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빛 (1)
광기 속에 찬란한 빛이 보였다.
내 몸이 있다. 등에 닿은 매끄러운 바닥이 있다. 내가 누워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대로 눈을 뜨고자 한다면 뜰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혼탁해진 기억을 되짚어보자. 그러지 않으면 눈을 떠도 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만 같다.
나는 페인이다. 인간으로 태어났고, 가정이 붕괴되었다.
처음으로 죽인 악령은 나의 아비였다. 악을 증오했지만 악을 죽이기 위한 수단으로 악을 선택했다.
사람이었기 때문에 배가 고팠다. 돈이 필요했다.
갈 길을 몰라서 방황했다. 그러다 스스로 위험한 길에 들어갔다. 먹기 위해서 위험한 심부름을 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내게 손을 내민 사람은 베르자인이었다.
해결사가 되었다. 악령들을 죽이고 돈을 벌었다. 점점 익숙해졌다. 남들보다 빠르게 실력을 키울 수 있었다. 내 안에는 악령이 있었으니.
리인이 화형을 당했다. 잿빛세계로 추방당했다. 모든 것을 잃고 울부짖었다. 그러다 선생을 만났다. 강령술사가 되었다. 악귀들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선생을 떠나보냈다.
타락한 승천자를 죽였다. 복수가 끝나자 공허했다. 문득 돌이켜보니 손에 피가 묻어있었다. 무고한 관계자들도 죽였다. 정말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정말 많은 존재들이 내 주변에서 죽었다. 잃었다. 너무 많이 잃어서. 시달려서.
그래서 끝내 미쳤던 거구나.
어쨌든 지금이다.
가장 최근의 기억까지 되짚었다. 가장 최근의 기억은,
「미안해.」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나 미워하지 마….」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
너는 언제나 내 편이었어.
「고마워.」
나는 죄를 쌓았고.
내 서사 따위는 중요하지 않고.
영원히 씻어낼 수 없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끝까지 가겠어.
누가 뭐라고 해도.
끝까지.
「그게 우리의 길이니까.」
- 강령술사 씨는 또 한 번 죽었어요.
- 미쳐버린 영혼을 죽음으로 씻어냈죠.
- 강령술사 씨는 다시 부활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에요.
추억 속의 리비카. 죽음의 문턱에 처했을 때 아홉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아라나크에게 죽어서 리비카는 여덟 마리가 남았다.
달란트 의장과 공멸하여 일곱 마리가 남았다.
승천자에게 죽어서 여섯 마리가 남았다.
승천자에게 또 죽어서 다섯 마리가 남았다.
셰르카에게 죽어서 네 마리가 남았다.
황제에게 죽어서 세 마리가 남았다.
황제에게 또 죽어서 두 마리가 남았다.
그리고 이렇게 한 마리가 남았다.
- 엑수스가 희생했어요.
- 우리는 그러기를 선택했죠.
- …미안해요.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올렸다. 영원할 것 같았던 광기가 끝났다. 대신 끔찍한 핏빛세계가 펼쳐졌다.
그런 세계를 눈에 담으며 두 다리로 일어섰다.
붉은 빛과 하얀 빛을 반사하고 있는 매끄러운 바닥.
주변에 있는 천사들.
저 앞에 보이는 다차원 거울.
내 옆에 있는 대천사 네이트.
황금빛 눈은 애써 슬픔을 감추고 있는 것 같다.
“정말 미안해요.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어서.”
“예. 네이트 님.”
“함께 싸워주세요.”
“예.”
내가 미쳤던 사이에 얼마나 많은 악을 먹어치웠는지 모르겠다.
“…그것들이 오고 있어요. 당신이 현계에서 경험했던 전쟁터와는 차원이 다를 거예요.”
어느 포드키엘이 다가와서 내게 도끼를 건네주었다.
“엑수스 님께서는 자신의 목숨보다 그대를 택하셨습니다.”
나는 그 도끼를 받아서 등에 멨다.
익숙한 감각이다.
「좋아.」
「놈들을 사냥하자.」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내게도 빛이 남아있다는 걸 깨달았으니.
* * *
붉은 뼈와 가시로 된 비대칭의 몸, 허공에서 흐느적대는 머리칼과 옆얼굴에 달린 생선의 커다란 눈알.
미크쉬는 지옥의 뒤틀린 피조물들을 모아놓고 이야기했다.
“페인은 다차원 거울 앞에 있어. 하지만 놈의 저주받은 영혼은 결코 천국으로 올라갈 수 없지. 인과율과 계율을 어기지 않고서야.”
