이잉!

눈을 감아도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구원의 빛이었다. 페인은 구원의 빛 앞에서 온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카하아악…!”

그리고 페인의 등에 달린 살덩이도 그와 똑같이 괴로워하며, 빛을 저주했다.

“천사 새끼들!! 이런다고 뭐가 바뀔 것 같아?! 어차피 또 우리의 힘이 필요해서 구하려는 거겠지!”

페인의 하반신을 짓누르고 있는 황금 철퇴가 꿈틀대는 핏물에 감싸졌다. 이어서 핏물은 황금 사슬을 따라 거꾸로 흐르며 엑수스의 손까지 닿아 저주를 퍼뜨렸다.

철그렁!

엑수스는 황금 사슬을 놓아버렸다.

“이런.”

그의 손이 까맣게 괴사하고 있었다.

“…그토록 후회하면서 지우려고 했던 역병을 제 손으로 다시 쓰다니.”

쩌겅!!

날카로운 은빛 십자가가 하늘에서 떨어져 엑수스의 괴사하는 손을 잘라버렸다. 곧이어 네이트가 외쳤다.

“조심해! 흑사병이 통한다는 걸 알았을 거야!”

엑수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흑사병….”

“까아악!!”

괴롭게 몸을 뒤틀던 페인은 기어코 황금 사슬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리고 즉시 황금 철퇴 밑에 깔렸던 핏물과 살점을 끌어와 하반신을 수복하고, 야수처럼 자라난 손톱을 눈앞의 네이트에게 휘둘렀다.

하지만 페인의 손톱은 네이트의 보호막만 긁고 말았다.

퍼엉!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소환된 십자가들이 허공에서 춤을 추는 칼처럼 페인의 사지를 절단해버렸다. 그러나 페인은 사지가 절단되어도 금방 수복하였다. 사실상 절단과 동시에 수복되는 수준이라, 십자가가 사지를 벤다기보다는 통과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키기기깅!!!

페인은 네이트의 보호막을 끌어안고서 흑염을 뿜어냈다. 그 흑염에 자신까지 화상을 입으면서도 네이트의 보호막을 깨버리려는 것이다.

“무슨 이런 영력이…”

“잘 잡고 있어라! 네이트!”

엑수스는 등 뒤에 태양 같은 거대한 소용돌이를 전개했다. 그 소용돌이로부터 파괴적인 크기의 철퇴들이 사슬을 늘어뜨리며 튀어나왔다.

잠시 하늘로 상승한 철퇴들이 공중에서 정지하고, 페인을 향해 일제히 낙하했다.

“죽이면 안 돼!”

“이걸로는 죽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페인을 노리는 철퇴의 타격이 이어졌다. 연달아 폭음이 터지면서 짓무른 대지가 움푹 꺼지고 흙에서 시작된 것인지 페인의 몸에서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없는 핏물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페인의 덩치에 비해 철퇴가 너무 크고 많아서, 철퇴끼리 충돌하여 찌그러질 정도로 집중된 타격이었다.

흙먼지 따위는 없었다. 허공에 흩어진 축축한 흙, 돌멩이, 살점, 뼛조각 따위는 금방 추락하였다.

그리고 확인하니 움푹 꺼진 구덩이에 페인은 없었다. 단지 좀 전에 허공으로 흩어진 것처럼 주인을 알 수 없는 살점과 뼛조각 따위가 그 자리에 떨어졌을 뿐이다.

“아래에 있다!”

당장 페인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두 상위 천사는 그의 존재감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엑수스의 황금 철퇴에 짓이겨진 게 아니라, 황금 철퇴를 피해서 스스로 땅밑에 숨어버린 것이다.

“개미지옥이야!”

동시에 엑수스의 배후에서 페인이 흙바닥을 뚫고 나왔다.

“…!”

그때 엑수스는 느꼈다.

태고의 시대에 겪었던 전쟁터의 불안정한 감각이다. 포드키엘이었던 시절에 홀몸으로 비명의 편린을 상대하면서 느껴본 감각이다.