지금도 가까운 전장에서 천계의 군대와 지옥의 피조물들이 싸우고 있다. 천사들은 다차원 거울을 지키기 위해, 지옥의 피조물들은 천계의 전초기지를 파괴하고 페인을 죽이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위선의 십자가를 휘두르는 네이트는 악을 씻어내기 위해 천국으로 떠났어. 그리고 천계의 폭군인 엑수스는 내가 죽였으니까. …지금이라면 놈들의 뼈와 살을 발라낼 수 있을 거야.”
지옥의 피조물들이 포효했다.
- 샤아아아!
“그리고 페인을 두려워하지 마.”
- 샤아아아!
미크쉬는 혐오스러운 육체를 그림자 속에 숨겼다.
“크라켄 앞에서 고전하는 놈 따위, 내 손으로 죽일 수 있어.”
미크쉬는 지옥에 널리고 널린 피조물도 아니고 그보다 상위의 존재인 악마의 하수인도 아니다.
미크쉬는 진짜 악마다.
인간들에게 종말을 선사하는 크라켄 무리를 자신의 머리칼로써 창조하고, 한때는 엑수스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이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악마다.
지금까지는 페인에게 손을 댈 수 없었지만, 이제는 페인과 미크쉬가 같은 세계에 있다.
엑수스는 죽었고 네이트는 자리를 비웠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 * *
- 샤아아아아아!!!
다차원 거울의 근방에서 전투가 한창이다. 1분 동안 지형이 몇 차례나 뒤바뀌고 대지가 뒤집히며 하늘이 찢어지는 전장이다. 아무리 강인한 인간이라도 핏빛세계의 공기를 들이마시면 미칠 것인데, 미치지 않고서 이런 전장에 남아 싸우게 된다면 인간은 과연 몇 초나 버틸 수 있을까.
“엑수스 님이 없어도 철퇴는 바뀌지 않는다!”
그동안 전장의 대지를 난타했던 거대한 철퇴들은 모두 엑수스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수의 포드키엘이 모여서 일제히 철퇴를 휘두르면 엑수스의 철퇴에 준하는 위력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콰아아앙!!
일정한 형태도 없이 제각기 다른 육체를 가진 피조물들은 철퇴에 맞아서 으깨지고 흩어졌다.
그래도 이곳은 핏빛세계다. 피조물들은 압도적인 머릿수를 내세우며 포드키엘을 덮쳤다. 이곳저곳에서 뒤틀린 불길과 흑염이 타오르고 눈부신 섬광과 빛줄기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하늘을 빼앗긴 군대에 미래는 없다!”
하늘의 발키리들은 성검을 휘둘렀다. 낮은 고도로 내려오는 먹구름들을 빛으로 태워버리고, 먹구름 속에 숨어있던 뒤틀린 비행체들을 상대로 검기를 날리며 싸웠다.
어느 진영의 것인지도 모를 뇌성이 울리고 번개가 전장을 갈랐다. 공기가 폭발하고 피조물들의 혈액이 대지 위에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지상의 피조물들은 붉은 대지를 뒤덮을 정도로 많은데, 하늘의 피조물들은 머릿수가 하늘을 다 뒤덮을 정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포드키엘보다는 발키리들이 더 크게 활약할 수 있었다.
콰앙! 콰콰쾅!
긴 벌레를 닮은 거대한 피조물들이 천둥 같은 검기에 갈려서 추락했다. 피조물들이 뿜어낸 그림자, 화염, 흑염, 검은 연기 따위는 발키리가 스스로 발하는 성스러운 보호막에 막혔다.
“계속 확장하세요! 적들의 머리 위까지 통제하면 지상을 향한 대규모 마법도 전개할 수 있을 겁니다!”
모든 발키리들은 저마다 마법적인 능력과 개성을 갖추고 있으니, 하늘은 곧 수많은 마법에 의해 태양이라도 뜬 것처럼 밝아졌다.
발키리들은 조금씩 무리를 지어서 높은 고도와 낮은 고도를 나누어 누볐다. 높은 고도에 있는 발키리들은 먹구름을 가르고 먹구름 속에 있던 피조물들을 상대했다. 낮은 고도에 있는 발키리들은 지상으로부터 올라오는 피조물들을 떨어뜨리고 지상으로 내려가려는 피조물들을 공중에서 해치웠다.
그렇게 이 근방의 하늘은 발키리의 것이 되는가 싶었다.
“뭔가 오고 있어요.”
“거기 조심해!”
소수의 발키리들이 사악한 존재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낮은 고도에 있던 일부 발키리들이 당하고 말았다.
키기기긱!!!
금속을 깎는 듯한 굉음이 터졌다. 성검이 발하는 빛 속에서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기괴한 형체가 있었다. 그 기괴한 형체에 당한 발키리들은 아름다운 날개가 갈기갈기 찢어진 채 추락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가까이 접근했으니, 이제 발키리들은 알 수 있다.
“악마…!”
키기기긱!!!
또 굉음이 터졌다. 발키리들의 날개가 찢어지고, 팔다리가 떨어지고, 목이 베였다.
“보호막으로 막을 수 없는 겁니다!!”
굉음이 터진 이유는, 녀석이 발키리의 보호막을 있는 그대로 깨부숴버린 탓이었다.
“샤를 추종하는 악마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악마들은 상관에게 충성한다는 개념조차 잡히지 않은 것들이 많다. 동족과 함께 싸운다는 것을 모르며, 자신들의 세계를 위해 싸우고 희생하고 기꺼이 피 흘리는 일을 거부하며, 죄인의 영혼을 괴롭히거나 인간들을 현혹하며 노는 게 대다수의 악마들이다. 이렇게 천계가 지옥을 침공하고 있음에도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악마들이 많으니.
하지만 간혹 자신의 원초적인 욕망보다 더 고차원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 극소수의 악마들이 있다.
바로 그런 악마들이 샤에게 충성하는 것이며, 다른 악마들보다 더욱 강하고 교활한 것이다.
“집결하세요!”
“힘을 합쳐야 해!”
발키리들을 학살하며 고속으로 접근하고 있는 악마의 그림자.
“정면으로 오고 있어요!”
“하늘을 밝히세요!”
퍼엉!
발키리들이 힘을 합쳐서 아주 밝은 빛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림자 속에 몸을 감추고 있던 악마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그 생선 같은 눈알과 머리칼들을 보면 어느 천사라도 알 수 있다.
녀석의 존재 자체가 천사들에겐 ‘과오’로 남겨진 것이니.
“미크쉬가 출몰했…”
키기기기긱!!
발키리들의 절단된 신체 부위가 허공에 잠시 떠올랐다가 일제히 아래로 추락했다.
그리고 미크쉬의 뒤로 다가온 먹구름이 괴이한 울음을 내뱉었다.
“꾸어어어어어…”
먹구름에 붙은 얼굴들이 입을 벌리자 그 속에서 비행하는 피조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약해빠진 발키리를 우상으로 삼는다니. 인간들은 얼마나 더 약해빠졌다는 거야?”
“샤아아아아! 샤아아…!”
비행하는 피조물들은 미크쉬를 지나쳐서 앞으로 나아갔다. 녀석들은 저 앞에서 다차원 거울을 넘어 하늘로 오른 새로운 발키리들을 상대할 것이다.
“하늘은 대충 정리됐고.”
미크쉬는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지상에서는 철퇴들이 날뛰고 있는 것 같다. 수많은 포드키엘들 사이에 덩치 큰 갑옷을 걸친 특수한 천사들도 보인다.
“수호자(守護者)들.”
포드키엘보다 덩치가 세 배는 큰 갑옷의 천사들이다. 그들은 한 손에 방패를, 한 손에 두꺼운 창을 들고서 전장을 돌파하고 있다.
그 두꺼운 창은 피조물들의 육체를 꿰뚫고 뜨거운 빛줄기를 쏘아내며 후방에 있는 비명의 편린들에게 상처까지 입히는 것이었다.
“이름에 맞게 천국이나 지킬 것이지.”
쐐애애애액!
미크쉬는 지상으로 내려갔다.
자신과 같은 편인 피조물들 사이에 내려가는 게 아니라, 천사들이 모인 적진의 중심에 대놓고 착지한 것이다.
“미크쉬가 여기에 있다!”
근처에 있던 포드키엘들이 온 사방에서 철퇴를 날렸다. 하지만 미크쉬는 뼈와 가시로 된 육체를 뒤틀며 자기 주변으로 머리칼을 뻗었다.
“크으윽…!”
머리칼은 철퇴를 휘감아 떨어뜨리고 사슬을 따라서 포드키엘들의 강인한 몸을 조였다.
“놈을…! 보내줘선 안 된다…!”
으드드득!!
미크쉬는 포드키엘들을 산 채로 비틀어 죽였다. 이어서 빛의 형태를 한 창과 단검들이 미크쉬를 향해 쇄도했다.
츠즈즈…!
미크쉬는 어둠을 퍼뜨렸다. 빛의 형태를 한 창과 단검들이 허공에서 소멸했다.