그의 인생에 두 번 있었다.

죽음의 문턱이었다.

“까아아아!!!”

사족보행을 하던 페인이 두 다리로 서있었다. 두 손으로 도끼를 들고 있었다. 그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 도끼날이 엑수스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도끼날이 엑수스의 목에, 살갗에 닿고 있었다.

천사들조차 반응하기 어려운 속도였다. 심지어 엑수스는 등 뒤에 눈이 달려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의 뒤에서 페인이 어떤 자세로 있는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엑수스는 경이롭게도 그것에 반응했다.

…터엉!

뒤를 보지도 않고 페인의 도끼를 손으로 막아낸 것이다.

엑수스의 황금빛 동공에는 네이트가 담겨 있었다.

“믿을 수가 없는 힘이군.”

네이트의 동공에는 페인이 담겨있었다.

즉, 엑수스는 네이트의 동공을 읽어서 페인의 도끼에 반응한 것이었다.

“죽을 뻔했다.”

카가가각!!!

엑수스는 도끼날을 맨손으로, 그것도 한 손으로 쥔 채 으스러뜨렸다. 흑기사의 사철과 론의 갑각까지 소재로 쓴 도끼인데 엑수스의 손아귀 안에서는 얇은 철판처럼 으스러지는 것이다.

그러자 촉수들이 엑수스의 옆구리와 복부를 노려서 달려들었다.

쐐애앵!

카앙!!

아주 얇은 십자가가 둘 사이에 떨어졌다.

촉수는 모조리 절단되었고 도끼의 손잡이는 불꽃을 터뜨리며 부러졌다. 그렇게 얇은 십자가가 둘 사이의 벽이 된 틈에 엑수스는 앞으로 뛰어서 페인과의 거리를 벌렸다.

“천사, 천사, 천사, 천사들아아아!!!!”

얇은 십자가가 일그러졌다.

페인은 십자가를 짓밟으며 다가왔다.

“기도를…! 왜 그때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던 거냐고!!!”

그때가 언제냐고 물어도 ‘그때’가 너무 많다. 그런 절박하고 간절한 순간들이 페엔에겐 너무도 많았다.

“나도…! 빛을 보고 싶었어…!”

페인의 목소리와 어느 소녀의 목소리가 뒤섞여있었다. 벌어진 주둥이가 뱀의 혀를 날름대고 있었다. 깨진 렌즈에서 새까만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안 보여…! 흐…!”

페인의 양쪽 흙바닥에서 핏물과 살점과 뼛조각으로 이루어진 손아귀 수백 개가 튀어나와 돌진했다.

엑수스는 철퇴를 휘둘러 수백의 손아귀를 으깨버렸다. 하지만 수백의 손아귀는 으깨지면서도 괴이하게 수복되었다. 곤충의 다리, 게의 집게발, 남자의 손, 여자의 손, 아이의 손, 빨판 달린 촉수, 장미의 가시가 되어서 결코 멈추지 않았다.

“나는…! 멈출 수가 없었어…!”

그 앞에 거대한 십자가가 떨어졌다. 십자가는 일직선의 빛줄기를 뿜어내서 뒤틀린 그것을 하얗게 불태우기 시작했다.

콰콰콰아아!!!

그림자 같은 검기가 날아와 그 거대한 십자가를 부숴버렸다. 엄청난 섬광과 폭음이 터졌고, 그래도 뒤틀린 손아귀들은 멈추지 않고 엑수스를 덮쳤다.

그때 엑수스는 철퇴를 휘두르면서 중얼댔다.

“…이 또한 나의 업보인가.”

그리고 그보다 앞서 페인이 엑수스를 뛰어넘어 네이트에게 돌진하고 있었으며, 네이트는 성검을 대체할 긴 십자가를 손바닥에서 뽑아들었다.

이윽고 네이트가 십자가를 내질렀다.

푸우우욱!!!

십자가가 끊임없이 길어져서 하늘의 끔찍한 먹구름까지 닿을 듯했다.

“카하아아악……!”

페인은 심장을 꿰뚫린 채 네이트 앞에 착지하고 말았다.