“비켜라!”
쿵쿵쿵!
수호자들이 뛰어와서 미크쉬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푸우욱!
미크쉬는 몸의 앞뒤가 창에 뚫렸다.
“위로 올려서 쳐라!”
수호자들은 저마다 쥐고 있는 창을 힘껏 들어 올렸다. 그렇게 미크쉬가 공중에 고정되었다. 곧이어 포드키엘들의 철퇴가 미크쉬를 쳤다.
미크쉬를 중심으로 섬광과 폭음이 터졌다. 철퇴끼리 충돌해서 불꽃까지 튀었다. 그 속에서 미크쉬의 뼈와 가시가 분쇄되는 모습이 선명했다.
츠즈즈즛…!
그러나 미크쉬의 머리칼은 여전히 살아서 제각기 자아를 가진 것처럼 움직이고 있다. 철퇴와 창을 순식간에 휘감아서 공중에 고정해버린 것이다.
“하급 천사들 따위가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죽일 수 없겠지!”
수호자들의 창이 뜨거운 빛을 머금었다.
미크쉬의 머리칼을 태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네놈을 지치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타닥…! 타닥…!
쿠와아아아!
미크쉬는 불길에 휩싸였다. 머리칼이 전부 타버려서 뼈와 가시로 된 몸만 남게 되었다. 살아있는 존재임에도 몸의 왼쪽과 오른쪽의 균형이 서로 다르게 뒤틀린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화아아….
이윽고 불이 꺼졌다.
뼈와 가시 사이의 틈새에 창이 끼워진 채 공중에 있는 미크쉬.
녀석은 몸이 반쯤 뒤집혀서 지면에 떨어지고 말았다. 창에 얽힐 머리칼이 없으니 더는 공중에 고정될 수도 없는 것이다.
어느 포드키엘이 철퇴를 들고 나섰다.
“지금 뼈를 분쇄해버리면 된다!”
“멈춰라!”
수호자가 포드키엘을 막았다.
“놈은 교활한 악마다! 속지 마라!”
“이쪽으로 지원을 요청하라! 더 많은 천사들이 필요하다!”
* * *
미크쉬는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많은 천사들이 전장의 어느 한 점을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다.
“머리칼 한 올을 떼어줬더니 가짜인지 진짜인지도 분간하지 못하고 목숨을 내던지네.”
“으으으….”
“역시 지상의 무식한 천사들이 자랑할 것이라곤 근육밖에 없는 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 오만함이…. 네놈을 죽일 것이다…!”
미크쉬는 한쪽 팔을 움직여, 그 팔과 이어진 머리칼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검은 머리칼 사이에 금빛의 머리칼이 섞여 있었다.
“어차피 죽을 건데 나한테만 솔직히 말해봐. 너도 포드키엘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하지?”
미크쉬는 날개 잃은 발키리를 옆구리에 끼웠다. 자신의 머리칼로 발키리의 온몸을 구속하고 있는 것이다.
“대답 좀 해봐.”
“그런다고… 네놈이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너는 이렇게 당하고 있는데. 네이트는 빛나는 욕조에 몸이나 담근 채 쉬고 있겠지?”
“닥쳐라…! 네놈의 입에 담을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전쟁이 터지면 언제나 아랫것들만 이렇게 피를 본다니깐. 너 같은 하급 천사들은 불쌍하게 이용만 당하다 죽는 거라고.”
“웃기지도 않다. 누군가를 가엾게 여긴다는 것을 네놈 같은 악마가 알기는 하나?”
“……맞네.”
츄우우욱!!
미크쉬는 발키리의 목구멍에 더러운 머리칼을 집어넣었다. 그대로 발키리의 몸속을 헤집고서 내장까지 뽑아냈다.
“이간질이 안 통하니까 재미없어.”
미크쉬는 죽은 발키리와 그녀의 내장을 지상에 내던져버리고 이리저리 생선 같은 눈알을 움직였다.
“재미는 없었지만…. 발키리의 정신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는 알아냈지.”
미크쉬의 옆으로 한 가닥의 두꺼운 촉수 같은 피조물들이 붙어서 함께 비행했다.
“바로 저기야.”
다차원 거울을 중심으로 온 사방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미크쉬가 보고 있는 건 그 격렬한 전장 속의 어느 한 곳이다.
좀 전에 자신의 분신이 그랬던 것처럼,
저 존재도 적진 한가운데에 들어가서 홀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끼이이이이이이이…!
비명의 편린들이 무력하게 쓰러지고 있다.
아니, 사냥당하고 있다.
죽어서 허공으로 돌아가야 할 막대한 ‘악’이 저 존재의 영혼으로 흡수되고 있다.
“너희들은 하늘을 막아. 아무도 방해할 수 없게.”
촉수 같은 비행체들이 허공에 정지했다.
그리고 미크쉬는 수직으로 떨어졌다.
의도적으로 거칠게 착지해서 주변으로 충격을 퍼뜨렸다. 미크쉬를 중심으로 충격의 여파가 둥글게 퍼져나가며 대지가 차례차례 뒤집혔다.
페인에게 모여들었던 피조물들은 자연스레 멀어졌다.
이제 미크쉬와 페인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네가 미크쉬냐.”
미크쉬는 그의 당당한 자세를 흥미롭게 보았다.
“날 알고 있었어?”
“미크쉬구나.”
분명히 인간이었던 존재라고 했다. 이 세계에 떨어져서 미쳐버리고 정신과 육체가 뒤틀려 날뛰었다고도 했다.
그런데 미크쉬는 눈앞의 페인에게서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일말의 동요도, 공포도, 적개심도 페인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돌과 대화라도 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두렵지 않아? 인간들은 내가 생긴 것만 봐도 심장이 멈춰버리는데.”
“두렵지 않아.”
“아, 그렇구나.”
미크쉬는 자기 주변으로 머리칼을 퍼뜨렸다. 허공에 퍼진 머리칼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흐물댔다.
“내 크라켄들이 너의 이런저런 것들을 빼앗았다고 했는데, 어땠어?”
“말이 많네.”
“…나는 그 크라켄들을 전부 합친 것보다 강해.”
“그 오만함으로 주변 피조물들을 물러서게 한 거냐.”
미크쉬는 목소리를 낮췄다.
“……진짜로 내가 안 무서워?”
경고를 섞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페인은 한결같았다.
“무섭지 않다고.”
“………그럼 무섭게 해줄게.”
어쩌면 1초.
1초를 여러 번 쪼갠 것보다 더 짧은 시간.
미크쉬와 페인 사이에 있는 땅이 찌그러졌다.
미크쉬는 땅을 박차며, 공중에 수놓은 머리칼들을 앞세웠다.
미크쉬는 그렇게 돌진하면서 내심 인정했다.
‘페인. 그게 너의 도발이라면, 통했다.’
그래서 미크쉬는 이렇게 진심을 다한 첫 일격을 가하게 된 것이다.
철저하게 정지된 시간 속, 정지한 페인.
그의 렌즈, 방독면, 몸, 팔, 다리, 손에 쥐고 있는 도끼까지 전부 노릴 것이다.
‘…뭐?’
그런데 정지한 시간 속에 페인이 사라졌다.
‘…!’
정지한 것은 미크쉬 자신이었다.
그가 정지한 척을 한 것이다.
교활하게도.
이제 등 뒤에서 엄습해온다.
만년설보다 서늘하고, 칠흑보다 어둡고, 심연보다 깊으며, 전체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범접할 수 없는 지나치게 거대한 ‘무언가’가 등 뒤에서 흐르는 전율 같았다.
쩌거거거걱!!!!!!
미크쉬가 딛고 서있던 땅이 갈라졌다.
미크쉬의 전방에 있던 피조물들이 갈라졌다.
그리고 미크쉬는 옆얼굴에 달린 눈알로 세계를 보고 있었는데,
세계가 기울어져서 바닥이 자신의 얼굴로 올라오는 것이다.
“나중에 너의 창조물들도 죽여줄게.”
“……아?”
미크쉬는 자신의 육체가 좌우로 갈라졌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좌우로 갈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도대체 어떤 주술을 쓴 건지, 갈라진 영혼이 페인을 향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영혼축출.」
“내가… 사냥을 당했다고……?”
미크쉬는 두 개가 된 육체를 제각기 움직였다. 처절하게 바닥을 기었다.
왼쪽 육체는 외쳤다.
“도와줘…!!!”
오른쪽 육체는 외쳤다.
“주인님…! 이 괴물로부터 나를 구해줘…! 이,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고!!!”
걷잡을 수 없는 강함이었다.
눈밭을 구르는 눈덩이가 크면 클수록 더 많은 눈을 머금게 되듯.
「우리가 이렇게 강했었나?」
「언제 여기까지 도달한 거지?」
페인은 손짓 한 번으로 미크쉬의 왼쪽 육체와 오른쪽 육체를 비틀어버렸다. 그렇게 한 악마의 악을 남김없이 흡수한 것이다.