“하아아악…!”

드드드드!

그래도 페인은 네이트에게 달려들었다. 십자가에 심장을 꿰뚫린 채 뛰었다. 등 뒤로 쭉 뻗어있는 십자가를 자신의 피로 더럽히면서 네이트에게 달려가 손아귀를 뻗었다. 그 손아귀를 막으려는 보호막이 흐릿한 빛을 발하였다.

그 순간, 네이트는 보호막을 해제하였다.

페인의 손아귀를 쳐내고, 그를 끌어안았다.

“카아아악! 까아아악…!”

페인은 네이트의 품에 안겨서 버둥댔다.

등에서 자라난 촉수로 네이트의 온몸을 때리고 긁고 찔러댔다.

그래서 네이트는 피를 흘렸지만, 그래도 페인을 껴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페인은 점점 더 크게 울부짖으며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괜찮아요.”

“씨발…! 개새끼들! 다 죽고 죽일 거야! 나도 죽을 거야! 다 죽이고 나도 죽을 거야!”

그러다 페인은 흑사병이 담긴 피눈물을 흘리면서 네이트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까아아아…!”

어느샌가 네이트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같이 돌아가요.”

네이트의 온몸이 밝게 빛났다. 처음에 보았던 그 빛이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빛이다. 눈을 감아서 세상을 칠흑으로 물들여도 그 칠흑을 뚫고 들어오는 광명이다.

그리고 어둠 속에 갇힌 누군가에게 한줄기 빛이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눈부시게 보이는 법이었다.

그때 페인은 잠시 넋을 잃고 서있는 것처럼 보였다.

네이트는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까아아아아…….”

천사들이란 기도도 들어주지 않고, 정작 필요할 때 힘을 빌려주지도 않고, 실재세계에 거악들을 남겨둔 채 무책임하게 전쟁을 끝냈으며,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 축복과 권능을 내려주기도 하는, 심지어는 직접 자신을 죽이려고도 했던, 진짜 거악을 상대하는 일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위선만을 가르치는 빌어먹을 존재들이다.

계율이라는 것으로 속내를 숨기고 있어서 신뢰할 수 없고, 인간을 시험하고, 인간을 죽이려는 시련을 외면하고, 허울뿐인 빛과 새하얀 날개만을 퍼덕이며 미물 같은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빌어먹을 존재들이다.

“….”

그런데 상위 천사의 품에 안긴 페인의 눈물이 투명하게 변하고 있는 건 왜일까.

“전부 이해할 수 있어요.”

“아무도… 이해…”

“천사니까. 이해할 수 있어요.”

네이트는 페인을 놓아주었다.

그의 심장을 뚫고 있는 십자가를 줄여서, 뽑아주었다.

페인은 가만히 서서, 진의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네이트를 보기만 했다.

그때 페인의 뒤로 철퇴가 날아들었다.

……콰앙!!!

페인은 철퇴에 맞아서 쓰러졌다.

기절시킨 것이다.

“엑수스…. 당신 몸이….”

엑수스는 온몸이 까맣게 괴사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도 쓰러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피를 흘리고 있다.

“이성이 없는 상태라도 너보다는 나를 더 미워한 모양이군. 손가락 하나하나에 살기가 가득했으니.”

“당신은 잘못된 화신을 골랐잖아.”

“인정하지. 여러 가지로.”

외곽선으로부터 붉은빛을 발하고 있는 어두운 달이 어느새 이들의 위쪽에 있었다.

- 샤아아아아아…

더 강력하고. 더 사악하고, 더 거대한 피조물들이 오고 있다.

시야 끝을 가득 채운 산맥들이 기괴한 존재들처럼 형태를 뒤틀고 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하기엔…. 너무 늦었나.”

지옥의 피조물들이 페인을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다. 비명의 편린과 거인들의 숫자만 해도 수백은 족히 넘으며, 그것들의 발치에서 떼를 지은 뒤틀린 존재들이 움직이는 핏덩이의 물결처럼 빼곡하다.

하늘의 비행체들은 박쥐와 용을 닮은 듯하다. 그것들 사이에 기다란 벌레를 닮은 것들이 수만 개의 다리를 놀리며 저마다 끔찍한 안광을 발하고 있다.

아무리 상위 천사라고 하여도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열세가 예상된다.

그래도 네이트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쓰러진 페인을 등지고서.

“내가 지상의 피조물들을 맡을게. 당신이 하늘을 맡아.”

“말도 안 되는 소리.”

엑수스는 거뭇한 몸으로 네이트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리 둘이서 저 괴물들을 무찌를 수 있을 것 같나? 심지어 그 녀석을 지키면서 말이다.”

“쉽지 않겠지만 어쩔 수 없잖아.”

“어서 안식실로 가라. 네가 타락천사가 되는 건 볼 수 없다.”

“당신은?”

“힘은 남겨두었다. 그래서 페인에게 당한 것이지.”

“이 상황에도 허풍이네.”

“진짜다.”

엑수스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지만 네이트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흑사병에 괴사된 몸으로, 악이 쌓인 몸으로, 저만한 규모의 군단을 혼자서 상대한다는 건 무리였다.

“죽겠다는 거잖아.”

네이트에게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엑수스는 생각을 정리한 후 말했다.

“나는 이곳에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물러가도록 하지. 포드키엘이 혼자서 비명의 편린을 쓰러뜨렸다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이야기가 남겨질 것이다.”

“시끄러워.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럼 세계를 포기할 텐가?”

네이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엑수스는 괜스레 인상을 썼다.

“빨리 가라.”

둘은 전부터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만나고, 대화하고, 서로를 동경하여 사랑에 빠졌었다.

비명의 편린을 혼자서 무찌른 포드키엘이 멋있었다. 인간에겐 아름다운 십자가를, 거악에겐 무자비한 십자가를 내리던 특별한 발키리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러나 둘은 길이 달랐다. 방식이 달랐다. 서로의 방식을 인정할 수 없어서 다투고 갈등했다. 그러다 헤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한때 깊게 뿌리내린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천사이기 때문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랑을 거둔다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페헤에에에이이인!!!!

- 처키 이타아아아!!!

그래서 지금 엑수스는 결단을 내렸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그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기 위해.

“내가 선택한 죽음이다.”

네이트는 그의 결단을 존중해야만 하는 것이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사랑했던 그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물러나서 내일을 맞이해야만 한다.

“……고마워. 엑수스.”

“무엇이?”

“여러 가지로.”

네이트는 페인을 보호막에 가두고 하늘에 올랐다. 그런 네이트를 향해 용을 닮은 피조물들이 달려들었다.

쿠구궁!!

새하얀 번개가 먹구름을 찢어발기며 떨어졌다.

번개는 철퇴의 형상이 되어서 하늘의 용들을 터뜨렸다.

지상의 괴물들은 엑수스를 향해 포효했다.

- 샤아아아아아아!!!!

엑수스의 날개가 흑사병에, 악에 괴사하여 검은 눈처럼 떨어졌다.

그의 황금빛 동공이 빛을 잃고 흰자위만 남게 되었다.

그래도 엑수스는 철퇴를 휘둘렀다. 거인들을 때려죽이고 비명의 편린을 대지와 함께 짓뭉개버렸다. 네이트와 페인을 쫓는 비행체들을 황금 사슬로 묶어서 지상에 떨어뜨렸다.

“오냐! 이 몸을 죽여봐라!”

엑수스는 찌그러진 대지 위로 돌진해오는 새까만 산맥을 한 번의 주먹질로 둥글게 뚫어버렸다.

샤아아…!

몸통과 사지가 칼날처럼 생긴 피조물들이 그림자를 연기처럼 흘리며 짧은 거리를 전이해왔다. 그렇게 여러 차례 전이하면서 싸우는 녀석들은 저마다 단 하나의 붉은 동공을 번뜩이며 엑수스의 온몸을 난도질했다.

“피켜라학! 헥수쓰으!!”

그래도 엑수스는 쓰러지지 않았다. 물러서지도 않았다.

“끄으으아아아아아!!!”

엑수스는 녀석들의 머리를 쥐어서 터뜨리고 황금 사슬을 온 사방으로 펼쳐서 매우 긴 채찍처럼 휘둘렀다. 채찍에 맞은 존재들이 수백 단위로 분쇄되고 찢어져서 허공에 살점을 흩뿌렸다.

수천, 수만의 사체가 쌓였다. 핏빛세계의 대지가 그 핏물을 흡수하지 못할 정도로 사체가 쌓여서 크고 작은 언덕을 이루었다. 핏빛의 강줄기를 이루었다.

피조물들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지형이었다.

그 중심에서 태양 같은 소용돌이 여러 개를 띄우고 수백 개의 거대한 철퇴를 휘두르며, 주먹질 한 번으로 분지를 만들어버리는 엑수스.

힘이 다 빠진 그를 확실하게 해치우기 위해 어떤 존재가 그림자를 타고서 전이해왔다.

엑수스는 입안 가득 피를 머금은 채 녀석을 보고 말했다.

“구면이군.”

붉은 뼈와 가시로 된 비대칭의 몸.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자아를 가진 듯 꿈틀대며, 생선의 커다란 눈알을 옆얼굴에 달고 있는 괴이한 존재.

“이 세계에서 그만큼 피를 뒤집어쓰고도 타락하지 않다니. 대단한 정신력이야.”

“미크쉬….”

미크쉬는 스스로 머리칼을 떼어내 현계에서 크라켄을 창조한 ‘악마’다.

그리고 엑수스는 현계에서 수많은 크라켄들을 학살하였으니, 둘은 구면인 것이다.

“괜히 포드키엘 군단의 머리라고 부르는 게 아니구나?”

“그러는 네놈의 크라켄들은 형편없더군. 벌써 세 마리가 죽임을 당했다지. 그것도 인간의 손에.”

“하지만 다섯 마리가 남았잖아.”

촤아악!

미크쉬의 머리칼이 엑수스를 덮쳤다. 그의 몸에 있는 상처들을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살갗 밑으로 더러운 머리칼을 퍼뜨렸다.

“끄으윽…!!!”

“그 다섯 마리로도 인류를 열 번은 멸할 수 있어. 그때는 네가 방해해서 그랬던 거라고.”

엑수스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더는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 것이다.

“인류의 최후를 보여주고 싶지만 아쉽게 되었어. 그분께서 너라도 확실하게 죽이라고 명령해서 말이지.”

“그때 도망치던 네놈을…. 놓친 게 한이다….”

“후회가 많은 삶이었네. 이렇게 죽으면 억울해서 어쩌냐?”

“내가… 선택한 죽음이다.”

“그렇구나.”

콰자작!

엑수스의 몸 깊숙이 퍼졌던 머리칼이 일제히 뽑혀 나왔다.

“미크쉬…. 제 목숨에 집착하고… 오만한 악마….”

“응. 그래서?”

“장담컨대… 네놈 같은 것들이… 가장 원치 않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주… 갑작스럽겠지….”

엑수스는 저주인지 경고인지 모를 말을 끝으로 내뱉은 후 쓰러졌다.

쓰러진 그는 빛의 가루가 되어서 천천히 부서졌다. 그의 육체는 살가죽도 뼈도 남기지 않은 채 완전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 샤아아아아!

- 샤아아아아!

지옥의 피조물들이 엑수스의 죽음에 환호하며 광기의 춤을 췄다. 뼈로 된 나팔과 피리를 꺼내서 힘차게 불고 저마다 노래하며 기괴한 음정을 맞추었다.

그 중심에서 엑수스를 쓰러뜨린 미크쉬는 머리칼을 흩날리며, 생선 같은 눈알로 먼 곳을 노려보았다.

“그나저나, 구원이라….”

빛의 가루들이 먼 곳에서 하나둘씩 꺼지고 있다.

“시체가 된 놈을 다시 일으켜 싸우게 만드는 것이 구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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